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08. 23.
- SOC 투자 줄고 취업 시장 냉각… '親서민' 정부가 서민층에 타격 줘
- 정부 정책 신뢰 못하는 기업들 "불안해서 투자·고용 더 꺼린다"
유튜브에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교수 시절 강연 동영상이 올라와 있다. 한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주제였다. 그는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 교수의 자료를 인용하며 1940년대 초반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고액 임금을 통제하고 최저임금을 올렸던 정책이 이후 40년간 미국 중산층의 번영을 이끌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 기업 현장에서는 정부가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는 도움 안 되는 정책만 골라서 집행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대공황 이후 불황 때마다 일자리 정책의 1순위로 꼽히는 SOC(도로·철도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는 올해 20%나 줄이고, 준비도 안 된 주 52시간 근무제를 밀어붙여 근로자들의 월급봉투를 홀쭉하게 만들더니, 2년간 29%에 이르는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으로 일자리 시장을 초토화했다는 것이다.
정부와 여당은 아직도 전전(前前) 정권에서 4대강 사업에 22조원을 투자한 것을 두고 "헛돈을 썼다"고 비판하지만, 기업 현장에서는 2년간 50조원 넘게 쓰고도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킨 게 일자리 정책이냐는 반응이다. 차라리 일자리 정책이 아니라 소득 재분배 정책으로 간판을 바꿔 달라는 말도 나온다.
격앙된 분위기 탓에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최근 가는 곳마다 청와대를 대신해 기업인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다. 한 중소기업인은 "장관 간담회를 하면 '이럴 거면 중기부를 왜 만들었냐'는 극단적 목소리까지 나온다"며 "간담회 때마다 난처한 중기중앙회장이 참석자들의 발언을 자제시키느라 진땀을 흘린다"고 말했다.
정부가 더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돈 많고 근무 여건이 좋은 대기업이 아닌, 영세한 기업일수록 정부 정책에 더 충격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서민을 위한 정부라는 구호가 무색하게도 지난 대선 때 문재인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소상공인에게 더 타격을 준 셈이다. 요즘 영세 자영업자 등 소상공인들은 최저임금 거부 운동을 넘어 정권 퇴진 운동이라도 벌일 태세다.
중소기업인과 소상공인들은 정부가 현실을 너무 모르는데도 현장 이야기를 들을 생각조차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논란이 불가피한 정책을 추진하려면 실현 가능성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여도 모자랄 판에, 부처 장관 등 고위 관료들은 대학 강의 하듯 정책의 당위성만 역설한다는 것이다.
한 중소기업인은 "기업이 한번 경쟁력을 잃으면 회복이 안 되는데, 정부는 너무 쉽게 '일단 시행해보고 나중에 수정하자'고 말한다"고 했다. 또 다른 기업인은 "세금으로 일자리를 떠받치는 게 몇 년이나 지속되겠느냐"며 "정부가 경제를 잘 이끌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니 기업이 불안해서 투자와 고용을 더 꺼린다"고 말했다.
소득 주도 성장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정부가 또 다른 성장 축인 혁신 성장을 서두르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혁신 성장도 절대 만만한 게 아니다. 세계적 경영학자 클레이턴 크리스텐슨 하버드대 교수의 말대로 혁신(innovation)에는 파괴적(disruptive)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아마존이 기존 유통 산업을 뒤흔들고 온라인 영화 서비스 넷플릭스가 전 세계 DVD 가게를 문 닫게 했듯이, 혁신은 기존 산업과 일자리를 초토화해 왔다. 혁신 성장을 성공시키려면 현장 목소리를 더 많이 듣고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기업에 한 투자 요청을 놓고 '구걸' 논쟁을 벌일 만큼 우리의 경제 여건이 결코 한가하지 않다.
조형래 부국장 겸 에디터(경제담당)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