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토장정 22-1 (2012년 4월 6일)
27.2km (803km)
(해남군 문내면 난대리 - 우수영 터미널 - 진도대교 입구 - 부곡리 - 황산면 한자리)
안양석수체육공원에서 정확히 오전 6시에 출발했다. 해남군 문내면 난대리까지는 4시간 30분이 소요되어 도착하였다. 약375km를 자동차로 달려왔으니 이미 몸이 지쳐있다. 차가운 바람은 봄을 시샘하듯 옷 속을 파고들어 제법 추위를 느낀다. 봄 패션으로 단장을 하신 회계님께서는 봄 컨셉트를 후회하고 있다. 바닷바람에 손이 시릴 정도로 추위를 느끼고 있지만, 도로변에서는 무성한 잡초 사이로 파란 새싹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77번 국도와 나란히 뻗어있는 마을길을 30분 정도 걸으니 우수영에 도착한다. 바닷가에는 옛 범선이 보이고, 그 옆에 거북선이 보인다. 그런데 무늬만 범선이요, 거북선이었다. 고증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배를 건조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관광객들을 상대로 유람선인 듯하다. 법선에 와이퍼까지 달려있으니 웃음이 나온다. 77번 국도를 따라 걷다 고가차도 밑에서 우회전을 하니 우리가 지나친 고가가 진도로 가는 77번 국도였다. 그 좌측에는 명량대첩지인 우수영관광지가 자리를 잡고 있어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당분간 우리는 77번 국도를 계속 만날 것이다.
범선(?)의 모습. - 모터 범선이다..ㅋㅋ
거북선인디...유람선인지 아니면 그냥 카페인지 잘 모르겠다.
진도대교가 보인다.
명량대첩지인 이곳에서 이순신장군을 생각한다.
요즘 내가 읽는 책인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흐름출판사 - 강상구 저)에서도 예문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더욱 관심이 깊은 상태였다.
사실 우리나라만큼 영웅 만들기에 인색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나관중이 쓴 “삼국지”를 읽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비, 관우, 제갈공명, 주유 등 나관중은 이들을 역사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또한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공신인 장량과 한신 또한 지장으로써 역사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의 역사적 영웅의 척도에서 그들보다 뒤처지는 듯 느끼는 것은 나 뿐 만인가?
23전 23승 0패 - 이것이 이순신장군의 전적이다.
중국 최고의 전략가 제갈량도 북벌정책을 4차례 실패 후 죽음을 맞았고,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도 적벽대전 이후 단 한 차례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이순신장군의 무패 전적은 전대미문의 전적이다. 또한 이순신장군은 용장의 모습뿐 아니라 지장으로써도 충분한 인물이다.
아래의 글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온 제1차 당항포해전에 대한 설명이다.
제1차 당항포해전은 이순신(李舜臣)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의 연합함대가 제2차 출전에서 사천·당포해전에 이어 세 번째로 치른 해전이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전선 23척, 이억기(李億祺)의 전라우수영 전선 25척, 원균(元均)의 경상우수영 전선 3척 등 총 51척이 참가하였다. 총지휘는 이순신이 맡았다. 당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연합함대는 당포 앞바다에 정박해 전략 회의를 계속하면서 나흘을 머문 뒤, 거제도 주민들로부터 당항포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연합함대는 6월 5일 아침 안개가 걷히자마자 당항포로 진격하였다. 포구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모여 있었다. 연합함대는 당항만 어귀에 전선 4척을 숨겨두고, 거북선을 앞세워 일제히 공격을 가하였다. 조선 수군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일본 수군도 조총을 쏘아 대며 대응 태세를 취하였다. 이에 아군은 왜군의 육지 탈출 봉쇄와 주민 보호를 위해 왜군을 바다 한가운데로 유인한 뒤, 왜선을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였다. 왜선 대부분은 여기서 격침되었고, 도주하는 나머지 왜선들도 모두 추적해 불살랐다. 다만 도망친 패잔병들을 소탕하기 위해 한 척은 남겨 두었는데, 이 역시 이순신의 명을 받은 방답 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에 의해 6월 6일 새벽에 섬멸되었다
[출처] 당항포해전 [唐項浦海戰 ] | 네이버 백과사전
위 해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순신장군이 왜 지장인지 잘 알 수 있다.
왜군은 전세가 기울자 전의를 상실하고 오로지 살고 보겠다는 일념으로 배를 포기하고 바다에 뛰어들어 뭍으로 도망갔다. 이순신장군은 왜군을 뭍으로 추격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모든 왜군 함선을 불태우되 1척만 남겨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철수하면서 방답첨사 이순신에게 포구 어귀에 매복을 지시하였다.
다음날 방답첨사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에게 보고하였다.
“ 어제 남겨두었던 적선이 오늘 당항포 어귀에 나왔습니다. 아군은 기다리고 있다가 즉각 돌격해 격침시켰는데 그 배에는 100여 명의 적병이 타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순신장군이 뭍으로 도망가는 적을 뒤 쫓아 모두 사살하려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뭍으로 올라간 왜군은 100여명이 넘었다. 자칫 역습을 당해 조선 수군의 피해가 예상된다. 또한 이들은 도망갈 곳이 없으면 민가에 피해를 입힐 존재들이다. 배 한척은 이들 패잔병들이 타고 나오라고 남겨준 것이었다. 그리고는 적을 바다로 유인하여 한꺼번에 몰살시켰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 및 민가의 피해도 전혀 입히지 않고 일망타진을 할 수 있었다.
중국 역사 최고의 지장인 제갈량, 장량, 한신과 비교해 보라.
우리가 머문 이곳은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명량해전은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수군이 칠천량에서 벌인 해전으로 삼도수군은 일시에 무너진 이후 벌어진 해전이다. 왜군 133척 VS 조선 수군 13척으로 벌인 해전에서 31척을 격침시키고 적장 구루지마를 사살한 해전이다. 아군의 피해는 부상 수명에 불과했다. 오직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과는 싸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겠는가!
우리 일행은 트레킹을 하면서 이순신장군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토의해 가면서 걷고 있었다.
초지의 푸르름
이상한 건물을 만났다. 일제시대의 건물 같은데 안의 구조가 요상하다. 무슨 용도의 건물이었을까?
외벽에는 총탄자국이 많은 걸로 보아선 6.25때 심한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다.
우리가 가야할 길
낙조의 모습
해남 최고의 한정식이란다.
해남의 바다는 만의 발달로 직선의 트레킹 코스가 없다. 산을 넘든, 바다의 바위나 모래 위를 걸을 수밖에 없다. 저 멀리에 한우 농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 초지가 보이는데 그 푸르름에 눈길이 간다.
우리는 다음 달 첫날 땅 끝에 도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많이 걸어야만 가능하다. 해도 길어졌다. 동계기간은 오후 5시만 되어도 어둠이 내려 걷지를 못하지만 지금은 오후 6시가 넘어도 해가 있다. 25km를 넘자 일행의 지친 기색이 역력하였으나 목표를 완성하고자 7시가 다 돼서야 우리의 일정이 마무리가 되었다. 해남의 최고 한정식 식당인 한성정에서 저녁을 마친 우리는 모텔을 잡고 순서대로 씻는데, 씻는 이를 제외한 모두는 꾸벅꾸벅 졸고 있다. 모두 피곤한 하루였던 것 같다.
첫댓글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
정말 본 받고 싶어요
아고고..............
뻐근허고마~잉~~~~~
아~~~~ 남도 한정식.............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