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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원문보기 글쓴이: 우리
땅이름(地名)관련문헌과 그 활용
이형석(교육학박사-지지전공, 한국땅이름학회장)
안동립(한국지도학회 이사, 동아지도사 대표)
1. 머리에
지역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도 하는 지리학(地理學)은 크게 계통적 방법을 쓰는 계통지리학과 지지적(地誌的) 방법을 쓰는 특수지리학으로 나눈다. 특수지리학은 한 지역의 자연·인문 제현상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것으로 지역지리학 또는 지지(地誌)라고도 한다.
계통지리학은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자연지리학과 인문현상을 주로 연구하는 인문지리학으로 나누어진다. 자연지리학은 지역의 물리적·생물적 자연의 이해와 아울러 그 환경적 의미를 생각하는 것으로 지형학,·기후학,·생물지리학,·지도학 등으로 세분된다.
인문지리학은 인문현상의 연구대상에 따라 정치지리학,·경제지리학,·도시지리학,·문화지리학,·역사지리학 등으로 나누어지고 더욱 세분된다.
지리학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역사가 오랜 학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근대학문으로서의 출발은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다. 기원은 서양에서는 고대그리스시대로 소급되며, 중국에서는 한대(漢代)에 이미 <한서>(漢書)‘지리지’가 완성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삼국사기>‘지리지’가 편찬되었으며, 지지 편찬사업은 조선시대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땅이름(地名)은 토지고착성(土地固着性)이 강하여 그 지역사회가 변천하여도 쉽게 변하지 않고 고유명사(固有名詞)로 계속 존속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고대지명의 변천을 살펴볼 수 있는 고대문헌으로 고려시대 김부식이 삼국의 위치와 지명, 지방의 연혁에 대해 기록한 <삼국사기>의 ‘지리지’이며 이 책에는 524개에 달하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지명이 수록되어 있어, 지명의 역사적 유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다음으로 1425년(세종 7) 팔도지리지 편찬시 그 사업의 하나로 하연(河演) 등이 완성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를 비롯, 1451년(문종 원년)에 편찬한 <고려사>‘지리지’, 1453년(단종 원년) 조선의 인구수와 면적을 정확한 숫자로 기록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69년(예종 원년) <경상도지리지>의 궐략을 보충하기 위하여 29조의 편찬사목을 중심으로 편찬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1481년(성종 12) 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서거정(徐居正) 등이 편찬한 <동국여지승람>과 이의 증보판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있다.
그리고 조선 중기, 후기에는 지방 유림들에 의하여 <사찬읍지>(私撰邑誌)가 편찬되었고 개인에 의해 편찬된 최초의 지리지로 실학사상의 기초가 된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와 정약용(丁若鏞)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신경준(申景濬)의 <강계지>(疆界志), 세계지도와 서양 세계를 소개한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이 있고, 실제 답사에 의해 도로·하천·산맥 등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가 있으며 19세기 말에는 계몽적인 지리서가 많이 등장하였으며, 장지연(張志淵)의 <대한지지>, 김홍경의 <만국신지지> 등의 근대 지리서가 만들어졌다.
땅이름의 유래를 알아보려면 이들 지리지를 시대별로 조사,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나라 대표적인 지리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땅이름 관련 문헌
(1) <삼국사기>‘지리지’
현존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서인 <삼국사기>‘지리지’(三國史記地理志)는 목판본으로 개인 및 경주 옥산서원 소장본 등이 있다. 34~36권은 신라, 37권은 고구려·백제의 지리지이다. 신라 부분은 후기신라시대의 지방 행정 체계와 지명을 기준으로 하여, 삼국시대 이후의 지명에 대한 역사적 변천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에 관한 내용은 후기신라 영역에 포함되지 않은 삼국시대의 옛 영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더욱 간략하다. 대부분 행정 지명만을 나열했으며 당시에 이미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미상지명'(未詳地名) 목록이 첨부되어 있다.
이 책은 역사서의 부록 또는 보조적인 기능으로 첨부된 것이기 때문에, 지역의 특성을 전달해 주는 독자적인 지리서로의 가치는 후대의 지리지에 비해 약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지리지이고, 삼국 통일 이전에 각 지역에서 고유한 언어로 부르던 우리의 옛 지명을 한자의 소리(音)와 뜻(訓)을 차용해 기록했으며, 통일신라 경덕왕 때 한자식으로 개편된 이름과 고려 시대의 행정구역 명칭을 표시했으므로, 고대의 지리, 역사, 국어학 연구에 기본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즉 고지명과 그 위치, 국경의 영역, 고대 국어, 한자 표기로의 전환 등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고대지명에서 신라와 백제의 지명에 붙은 벌(伐)·불[火(화)]·부리(夫里)는 오늘의 벌판·갯벌의 벌과 같은 어원으로, 신라와 백제가 비교적 평탄한 지역에 취락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단서이다.
고구려의 지명에 나타나는 골은 오늘날의 골목·골짜기의 골과 같은 어원으로, 이를 통하여 고구려가 산악지대에 곡성(曲城)을 쌓아 취락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지명의 변천 과정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 환경뿐 아니라 언어의 변천 과정도 알 수 있다.
한편 왕조가 바뀜에 따라 민심의 쇄신과 행정구역의 정비를 위해 지명을 바꾸는 등 시대가 바뀌면서 지명이 약간씩 변천되기도 하였다.
(2) <고려사>‘지리지’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만든 <고려사>는 고려시대의 역사책,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총 139권으로 되어 있다. 1392년(태조 1) 10월 태조로부터 이전 왕조의 역사책을 만들라는 명을 받은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은 1396년 37권의 <고려국사>를 만들어 바쳤다.
이것은 그 내용과 서술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1414년 하륜(河崙) 등에게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태조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대표자인 하륜이 죽자 중단되었다. 이를 잇고자 하는 논의는 세종의 즉위 후 왕 자신에 의해서 제기되고, 마침내 1419년(세종 1) 9월 유관(柳觀)과 변계량 등에게 일을 맡기니, 이들은 21년 정월에 다 만들어 올렸다.
이리하여 본래의 사초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던 곳이 바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국제관계가 고려된 부분에서는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관점이 오히려 강화되어 제칙(制勅)·태자(太子) 등을 교(敎)·세자(世子) 등으로 고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책도 반포되지 못하다가 1423년 12월에 다시 유관과 윤회(尹淮)로 하여금 이 부분을 실록에 따라 바로 쓰도록 하고 있다.
1424년 8월 이 일은 끝났지만, 이번에도 변계량의 반대로 발간되지 못하였다.
세종은 1431년에 <태종실록>이 편찬된 것을 계기로 <고려사>를 다시 쓰는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1442년 8월에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바쳤다.
이 책은 1448년에 지리학자 양성지(梁誠之)의 교감을 거쳐 일단 인쇄되었으나 배포가 곧 중지되었다. 세종은 다시 1449년에 김종서·정인지·이선제(李先齊)·정창손(鄭昌孫)에게 명령을 내려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하면서 이런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
김종서는 드디어 1451년(문종 1) 8월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고려사> ‘지리지’권 제56-58(지재 지리10-3)에 기록되어 있으며 전국에 총계 경(京)에 4개, 목(牧) 8개, 부(府) 15개, 군 125개, 현 335개, 진(鎭) 29개에 대해 그 연혁과 지지(地誌)가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 고려의 경계선을,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기록되었으며 왕경(王京)‘개성부’부터 지명의 역사와 변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3).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세종실록>‘지리지’는 8권 8책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425년에 발간된 <경상도지리지>를 비롯한 8도지리지를 모아 편찬한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수정하고 정리하여 1454년(단종 2)에 만들어졌다.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의 제148권에서 제155권까지 8도에 관한 내용이 8권으로 실려 있는데, 당시의 경제·사회·군사·산업·지방제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역사지리학과 지방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구성은 제148권의 경도한성부(京都漢城府), 구도개성유후사(舊都開城留後司), 경기도관찰부터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함길도의 순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별도의 간행물이 아니고 <장종장헌대왕실록>의 제148~155권에 실려 있는 전국지리지로서 8권8책으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은 단종2년(1454)에 완성되었는데, 권1부터는 권127까지는 편년체로 되어 있고 그 뒤에는 지(志)가 붙어 있으며, 지(志)에는 오례(五禮),·악(樂),·지리지(地理志),·칠정산(七政算)으로 나뉘어 들어 있다.
이 지리지는 8도에 소속된 328곳의 군현에 관한 각종 인문지리적인 내용을 싣고 있는데, 관원,·연혁,·소관,·명산,·대천,·조운(漕運),·호구,·군정,·토산,·군영,·역관,·성곽,·목장,·봉수,·인물 등을 비롯한 각종 사항이 열거되어 있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거나 집권자가 바뀌는 경우, 흔히 지배 지역을 면밀히 조사한 지리지를 작성하여 통치 자료를 삼곤 한다.
실록의 지리지가 편찬되기 이전에 이미 관찬 지리서를 펴낸 바 있는데, 세종은 즉위 6년(1424)에 이미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에게 조선 전역의 지지(地志) 및 군현의 연혁을 찬진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듬해 발간된 <경상도지리지>는 바로 이때 지방관이 올린 조사보고서인 셈이다. 이것을 필두로 나머지 7도의 지리지를 한데 모아 1432년 <신찬팔도지리지>가 완성된다. 22년 후에 이것을 저본으로 다소 가감 정리하여 만든 것이 바로 실록지리지이다. 따라서 그 원형태는 30년 전인 세종 당대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변계량(1369~1430)은 이색과 권근에게 배웠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4살에 고시를 외우고 6살에 글을 지을 정도였다. 그는 이미 고려말에 문과급제하였고 조선왕조의 건국과 더불어 전의감승과 의학교수관을 거친 문신이었다.
(4)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우리나라의 지리지는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지리지가 수록된 것으로 보아 그 전통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책에 수록된 것은 모두 소략한 내용의 역사, 지리지로서 주로 주,·군,·현의 소속 관계와 변천 관계를 기록하였다.
조선 전기 중앙집권화가 강화되면서 국가는 각 지역의 정보를 제대로 파악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따라 각 지역의 연혁, 토,지 호구, 성씨, 인물, 물산, 문화유적 등에 대한 정보를 기록한 지리지 편찬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지리지 편찬은 세종 시대에 본격화되었는데 이때 편찬된 팔도의 지리지는 <세종실록>의 '지리지' 부분에 반영되었다. 세종 대에 편찬된 팔도의 지리지로는 유일하게 <경상도지리지>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세조대에는 양성지 등이 주도하여 1478년(성종 9)에 <팔도지리지>를 완성하였으나, 다른 지리지는 모두 없어지고 역시 <경상도속찬지리지>만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전기 지리지 편찬사업은 <동국여지승람>의 완성으로 그 결실을 보았다.
<동국여지승람>은 <팔도지리지>를 토대로 하여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의 시문을 합한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훈구파 세력들이 중심이 되었다가 후에 김종직, 최부 등 사림파 세력이 이 책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중종은 기존의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행, 윤은보, 홍언필 등이 중심이 되어 1530년 ‘새롭게 증보했다(新增)’는 뜻을 담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여 문화사적인 내용을 많이 보강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55권 25책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으로 전국 군현의 사회, 경제, 문화에 관한 모든 사항을 자세하게 담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첫머리에는 이행의 진전문(進箋文)과 이행 등이 쓴 서문(序文)과 구본(舊本) <동국여지승람>의 서문 등이 실려 있다.
서문에는 '비록 역대가 오래된 풍속이나 사경(四境)의 먼 것이라도 한번 책을 펼치면 분명히 손바닥에 놓고 가리키는 것과 같으니 실로 일국의 아름다운 볼거리(勝覽)로서 열성(列聖)이 미처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라 하여 국토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필요성에서 본 책이 편찬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 경도(京都), 한성부, 개성부,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등으로 나누고 각 부와 도에 속하는 329개 지역의 연혁과 관원, 군명, 성씨, 풍속, 형승(形勝), 산천, 토산, 성곽, 관방(關防), 봉수, 누정, 학교, 역원, 불우(佛宇), 사묘, 능묘, 고적, 명환(名宦), 인물, 시인의 제영(題詠) 등의 순서로 지역적 특성을 기록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연혁은 시대에 따른 각 군현의 지명 변화를 기록한 것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지명 변천의 과정을 알 수 있다. 풍속은 그 지역의 특징적인 기질과 풍속을 적고 있는데, 안동의 경우 '부지런한 것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농사 짓고 누에 치는 일을 힘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토산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 관방은 주요 방어처, 누정은 정자, 불우는 사찰을 기록한 것이다. 역원과 봉수 항목이 있는 것은 왕명의 전달이나 긴급한 상황에서의 연락망 확충이 당시에 매우 중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이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토지, 호구, 군사 항목이 없는 대신에 인물이나 제영의 비중을 크게 한 점이다.
이것은 성리학의 이념이 조선사회에 점차 확산되면서 성리학 이념에 충실했던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널리 전파하고, 관리나 학자들이 쓴 시문들을 알려 문화국가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이 학문과 문화를 중시하는 사림파 학자들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이러한 면모가 더욱 강조되었다.
이 책에 서울에 소방서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사실 조선의 궁궐 및 관청 건물은 모두 목재로 만들어져 있어서 화재의 위험이 매우 높았는데, 화재를 막기 위해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라는, 지금의 소방서와 같은 관청이 서울의 종루에 설치되었음이 나타나 있다.
당시 수성금화사에는 각종 소화기구가 갖추어져 있었고, 멸화군(滅火軍)이라고 불리는 소방대원 50여 명이 24시간 근무를 했다고 한다.
한성부의 '교량' 항목에는 혜정교, 대광통교, 소광통교, 통운교, 연지동교, 동교, 광제교, 홍제교 등 조선 전기부터 있었던 다리들의 명칭과 위치가 기록되어 있어서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시가의 모습을 추리할 수 있게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동람도(東覽圖)라는 지도를 그려 넣어 지리지와 지도집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 첫머리에 팔도총도(八道總圖)라는 제목을 붙인 조선전도를 넣었고 각 도 첫머리에는 도별로 지도들이 그려져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이들 지도들은 지리지의 기록과 함께 보급을 위해 목판으로 인쇄되었다. 각 지도의 옆에 독특한 형태의 파도 무늬가 보이는 것은 이 지도들이 목판으로 인쇄한 것임을 잘 보여준다.
지도들은 모두 동서의 폭은 넓고 남북의 길이가 짧아 통통한 모습을 띠고 있는데, 이것은 목판에 맞추어 찍기 위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팔도총도'의 울릉도 왼쪽에는 독도로 여겨지는 우산도(于山圖)가 그려져 있다. 또한 동해, 남해 등이 바다 부분에 적혀있지 않고, 육지에 적힌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다에 제사를 올리던 곳을 표시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이행(李荇),·윤은보(尹殷輔),·신공제(申公濟),·홍언필(洪彦弼),·이사균(李思鈞) 등이 중종의 명에 따라 1530년(중종 25)에 〈동국여지승람〉을 새로 증보하여 만든 조선 전기의 전국지리지로 규장각 소장55권 25책. 목활자본. 현전하는 것은 대부분 임진왜란 후 1611년(광해군 3)에 다시 간행한 목판본이다.
원래의 <동국여지승람>은 세종대에 편찬된 지리지 이후에 변경된 사항을 바로잡기 위하여 세조대부터 시작하여 1477년에 양성지(梁誠之) 등이 완성한 <팔도지리지>에 우리나라 문사(文士)들의 시문(詩文)을 첨가하여 1481년(성종 12)에 50권으로 완성했다.
이 책은 1485년(성종 16) 김종직(金宗直) 등에 의해, 1499년(연산군 5) 임사홍(任士洪),·성현(成俔) 등에 의해 2차에 걸쳐 교정과 보충이 이루어졌으며 중종대에는 새로운 보충 작업이 시도되었다.
(5) 기타 <동국문헌비고>‘여지고’ 등
관찬지리지의 편찬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 1770년(영조 46)에 <동국문헌비고>‘여지고’(輿地考)가 간행되고, 다시 수정, 보완되어 1908년에 <증보문헌비고>‘여지고’ 27권을 마지막으로 간행하게 되었다.
사찬지지의 발간은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 활발해졌다.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일본과 유구국의 지지와 지도를 포함한 지리지로 높이 평가되며,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는 종래의 나열식 서술이 아니고 지리적 사실을 문헌을 이용하여 고증한 새로운 지리적 역사서로 평가되며 실학파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실학파 학자들은 서양의 학문을 중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도입, 수용하였으며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와 정약용(丁若鏞)의 <강역고>(疆域考)는 실학자가 편찬한 대표적인 지리서이다. 이중환은 함경도와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을 실제 답사하였으며, 농촌사회의 새로운 변화와 함께 농업·상업·교통면에서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던 1750년대의 우리 나라를 문화·역사적인 면에서 고찰한 훌륭한 인문지리서인 <택리지>를 저술하였다.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가교적 위치에 있는 최한기(崔漢綺)와 김정호(金正浩)는 같은 연배이고 친구이면서 지지 편찬과 지도 제작에 서로 협조하였다.
최한기는 초기 실학자들의 지리적 관심과 업적이 단편적인데 비하여 서양의 지지와 지도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첫번째 학자였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의 제작자로는 잘 알려졌으나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저자란 사실을 잊을 때가 종종 있다.
<대동지지>는 경도(京都),·부(府),·군(郡),·현(縣)의 지지에 한정되어 있던 종래의 지지에 계통지리적 성격을 띠는 교통,·통신을 다룬 정리고(程里考), 현재 낙질로 돠어 있는 산수고(山水考)와 변방고, 방여총지(方輿總志) 등을 추가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대동지지>는 총론과 지방지를 포함하는 현대적인 한국지리지에 접근하였고 역사지리적 내용을 다룬 방여총지는 종래의 역사와 지리의 유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지도는 100만분의 1 내외의 소축척(小縮尺) 지도이며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우리나라 지도이다. 조선 후기에는 축척과 방위가 정확하고 자세한 대축척지도인 정상기(鄭尙驥)의 ‘동국지도’가 18세기 중기에 도별분도(道別分圖)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이 지도는 산계(山系)와 하계(河系)가 정확하고 자세하며 교통로와 봉수, 각 군현·병영·수영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동지지>의 저자인 김정호는 1834년(순조 34)에 ‘청구도’ 1861년(철종 12)에 ‘대동여지도’를 간행하였다. 전자는 상하 2권으로 된 지도책 형식을 취하였고 후자는 22첩의 절첩(折疊) 형식으로 되어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약 16만분의 1 대축척 지도이며 정상기의 약 42만분의 1 지도를 기초로 하여 보완, 수정한 것이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필사본이나 ‘대동여지도’는 정교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산계와 수계가 자세하며 독특한 산맥의 표시방법을 발달시켰다.
한일수호조약(1876)에서 1910년의 한일합병 때까지는 서양의 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이며, 근대학교의 교과서를 통하여 서양의 지리학이 도입되었다.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써왔던 관계로 지리학은 국민들의 국제적인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세계를 이해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소학교령과 사범학교 관제가 반포된 1895년 이후에는 학부편집국에서 직접 <조선지지>(1895)와 <소학 만국지지>(1895), <중등 만국지지>(1902)를 국한문 혼용의 활자본으로 간행하였고, 현채(玄采)·장지연(張志淵) 등의 <대한지지>, 김홍경(金鴻卿)의 <중등 만국지지>, 보성관(普成館)의 <중등지문학> 등이 이어서 출판되었다.
실학자들의 지리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 그리고 개화기 교과서와 일반 계몽을 위한 지리적 관심은 일제강점기에 그 공백기를 맞게 되었다. 다른 학문 분야는 활발하지는 못하였으나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의 양대 사립고등교육기관과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 등에서 소수이기는 하나 전공학자를 양성할 수 있었다.
지리학은 일제 말에 경성제국대학 부속 이과교원양성소(理科敎員養成所)에 지리과가 있었을 뿐이고 그 존속기간도 짧아서 졸업자는 약간 명에 불과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지리학을 공부하고 광복 후까지 지리학계에서 활동한 이들은 다음과 같다.
1945년 광복 당시에 고등교육기관에서 지리학 강의를 맡고 있던 한국인 교수는 육지수(陸芝修)뿐이었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지리에 관한 연구는 주로 일본인에 의하여 일본연구의 한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데 불과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지리서로서는 박헌용(朴憲用)의 <강도지>(江都志) 증보(1932), 조선박문사의 <조선각도읍지>(朝鮮各道邑誌)(1929), 남궁준(南宮濬)의 <신조선전지>(1913) 등이 있을 뿐이다.
3. 문헌기록 활용
어느 지역의 땅이름(地名)의 유래나 연혁을 살펴보려면 먼저 지리지(地理誌)나 지지(地誌) 등 관련된 문헌과 각종 고지도를 년대별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도상에 표기된 지명과 지도상에서 위치를 확인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땅이름의 유래나 연혁을 밝히는 것도 보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예거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활용할 경우, 그 기록의 소재가 본문부분에 있는지 또는 <신증>부분에 있는지에 따라 기술을 달리해야 바른 활용이라 할 수 있겠다.
다음은 문헌 기록을 활용하는 사례로, 직접 문헌의 기록을 중심으로한 ‘광주지역 무등산지명유래기록’과 문헌 및 주(註)를 활용한 ‘서울 용산일대 지명유래기록’을 예시하여 활용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1) 사례1-광주지역 무등산지명유래기록
►<삼국사기> 지리지/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잡지 지리지편(雜志 第五 地理三)에는 무주(武州)의 기록만 전하고 무등산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잡지 제 1 제사편의 소사조(小祀條)에 무진악(武珍岳)이 있어 산 이름만 전해진다.
►<고려사> 지리지/ 다음 <고려사> 지(志) 권 제11 지리2 해양현(海陽縣)조의 끝에는 ‘有無等山’이라 하고 ‘一云 武珍岳, 一云 瑞石山, 新羅爲小祀, 高麗 致國祭’라고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세종실록> 권 제151 지리지 전라도조 기록은 다음과 같다.
‘無等山, 一云 武珍岳, 一云 瑞石山, 在武珍, 豊厚高大, 新羅爲小祀, 高麗 致國祭, 本朝令州官行祭’ 이어 무진군조에는 ‘鎭山 無等 在郡東’이라 적혀 있어 무등산을 군의 진산으로 불러왔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산현 산천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無等山 在縣東十理 鎭山, 一云 武珍岳, 一云 瑞石山, 穹?高大, 雄盤五十餘理, 濟州漢拏山, 慶尙道南海, 巨濟等島, 皆在眼底, 山西陽崖, 有石條數十櫛立, 高可百尺, 山名瑞石以此, 天旱欲雨, 與久雨欲晴, 山輒嗚聲聞數十理, 欲有無等山曲, 百濟時城, 此山 民賴以安樂而歌之’
이어 무등산과 관련 있는 지명 두 곳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風穴, 在圭峯庵傍, 石壁下長一尺 廣五寸, 風或生或止, 俗名其石壁爲風穴臺.
壯元峯, 絶無等山支峯, 俗傳鄕校舊在峯下, 邑人中壯元者多故名‘
또 규봉암에 관한 기록되 있는데 이것은 따로 사찰편에서 언급해야 될 일이지만 무등산의 지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할 것 같아 역시 이곳에서 인용해둔다.
‘圭峯庵, 在無等山, 寺傍有三石, 高數百尺, 名曰三尊石, 又有十臺 曰送下, 曰廣石, 曰風穴, 曰藏秋, 曰靑鶴, 曰松廣, 曰榜嚴, 曰法華, 曰說法, 曰隱身 世傳道誅遍坐此臺, 相松廣山勢, 而創寺焉.
또 사묘조(祠廟條)에는 무등산 신사의 기록이 있다.
‘無等山神祠, 在縣東十里, 新羅爲小祀, 高麗致國祭, 東征元師金周鼎, 祭名官城隍之神, 歷呼神名以驗神異, 州城隍嗚纛鈴者三, 周鼎報于朝封爵焉, 本朝春秋令本邑致祭’
►<여지도서>(與地圖書)/ <여지도서> 광주조에 보인 무등산과 그 지산(枝山)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無等山, 白玉果雪山, 來爲主脈, 在州東十里’
‘金堂山, 無等山下麓, 在州西南十五里’
‘粉積山, 無等山下麓, 在州南五里’
‘三角山, 無等山下麓, 在州北五里’
‘巾之山, 無等山下麓, 在州南二十五里’
‘壯元峯, 無等山下麓, 在州東五里’
‘楊林山, 無等山下麓, 在州西二里’
‘風穴巖, 在無等山圭峯庵傍’
►<대동지지>(大東地志)/ 무등산에 관해 가장 방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 고산자(高山子) 김정호의 <대동지지>다. <대동지지> 광주편의 산수조의 기록은 아래에 적는다.
‘無等山, 東三十里和順同福昌平界, 新羅?武珍岳, 高麗?瑞石山, 穹隆高大, 雄盤百餘里, 登臨觀百里山川, 山之西 陽崖, 有石條數十, 排列雪?, 高可百尺, 如?笏竪碑, 山勢峻極, 雄壓一道, 又有石壁, 長可數十武, 高可數十丈, 石紋如波如雪, 赤白色相雜, 又有天作石室, 圭峯庵, 有三石, 高數百尺, 名曰三尊石, 又有十臺, 曰送下, 曰廣石, 曰風穴, 曰藏秋, 曰靑鶴, 曰松廣, 曰榜嚴, 曰法華, 曰說法, 曰隱身, 風穴臺, 在寺之傍, 石壁下長一尺, 舍人岩, 有名寺庵十餘區, 壯元峯, 東五里 無等山西支, 鑄劍窟在, 在無等山.’
또 대동지지는 제터에서 ‘無等山壇’을 적고 ‘新羅?武珍岳以名山載小祠, 高麗元宗十四年春秋致祭于無等山, 本朝令 本邑春秋致祭’라 했다. 그리고 성지조(城池條)에서는 ‘無等山古城’에 언급하여 ‘有遺址百濟時代城, 于此山民賴以安樂, 而歌之, 俗有無等山曲’이라 했다.
►<광주읍지>/ <광주읍지>는 산천조에서 무등산을 소개하고 있는데 내용은 <동국여지승람>과 거의 같다. 오직 거리를 <동국여지승람>이 ‘현의 동쪽으로 10’라 한 것을 ‘주의 동쪽으로 30리’라 한 것이 다를 뿐이다. 자료로써 전문을 아래에 소개한다.
‘無等山 在州東十理 鎭山, 一云 武珍岳, 一云 瑞石山, 穹?高大, 雄盤五十餘理, 濟州漢拏山, 慶尙道南海, 巨濟等島, 皆在眼底, 山西陽崖, 有石條數十櫛立, 高可百尺, 山名瑞石以此, 天旱欲雨, 與久雨欲晴, 山輒嗚聲聞數十理, 欲有無等山曲, 百濟時城, 此山民賴以安樂, 而歌之’
(2) 사례2-서울 용산일대 지명유래
서울역에서 한강철교(漢江鐵橋)에 이르는 일대의 지역, 즉 철로 좌우양측 넓은 들의 원래 이름은 사촌리(沙村里) 또는 사리(沙里)로서 한강안(漢江岸)의 적막한 모래 벌판이었다.
홍수가 나면 남대문 근처까지 물이 들어 왔으니 많은 인가(人家)가 들어서지도 않았다.
조선시대의 용산(龍山)은 이른바 구용산(舊龍山)으로서 지금의 원효로를 중심한 양측, 그 중에서도 원효로(元曉露) 이서(以西)의 지역이 주된 부분이었다. [註28]
1886년에 일본 육군성(陸軍省)에서 발생한 한성주변도(漢城周邊圖)를 보면 욱천(旭川)에서 이태원(梨泰院)까지의 넓은 들판이 모래땅으로 버려진채 거의 전답(田畓)으로도 이용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지금은 신용산이 된 이 지역의 지명(地名)이 기록상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고려(高麗) 때의 일인데 <고려사> 지리지(<高麗史> 地理志) 한양부조(漢陽府條)에는 한강을 사평도(沙平渡)라 주기(註記)하고 있고 영조말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여지고(輿地考) 산천조(山川條)에는 '한강고칭사평도(漢江古稱沙平渡) 속호사리진(俗號沙里津) 진재도성남십리(津在都城南十里)'라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리진을 줄여 사리 혹은 사리마을이라 불렀고 사촌(沙村) 또는 사촌리라고도 불렸던 모양이다.
정조 중엽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호구총수>(戶口總數) 한성부(漢城府) 서부(西部) 용산방조(龍山坊條)에는 사촌리계(沙村里契)로 표시되고 있다. 지금의 삼각지(三角地) 로터리 서쪽 인근을 새남터(沙南基)라 부르는 것은 사촌리 또는 사평도와 관계가 있는 전음(轉音) 또는 속칭(俗稱)일 것으로 추측된다.
용산방 사촌리계의 북동 인근은 둔지방(屯之坊) [註29] 와서계(瓦署契)였다. 즉 대체로 오늘날의 한강로(漢江路)가 조선시대 용산방과 둔지방의 경계쯤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와서(瓦署)는 조선시대 초기에 설치된 관용(官用) 기와 제조소로서 선공감(繕工監) 산하에 20명의 전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註30] 당시 와서의 소재지는 남부 둔지방, 오늘날 용산소재 철도병원(鐵道病院) 서남방에 있었으며 고종 19년(1882) 말까지 존속하였다.
옛날 서울에서 남하하는 길은 여러 개가 있어 ① 동대문 또는 광희문(光熙門)에서 광나루를 지나 광주(廣州)로, 혹은 살곶이 다리를 건너 송파(松坡)를 거쳐 광주로 가는 길. ② 광희문에서 한강진(漢江津)으로 빠져 압구정(狎鷗亭) · 말죽거리를 지나 광주나 용인(龍仁)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③ 남대문에서 남묘(南廟)앞 · 이태원(梨泰院) · 서빙고(西氷庫)를 거쳐 동작진(銅雀津) · 과천(果川)으로 가는 길 ④ 남대문(南大門)에서 현 한강로(漢江路)를 지나 와서고개를 넘어 동작진(銅雀津)으로 가는길, 혹은 와서(瓦署)고개 · 사평리(沙平里)를 거쳐 노량진(鷺梁津)으로 해서 시흥(始興) · 군포(軍浦) · 수원(水原)으로 가는 길도 있었다.
4. 땅이름의 분류
땅이름은 발달단계나 기인론(起因論)에 따라 분류하거나 기능별·대상별로, 또는 언어학적 측면 등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자연지명,·행정(법제)지명,·경제지명,·문화지명으로 크게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연지명/ 기후,·지형,·위치,·지질,·자연물 등과 관련된 지명이다.
한국은 벼농사문화권에 속하므로 천체·기상과 관련된 지명이나 산,·천(川),·해(海),·평야 등과 같이 지형을 나타내는 지명이 많다.
천체·기상과 관계되는 지명으로 양지,·음지,·월평(月坪),·칠성(七星) 등이 있으며 내동(內洞),·화동(華東),·남양(南陽) 등과 같이 위치나 방위를 나타내는 지명도 많이 있다.
지질의 특성을 나타내는 지명으로는, 암석이나 토양의 색을 따서 백,·밝[明(명) → 博(박)],·검[黑(흑) → 今(금)·禽(금)·錦(금)·穴(혈)·熊(웅)] 등의 단어가 사용된 것이 있고 돌이 많은 곳에는 돌[乭(돌), 石乙水(석을수)],·반석(斑石 → 玄武岩) 등의 단어가, 물맛이 좋은 데서는 달천(達川),·감천(甘川),·감물(甘勿) 등의 단어가 붙어 그 지역의 특성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있다.
이 외에도 산의 모양이나 특징에 따라 산,·악,·봉,·등(嶝),·더미(덤, 터미, 퇴미) 등이 쓰인 지명이 많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산을 <오름>이라 하여 올[兀(올)],·쉬[犀(서)]로 쓰이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갈미,·수리,·부리,·두리,·모로,·망 등의 산을 나타내는 말이 붙어 지명이 된 경우도 많다.
강과 물에 대한 지명도 많아서 하천의 위치에 따라 수분(水分),·중강(中江),·하단(下端),·하구(河口),·하동(河東),·강서(江西),·천변(川邊) 등의 지명이 있고, 하천이 교류되는 곳에는 합수(合水),·교하(交河),·삼강(三江),·수구(水口),·어구(於口) 등이 붙은 지명이 많다. 하천이 곡류를 이룬 곳에는 곡천(曲川),·구곡(九曲),·곡수(曲水),·수회(水回),·도랫말[回洞(회동)] 등과 더불어 <곡>자나 <회>자가 많이 쓰였으며 물이 돈다는 의미로 강돈(江敦),·전포(錢浦),·돌머리[石隅(석우), 石頭(석두)] 등의 지명과 같이 돈[敦(돈), 錢(전)]·돌[石(석), 突(돌)] 등의 글자가 쓰였다.
또한 해안지방에서 가장 흔한 지명으로 에서 유래한 구미가 있으며, 여기서 파생된 것으로 곰[熊(웅)],·검[黑(흑), 儉(검)],·굼[穴(혈)],·감(甘),·금(金, 錦, 今, 禽),·가마[釜(부), 加馬(가마)],·고마(古馬),·계마(桂馬),·가막(駕莫) 등이 있다.
하안단구를 나타내는 곳에는 평(坪), 삼각주를 뜻하는 곳에 주(洲), 반도나 곶을 나타내는 곳에는 갑(岬),·곶(串),·단(端),·두(頭),·말(末) 등이 쓰였고 무인도에는 불무섬·야도(冶島),·대도 등을 붙인 지명이 많다. 온천리·온수리,·온정리,·온양 등과 같이 온(溫)자가 붙은 곳에는 온천이 발견된 예가 많다.
또한 예로부터 농업국으로 홍수나 가뭄에 관심을 보여 수풍(水豊),·수해(水害;水海),·둑섬,·물금[水禁(수금) → 勿禁(물금)] 등도 지명에 쓰였다.
♤행정(법제)지명/ 토지,·세제,·경계,·군사,·행정지명 등이 있다. 토지제도와 관련해서는 정전(井田),·공세(貢稅),·방축(防築) 등의 지명이 있고 조세미를 운반하던 곳에는 창(倉)지명이 많다. 지방행정의 경계를 나타내는 지역에는 특히 조선시대에 지계(地界),·지경(地境) 등이 쓰였고 변방지역에는 남관(南關),·동관(潼關),·삼방(三防) 등의 지명이, 군대주둔지역에는 진,·보,·둔전(屯田) 등의 이름이 붙여졌다.
역체제도(驛遞制度)가 발달했던 지역에는 역촌(驛村),·사리원(沙里院),·조치원(鳥致院),·구파발(舊擺撥) 등과 같이 역·원·파발 등이 붙어 있다. 벽란도(碧瀾渡),·노량진(鷺梁津)은 나루터가 있었던 교통지역의 지명이다. 관아지명으로는 세종로(世宗路),·원남동(苑南洞),·경운동(慶雲洞),·내자동(內資洞),·팔판동(八判洞),·사간동(司諫洞) 등이 있고 태릉,·홍릉 등의 능지명과 삼묘리(三墓里),·묘막리(墓幕里) 등의 능묘지명이 있다.
♤경제지명/ 오랜 농경으로 인해 개간,·간척,·농산물 등과 관계된 지명이 많다.
개간과 관련된 신촌(新村),·사근(沙斤),·장(庄) 등과 함께 개척을 뜻하는 흥(興),·개(開),·막(幕)자 지명과 농경지와 관련된 평촌(坪村),·여덟배미(八夜) 등의 지명이 그것이다.
축산업과 관련 있는 지명으론 우도(牛島),·마양도(馬養島) 등이 있고 수산업과 관련된 것으론 방어진(方魚津),·구을비도(九乙非島), 임업과 관련된 목벌(木伐),·판막(板幕), 요업과 관련된 사기(沙器),·와동(瓦洞) 등의 지명이 전국에 널리 분포한다.
상거래·시장 등과 관계되는 교역지명도 많이 나타나는데, 교통의 주요 분기점에는 분기(分岐)·나들이·사거리·구(口) 등의 글자가 붙은 지명이 많고, 고개 밑에는 영하(嶺下),·대치(大峙),·재(在, 才, 財) 등의 글자가 붙은 지명이 많다. 당진(唐津),·왜관(倭館),·청진(淸津) 등 교역상대국의 국명을 딴 지명도 있다.
또 금촌장(金村場),·김량장(金良場),·신시(新市) 등 정기적으로 열리는 재래시장과 관련하여 시·장의 글자가 붙은 지명이 있고, 여행자들을 위한 시설이 있는 곳에는 주막(酒幕),·떡전[餠店(병점)],·거리(巨里),·노(路),·정(程),·장승(長丞),·참(站),·관(館) 등의 글자가 붙은 지명이 많다.
♤문화지명/ 인물,·성씨,·민족,·도덕,·풍속,·종교,·어문 등과 연관되어 붙여진 지명을 말한다. 한국에는 동성마을이 전국에 널리 분포하고 있어서 마을이름으로 유교에 관한 것이나 성씨에 관련된 것이 많다.
이 외에 세종로,·충무로 등과 같이 인명이나 시호로 된 지명과 공덕동(孔德洞),·안맹리(顔孟里),·퇴계로(退溪路) 등과 같이 성현의 이름을 딴 지명이 있다.
풍수지리와 관련된 것으로는 묵동(墨洞),·연촌(硯村),·필암산(筆巖山;지금의 佛巖山)과 비봉(飛鳳) 등의 지명이 있고, 도덕·효행·충의 등과 관계된 유교지명과 절골,·탑골,·미륵,·관음 등의 불교지명도 많이 분포한다.
5. 마무리
현대에 와서 1914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명이 대폭 변경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한성(漢城)을 경성(京城)으로 바꾸는 등 지명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였으나 광복 후 다시 경성을 서울로 고쳤으며, 지금까지 새로운 지명이 많이 생겨났다.
그런데 많은 지명들이 오용되거나 혼용되고 있고 합성·변조·감소되는가 하면 숫자지명과 방위지명이 범람하여 역사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지명이 사라져가는 등 문제점이 많다.
따라서 지명을 문화유산의 하나로 보고 그 어원적 분석, 사회적·행정적 기능에 대한 연구 등 지명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필요하며 역사적인 지명을 발굴, 보존하고 혼란된 지명을 바로 잡는 등 지명의 정리·보전에 대한 관심과 대책이 요구된다.
본서에서는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방대한 분량의 지지(地誌)나 지리서(地理書)와 지도(地圖)를 모두 포괄하지 못하고 쉽게 접할 수 없는 자료를 중심으로 편찬하게 되었다.
앞으로 추가 발간의 기회가 주어지면 보다 다양하고 전문적인 <지명유래사전>을 발간할 예정이다. 여러 가지 여건으로 참고문헌, 주(註), 자료의 활용의 다양한 예시 등 불비한 점이 많음에 대해 강호 제현의 많은 관심과 질정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