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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 일기를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목양 일기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어느 아침 일찍 성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소리는 대개 가라앉아 있고 또 좀 떨리는 목소리였어요. 4년간 목회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보통 이런 목소리와 이런 톤이면 집에 뭐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부모님에게 문제가 있거나 어쨌든 문제가 있는 경우 이렇게 전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근데 이 집은 좀 달랐어요. 하여튼 요지는 이런 거예요. 그동안 함께 했던 강아지가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는 거예요. 기독교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운명하셨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그래서 그냥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는 용어로 표현을 했어요.
성도님이 매달 강아지에 들어가는 사료비가 있었대요. 근데 이 강아지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나니까 사료비가 들지 않게 된 거잖아요. 그래서 고민이 되더래요. 이거를 어떻게 할까?
저희집에도 개가 있어요. 달마시안이라고. 큰 개도 있고 또 조그마한 개들도 있어서 이번에 새끼를 4마리 낳아서 집에 하여튼 개들이 바글바글해요. 시골집에 가면 저도 개랑 되게 친숙하고 동물과 어려서 많이 키우고 자라서 가족 같지는 않지만 거의 거기에 준하는 느낌이 저 여기에도 있는데 요즘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저보다는 훨씬 더 이 동물에 대한 사랑이 성도들이나 일반인들이나 훨씬 이렇게 깊은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그런 시대이기도 합니다.
강아지를 추억하고 싶긴 한데 어떻게 추억할까 고민이 되신 거예요. 이분이 그래서 목사님 제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매달 강아지 사료가 한 3만 원 정도 들었는데 그것을 선교 헌금으로 하겠다 이렇게 원래는 이렇게 액수를 밝히지 않으려고 했는데 제가 밝혔어요. 선교헌금을 하겠다고 이렇게 전화가 오셨어요.
되게 기쁘기도 하고 생각이 좀 복잡하기도 하고 강아지가 하는 선교 헌금 제가 목회하면서 처음 받아보는 선교 헌금 같아요.
어쨌든 올해는 아마 선교의 원년이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강아지도 선교에 헌금하는데 하나님 우리 교회를 얼마나 축복하시겠어요. 그래서 강아지 선교 헌금이 올해 시작이 되었습니다.
동물에 대한 애정이 정말 남다른 시대예요. 그래서 강단에서다 이 동물에 대한 말을 함부로 하는 게 되게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말과 행동이 차별처럼 느껴지기 때문인 거예요. 차별 오늘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하는데 차별은 되게 예민한 주제예요. 그래서 이거는 설교를 잘해도 본전 찾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제가 다른 내용들을 가서 더 이렇게 더 할까 싶어서 그냥 본문 중심에 본문에 기록된 내용 한정 안에서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려고 해요. 그런데 오히려 이것이 역차별을 기독교인들에 대한 역차별을 가져온다고 해서 많은 논의와 논쟁과 또 싸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함부로 이런 것을 말하기 되게 어려운 것은 교회가 마치 차별하는 집단처럼 실은 교회는 그런 공간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누구 어느 공동체보다도 가난하고 세상에 연약한 이들을 많이 사랑하는 공동체가 교회인데 우리 용어를 잘못 쓰고 표현을 잘못하는 것 때문에 교회가 차별하는 공동체처럼 느껴질까 되게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앞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냥 오늘은 차별에 대한 이야기긴 하지만 본문에 한정되어서 제가 함께 나누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1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우리 1절 한번 같이 읽습니다. 시작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은 개혁 개정판이에요. 개혁 개정판에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돼 있지만 개혁 개정의 이전 판하고 개혁 한글판에 보면 차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을 외모로 체하지 말라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차별이라는 단어는 외모로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보다는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에 훨씬 더 가까운 말씀인 거예요. 말씀의 요지는 이거예요. 사람을 외적인 것으로 외모나 외적인 환경이나 그리고 얼굴로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외모로 외적인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게 가장 쉬운 일이기 때문인 거예요. 아무 노력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우리는 그냥 사람을 외적인 것으로 외모로 외적인 환경으로 조건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더 주의하고 더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가장 오해하기 쉬운 판단의 수단이에요. 외모로 판단하는 것 외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것 그래서 많이 주의하고 조심해야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고 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외모로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쉬운 판단의 수단이기 때문에 오해를 만들기가 가장 쉬운 판단이기도 해요.
사람들은 외모로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데 되게 익숙해졌어요. 익숙해졌어요. 그 일반적인 거라는 거예요. 여러분이나 저나 사람을 보면 그냥 첫눈에 외적인 것으로 판단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너무 쉬운 길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잘못할 수도 있고 그리고 너무 쉬운 길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상처를 주고 누구에게나 상처를 가둘 수 있기 때문에 외적인 조건으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을 주의하고 조심해야 됩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낯설거나 가끔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무 흔한 일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외적인 조건이잖아요.
저는 옷을 보고 이제 그 옷이 좋은 브랜드인지 아닌지 잘 판단하기 어려워요. 저는 신발을 봐도 이게 비싼 신발인지 그렇지 않은지 잘 몰라요.
그런데 그것을 사회에 본 사람들은 보는 순간 이 사람이 돈이 많은지 돈이 적은지 금방 알아요. 심지어 돈 많은 척 흉내를 내는지 진짜 돈이 많은지도 금방 판가름이 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보는 데 익숙해져 있고 그런 판단 능력을 나름대로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보면 외모로 외적인 환경으로 성도를 판단하는 일이 아주 흔하게 일어납니다.
제가 있었던 교회 중에 하나인데 이 교회는 되게 부유한 동네에 있었어요. 장로님들도 큰 기업의 사장 지금으로 말하면 그 기업이 어떤 기업인지 아는 정도의 사장이거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대학의 교수이거나 아니면 공공기관의 장이거나 주로 이런 분들이 아니면 정말 교회가 옛날부터 한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겨오거나 보통 이런 분들이 장로님이 되는 경우가 일반이었어요.
이 교회는 정말 그분들과 너무 다른 직급 직종을 가진 누가 봐도 비교되는 직종을 가진 장로님이 한 분 계셨어요. 저는 그게 너무 보기가 좋았어요. 만약에 그 교회가 그 교회 당회가 정말 유명한 대학만 나오고 유명한 회사를 다니는 사람만 모여 있었다면 저는 약간 존경심이 떨어졌을 텐데 감사하게도 그 교회는 그렇지 않은 직분을 가진 사람들도 당회에서 함께 논의를 하고 또 장로가 될 수 있는 그런 교회였어요.
저는 이것이 바른 교회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교회가 외적인 환경으로 사람을 뽑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교역자 시절 오해를 엄청 받았습니다. 제가 좀 조숙해서 담임 목사님과 같이 가도 제가 담임이라는 거예요. 담임이랑 안 가도 제가 담임이고 담임과 가도 제가 담임인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시고 담임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어요. 분명히 자기가 담임으로 왔는데 물론 교회가 아주 작은 교회는 아니어서 성도들이 담임을 잘 모르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이제 10장을 가도 말씀드렸던 거는 제 앞에만 영수증이 와요. 보통 담임 목회자에게 영수증이 가는 게 정상인데 항상 부목사인 저한테 영수증이 왔습니다. 저는 외적으로 되게 좀 부하게 보였던 것 같아요.
공장을 다닐 때도 정말 힘들어서 공장을 다녔는데 사장 아들이라고 잘 안 놀아주고 무슨 일을 해도 저는 그냥 부자인데 그냥 가난을 체험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었어요. 얼굴에 약간 붓기도 있고 또 지금은 조금 까무잡잡했지만 훨씬 더 이렇게 하얘서 아마 그렇게 외연적으로 보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외모로 저를 판단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저는 더 어려운 일, 마음에 속상한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쉽게 외모로 외적인 것으로 사람을 판단해요. 예수님도 외모로 사람들을 판단했어요.
여러분 어떻게 구원자와 메시아를 그리고 그리스도를 창조주를 외모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능력으로 판단이 불가능한 분이에요. 우리의 지혜를 아무리 많이 모아도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예수님은 판단 불가예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조차도 외형적인 조건을 가지고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흠모할 것이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그분은 인류의 구원자였어요. 사람들은 흠모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예수님을 치부했지만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너무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잘못된 일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7장 52절을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시작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과 여보라 갈릴리에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리라.
바리새인들은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갈릴리 출신이신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럼 이 사람들은 메시아가 어디서 난다고 생각했을까요? 바리새인들, 사도, 유괴인들, 유대인의 장로들, 그리고 공이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이 살던 마을인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셨죠. 그러나 갈릴리에 자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출생 후로 알았어요. 그래서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따랐을 때, 메시아로 따랐을 때 그것을 부인하고 부정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외모로 차별하는데 여러분과 저는 쉽게 사람을 외모로 차별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주의하고 더 조심해야 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물질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난과 부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을 금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을 대할 때 동일한 기준으로 대하라는 거예요.
되게 어려운 일이죠. 동일한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라. 야고보 사도는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냐 하면 본문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믿는 여러분과 제가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이 너무 영광스러운 곳이어서 그 믿음 안에서는 차별적인 사랑이 나올 수 없다는 거예요.
이게 야고보 사도의 요지예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너무 고귀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워서 우리가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우리 안에서 차별이 나올 수 없다는 거예요. 차별이 나온다 하더라도 곧 고쳐질 것이고, 차별이 나온다 하더라도 곧 회개하고 돌이키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차별을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찮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에서 차별하는 사랑이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과 제가 갖고 있는 이 믿음이 하찮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너무 고귀한 거라서 이 고귀한 믿음에서는 차별하는 특별히 외모로 가난과 부로 사람을 차별하는 사랑이 절대로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은 우리의 믿음에서 나올 수 있지만 차별하는 마음은 우리의 믿음에서 나올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긍휼로 대하고 차별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과 제가 믿음 안에 바로 서 있고 온전히 서 있다면 우리의 믿음에서 차별이 나올 수 없다는 거예요. 물론 우리가 죄인이고 늘 범죄하고 살아서 잠깐 차별적인 언행을 하고 언사를 할지 모르지만 곧바로 회개하고 사과하고 돌이키게 된다는 거예요.
그만큼 우리가 가진 믿음, 여러분과 제 안에 있는 이 믿음에서는 차별하는 사랑이 나올 수 없고 오히려 긍휼의 사랑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차별이 있다는 건 좀 기분 나쁘게 말하면 우리의 믿음 어딘가에 문제가 생겼다는 거죠. 지금 내가 차별하는 관점으로 사람을 대하고 있다면 특별히 가난과 부로 사람을 차별하고 있다면 지금 내 믿음의 어딘가에는 문제가 생겼다는 겁니다.
야고보 사도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이나라 부한 사람이나 동일하게 되라.
가난한 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부한 자들을 멸시하는 태도도 갖지 말고, 반대로 부한 자들을 존귀하게 여기고,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는 태도도 갖지 말라는 거예요. 두 가지 태도가 다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세상은 차별을 논할 때 가난한 사람들은 귀하게 여기고, 부한 자들에 대해서는 착취자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가난과 부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을 교회 안에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존귀하게 여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남루하다는 말은 어떤 의미냐 하면 더러운 값산 초라하다는 의미입니다. 남는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들도 아름다운 옷을 입은 부자와 차별하지 말라는 거예요.
여러분 야고보는 여기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예요. 이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어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떠난 예루살렘 교회를 섬겼던 지도자입니다.
근데 왜 이 야고보가 가난과 부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야고보서를 기록했을까요?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 안에 예루살렘 교회가 어떤 교회예요? 초대교회의 어머니 교회 같은 교회잖아요. 이 어머니 같은 교회에서 지금은 가난과 부의 문제로 차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을 야고보가 발견한 거예요.
예루살렘 교회 안에 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을까 왜 교회가 교회답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라고 추적해 봤더니 그 안에는 가난과 부,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문제가 예루살렘 교회에 있었고, 이 문제로 시작해서 교회 안에 많은 문제가 만들어졌다고 야고보는 판단했던 거예요. 그래서 가난과 부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차별은 교회의 본질을 해치고 깨는 일이에요. 차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극도로 차별을 경계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차별을 방치하면 어느 순간 이 차별이 교회를 파괴하는 행위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인 거죠.
여러분 잘못된 것을 그냥 방치하면 언젠간 그것은 다시 우리에게 위협적인 것으로 다가와요. 가정에 잘못된 것을 방치하면 어느 순간 그 잘못된 것이 가정을 위협하는 것으로 변하고요. 교회 안에 잘못된 것을 방치하면 어느 순간 그것은 교회를 위협하는 것으로 바뀌어서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거예요. 야고보 사도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차별을 극도로 조심하고 극도로 경계시키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차별에 되게 길들여져 있습니다. 부자 앞에서의 행동과 가난한 자 앞에서의 행동이 달라요. 왜 이래요? 목사님 저는 정말 사랑 차별을 하지 않아요. 목사님 제가 가난한데 제가 사람을 차별할까요? 정작 이렇게 말하는 성도 앞에 부자가 나타나면 가난한 자와 다른 모습으로 대하는 이상한 모습이 만들어져요.
왜 그럴까요? 이미 길들여져 있는 거예요. 우리는 어려서부터 차별에 익숙해져 살아왔어요. 학창 시절도 그런 차별을 경험해 살아왔고, 또 직장에서도 차별을 경험하며 살아왔고, 또 사람들과 교재와 만남 속에서도 차별을 경험하고 살았기 때문에 내가 경험한 이 차별을 그대로 세상에 돌려주는 거예요.
노력하지 않으면 차별은 멈출 수 없어요. 그냥 우리가 말씀을 몇 번 듣고 성경 공부 몇 번 한다고 해서 차별이 멈춰지지 않아요. 차별하지 않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그래서 아무리 우리가 입으로 나는 차별하지 않습니다고 말하지만 정작 정말 부자가 아니면 정말 권력이 높은 사람이 우리 앞에 오면 행동이 다른 게 금방 보여요. 금방 보여요. 이게 차별인 거죠. 따지고 보면 가난한 사람 앞에서도 동일한 행동을 취해야 되는데 우리가 안 그래요.
여러분 저도 안 그래요. 고개 숨기는 각도가 달라지더라고요. 사람이 그만큼 간사하고 차별에 길들여져 있는 거예요. 정말 유명한 사람들이 오면 말에 공손함이 달라지고요. 허리 굽히는 태도가 달라져요. 그리고 식탁에서 예절이 달라지고요. 사진을 찍을 때도 달라져요. 어떻든 위치를 그 사람을 가운데 두려고 하잖아요. 너무 익숙했어요.
여러분과 저는 이미 차별적인 문화에 아주 익숙해져 와서 그런 차별에 대해서 저항하는 게 아주 어렵습니다. 학벌이나 배경이 좋은 사람과 학벌이나 배경이 없는 사람 앞에서의 행동이 다릅니다. 어떤 차를 탔느냐에 따라서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제가 차를 한 2년간 차에 기름을 넣었다고 그랬잖아요. 지금은 워낙 좋은 차가 많아서 지금은 아니겠지만 그때는 좋은 차가 오면 인사하는 각도가 달라져요. 사람이 정말 간사해요. 들어오면 아저씨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사하고요. 정말 그 당시에 좋은 차들이 오면 고개 각도가 달라져요. 왜냐하면 그렇게 인사하면 가끔 뭐가 생기기도 하거든 사람은 그냥 자라면서부터 차별에 익숙해져 살아가요. 그래서 이것을 멈추는 것 이걸 끊는 것이 되게 어렵고 아무 생각 없이 교회 안에서도 사람을 차별하면서 살게 되고, 어쩌면 여러분이 제가 여러분을 차별하는 것도 봤을 수도 있어요. 보여지는 거잖아요. 말투가 다른데 인사하는 각도가 다른데 그만큼 나나 여러분이라 차별의 노출되어 살아왔다는 의미입니다.
보통은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부자를 차별하기도 합니다. 그것도 차별이에요.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부자와 가진 자를 차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도 차별입니다. 외모로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취한다는 것을 그것은 차별한다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편해도 차별의 일종이에요.
무관심보다 더 무서운 것이 편애예요. 자녀들도 우리가 똑같이 사랑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반드시 편애를 하게 됩니다. 문제는 편애를 받고 자란 자녀들은 그 자녀들의 삶이 망쳐진다는 거예요.
우리는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는 차별이고 편애하는 사랑을 자녀들이 하고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향한 편애가 성도의 삶과 교회를 망치고, 부하들을 향한 편애가 종업원의 삶과 회사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차별의 문제를 다루면서 외모 외적인 접근을 가장 언급하는 것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너무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노력하지 않고 가만히 둬도 그냥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노력이 필요가 없어요. 가만히 있어도 그냥 그렇게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모로 외형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 사회적으로도 차별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쏟아부어지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 위해서 교회가 엄청나게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차별하지 않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차별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문제는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차별을 죄라고 하고 있어요. 우리는 차별을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차별을 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차별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차별을 죄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성경은 분명하게 차별을 하는 것이 죄래요. 차별이 죄일 수도 있고, 차별하는 것 때문에 죄를 지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차별하지 않기 위해서 조심해야 됩니다.
사랑은 편견을 이기고 긍휼은 심판을 이깁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외모로 취하지 않는 사랑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긍휼히 여기는 시선으로 서로를 대하는 사랑이 우리에게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야고보 사도의 말을 요약하면 이런 거예요. 우리 자신이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것처럼 말도 하고 행동도 하라는 거예요. 내가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자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는 거예요. 내가 차별한 것 때문에 내가 언제든지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말하고 행동할 것을 야고보가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을 남에게 적용하지 말고 자기에게 적용하라는 거예요. 심판받을 각오로 말도 하고 행동을 하라는 거예요.
우리 남이 잘못된 것을 정제하고 판단하고 심판하잖아요. 근데 야고보는 그게 아니라 너희가 너희 스스로 심판받을 각오로 너희가 말하고 행동하고 조심하라는 거예요. 그래야 긍휼의 시선이 사랑의 시선이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내가 곧 하나님께 심판받을 자유처럼 내가 내 잘못과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 대상자가 된 것처럼 그렇게 여기고 자기를 이웃을 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당신보다 더 큰 심판의 심판 아래 놓여져 있다는 이런 관점에서 이웃을 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마음에서 우리 마음에서 사랑이 나오고 긍휼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랑과 긍휼은 심판을 이기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과 긍휼이라는 무기는 가장 무능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여기서 한 두세 줄은 되게 좀 까다롭고 이야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말씀이기도 하고, 그래서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잘 한번 들어보십시오.
사랑과 긍휼이라는 무기는 가장 무능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지니기 어려운 성품들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가장 하찮은 것으로 천국의 부활을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삶으로는 천국을 차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게 어떤 의미냐 하면 가장 보잘 것 없는 것 하찮은 것 이것을 천국의 부로 삼았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천국의 삶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했던 거예요.
우리는 대개 사랑과 공유를 하찮게 여겨요. 함부로 취급해요. 근데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사랑과 긍휼은 너무 고귀해요. 우리가 하찮게 여길 뿐이지 여러분 우리는 사랑을 되게 쉽게 생각하고 쉽게 말하고 쉽게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아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사랑과 긍휼이라는 이 주제들 이 단어들 이 성품들은 너무 고귀해서 정말 온전한 마음이나 온전한 신앙이 아니면 여기에 접근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는 일이 너무 어렵다는 거예요. 그래서 함부로 사람들이 이 천국의 부활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찮게 여기는 것들을 천국의 귀한 것으로 삼아 놓으셨다는 겁니다.
어렵지만 이해가 되죠. 우리가 하찮게 여긴 것을 하나님이 천국의 부하로 삼아 놨어요. 그래서 아무나 이 천국의 부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놨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는 많은 것들 대부분 하찮게 여기는 것들이 많아요. 모두가 다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어요. 그래서 이 천국의 부활을 제대로 느끼거나 제대로 알거나 제대로 간직한 사람이 교회에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 사랑과 긍휼이라는 이것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사랑과 긍휼이 여러분 안에 제 안에 언제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성경은 순종하는 삶 특별히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우리 안의 사랑과 그리고 국유를 만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 안에 사랑의 성품이 만들어져요.. 그리고 이 사랑의 성품은 사람을 결국 차별하지 않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성품이 아니고는 세상을 동일하게 사랑 없어요. 여러분이 그동안 배운 학습돼온 학습이나 이런 것으로는 절대로 세상을 동일하게 사랑할 수 없어요.
근데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에게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주시고 이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가 차별하지 않고 성도들을 또 가난한 자와 구한 자들을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과 긍휼이 만들어지는 길이 하나가 더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 앞에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사랑과 긍휼을 만든다면 말씀에 순종하는 또 구체적인 순종이 사랑과 긍휼을 만들어내요.
이렇게 만들어낸 사랑과 긍휼로 만들어진 사랑과 긍휼은 사람을 차별하게 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차별하지 않는 사랑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차별하지 않는 사랑은 만들어질 수 없어요. 우리의 순종함으로 사랑과 긍휼이 만들어지고 이 사랑과 긍휼은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게 합니다.
이제 말씀을 좀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외모로 외적인 것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되지만 기독교인들이 성도들이 꼭 조심해야 될 게 한 가지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분별이에요. 차별하지는 말아야지만 분별은 해야 돼요.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되지만 구분은 해야 돼요. 이게 악인지 이게 선인지 반기독교적인지 구분은 구별은 분별은 해야 된다는 거예요.
차별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고 하면서 그 안에 반기독교적인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경계하고 주의하고 조심해야 된다는 거예요. 교회 안에 차별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자고 하면서 정작 말씀을 떠나는 행위와 말씀을 벗어난 어떤 결단과 결심이 있다면 그것은 분별하고 구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인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인지는 반드시 분별해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13절 말씀을 표준 새번역으로 한번 읽어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고 차별한 사람들에게 무지비한 심판이 있을 거라는 거예요. 차별은 죄라고 분명히 말했고, 차별에 대해서 심판이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저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당연히 차별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 거죠. 그리고 이 차별하지 않는 마음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거예요. 세상에 순종하는 마음으로는 차별하지 않는 사랑이 나올 수 없어요. 그래서 세상의 사랑은 다 차별적인 사랑이에요. 세상의 제도도 다 차별적인 제도이고, 세상의 사랑도 다 차별적인 사랑이에요.
오직 차별하지 않는 사랑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공동체가 가질 수 있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도가 가질 수 있습니다. 목장 교회 성도들에게 편견을 이기는 사랑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장 교회 성도들에게 편애를 이기는 사랑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장 교회 성도들에게 심판을 이기는 긍휼의 마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내가 심판받을 자처럼 자기를 알면 우리는 남들을 차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것을 사랑할 수 있고, 멀리해야 하는 것을 멀리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세상은 차별 없는 세상을 원하지만 성도는 차별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분별된 차별 없는 사랑을 가지고 성도들을 대해야 됩니다.
여러분 교회를 다니면서 어떤 차별을 당하셨나요? 혹시 이전 것이 있다면 오늘부터 좀 오늘은 오늘부터 다 잊어버리십시오. 이전에 경험했던 교회 안의 차별들, 그리고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후에는 한번 곰곰히 생각하시오. 내가 혹시 남의 적용시키지 말라 그랬죠 내가 혹시 성도들을 차별하게 대하지 않았을까 가난한 사람도 차별할 수 있다고 생각해 말씀드렸죠. 가난해도 사람들을 차별하는 모습이 있을 수 있어요. 가난한 이들에게도 부자들에게도 차별적인 사랑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과 저는 다 누구나 차별적인 사랑을 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내가 받은 차별적인 사랑은 잊어버리고 혹 내가 했던 차별에 대해서 우리가 곰곰히 생각해보고 오늘 마음 깊숙히 내가 이후로는 내가 교회 안에서 차별하는 사랑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노력해야 되겠다. 이것은 죄라고 했고, 이것은 심판받을 일이라고 했기 때문인 거예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심판을 받는다면 반드시 차별에 대한 심판은 받을 거예요. 니가 왜 그때 니가 차별을 했지 니가 왜 그 성도에 대해서, 니가 왜 그 사람에 대해서 니가 왜 차별적인 사랑을 했어라고 하는 반드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고 우리의 죄를 물으실 거예요.
이거는 100% 성경 안에 그대로 나온 말씀인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혹 차별이 있었다면 제가 여러분을 차별한 것이 있다면 용서하시고 또 여러분이 혹시 주변에 차별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냥 용납하시고 오늘부터는 혹시 내가 차별하는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을까 여기에 집중하고 살아야 돼요. 내가 받은 차별을 기억하지 말고 내가 차별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여기에 집중하며 산다면 여러분이 그나마 좀 기대할 수 있는 차별이 많지 않은 차별이 많이 줄어든 교회의 모습들을 그리고 야고보 사도가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했을 때 그 아픔이 우리 교회는 잊지 않게 될 것입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