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이름의 변천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땅이름은 계속 태어난다.
어난 땅이름은 없어지거나 변하기도 하고 완전히 다른 땅이름으로 바뀌거나 다른 땅이름에 흡수돼 버리기도 한다.
이에 따라 수명이 긴 것도 있고, 짧은 땅이름도 있다.
우리 땅이름들은 삼한-삼국-통일신라-고려-조선-일제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시대가 바뀌고, 영역이 바뀌고,
쓰이는 말과 글이 바뀔 때마다 계속 옷을 바꾸어 입어야 했다.
'서울' 지역도 역사상 가장 먼저 나타난 이름이 '위례성'이요,
그 후로 '하북위례성', '북한성', '북성', '한성', '북한산', '남평양', '북한산성', '신주', '한산주', '북한산주',
'한주', '양주', '남경', '한양부', '한성부', '경성부', '서울' 등으로 시대 따라 엄청나게 많은 이름을 얻고 잃었다.
약 1천 년간의 신라 수도였던 경주(慶州) 역시
계림(鷄林), 동경(東京), 월성(月城), 금성(錦城) 등 많은 이명(異名)들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일반적으로 '경주'로만 통하고 있다.
특히, 한자에 의한 땅이름 표기는 순수 우리말에 바탕을 두었던 땅이름 변천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쳤다.
1. 땅이름의 생겨남과 사라짐
한자가 보편화되지 않던 신라 초기에는 나라 이름에서부터 임금, 벼슬, 땅, 사람 등의 이름들이 온전히 배달말로 되었었다. 그런데, 서기 6세기 초부터 한자 사용이 본격화됨에 따라 순수한 우리말로 된 갖가지 이름들이 한자말로 바뀌었다.
22대 지증왕 때에 '사로', '서나벌', '서라벌', '서벌'(이 이름은 후에 '서울'이란 말로 변해, 이제 우리 나라의 수도 이름이 됨) 등으로 일컬어지던 이름이 '신라(新羅)'로 고쳐졌고, '거서한' '니사금' '마립간'(마리한) 등으로 일컬어지던 임금 이름이 '왕'(王)'으로 개칭되었듯이, 순수한 우리말 땅이름들이 한자 옷으로 입혀졌다.
경덕왕 때에 본디 백제 땅의 '진악산현(珍岳山縣)'이나 고구려 땅의 '모을동비(毛乙冬非)'라고 된 우리식 땅이름이 '석산현(石山縣)'이나 '철성군(鐵城郡) 식으로 바뀌었다. '진악산'은 그 본이름이 '돍뫼' 또는 '돌가뫼(돍아매)'로, '돌산'으로 풀면서 '석산(石山)'으로 바뀌었고, '모을동비'는 '털두미' 또는 '털동구리(텰동구레)'인 것을 '털(텰)'을 '철(鐵)'로 소리빌기로, '두미'나 '구레'는 '고을'과 같은 뜻으로 보아 뜻빌기로 하여 '철성(鐵城)'으로 취했다. 이들 땅이름은 뒤에 다시 '석성(石城)'(지금의 부여군 석성면)과 '철원'이 되었다.
'어느 곳'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어떠한 곳'이라는 지칭 형태를 이루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정리된 말로 불림을 받을 때, 이것은 땅이름으로 자리잡게 된다.
<보기> '벌 건너에 있는 마을'→'벌 건너 마을'→'건너 마을'→'건넛마을'→'건넛말'
이와 같은 식인데, 우리 땅이름 중에는 이러한 생성 과정을 거친 것이 매우 많다.
지금은 정부2청사 등의 관청과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선 과천시의 문원동에 개발 이전에 '두집메'라는 마을이 있었다. 피난 시절을 이 마을 근처 '홍촌말'(지금 종합청사가 들어선 곳)에서 보낸 나는, 이 마을(실상 마을이랄 것도 없지만)에 집이 3채 있는데도 '세집메'가 아니고, '두 집이 있는 곳'이란 뜻의 '두집메'인 것을 보고, 땅이름은 그 후의 상황이 변해도 본래의 것으로 이어가려는 끈질김이 있음을 실감하였다. 본래 시흥군 과천면 문원리였던 이 곳은 1970년대에 시가지 개발로 지형이 바뀌고, 마을들이 없어지고,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새술막', '생겻말'(향교말), '구리안', '찬우물' 같은 옛 마을들이 모두 없어져 이름까지 사라져 갔다.
이처럼 땅이름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새터말', '벌말', '밤나뭇골' 등의 토박이 땅이름들은 대개 '신촌'(新村) '평촌(坪村)', '율곡'(栗谷) 등으로 변질되거나 우리 입에서 멀어져 갔고, 태어나는 땅이름 역시 '성남(城南)', '동해시(東海市)', '왜관7리(倭館七里)'식으로 우리 토박이말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돼 가고 있다.
2. 우리 땅이름의 실태와 오류
국토가 변하면 땅이름도 변한다. '등마루'가 깎여 평지처럼 되면 이미 이 이름은 사람들 입에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이 근처에 새 마을이 들어서도 그 땅이름은 다시 우리 입으로 돌아오지 않고, 기껏해야 그 이름에 가까이 가는 한자 이름인 '등촌동(登村洞)' 식으로 된다.
해방된 지 60여 년. 우리 땅도 엄청나게 많이 변했다. 황해안에 많은 간척지가 생겨 해안선이 바뀌었고, 산이 깎여 평지가 되었는가 하면, 새 도시가 되어 아파트 숲으로 되면서 옛 지역을 가늠하기 어렵게 돠었고, 맞닿은 두 고을이 합쳐져 '동해시(東海市)'(묵호+북평=동해)처럼 되기도 했다.
특히 우리 토박이 ~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옛 이름이 우리 입에서 많이 멀어져 갔다.
경주 지역에서의 몇 예를 들어 보자.
* 탑말 塔洞
* 소티 孝峴洞
* 덕골 德洞
* 말골 馬洞
* 섶들 薪坪洞
* 진티 進峴洞
* 들말 坪洞
한자로 바뀌어 버린 이러한 이름들 중에는 그 글자 자체로는 뜻을 알기 힘든 땅이름들도 많게 되었다.
인구 증가에 따라 '금장9리', '봉천3동'식의 숫식 행정지명에 많이 나왔다. 이러한 숫자식 땅이름은 다리 이름이나 터널 이름에도 예와가 아니었다.
한강의 홍수나 하상 공사로 인해 '밤섬(栗島)', '저자도(楮子島)'는 없어져 버렸고, '여의도(汝矣島.너벌섬)'는 샛강이 좁아져, '부리도(浮里島)'나 '난지도(蘭之島)'는 육지와 이어져 이젠 섬 이름으로는 알맞지 않게 돼 버렸다. '부리도'는 '잠실동'이 있대서 서울시에서 뒤에 '잠실도'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나 그 섬이 없어짐에 따라 이름도 사라졌다.
방위식 땅이름도 문제가 있다.
서울의 '강동구(江東區)', '강서구(江西區)', '강남구(江南區)'는 모두 한강 남쪽에 있는데도 동.서.남의 방위를 넣어 지어 놓았다. 이들 구이름을 각기 옛 땅이름을 따서 강동구는 '위례구'(백제의 '위례성' 지역)로, 강서구는 '양천구'(옛날 경기도 양천현), 강남구는 '언주구'(옛날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로 했어야 했다. 지금도 양천구가 있지만, 옛날의 양천 지역은 그 지역이 아니라 지금의 강서구 일대이다.
부산과 대구에도 '동구(東區)', '서구(西區)', '남구(南區)', '북구(北區)' 등의 방위 땅이름이 있다. 더구나 부산에서 '남구'는 '영도구', '서구', '동구'보다도 오히려 북쪽이나 북동쪽에 있고, '동구'는 실상 부산 전체 지역으로 볼 때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데도 그런 땅이름을 붙여 혼동을 안겨 주고 있다.
3. 땅이름의 오르내림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며 살듯 땅이름들도 서로 경쟁해 간다. 그 경쟁은 지금도 계속 이어진다.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두 고을이 합쳐져 하나의 고을이 되면 두 고을 중 하나는 자연히 없어지거나 그 격이 낮춰진다.
① 부산과 동래의 경우
지금은 우리 나라의 두번째 큰 도시인 부산. 이 곳은 옛날엔 동래부(東萊府)라는 큰 고을에 속했던 하나의 포구, 즉 '부산포'였다. 조선시대에 동평현(東平縣)이었던 이 곳은 16세기 때 동래부에 속해 있었다.
'동래'라는 이름은 행정상으로 부산광역시 안에 '동래구'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동래군도 아니고 동래시도 아닌, 광역시 속의 하나의 구(區). 즉, '동래'라는 배 안에 있던 작은 '부산'은 점점 몸집을 불려 자기를 안고 있던 '동래'를 뱃속에 넣게 되었다. 다시 말해 동래부 속의 부산포가 부산시 속의 동래구로 된 것.
지금의 부산 동래구의 대부분이 옛날 동래부 또는 동래군 지역이었고, 수영구의 광안동, 망미동, 민락동 일대, 남구의 대연동 일대, 동구의 범일동 일대, 금정구의 범일동 일대, 부산진구의 당감동, 부전동 일대, 사상구의 감전동 괘법동 일대, 영도구의 동삼동 일대까지도 모두 옛날에 그 고을에 속했던 지역이었다.
② 대전과 회덕과 유성의 경우
지금의 대전도 이와 비슷하다.
대전의 원이름인 '한밭'은 '넓은 밭'이란 뜻. 이는 '밭'의 이름이라기보다는 마을 이름처럼 불려 온 하나의 작은 지역이었다. 고을이 아닌 작은 지역에 불과했던 한밭은 옛 지도나 지리지 등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19세기에 한때 지금의 충청도는 '공충도(公忠道)'였다. 공충도는 공주와 충주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 그 공충도에 속해 있던 지금의 대전 일대는 '회덕(懷德)' 고을이었다. 당시, 그 고을 안의 마을 한밭은 한자로 대전(大田)이 되면서 면이름을 거쳐 읍이름으로 되더니, 큰 시(市)가 되어 직할시(광역시)가 되어 주위의 유성(儒城), 회덕(懷德) 같은 고을들을 싸안았다.
한밭 일대는 고려시대엔 공주군 산내면(山內面)에 속했었다.
고종 32년에 회덕군에 편입되고, 1901년 경부선의 대전역이 생기면서 급속도로 발전해 갔다. 경부선은 애초엔 당시 충청도의 중요한 고을인 공주를 통과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계룡산 정기를 염려한 공주 유림들의 반대로 대전쪽으로 노선 방향을 바꾸었다.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시가 더욱 커져 '대전역'으로만 알려지기 시작했던 대전은 서서히 충청도의 중요 고을로 자리매김되어 갔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일제는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군면 폐합을 단행하면서 회덕군의 13개면과 진잠군의 3개면, 공주군의 일부, 연산군(논산) 두마면, 벌곡면의 일부를 합치면서 대전군을 신설한다. 대전군 속에는 12개 면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인 대전면은 1931년 읍제를 실시하면서 대전읍이 된다.
1932년 충남 도청이 공주에서 옮겨옴에 따라 더욱 발전한 대전은 그 3년 뒤에 대전부로 승격된다. 부(府)는 지금으로 치면 시(市)였으니 도시로까지 승급된 것. 당시 일부 지역은 대덕군에 편입된다. 대덕(大德)이란 이름은 '대전'의 '대'와 회덕'의 '회'를 취한 것이어서 사실상 몸만 나뉘었을 뿐 이름을 함께 나누어 가진 셈이었다. 인덕을 크게 베풀어서 착한 이웃을 만들어 나가는 곳으로 해석하게끔 된 지명이지만, 이 명칭은 1935년 행정제도 개편 때 대전 일부와 회덕군을 통합하여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광복 후인 1946년, 전국의 부(府)를 시(市)로 변경함에 따라 대전부는 대전시로 된다. 시에 속한 행정단위인 정(町)은 동(洞으)로 된다. 그 뒤로 구역 확장이 이루어져 대도시로 되고, 시를 둘러싸고 있던 대덕군까지 합해 직할시(광역시)가 되었다.
'대전'은 이처럼 놀랄 정도로 몸을 불렸다. 그 불린 몸 속에는 자신이 몸담았던 회덕구가 있고, 그 곁의 군이었던 유성(유성구)도 있다. '대전'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상전(?)이었던 고을들을 모두 삼켜 먹은 셈이다.
이처럼 하나의 땅이름은 사회 현상과 행정구역의 변화로 부침을 거듭한다.
③ 조치원과 연기군의 경우
대전 인근의 고을 중 잘 알려져 있는 곳이 조치원.
한반도의 허리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차령산줄기의 중간 허리 남쪽 평야 지대에 위치한 조치원은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이지만, 전에는 작은 역촌(驛村)에 불과했다. 조선시대에 여행객이 쉬어 가거나 말을 바꿔 탈 수 있게 해 주는 길손 쉼터가 있는 마을이었다.
조치원 일대는 넓은 평야 지역이어서 행정구역의 변화가 그 어느 곳보다도 심했다. 한때 청주 땅에 속하기도 했었고, 지금의 천안시 목천면인 목천(木川) 고을 감무(監務)의 영역이기도 했었다.
연기군은 본래 백제 '두잉지(豆仍只)'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연기(燕岐)'로 고쳐서 연산(戀山.문의)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그 후, 고려 현종 때 청주에 붙였고, 명종 때 감무를 두었다가 뒤에 목천 감무가 겸임하게 된다. 조선 태종 때 전의현(全義縣)과 합쳐서 전기현(全岐縣)으로 했다가 그 16년(1416)에 와서 다시 갈라서 현감을 두었고, 숙종 때 문의현(文義縣)에 들어갔다가 그 11년(1685)에 다시 현이 되고, 고종 32년(1895)에 다시 군으로 되어 7면을 관할하다가 일제 때인 1914년에 군면 폐합에 따라 지금과 거의 비슷한 행정구역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지금 연기군은 조치원읍과 여러 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행정중심 복합도시가 완성되면 관할 지역 변화와 함께 땅이름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조치원읍은 본래 연기군의 북쪽 지역이어서 북일면(北一面)이라 했다가 뒤에 북면(北面)이 되었던 곳이다.
일제 때에 조치원리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여 조치원면이 신설되고 인구 증가에 따라 1931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리(里)가 면이 되고 읍으로까지 된 것.
본래 연기군의 읍터는 지금의 조치원이 아니라 보통리 바로 남쪽의 남면 연기리(燕岐里)였다.
연기리에는 지금도 연기현 동헌의 터가 있는데, 느티나무가 여러 그루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일부나마 보여 주고 있다. 조선 태종 16년(1416)에 창건하였다는 연기향교도 남아 있고, '향교말(校村=교촌)'이라는 마을도 있다. 연기현의 옥(獄)터도 있고, 객사(客舍)터도 있다. 옛날 연기군의 중심지는 지금의 조치원이 아니라 남면의 보통리-연기리 일대였음을 알 수 있다.
④ 익산과 이리의 경우
전북 익산은 본래 조선왕 기준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배로 타고 와 마한이라 하였던 곳이다. 백제 시조 온조왕이 차지하여 금마저((金馬渚)로 하다가, 신라 경덕왕이 금마군으로 고치고, 고려 초에 전주에 붙였다가, 충혜왕 5년(1344)에 원나라 순제의 황후 기씨의 고향이어서 익주로 승격하였는데, 조선 태종 13년(1413)에 익산군으로 고쳤다.
익산은 일제 때인 1914년 4월 군면 폐합에 따라 여산군, 함열군, 용안군 등을 병합한다. 1931년 1931년 익산면이 이리읍으로 승격되면서 '이리'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리는 본래 옥야현의 지역으로서 야산 가운데 으슥하게 들어가 있어서 '솝리'라 하였던 곳. 하나의 동리 이름에 불과했던 것이 일약 읍이름으로까지 올라선 것. 호남선에서 전라선이 갈라지는 철도 교통의 요지, 인구가 많아진 이리는 1947년 이리시가 되어 '시(市)'로까지 올라선다. 이렇게 되면서 '익산'보다는 '이리'가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1995년 익산과 이리와 합해져 익산시로 되면서 잘 알려진 '이리'는 시 이름에서 빠지게 되었다. 마을 이름에서 시 이름으로까지 올라섰던 이리는 다시 아래로 떨어진 채 사람들의 입에만 남게 된 것이다.
⑤ 구미와 인동의 경우
지금의 경북 구미시 일대는 조선시대에 인동현(仁同郡)이라는 고을이 있던 곳이다. 인동장씨(張), 인동김씨(金), 인동양씨(楊), 인동유씨(柳,兪), 인동강씨(姜) 등의 관향이 바로 이 인동현이다.
신라 초에 사동화현(斯同火縣) 또는 수동현(壽同縣)이라 하다가 삼국통일 후에는 인동현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는 지금의 성주 땅인 경산부(京山府)와·약목현(若木縣) 등에 예속되었다가 조선 선조 때 인동부(仁同府)로 승격되었다. 1895년 인동군이 되었고, 1914년 군이 폐지되고 그 일부 지역은 칠곡군의 인동면이 되었다. 지금의 구미시 인의동(仁義洞)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고을이 중심이어서 아직도 이 곳에는 인동향교가 있고, 인동농협, 인동교(仁同橋), 인동장터, 인동성당 등도 있다.
인동군이었을 때 그 관할 아래에 상구미면과 하구미면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두 면이 통합되어 구미면을 형성하였는데, 이 때 인동군은 폐지되어 칠곡군에 병합되면서 면으로 떨어졌다.
1963년 구미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지만, 당시는 농업 중심의 한적한 시골 읍이었다. 그 뒤 1969년에 구미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국내 최대의 내륙공업기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78년 구미읍과 인동면이 통합, 구미시로 승격되어 군에서 분리되었고, 그 뒤 계속 인근지역을 편입하여 큰 도시로 발전해 가더니 1995년 1월 구미시와 선산군이 통합하여 도농 통합형인 현재의 구미시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옛날 인동 고을 속의 본마을(인동)은 구미시 속에 들어가 인의동(仁義洞)이란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다. 인동 속의 구미가 이제는 구미 속의 인동이 되어 버린 상황이 된 것이다.
⑥ 사천과 삼천포의 경우
지금은 삼천포시(三千浦市)라는 말이 없어졌지만, 이 고을은 본래 진주군의 지역으로서 문선면(文善面)이라 했던 곳이다. 고종 광무 10년(1906)에 사천군(泗川郡])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 구역 병합에 따라 전 고성군(固城郡) 일부을 병합하고, 1918년 11월 수남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삼천진(三千鎭)의 이름을 따서 삼천면이라 하다가, 1931년 11월 읍으로 승격되고, 1956년 7월 삼천포시로 승격하였다.
지금의 사천시는 진주만에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사천만의 양안에 걸쳐 있다. 신라 때에는 사수현(泗水縣)으로 고성군에 예속되었다가 조선 태종(1413)때 사천(泗川)이라 개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사천은 왜구의 주요 침입로여서 세종(1441년)때에 진을 설치하여 사천읍성을 쌓고 병마첨절제사를 두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선진리에 왜군이 왜성을 쌓고 농성하였으며 2차에 걸친 전투가 있었다. 1914년 일제의 부.군 폐지 분합에 따라 곤양면이 폐지되면서 서부면, 초량면, 소고면 등을 병합하여 11개 면이 되었다.
원래 구라량으로 불리는 포구이던 삼천포는 1909년 삼천포∼진주간 도로(지금의 3번 국도)가 개통되면서 진주의 관문으로 급성장하였다. 1931년 삼천면이 삼천포읍으로 승격되고, 1995년 5월 주민 투표에 의하여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다시 합하여 1읍 7면 10동의 행정구역을 가지게 되었다.
"자알 나가다가 왜 삼천포로 빠지니?"
이 속담처럼 사람들은 사천이란 이름보다는 삼천포라는 이름을 더 잘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원래 많이 이용하는 지역의 이름을 더 익히게 마련이어서 사천보다는 상대적으로 이용률이 높았던 삼천포가 더 널리 알려졌다. 유명해진 삼천포이지만, 어떻거나 사천 고을 속의 한 포구였다. 그러던 것이 크게 발전하여 시(市)가 되기까지 하였으나, 결국은 자기를 감싸고 있던 사천 고을에 시 이름을 빼앗기고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4. 성씨의 관향으로만 남은 옛 고을 이름
우리가 자신의 성씨를 말할 때, 관향까지 들어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관향이 바로 시조나 그 씨족의 세거지와 관련이 있는 고을의 옛 땅이름이다.
① 인동짱씨의 관향 인동(仁同)
인동은 인동장씨의 시조인 삼중대광공신호(三重大匡公神號) 장금용(張金用)이 나온 고장이다.
장씨는 각종 문헌에 약 4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30본 내외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외래 귀화씨족(歸化氏族)인 덕수장씨를 제외한 나머지 관향은 모두 안동장씨(安東張氏)를 대종으로 하는 동원 분파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 중에서는 인동장씨가 가장 많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는 '시조 장금용의 본성은 장씨(長氏)였는데 활을 잘 쏘아 궁(弓)자를 더하여 장(張)으로 성을 삼았다는 말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동 고을의 옛 이름은 사동화현(斯同火縣)인데, 이 이름은 학자들이 '똥벌'로 유추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려사 등의 옛 문헌들에는 인동은 고을의 행정구역 명칭이고 별호를 옥산(玉山)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옥산은 인동고을의 원이 사무를 본 관아가 있었던 인동의 중심지로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 구미시 인의동(仁義洞)이다.
인동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에 인동장씨(張) 외에 인동김씨, 인동양씨(楊), 인동유씨(柳,兪), 인동강씨(姜) 등이 있다. 이를 보면 인동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② 파평윤씨의 관향 파평(坡平)
파평은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파평면의 옛 지명이다.
파주는 본래 고구려 장수왕 때 파주사현이었는데 1398년 조선 태조 때 서원군(瑞原郡)과 파평현을 병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라 하였고, 1461년 파주목으로 승격하였다가 1895년 군이 되었다.
파주 고을의 옛 이름 파평은 학자들이 '뱃벌'로 유추하고 있다.
③ 김녕김씨의 관향 김녕(金寧)
김녕은 경남 김해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여 오다가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돠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그 후 문무왕이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었으나 경덕왕이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고쳤고,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 김해부(金海府)로 고쳐 임해(臨海), 금주(金州) 등으로 불렀으며, 1270년(원종 11) 방어사(防禦使) 김훤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 금주목 (金州牧), 김해부(金海府)로 개칭되었다. 조선 때 와서는 태종이 다시 도호부로 고쳤다가 세조 때 진(鎭)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에 군(郡)이 되었다.
김녕김씨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의 넷째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여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으며, 명종 때에는 조위총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을 김녕으로 하여 혈통을 이어 오다가 고려 말에 지명이 김해로 개칭되자 김해로 칭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로왕 계통의 김해김씨와 혼돈되어 김해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김씨는 후김(後金)으로 칭하다가 1865년(고종 2) 왕명에 의하여 김녕(金寧)으로 확정하였다.
'감녕'은 '검마을' 또는 '검나라'로 유추된다.
④ 순흥안씨의 관향 순흥(順興)
순흥 고을은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일대에 있던 마을이다.
순흥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에는 순흥안씨를 비롯해 순흥김씨, 순흥박씨 등이 있다.
⑤ 남평문씨의 관향 남평(南平)
남평현은 미동부리, 현웅, 오산, 영평 등으로 불리던 곳이다.
현재는 전남 나주시 일대로 본래 백제의 미동부리현인데, 신라 경덕왕이 현웅으로 고쳐 무주(광주)의 딸린 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 남평 또는 영평(永平)으로 고쳐서 나주에 붙이고,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는데, 공양왕 2년(1390)에 화순 감무가 겸하였다가 조선 태조 3년(1394)에 복구되고, 태종 13년(1413)에 예에 따라 현감이 되고,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었다. 일제 때인 1914년 나주군에 편입되면서 남평면으로 되었다. 남평은 현재 나주시 남평, 다도, 봉황, 금천, 산포의 5개 읍면과 광주시 광산구 본량동 일대의 지역이었다.
남평읍의 남평리는 아직도 사람들이 남평읍내라고 부른다. 남평읍 서산리 주막거리 남쪽에는 남평문씨 시조비가 있다.
⑥ 남양홍씨의 관향 남양(南陽)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한 동의 이름, 즉 남양동(南陽洞)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으나, 조선시대까지도 남향현(南陽縣)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을이었다.
지금 이 곳에는 남양향교가 있어 옛날에 고을 원님이 다스리던 한 고을이었음을 나타내어 주고 있다.
⑦ 문화유씨의 관향 문화(文化)
문화 고을은 고대 단군조선 때 당장경(唐藏京)이었는데 고구려 때에 이르러 궐구현(闕口縣)으로 고쳤다.
고려초기에 유주(儒州)로 고쳤더니 성종 때에 시령(始寧)으로 바뀌고 현종 9년(1018)에 풍주(豊州)에 예속시켰다가 예종 원년(1106)에 유주로 복구하여 감무를 두었다. 고종 46년 기미(1959)에 위사공신(衛社功臣) 류경(柳璥)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로 개칭하는 동시에 현으로 승격시켜 현령을 두었다.
조선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따라 현령과 훈도(訓導)를 각 1인씩 두었다. 광해군 10년(무오.1618)에 부로 승격시켰다가 곧바로 현으로 바뀌었다.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고, 일제 침탈 이후에 신천군(信川郡)에 병합되어 문화면이 되었다.
고을의 주산인 당장산은 구월산(九月山)이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삼성사를 지어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 3위를 모시고 향사하였다.
문화 고을 안악군, 남쪽은 신천군, 서쪽은 송화(松禾)와 은율(殷栗). 북쪽은 장연현(長連)이다. 문화 고을의 풍광을 읊은 제영 중에 조선의 문신 이초(李初)는 '인사는 기한이 있어 서로 바뀌는데, 계산(溪山)은 옛과 같이 스스로 맑도다.' 하였고 김처례(金處禮)는 '시냇가에 해가 기니 중천이 따사롭고, 하늘 끝에 구름이 열리니 월악이 기이하다.' 하였다.
⑧ 정식 지명에서 멀어진 그 밖의 성씨 관향들
성씨 관향에는 남아 있으나 이미 우리 입에서 멀어진 관향 지명들은 이 밖에도 많다.
여산송씨(礪山宋氏)의 관향 여산은 옛날에는 군(郡)이었으나 일제 때인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익산군의 한 면(面)이 되었다. 지금은 전북 익산시의 여산면이다. 지금도 여산면 여산리에 여산향교가 있다.
이처럼 군면 폐합에 따라 군이나 현(縣)이던 곳이 읍면으로 떨어지면서 그 격(格)이 낮아진 땅이름들은 무척 많다.
지금은 경북 포항시 남구로 들어간 연일(延日)도 옛날에 현이었던 곳이다. 읍이 되어 버린 이 곳은 연일정씨(延日鄭氏)의 관향으로 연일향교가 있다.
일반적으로 인월도유씨라고 말하는 기계유씨(杞溪兪氏)의 관향 기계도 큰 고을이었지만, 지금은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으로 남아 있다. 본래는 신라의 모혜현(芼兮縣))인데, 경덕왕 때 기계현으로 개명하였다.
은진송씨의 관향인 충남의 은진(恩津)도 군현이었으나 지금은 논산시 속의 은진면으로 남아 있고, 현풍곽씨의 관향인 경북의 현풍(玄風)도 군현이었으나 지금은 대구시 달성군 속의 현풍면으로 남아 있다.
반남박씨의 관향인 반남현(潘南縣)은 반남면이 되어 나주시 속으로 들어갔고, 한산이씨의 관향 한산(韓山)도 충남 서천군의 한 면으로 들어가 버렸으며 전의이씨의 관향 전의(全義)는 연기군의 한 면이 되었다.
양천(陽川)은 원래 한강 하류쪽의 한 지명으로, 원래 고구려 때의 제차파의현(齋次巴衣縣)이었는데,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공암현(孔岩縣)으로 고쳤다. 1310년에 양천현으로 개칭되어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 내려오다가 1914년 경기도 김포군에 흡수되었다. 지금은 서울시 강서구, 양천구 일대인데, 현재 양천향교가 강서구 가양동에 남아 있다.
풍천임씨(豊川任氏)의 관향 풍천은 황해도 송화군의 한 면으로,
청풍김씨(淸風金氏)의 관향 청풍은 충북 제천시의 한 면으로,
초계정씨(草溪鄭氏)의 관향 초계는 경남 합천군의 한 면으로,
벽진이씨(碧珍李氏)의 관향 벽진은 경북 성주군의 한 면으로,
영산신씨(靈山辛氏)의 관향 영산은 경남 창녕군의 한 면으로,
진보이씨(眞寶李氏)의 관향 진보는 경북 청송군의 한 면으로,
지명 변경으로 여흥민씨의 관향인 여흥(驪興)이란 지명은 아예 없어지다시피 했다.
여흥은 경기도 남동단에 위치한 여주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內斤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황효현(黃驍縣)으로 개명하여 기천군(沂川郡)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 초에 황려현(黃驪縣)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원주에 속하였다가 고종 때 영의(永義)로 개칭되었다.
1305년(충렬왕 31) 여흥군으로 승격한 후 조선 태종 때 음죽현(陰竹縣)을 북부를 편입하여 여흥부로 승격되면서 관할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변경되었다. 예종조에 천녕현(川寧縣)을 병합하여 여주목으로 하고 1501년 충주부의 관할하에 두었다가 1895년 충주부 여주군으로 칭하였고 1914년 경기도 여주군이 되었다.
능성(綾城)은 전라도 능주(綾州)의 옛 지명으로, 백제시대에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 또는 죽수부리군(竹樹夫里郡), 인부리군(仁夫里郡) 등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때 능성현이라 개칭되었고, 1913년에 능주면으로서 화순군에 편입되면서 '능성'이란 지명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여양진씨의 관향인 여양은 원래 백제시대의 사시량현(沙尸良縣)인데 또는 사라현(沙羅縣)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신량현(新良縣)으로 충청도 결성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여양현으로 개칭하고 감무를 두었다가 고려 현종 9년(1018)에 감무를 폐하고 홍주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명종 원년(1171)에 홍주군이 양광) 청주목에 속했다가 조선 태조 4년(1395)에 폐현되고 홍주군에 편입되었다. 홍주는 고종 32년(1895)에 홍주부가 되었다가 광무 원년(1897)에 다시 홍주군으로 되었고 일제 때인 1914년에 결성군(結城郡)과 병합하여 홍성군이 되었다. 옛 여양현은 지금의 충남 홍성군 장곡면 일대이다.
분성배씨(盆城裵氏)의 관향 분성도 현재의 지명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분성은 경남 위치한 김해의 고려 때 지명이었다. 본래 가락국이었는데 신라에 병합되어 법흥왕 때 금관국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 김해로 고쳤다. 고려 때 임해현, 금주, 김녕도호부가 되었다가 다시 김해로 고쳤다. 이렇게 되면서 '분성'이란 지명이 사라졌다.
탐진최씨(耽津崔氏)의 탐진은 전남 강진군에 속해 있던 옛 지명이었다. 본래 백제의 동음현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탐진현으로 고치고, 조선 1417년 도강현과 합하여 강진으로 고쳤으며, 1895년(고종32) 강진군이 되었다. 탐진은 현재 이 지역의 하천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상산김씨(商山金氏)의 관향 상산은 경북 상주의 옛 지명. 삼한시대에 진한의 영토였고, 신라 첨해왕 때 상주(上州)라 하였고 그 후 경덕왕이 상주(尙州)로 개칭하였다.
소위 후삼국(태봉국, 후백제, 신라) 때만 해도 상주를 배경으로 한 세력 각축 와중에서도 상주를 배경으로 하여 다른 가문(고려 말에 가문 만들어짐)은 관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고려 말에 관계에 진출을 한다는 것은 고려 때만 해도 상주 지역은 여전히 상산김씨의 수중에 있었고, 주도 세력이었다는 것이다. 경주의 옛 이름인 서라벌, 셔블이라는 명칭은 상주의 고대지명인 사량벌, 사벌과 연관이 있다. '사벌'이나 '서벌', '서라벌'은 모두 나라의 중심 지역을 나타내는 지명이었다.
지금 상주시에 쓴 상산초교 등 상산이란 옛 지명을 쓰는 기관이나 상점이 많다.
공자를 시조로 하는 곡부공씨(曲阜孔氏)의 관향 곡부는 우리 나라에 있지 않고, 중국 산뚱성에 있다.
5. 새 시설물로 인한 새 이름의 등장
우리의 땅 곳곳이 얼굴을 변하는 만큼 땅이름은 변하고 새로 생기기도 한다.
특히, 요즘에는 새로운 도시, 역, 도로, 다리, 공원 등이 생기면서 새 이름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 몇 예를 들어보자.
① 천안아산(역 이름)
철도가 새로 개설되면 역 이름이 나오게 된다. 경부고속철도의 개통으로 몇 개의 새 역 이름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 새롭게 등장한 것이 천안아산역이다. 2002년, 이 곳의 역 이름을 놓고 천안과 아산 두 고을이 서로 조금도 이름을 양보하지 않아 이와 같이 두 고을 이름을 붙인 역 이름이 나오고 말았다.
② 위례(신도시 이름)
원래 '송파 신도시'로 한동안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서울 송파구에만 속한 것이 아니어서 애초부터 잘못 된 것이었다.
이에, 이 신도시 지역 일부를 가지고 있던 경기도 성남시와 하남시가 신도시 이름에서 '송파'를 빼 달라고 요구해 왔다. 신도시 예정 지구로 들어간 지역이 송파구 부분은 38%에 불과하고, 성남시가 41%로 송파구 부분보다 넓으며, 하남시도 21%나 된다. 성남시와 하남시에서는 3개 지방자치 단체에 걸쳐 있는 이 지역을 '송파 신도시'란 명칭으로 계속 쓰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변경을 요구해 왔던 것.
의견 조율이 필요하다고 본 토지공사에서는 국민들의 의견을 참작하여 07년 4월 국민공모를 실시, 940여 건의 이름들을 접수하였다.
이어서 한국땅이름학회 등 전문 학자 11명으로 명칭공모 심사위원단(위원장 배우리)을 구성하였고, 5월 29일 오후 2시에 판교 신도시 홍보관에서 접수된 응모작 심사에서 위원장(배우리)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은 '위례(慰禮) 신도시'를 만장일치로 선정했다.
위례성은 백제 건국 초기의 도성(都城)으로 원래 한강 북쪽에 있었으나 온조왕 때에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의 이성(二聖)산성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역사 기록에는 위례성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는 이름이 함께 나오는데, 흔히 한강 북쪽에 처음 만든 왕성을 위례성 혹은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 한강 남쪽에 새로 지은 왕성은 하남위례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위례는 우리말 '울타리'를 한자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③ 인천(공항 이름)
인천 앞바다 영종도 섬을 중심으로 하는 서해안 일대에 마련된 이 공항은 한동안 영종공항으로 불려 왔다. 그러나, 인천 지역민들이 '인천공항'으로 해 달라고 강하게 요구하여 인천공항으로 확정하였다. 이 이름으로 결정되기 전까지는 '세종공항'으로 하자는 일부 의견도 강하게 대두되었었다.
④ 세종(행정중심 도시)
행정중심 복합도시를 줄여 '행복도시'로 불려 왔다. 현재 충남 연기군 남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이 일대는 새 도시가 완성되면 이 도시를 일컫는 새 이름이 필요하다 하여 국민들로부터 응모 작품을 받았고, 신사 끝에 '세종'이라는 이름으로 결정하였다.
새 도시가 완성되면 이 곳에 있는 모든 시설물(길, 공원, 다리등) 이름들도 모두 새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
⑤ 계룡(시 이름)
충남 계룡시는 2003년 9월 10일자로 그 역사가 시작된다. 계룡시로 승격되기 전에는 논산군 두마면 일대였는데 시로 승격되면서 남선면, 두마면, 금암동 등 1동 2면을 싸안게 되었다.
계룡시라는 이름은 이 곳에 있는 산인 계룡산(鷄龍山)의 이름을 딴 것이다.
⑥ 미사(다리 이름)
2008년 10월에 새로 생긴 다리 이름이다. 이 다리 이름으로 결정되기 전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춘천고속도로 개통으로 인해 새로 생긴 이 다리 이름을 놓고 다리 양쪽에 있는 남양주시와 하남시가 서로 자기네가 정해 놓은 이름으로 해 달라고 경기도에 요청해 왔는데, 워낙 두 주장이 강하여 도에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여 결국 국가(서울지방 국토관리청)에서 심의위원(위원장 배우리)을 구성해 투표로, 하남시에서 주장하는 '미사대교'로 결정하게 되었다. 남양주시에서 주장하는 다리 이름은 덕소대교였다.
⑦ 새만금(간천지 이름)
간척지를 개발함에 따라 새로운 땅이 생기고, 이에 따라 그 곳에 붙는 땅이름이 필요하게 되었다. 간척지 개발 초에는 만금(萬金)간척지구라고 했었다. 개발을 할 간척지가 넓어짐에 따라 새 이름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새만금'이다. '만금'은 이 근처 지명 '만경(萬頃)'과 '김제(金堤)'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다
⑥ 고을 통합에 따른 새 이름(예정)
전국의 각 지방 자치단체들이 앞다투어 인근의 고을(시-군)과 통합을 추진하거나 고려 중에 있는데, 이렇게 되면 이 중에서는 새로운 이름이 탄생될 가능성도 있다.
09년 9월 3일 현재 통합이 예정되어 있거나. 고려 중에 있는 고을들은 다음과 같다.
* 성남-하남-광주,
* 양주-동두천,
* 부산 중구-동구,
* 안산-시흥,
* 남양주-구리,
* 의정부-양주-동두천,
* 안양-의왕-군포,
* 안산-시흥,
* 목포-무안-신안,
* 마산-함안(또는 마산 창원 진주)
한 도시 안에서는 이미 몇 해 전부터 동(洞)의 통폐합이 추진되어 왔다.
행정동 통폐합은 서울에서 먼저 시범을 보였다. 서울시는 2007년 6월 행정동 주민센터 통합사업을 발표했는데, 이에 앞서 전국 최초로 마포구가 일부 동사무소를 폐지하고 ‘권역별 타운 조성사업’을 내놓았다. 50여 년 전에 도입된 행정동이 현실에 맞지 않게 주민 수 등에서 들쭉날쭉인 데다 민원서류의 인터넷 처리 등으로 통합행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통폐합 대상은 인구 2만명 미만 또는 면적 3㎢ 미만 동이었다. 당시 행정자치부가 이를 국책 사업으로 채택, 그해 7월부터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서울 말고는 추진 성과가 별로 좋지 않다. 09년 6월 말까지 전국에서 126개 동이 폐지됐으나 이 가운데 94곳이 서울지역의 동이다. 지방은 정부 지침상 통폐합 동이 많았지만 대부분 추진조차 하지 못했다.
서울 동대문구는 1955년 행정동제 시행 이후 전면 개편을 단행, 26개동을 14개동으로 거의 반이나 줄였다.
대전시는 08년 9월1일 통폐합 대상 16개동 가운데 10곳을 줄였다. 나머지 6개 동은 ‘재개발 사업과 아파트단지 조성으로 인구가 늘고 있다.’는 이유로 중도에 폐기됐다. 대전은 인구 밀도가 높지 않아 2만명 미만인 서울과 달리 1만명 미만 동을 대상으로 통폐합에 나섰다. 포항시는 지난 1월 죽도1·2동을 죽도동으로 합치는 등 8개 동을 4곳으로 통폐합했다.
광주광역시는 단 한 곳도 합치지 못했다. 동구 서석동과 남금동이 통폐합을 추진했으나 주민 반발 등으로 무산됐다.
경북 경산시는 지난해 4개 동을 2곳으로 줄이려다 시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되는 곤혹을 치렀다. 충북도는 정부의 특별교부세 제공을 내걸고 통폐합 신청을 받았으나, 아직 한 곳도 접수하지 않았다.
58개 동이 정부 지침상 통폐합 대상인 경남도는 마산시, 김해시, 거제시, 통영시 등 22곳이 통폐합 계획을 세우거나 추진에 나섰지만 실제로 성사된 곳은 전무한 실정이다.
행정동 통폐합의 시발지인 서울에서는 94개의 동이 없어졌다.
통합 뒤 후유증을 앓는 곳도 있다. 일부 지역은 적절한 동 이름을 찾지 못하거나 주민들이 동 이름 바꾸기를 꺼려 기존 동 이름을 모두 나열해 쓰고 있다.
종로구 효자동과 청운동은 ‘청운효자동’으로 불린다. 주민들이 서로 자기 동 이름을 고집하여 결국 지명을 합친 것.
충북 청주시 상당구에는 용담동과 명암동, 산성동을 합쳐 '용담명암산성동'’이라는 동명을 만들었다. 긴 이름 때문에 주민들은 앞 글자만 따 ‘용명산동’이라고 부른다.
신림13동과 같이 숫자식 동이름을 많이 가진 서울 관악구에서는 09년 9월부터 일부 동을 폐합하면서 많은 새 동이름들이 태어났다. 대표적인 달동네 중 한 곳인 관악구 신림동이 재개발 호재를 타고 동네 이미지를 바꾸려 '강남식'으로 이름을 바꾼 것. 신림본동부터 12동까지 새로운 동명을 부여했고, 신림4동은 신사동으로, 신림 6·10동은 삼성동으로 변경했다,
이 바람에 서울에는 은평구와 서초구에 이어 신사동만 3곳이 됐다. 물론 한자로는 다르다. 주민들이 조용한 단독주택가로 이름난 은평구 신사동과 부유촌인 강남구 신사동의 이름을 부러워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또 신림6동과 신림10동은 강남구에 이미 있는 삼성동으로, 봉천1동은 동작구와 같은 보라매동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때문에 강남구가 관악구를 상대로 ‘행정동 명칭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웃지 못할 일도 생겼다.
중구는 소공동을 명동에 합치는 문제로 계속 골머리를 앓고 있다. 소공동 주민과 구의원들은 백화점가 덕분에 쇼핑1번지로 소문난 곳인데 왜 없애려 하느냐고 반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강남구는 관악구의 동명 변경에 반대하며 최근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한 상태다.
6. 옛 사람들이 오묘하게 표기한 땅이름들
요즘 사람더러 우리말 '돌쇠놈'을 한자로 적어 놓으라고 하면 막막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놈'자에 해당하는 한자를 별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이를 '乭釗 '이라고 적고 '돌쇠놈'으로 읽었다. '돌'을 '돌(石)'의 뜻에 해당하는 '石'에 음을 나타내는 '乙'을 받쳐 '乭'로 적어 '돌'의 뜻과 음을 동시에 나타냈고, '노(老)'자에 한글 자모 ㅁ 모양의 口(입 구)를 받쳐 '놈'을 표기했다. 우리말(한글)과 한자의 조합인 셈이다.
① 우리식 한자의 등장
중국의 표음문자인 한자는 우리말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었다. 토박이 순 우리말이 많은 우리의 한국어와는 애초부터 좋은 짝이 되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한자는 우리말을 표기하기엔 완벽하지 못한 글이었다. 특히, 토박이 땅이름이나 사람이름을 적을 때 이를 적을 마땅한 한자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옛날 우리 선비들은 중국에서는 아예 없는 우리식의 한자를 만들어 냈다. 주로 한자와 우리 글자로 조합된 '한국식 한자'를 만든 것인데, 이러한 식으로 만들어진 글자들은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지금도 거의 볼 수 없는 것들이다.
乙(새 을)자를 써서 ㄹ의 음을 대신한 것이 많고, 口(입 구)자를 써서 ㅁ의 음을, 한글 자모의 ㅇ자를 써서 ㅇ의 소리값 음을 보태기도 했다. 이러한 식의 조합은 한글 창제 이후부터 더욱 많아진 것으로 추측된다. 한자와 한글의 자모를 짜 맞춘 글자들이 많이 나와 이용된 흔적이 문헌 등을 통해서 많이 발견된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한자는 역시 음의 체계가 다른 우리말을 제대로 표기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이러한 식의 조합 글자들이 적히고 읽힌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의적(義賊)으로 알려진 조선시대의 '임꺽정'을 어떻게 적었을까? 한자로 '林巨正'이라고 적기도 했지만, 이는 '임거정'으로 읽혀 원이름과 상당한 차이가 난다. 그러나, '꺽'자에 가까운 '걱'자를 만들어 적었다. '巨(거)'자에 한글 자모의 ㄱ자를 밑에 받쳐 ' '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쁜 애'란 뜻으로 '이뿐'이란 이름을 지었다면 이를 한자로 어떻게 적었을까? '入分(입분)'이나 '伊分(이분)'으로 적기도 했지만, '伊 (이뿐)'으로 써서 완전한 발음이 되게 했다. '分(분)'자를 된소리로 만들기 위해 그 글자에 된소리를 의미하는 '叱'자를 위나 아래쪽에 붙였다. '叱'은 '꾸짖음', '성을 냄'의 뜻이어서 '분'을 된소리로 발음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곱단'이란 이름을 가졌다는 어느 할머니 이름이 호적에는 어떻게 올라라가 있나 했더니 ' 丹'으로 나와 있었다. 원래의 한자에는 '곱'자가 없어 '高(고)'자에 ㅍ 발음에 근사한 '巴(파)'자를 받침으로 받쳐 ' (곱)'자를 만든 것이다.
'보름섬', '그믐섬'이란 이름의 섬이 있다. 이를 한자로 적어야 하는데, 적을 만한 '보름'의 '름'자나 '그믐'의 '믐'자가 없었다. '르'나 '므'자라도 있으면 거기에 ㅁ을 받쳐서라도 만들면 되었지만 그나마도 없었다. 그런데, 결국 연음(延音)을 이용해 이를 해결했다. '乶音島(볼음도)'와 '今音島(금음도)'로 적어 '보름섬'이나 '그믐섬'을 표기했다. '甫(보)'자에 우리글 ㄹ 모양의 乙을 받쳐 '볼'이라는 음을 우리식 한자로 만들어 적은 것도 참으로 재미있는 발상이다. '곰달내'라는 땅이름을 '고음월천(古音月川)'이나 '고음달내(古音達乃)'라고 표기한 것보다 더 앞선 생각이다.
'밖의 지역'이란 뜻의 땅이름인 '밧개'는 ' 怪(욋괴)'로 적었다. '外(외)'자에 '叱(질)'자를 받쳐 '밧(밖)'자를 만들어 낸 것.
우리말 '움막'은 '굴'의 뜻인 ' (굴바위 엄)'에 '움'에 근사한 음을 가진 '音(음)'자를 넣어 '움'으로 읽도록 하고, '幕(막)'자를 붙여 표기했다.
한자로의 표음이 불가능한 '갓', '것', '곱', '넙', '놀', '놈', '늣(늦)', '댐', '덜', '덩', '둘', '둥', '며', '묠', '볼', '섬', '얍', '잘', '줄', '할' 등의 글자도 한자와 우리 한글의 자모를 짜맞추어 완벽하게 만들어 냈다. 일부 한자의 불가능한 표음 기능을 받쳐 주기까지 하면서 어느 음이나 표현을 가능하게 한 한글은 고금을 통해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글자였다.
② 우리식 글자(국자)의 몇 예
우리 나라에서 만든 대부분의 한자는 우리말을 음(音) 그대로 적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畓(답 논))은 우리말은 아니나 논은 곧 물밭(水田)이란 생각에서 만든 글자로 음 '답'은 이와 비슷한 글자인 沓(답 유창하다)에서 따온 것이다.
垈(대 터)와 媤(시 시집)은 형성문자 형식으로 만든 글자. 이 말들은 원래 우리말인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倻(야)는 고유명사 가야(伽倻)를 표기하기 위해 만들 글자. 가야는 우리말 지명. 그래서 표기법도 다양하다.
가야(加耶, 伽耶, 伽倻), 가라(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구야(狗邪, 拘邪), 임나(任那).
여기서 倻는 불교 관련 음역 글자인 伽와 마찬가지 원리(人이 부수인 형성자)로 글자를 만들었기 때문인 듯.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중이었으니 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乭(돌)은 이름에서 쓰는 글자로 한국어 돌을 한자로 옮긴 것.
재미있는 것은 石으로 뜻을 나타내고 乙로 'ㄹ' 받침을 나타낸다는 것(훈+乙). 乙의 발음이 ㄹ받침을 가지고 있고 또 글자 모양도 ㄹ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 글자를 썼다.
이 방식의 글자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미지 참조)
(入+乙)들, (文+乙)글, (米+乙)쌀, (角+乙)뿔, (浮+乙)뜰, (擧+乙)
乶(볼)은 甫라는 글자에 ㄹ 받침을 나타내는 乙을 붙여 썼다(음+乙).
이 규칙을 따라는 것이 무척 많은데,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할 , 둘 , 갈乫, 갈 , 걸 , 묠 , 볼乶, 살乷, 살 , 솔 , 솔 , 얼 (※을-으에 해당하는 글자가 없어 비슷한 於 응용), 절 (정에서 받침 ㅇ이 빠짐), 줄 , 잘 , 굴 , 톨 , 살乷, 올 , 돌(冬+乙), 갈乫, 갈 , 놀 , 놀 , 율 , 솔 , 솔 , 놀 , 놀 , 톨 , 둘 , 올 , 울亐, 울 , 길(其+乙), 굴 , 굴 , , 펼(坪+乙 ※평에서 받침 ㅇ이 빠짐), 빌(非+乙), 솔 , 솔 , 솔(松+乙 ※송에서 ㅇ이 빠짐), 홀(呼+乙), 말(馬+乙), 설 등.
임꺽정의 꺽 또는 걱( )은 巨 밑에 받침으로 ㄱ을 붙여서 나타냈다. 斗 밑에 ㄱ 하면 둑자가 된다.
엇시조의 엇(?)은 於 밑에 ㄷ, ㅅ, ㅈ, ㅊ, ㅌ(모두 대표음은 ㄷ) 받침을 뜻하는 叱을 붙여서 썼다.
이 방식도 상당히 쓰였다. 예: 굿 , 팟 , 끝唜(귿-끝을 나타내는 한자 末에 ㄷ음으로 끝남을 표시하는 叱. '말'도 이 글자를 씀), 싯(始+叱. ※비롯시始자에 ㅅ받침으로 끝남을 표시하는 叱), 짓 (직에서 받침 ㄱ이 빠짐), 잣 , 씻(種+叱)씻 또는 씨, 곳 (※꽃)
ㅂ 받침은 巴 또는 邑을 밑에 써서 나타냈다. 그래서 (高+巴)곱, (沙+邑) 삽 삽사리
老 밑에 ㅁ 받침을 붙이면 노+ㅁ=놈이 된다.
斗 밑에 ㅇ 받침을 붙이면 두+ㅇ=둥이 된다.
일부 한자는 중국에서 만들어졌으나 우리나라 문서에서 고유한 뜻을 부여한 경우가 있다. 太는 콩이란 뜻으로(음은 태), 印은 끝이란 뜻으로(음도 끝) 쓰인 게 그 예. 釗(소 힘쓰다, 깎다)는 사람 이름에서 한국어 쇠를 적는 데 썼다. 뜻을 나타내는 金이 부수로 쓰였고 또 소는 쇠와 발음이 비슷해서이다. 남?(남 말소리)는 한국에서 남자 형제를 가리킨다.
또, 이두에 쓰는 한자가 있다. ?는 '(공부)하며(爲?)'의 '며'란 음을 표기하는데 썼다. 이 글자는 ?(미 彌의 동자)와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이 글자를 변형해 만들어진 글자죠. 뿐 , 뿐 은 우리말 '뿐'을 나타낸다. /// (배우리 글)
--------------------------
배우리 회장(한국땅이름학회)
-국가지명위원회 지명위원-
-서울대학교 고운이름 자랑하기 심사위원 (81~83년)
-1980년대 초부터 지명(땅이름) 연구 활동 (84년 한국땅이름학회 창립. 회장 역임)
-서울시 교통연수원 교수 (88.8~현재까지 근 20년간 근속) ※ 최근 사직
-1997년부터 전국 도로명 제정 작업 참여(행정자치부 추진)
(전국 각 지역 지방 단체 추진 길이름 제정 및 자문)
-1970년부터 이름짓기 활동 (상호 및 인명) 작명 실적 1만 여 개
(하나은행, 한솔제지, 웅진그룹 등 작명 및 자문)
- 연세대학교 사회교육원 '땅이름 연구' 과정 주임(전)
- 국토지리정보원 중앙지명위원 (현재)
-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현재)
- 한국 자유기고가협회 회장 (현재)
<저서>
'고운이름 한글이름'(1984.4.10) -해냄
'지명 유래집' (공저) (1987.12.16) -국립지리원
'아버지의 한마디'(공저) (1987.12.25) -집현전
'과천 향토사' (지명 분야)' (1993.12.16) -과천문화원
'연천 향토사' (지명 분야 감수) (1995.12) -연천문화원
'담양고을 땅이름' (2001.12) -담양문화원
'땅이야기'(1996.1.31) -한국토지공사
'우리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① (1994.4.25) -토담
'우리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② (1994.5.25) -토담
'사전따로 말따로'(1994.11.5) -토담
'글동산 말동네'(1996.5.18) -해난터
'배우리의 땅이름 연구'(1997.9.5) -연세대 사회교육원 땅이름 연구반
'내고향 문화유산을 찾아서'(예언성 땅이름 부분) (1998.12.20) -한국토지공사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2006.3.10) -이가서
'고운말우리말 고운이름 한글이름(2006.10.18)-자유로운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