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걷는 즐거움
걷는 것은 인간에게 알맞은 기본 윤리의 장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마주치고, 단박에 서로를 알아보고 인사를 주고받고, 미소를, 시선을, 길 또는 목적지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갈 길을 알려준다. 걷기는 상호성의 세계이다. 여인숙이나 카페는 이따금 어렴풋한 만남을 몇 시간 일찍 연장하기도 한다. 샛길로 접어드는 것은 우정과 대화 그리고 연대감의 세계를 위해 경쟁과 무시, 이탈, 속도,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를 앞지르는 것과 다름없다. 타인이 더는 경쟁 상대가 아니라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한 사람이라는 보편적인 인간성의 근원으로 회구하는 일이다.
걷기는 나라는 존재의 시간과 공간에 차분하게 다시 매력을 불어넣는 방법으로 일단 집에서 나와 삶에 대한 의욕을 흐리는 구태의연한 습관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오솔길이나 도로 지나기, 숲이나 산을 활보하기, 힘겹게 언덕을 올랐다가 내려가는 기쁨을 만끽하기, 이 모든 걷기는 오로지 자신의 신체 수단 하나에만 몸을 맡긴 채 세상과 연결되는 느낌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빠른 속도, 유용성, 수익, 효율성을 중시하는 요즘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걷기는 느림, 유연성, 대화, 침묵, 호기심, 우정, 무용성을 우선시하는 저항 행위이다. 또, 이제까지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해온 신자유주의적인 감수성에 과감하게 맞서는 가치들도 중히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