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이씨(永川李氏)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산운리(山雲里) 마을 기타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산운리(山雲里) 및 수정리(水淨里) 마을은 의성군에서 대감마을로 불리는 전통 반촌으로 경관이 수려한 영천이씨(永川李氏) 집성촌이다.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금성산(金城山)을 뒤에, 비봉산(飛鳳山)을 옆에 두고 나지막한 구릉과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초에 득성(得姓)한 영천이씨(永川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이문한(李文漢)공이다. 옛 사로(斯盧)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의 촌장(村長) 경주이씨(慶州李氏) 이알평(李閼平)의 후손이다.
영천(永川)은 경상북도 영천시 일원의 옛 지명으로 고대 골벌국(骨伐國)이었던 것을 초기 신라 때에는 절야화군(切也火郡)이라 하였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임고군(臨皐郡)으로 개칭하였다. 925년(경애왕 2)에 고울부(高鬱府)로 고쳐 불렀고, 도동현(道同縣)‧임천현(臨川縣)‧맹백현‧이지현(梨旨縣) 등의 현들을 관할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도동‧임천현을 합하여 영주군(永州郡)이라고 불렀으며, 995년(성종 14)에 자사(刺史)를 파견하였다. 1018년(현종 9)에 경주(慶州)에 편입되었다가, 1172(명종 2)에는 감무(監務)를 두면서 독립하였고, 후에 주(州)로 승격되었다. 1414년(태종 14) 영천군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영천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상북도 영천군이 되었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신녕군(新寧郡)이 영천군으로 폐합되어 영천면을 신설하였다. 1937년 영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1년에는 영천읍이 시로 분리 승격했고, 1995년 영천군을 영천시에 통합하였다.
영천시 오미동(五味洞)에 시조 고울군(高鬱君) 이문한과 2세 어모교위(禦侮校尉) 이연재(李延才), 3세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이배(李倍), 4세 증(贈) 금오위장군 이유상(李有尙), 5세 금오위장군 이조잠(李朝箴)의 묘단(墓壇)을 설단(設壇)하여 후손들이 받들고 있다.
이문한의 6세손 이극인(李克仁)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신호위 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내고 영양군(永陽君. 영양은 영천의 다른 이름)에 봉해진 이대영(李大榮)을 중시조로 하는 파와 고려 때 영동정(領同正)을 지낸 이박(李磚)을 1세조로 하는 파가 있다. 안동 도산면(陶山面) 분천리(汾川里)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65) 선생,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선생은 영양군(永陽君)의 계열로 소윤공파(少尹公派)이고, 의성군(義城郡) 산운리(山雲里) 세거 영천이씨는 영동정공파(領同正公派)에서 나뉜 감사공파(監司公派)이라 한다.
영동정공파는 고려 때 영동정을 지낸 중시조 1세 이박(李磚))의 문중이다. 여말 선초 영동정공 이박의 9세손 나은(羅隱) 이려(李麗)대에 영천에서 복거하다가 군위(軍威) 서촌(西村) 양곡(良谷)에 이주 정착하여 문중이 형성되었다. 군위군 소보면(召保面) 봉황리(鳳凰里)에 천하명당으로 알려진 묘혈(墓穴)에 이려의 묘소가 지금까지 전하며 산아래 동네에 이려와 그의 손자인 우암(牛巖) 이세헌(李世憲. 1475∼1555)을 봉향하는 재실 광석재(廣石齋)가 있다. 이박의 12세 이세헌은 진사(進士) 때 사화(士禍)를 피하여 낙향하였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군위 오양서원(梧陽書院)에 배향되었는데, 군위읍 내량리(內良里)에 우암이선생유허비(牛巖李先生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이세헌의 손자인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1525∼1609)은 강원도관찰사 지내고 조선조 중기 군위(軍威)에서 의성 산운(山雲)에 입향하여 영동정공파 자손의 약 50%인 감사공파 대문중(산운문중)이 형성되었다. 조선 명종 연간에 학동공이 산운으로 처음 입향하였다고 전하며, 족보의 기록에는 이 시기에 영동정공파는 8파문중이 형성되어 군위, 의성, 산운, 경산, 영천 일대에 세거하여 왔다고 하였다.
영동정공 14세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은 강원도(江原道) 감사(監司)를 지내고 예조참판(禮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에 추증되고 빙계서원(氷溪書院)과 군위 오양서원(梧陽書院)에 배향되었다. 이후 이조참의(吏曹參議) 이민성(李民宬. 1570∼1629), 형조참판(刑曹參判) 이민환(李民寏, 1573-1649), 형조판서 이희발(李羲發. 1768∼1850), 경술국치 때 애국지사로 건국공훈을 세운 이태직(李泰稙. 1878∼1913) 등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48명을 비롯하여 호당 1명, 청백리 2명, 공신 1명 등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천이씨(永川李氏)는 23,290가구 95,4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동공의 증조부는 이종림(李宗林)인데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되고, 조부는 이세헌(李世憲)으로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고, 부친은 이여해(李汝諧)인데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으니 이 3대의 추증은 모두 공이 권귀한 때문이었다. 비(妣)는 일선김씨(一善金氏)로 판사(判事) 김성미(金成美)의 후손이고 김형손(金亨孫)의 딸이다.
공은 신묘년(1531, 중종26)에 출생하고, 임술년(1562,명종17) 문과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전적(典籍), 형조좌랑(刑曹佐郞), 정랑(正郞), 하동(河東)과 창녕(昌寧) 현감(縣監), 임천(林川)과 예천(醴泉)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이 때에 양친께서 모두 고령(高齡)이셨는데, 공은 전성(專城)의 봉양을 지극히 하였다.
임오년(1582,선조15)과 갑신년(1584,선조17)에 양친의 상을 당하였는데, 복을 마치자 청송부사(靑松府使),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내자시정(內資寺正), 강릉(江陵)과 중화(中和) 부사(府使),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와 충주목사(忠州牧使), 형조참의(刑曹參議)와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다. 기유년(1609, 광해군1) 7월 별세하니, 향년이 79세였다. 조정에서는 예조(禮曹)의 관원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하였으며, 다음해 정월 의성(義城) 서쪽 하현(霞峴) 태좌 진향(兌坐震向)에 장례하였는데, 부인은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인의(引儀) 신권(申權)의 딸이다. 사후에 빙계서원(氷溪書院)과 군위 오양서원(梧陽書院)에 배향되었다.
둘째 아들 이민성(李民宬)은 자가 관보(寬甫), 호는 경정(敬亭)인데, 어려서부터 뛰어나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를 통달하였으며, 효우가 출중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뽑혔고, 1601년 승정원주서, 그 이듬해 시강원설서, 사서로 승진, 서장관(書狀官)으로 뽑혀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3년 예조좌랑, 병조좌랑에 이어 곧 정랑으로 승진되었다.1605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 일당의 반대로 제주점마어사(濟州點馬御史)가 되었다. 그 뒤 시사(時事)의 동향이 심상하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1608년 사헌부지평, 문학(文學)으로 옮겨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이듬해 옥당(玉堂)에 선입(選入)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향, 여묘(廬墓) 3년을 마치고 홍문관수찬에 이어교리, 세자시강원 겸 문학 등을 역임하였다.1617년(광해군9)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이 폐모론을 발의하자 윤기(倫紀)에 득죄(得罪)함이 심하다는 내용의 차자(箚子)를 올렸다가 이이첨(李爾瞻) 등의 모함을 받아 삭직되어 그 뒤 고향에 내려가서 거의 10년 동안 글씨와 그림으로 소일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때 사헌부장령에 복직하였다.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성균관사성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았고,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승진되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추천으로 경상좌도의병대장(慶尙左道義兵大將)이 되어 전주에 진출, 왕세자를 보호하였다.1629년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 그 해에 죽었다.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 높았으며, 의리에 강하여 광해군의 난정 때 간당(奸黨)들에게 모함을 받은 이덕형(李德馨)‧이원익(李元翼)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출하려고 힘썼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명나라에 갔을 때 그곳의 학사‧대부들과 수창(酬唱)한 시는 사람들에게 애송되어 중국 사람들이 그를 이적선(李謫仙)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하는 시는 1천 여 수에 이르며, 사후 의성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정집》 13권, 보유(補遺) 4책과 《조천록(朝天錄)》 등이 전한다.
학동의 제3자 이민환(李民寏)은 자는 이장(而壯), 호는 자암(紫巖).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160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정언‧병조좌랑을 거쳐, 1603년 암행어사로 평안도에 가서 수령의 비행과 민정을 살폈으며, 1608년 영천군수로 나갔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에서 군원을 요청하자, 원수 강홍립(姜弘立)의 막하로 출전하여 부차(富車)싸움에서 패하여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17개월 동안 청나라의 항복 권유를 물리치고, 1620년에 석방되어 의주에 이르렀을 때 사원을 가진 박엽(朴燁)의 무고를 받아 4년간 평안도에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1623년(인조 1)인조반정으로 서울로 올라왔다.이괄(李适)의 난 때와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의 종사관이 되어 출전하였다. 난이 끝난 뒤 군자감정으로 통정계(通政階)에 올랐고, 이어 동래부사가 되어 번거로운 폐단을 근절하였다.그 뒤 판결사‧호조참의‧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가, 1645년에 경주부윤으로 나갔다. 저서로는 《건주견문록(建州見聞錄)》‧《자암집》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희발(李羲發, 1768.영조44∼1850,철종1). 자 우문(又文), 호는 운곡(雲谷). 1768년(영조 44) 아버지 이의명(李宜明), 어머니 파평윤씨 사이에서 울산 외가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남와(南窩) 정동필(鄭東弼)에게 수학하고, 1795년(정조19) 문과에 합격하고 괴원(槐院)에 배속되었으며 곧 초계문신에 선발되었다. 1797년(정조21) 명릉별검(明陵別檢), 이듬해 효릉별검(孝陵別檢), 1805년(순조5) 예조좌랑(禮曹佐郞), 1806년(순조 6) 병조좌랑(兵曹正郞),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1811년(순조11) 장령(掌令), 1816년(순조16)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임명되어 모친을 모시고 부임하였다. 1821년(순조21) 집의(執義), 1825년(순조25) 사간(司諫)에 이어 곧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 1826년(순조26) 영월부사(寧越府使)에 임명되었는데, 그 해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정제(定齋)라 편액하고 독서하였다. 1830년(순조30) 다시 동부승지(同副承旨), 다음해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1843년(헌종9) 헌종이 화성행차 때 정조의 시종신(侍從臣)으로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렸으며 한성우윤(漢城右尹)을 제수하였다. 1847년(헌종13)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었고 기로소(耆老社)에 들었다. 1850년(헌종15)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851년(철종1) 정월 서세(逝世)하였으며 시호는 희강(僖康)이다. 중용강의조대(中庸講義條對), 주자국조고식(朱子國朝故寔) 등 저작을 남겼는데, 성리학에서는 퇴계를 계승하여 주리론의 이선기후(理先氣後)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주정(主靜)을 강조하였다.
문화재로는 학록정사(鶴麓精舍,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2호)가 영조 26년 건축되었고, 경정종택(敬亭宗宅), 운곡당(雲谷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74)과 점우당(漸于堂,제375호), 그리고 소우당(素于堂, 중요민속자료 제237호)등이 있으며, 이를 포함한 약 40여 동의 전통 고가옥이 유존하고, 근처 금성산과 비봉산이 만나는 절경 계곡에는 의상조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 수정사(水淨寺)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