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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 국사편찬위원회
올해는 3·1 운동 102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폭압에 맞서 민족의 해방을 위해, 1945년 8월 이후 미 군정과 그 앞잡이들의 분단 획책에 맞서 민족의 통일을 위해 끝까지 헌신한 노동자·농민·지식인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때까지 양심적인 사회주의자들은 대다수 죽임을 당하고 일부만 이북으로 가서 활동했다. 일제가 민족경제를 말살하던 당시에 최초로 사적유물론에 입각한 ‘조선사회경제사’를 펴냈고 진보적 경제연구회를 만들어 교수·청년학생의 반일활동을 지도하다가 감옥살이를 했으며, 해방 후에는 남쪽에 진보적 정당을 건설해 운영하다가 남북연석회의 때 북으로 가서 초대 교육상에서 최고인민회의 의장까지 지냈던 백남운 선생이 그중 한 사람이다.
진보적 경제사학자, 자치론 강력 비판
백남운(白南雲, 1894년 2월11일~1979년 6월12일)은 1894년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반암마을에서 백낙규(白樂奎)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엄격한 봉건 양반 가문에서 16세까지 한학을 배우다 서울 종로 YMCA 종합부에 입학해 2년간 공부했고 19세에 수원농림학교에 들어갔다. 1913년부터 이곳에서 받은 신식교육과 학교생활이 그의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거친 음식도 맛이 있고 괴로움도 즐거웠다. 과학적 정신이 길러지는 곳, 기쁨이 가득한 생활이 잠자는 곳”이라고 졸업 후 추억했을 정도로 수원농림학교 시절에 그는 지적 갈망을 충족했고 새 세계를 향한 안목을 키웠다.
1916년 강화보통학교에서 2년간 교원생활을 하다 강화군 삼림조합의 기술자로 전보 발령을 받아 1년 근무했다. 24세 때인 1918년 일본 유학길에 나서 동경고등상업학교와 도쿄 상과대학(현재의 히토쓰바시대)을 졸업했다. 조선 민중에 대한 일제와 친일지주의 억압·착취·수탈에 울분을 참지 못한 백남운은 당시 신사조인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빨려들었고 그 입장에서 조선경제사를 정립하고자 결심했다. 하숙집 주인이 운영하는 사회과학출판사의 책들은 이런 백남운의 사회주의 지향을 도왔다. 수년간의 고학 끝에 1925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게 됐다. 백남운은 여기에서 경제사학 이론을 더욱 심화했고 조선사에 적용하는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유물사관으로 조선사를 연구하는 자체가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대한 도전의 시작이었다.
연희전문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소개하던 이순탁과 함께 경제사를 가르치던 백남운은 사회주의운동을 지향하는 학생들이 많아지자 경제연구회라는 학술단체를 만들었다. 새 사조 학습을 돕고 식민지 조선경제 현실을 비판하면서 조선경제사 집필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민족개량주의자들의 자치론을 비판하는 글을 여러 번 발표했다. 1927년 ‘조선자치운동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을 통해 3·1운동 이후 민원식 등의 참정권운동, 1924년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 1926년 ‘연정회’ 등 자치운동의 조직적 움직임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해 ‘조선계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이란 글도 발표했는데, 조선사 이해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적용하는 논리와 방향을 제시했다. 1932년 ‘향약의 부활에 대하여’라는 글은 우리나라의 봉건적 잔재가 일본 식민주의와 결탁하는 데 대한 강력한 비판이었다. 친일자치론자들의 집중 반격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조선사회경제사’ 발표, ‘경제연구회’ 동아리 지도
이 시기 백남운은 식민지정책의 합리화를 위한 일제의 ‘일선동조’론과 친일변절자 최남선이 펼친 ‘문화사관’의 부당성을 논증했을 뿐만 아니라 1933년 계급투쟁 관점에서 ‘조선사회경제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독자적 사회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발전해 온 조선사회경제 발전 과정을 역사적 사실 자료에 기초해 서술한 것이다. 조선의 원시·고대·중세 사회경제 연구는 조선경제사학 발전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고 우리말까지 없애려는 당시 상황에서 일제 어용학자들의 ‘동조동근’을 거부하고 반일기운을 고취하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37년에는 조선 사회의 특수성을 해명하고 ‘조선사회경제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내놨다.
연희전문 교수 시절 특히 주목할 그의 반일활동은 동료 교수, 학생들을 규합해 학술단체였던 ‘경제연구회’를 만들고 비합적 적색연구회로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적색연구회 회원들은 방학 때 모두 대중 속에 들어가 계몽활동을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발행한 ‘최근에 있어서의 조선치안상황’ 자료에는 적색연구회가 공산혁명 달성의 목적 밑에 연구토론회·강습회·독서회 등을 열어 회원들에게 선진사상 주입과 선전을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 해 왔다고 쓰여 있다. 또한 백남운은 1937년 항일유격대의 보천보전투 소식을 전해 들은 다음 해 겨울부터 서재로 쓰는 방의 난로에 불을 때지 않고 냉방에서 지냈을 정도로 올곧은 지식인이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비합법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이던 조국광복회의 10대 강령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고 보천보전투 현장을 직접 답사하고 돌아온 여운형을 초빙해 강연회도 개최했다. 1938년말 마침내 일제는 연희전문에 적색연구회라는 비밀결사가 있다는 혐의로 백남운을 동료 교수들과 함께 체포·구속했다가 1941년 7월께 풀어 줬다. 출감 후 그는 온갖 협박과 회유를 받았지만, 일제 패망 때까지 무직으로 은거하면서 ‘조선봉건왕조실록’을 번역했다. 민족성을 고수하고 저항의 길을 택한 백남운은 식민지 조선의 진정한 지식인의 삶을 굳건히 지켜 낸 것이다.
해방 후 민족단합을 위해
1945년 8·15 직후 백남운은 우선 조선학술원을 창설하고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부임했다. 서울에서 홍명희·허헌 등과 김일성 장군 환영준비위를 결성하고 최일천의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출판하기도 했다. 진보적인 학자들과 함께 새 국가 건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일에 전념했는데, 그해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 이후 반탁-찬탁 격류에서 정세를 정확히 몰랐던 남쪽 진보진영 대부분이 그랬듯이 그도 처음에는 반탁을 주장했다가 나중에 찬탁을 지지하면서 정치 일선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중국 옌안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이북으로 귀국한 한글학자 김두봉, 조선독립동맹의 최창익·허정숙 등과 연계를 맺고 조선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을 맡았고 이를 남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해 당대표로 활동했다.
1946년 백남운은 박헌영의 분파행위에 분노해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당에서 이탈해 사회노동당을 창당했다. 진보민주진영에서 분열주의자 우익기회주의자로 지탄받고 정계에서 물러나게 됐다.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민족의 대단합을 실현해 통일적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남쪽의 광범한 애국민주 역량의 통일단결에 저촉되는 실책을 범한 것이다. 민족문화연구소를 차리고 문화운동을 하다가 6개월 만인 1947년 4월 다시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사회노동당을 해체하는 한편, 여운형과 함께 1947년 5월 중간계층까지 망라하는 사명의 근로인민당을 결성해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 후 근로인민당 등 12개의 정당협의회가 미소 양군 철수와 민주주의 통일정부 수립을 행동강령으로 제시하고 그 실천을 위한 전 민족적인 투쟁을 호소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교육상
백남운은 미국 제국주의자들과 이승만 일파의 민족 분열 책동에 맞서 1948년 4월 조국의 통일독립 대책을 논의하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해 남조선 정치정세 보고를 하고 셋째 날 회의 사회를 맡았다. 훗날 백남운은 자기의 수기에 “돌이켜 보노니 5천년을 헤아리는 파란 많은 배달민족의 갈피 속에 나라와 겨레의 운명이 칠성판에 올랐던 경각의 시기는 허다했건만 가물가물 꺼져 가는 그 가엾은 운명을 건지고저 재산의 유무와 귀천을 막론하고 사심 없이 무릎을 마주한 적 언제 한 번이나 있었던가”라고 섰다.
백남운은 남쪽에 거주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북쪽으로 가는 데 촉매제 역할을 했다. 자신이 인정하는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절실한 인재 파견으로 여겼을 것이다. 1946년 1월 첫 번째 북행 이후 돌아와 역사학자 김석형·박시형, 섬유 분야 권위자 계응상, 물리학자 도상록, 기술자 최재우·강영창, 예술인 문예봉·황철·박영신 등의 월북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남북연석회의 이후 김구·김규식 등은 서울로 귀환했으나 백남운은 홍명희·이극로·김원봉 등과 함께 평양에 남았다. 1948년 8~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년 9월~1956년 초대 내각 교육상, 1956년~1967년 과학원 원장, 1957년 12월 조국전선 중앙위원, 1960년 12월 조국전선 중앙위 상무위원, 1961년 3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조선노동당 중앙위원·마르크스레닌주의방송대학 총장, 1967년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냈다. 그 뒤 1974년부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으로 활동하다 1979년 6월12일 86세 나이로 별세했다. 1990년 조국통일상을 수상했고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정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