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따가워. 왕벌에 쏘였어요"
기억과 추억 사이/수필·산문·에세이
2005-12-25 17:02:20
벌초할 날이 돌아왔다. 추석이 바싹 코앞에 다가온 탓에 산소가 있는 산길마다 차량이 몇 대씩 멈춰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생계에 바빠 연락조차 없이 지내다가도 벌초날에 맞춰 친척들은 서로 한 후손임을 과시하게 된다. 이렇게 함께 벌초를 하다 보면 멀어졌던 정도 다시 쌓이고 그동안 잊고 지냈던 조상의 숨결을 다소나마 느낄 수 있어 마음 또한 든든해진다. 산소 몇 개를 끝내고 부모님 산소로 이동한 것은 정오가 다 된 무렵이었다. 앞서 조부모님과 백부모님의 쌍분, 형수님의 산소에 벌초를 하느라 진이 다 빠졌는데 부모님 산소에 도착하니 이미 탈진상태가 되었다.
▲ 막내 당조카의 예초기 돌리는 솜씨가 제법이다. 세군데의 산소를 거뜬히 해치워도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2005 유진택
그래도 막내 당조카는 예초기 돌리는 솜씨가 제법이다.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가볍게 돌아가는 예초기의 칼날에 잡목이나 풀이 뭉텅뭉텅 잘려나간다. 풀들과의 전쟁을 치르는 듯 상큼한 풀 향기가 코를 찌른다. 그래도 잔디가 무성하게 자란 탓으로 예초기 돌리기가 수월하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잔디가 산소를 시퍼렇게 뒤덮고 있어 눈길 한 번 스칠 때마다 여간 시원한 게 아니다. 지난 늦봄에 분무기로 풀 약 한 번 살포하였더니 겁없이 솟구치던 풀들은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변두리에 잡목과 풀들이 뒤엉켜 산소를 점령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풀들은 내 키만큼 자라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풀들이 지천이다. 칡넝쿨을 뚫고 올라온 엉겅퀴, 망초대가 우굴우굴 줄기를 늘어뜨린 종족들과 싸움질을 하고 있다. 그 중에도 드문드문 붉은 물감을 찍어 바른 꽃들이 선명하다. 내 마음은 이미 들꽃에 피사체를 맞추고 있다. 그렇지만 꾹 참았다. 셔터를 눌렀다간 정신 나간 놈으로 찍힐까봐 애써 참았다. 예초기의 칼날과 시퍼런 낫날에 무참히 쓰러지는 잡목과 풀들, 그 종족들이 뱉어낸 상큼한 풀 향기가 산소를 뒤덮고 있다. 벌초를 반쯤 끝내고 나무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과수원 쪽에서 백발노인이 불안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 무덤까지 점령한 고구마 순, 큰 형님이 한 동안 밭을 비워둔 것을 알수가 있다.
ⓒ2005 유진택
낯익은 얼굴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 바로 옆집에 살았던 아줌마, 그러나 이젠 그때의 청순한 얼굴은 지워지고 성성한 백발에 세월의 흔적 같은 잔주름만 얼굴을 덮고 있다. 새참을 이고 걸어도 끄떡없었던 두 다리는 벌어지고 허리는 앞으로 푹 수구러져 뒤뚱뒤뚱 걸어오는 폼이 35번이나 바뀐 세월의 흔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배 좀 잡숫고 혀. 땅에 떨어진 배가 천지여."
산소 옆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는 노인이 색 바랜 봉지에 싼 배를 몇 개 내 놓았다. 그러더니 주름이 주글주글 접힌 입에서 봇물터지 듯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저 산소에 왜 풀이 하나 없는지 알어. 노상 산소에 와서 살다시피 해. 어느 조카가 작은 아버지, 엄마 산소에 와서 풀을 뽑겠어. 전번에는 산소에 비료를 뿌려대더니 저렇게 시퍼렇게 잔디가 산 것 같어, 근데 요새 몸이 많이 아픈가 통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그 양반 복 받을 끼여."
그 양반은 바로 고향에 터를 잡고 계신 큰집의 큰 형님을 두고 하는 말이다. 큰 형님은 산소 옆자리에 딸린 밭뙈기를 부치는 탓으로 매일 밭에서 일을 하다가 틈만 나면 부모님 산소에 풀을 뽑아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노인 말대로 큰 형님이 밭에 오지 않는 것을 밭머리를 헤집고 나온 고구마 순들이 산소 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밭주인이 있었다면 수시로 고구마 순들을 밭 안쪽으로 거둬들였을 것인데 그대로 놔둔 걸 보면 요 며칠 동안 밭을 비운 게 틀림없었다. 전번에 디스크로 허리 수술을 하고 그 후유증이 낫기도 전에 다시 장염이 도진 걸 보면 아마 밭은 얼마 동안 주인 없는 빈 공간으로 묵혀둘 게 틀림없었다. 배를 몇 개 깎아 달게 먹고는 벌초를 시작하기 전 당조카가 불쑥 웃옷을 걷어 올렸다.
"팔이 뻐근해져네. 병원에 안 갔으면 큰일 날 뻔 했어."
살집이 덕지덕지 붙은 당조카의 어깨쪽지엔 왕벌에 쏘인 자국이 선명했다. 그 주변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사실 부모님의 산소를 벌초하기 전 백부모님의 산소를 벌초한 일이 있었다. 그때 정신없이 잡목을 쳐대던 당조카가 오만 인상을 찌푸리며 부리나케 달려왔다.
▲ 깔끔하게 변한 산소의 모습
ⓒ2005 유진택
"앗, 따가워. 왕벌에 쏘였어요."
우리는 낫과 예초기를 내팽개치고 달려갔다. 웃옷을 걷어 부쳤더니 왕벌에 쏘인 침 자국이 보였다. 허벅지에도 핏물이 고였다. 달려드는 왕벌을 피하려고 낫을 휘두르다가 낫날이 그만 허벅지를 스친 것이었다. 당조카가 인상을 쓰고 있는 사이 막내 당조카는 벌집이 잇는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 순간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엄청 커요. 바도리보다 몇 배 더 큰 놈 같아요. 살충제만 뿌리면 다 죽일 수 있을텐데."
"허튼 짓 하지 말고 빨리 내려와, 너도 한방 쏘이려고 그래. 몰라서 그렇지 거기 벌들이 바글바글 해."
막내 당조카는 왕벌의 근성을 모르는 것 같았다. 떼거리로 달려드는 땅벌이나 땡피보단 점잖지만 한 방 쏘이면 그 길로 황천길로 갈 수 있는 맹독성 말벌인 왕퉁이의 생리를 모른 것 같았다. 작은 형님의 거듭되는 요구에도 막내 당조카는 아쉬운 듯 입만 쩍쩍 다시고 있었다.
작년 벌초 날에도 큰 형님이 그 자리에서 벌들에게 습격당한 사건이 있었다. 잡목을 쳐내다가 새까맣게 날아오는 벌들을 목에 두르고 있던 타월로 쫓아낸 사건 때문에 그 자리에 가길 주저했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오늘 당조카가 그 곳에서 잡목을 쳐내다가 그만 왕퉁이에게 한 방 쏘이고 만 것이다.
"그나저나 너 빨리 병원에 가. 그냥 놔두면 큰일 나."
"괜찮아요, 그냥 참지요, 뭐."
나의 말에 당조카는 대수롭지 않는 듯 머뭇거렸다.
"야. 왕퉁이는 제트기보다 빠른 놈이야. 만약 혈관에 쏘이면 그 길로 황천행이야, 그러니 빨리 병원에 가. 벌초하다 죽었다는 사람 소식도 못 들어봤어."
작은 형님이 한술 더 떠 겁을 주자 그제 서야 당조카는 나와 함께 영동에 있는 병원을 찾게 되었다, 거기서 진찰을 받고 바로 벌초를 하고 있는 부모님 산소로 달려오게 된 것이다.
"니가 벌에 쏘여도 괜찮은 것은 지방질 때문이야. 돼지가 벌에 쏘이거나 뱀에 물려도 왜 죽지 않는지 아냐. 그것은 살이 두꺼워 벌침이 혈관까지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내가 쏘여서 망정이지 아재가 쏘였으면 벌써 죽었을지도 몰라."
작은 형님의 말에 당조카는 나에게 화살을 돌렸지만 자꾸만 어깨쪽지가 뻐근한지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겠지 뭐, 주사 맞고 약까지 먹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 마저 남은 벌초를 시작하자고…."
나는 당조카를 안심시키고 다시 낫을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잔디로 무성하던 산소는 말끔히 변해가고 있었다. 쉬지 않고 내려 쏟는 땡볕에 얼굴이 타는지도 모르고 예초기를 돌린 막내 당조카의 노련한 손놀림 때문이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푹푹 빠지던 잔디는 순명하듯 그렇게 예초기의 칼날에 쓰러져 최후의 날을 맞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