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속에 이야기를 남김니다.
오프라인으로 지원하다가 1998년 4월5일 한국최초로 컴퓨터가 가능하면 알았던
온라인 웹서비스로 출장연주 개발하고 시작했던 동기와 의미가 여기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안성에 사시는 어느 지인의 회갑연 행사를 한달전에 예약을 받게 되었는데...
행사 예정일를 일주일도 남긴 상태에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행사취소한단다"
"아~~그 집 말이다. 집안에 사정이 있어서 행사를 하지 못할것 같으니... 전화한번해봐라..."
이미 셋팅된 행사였으니 전화하여 내용을 알아보니....
그 동안 아버님이 암으로 투병중이였고..
그래서 잔치를 준비 한것이였는데...
이제 병원에서도 포기했다"는 내용이였다.
가족회의를 거쳐 이제 아버님에게도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알리고,
가족들의 회의는.....
죽을 사람 집에두고 잔치를 할수있겠느냐!....
동내 사람들 한테도 욕 먹을 일 아니냐! 는 등등...
가족들은 운명을 달리할 부모를 두고,
소란스런 행사없이 조용이 넘기자는 쪽으로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것이였다...
통화중 잠시 동안 말 없는 침묵이 흐르는 시각에... 나는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침묵을 깨고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잔치 한다는게 어렵겠네요....
구설수에 오를수 도 있겠구요..."
"아버님 생전에 활동사진 찍어두신건 있나요?"
"없어요... 그러믄요..
"가족회의를 다시한번 하실래요."
"어렵게 드리는 말씀인데요.."
"아버님 생전에 동네 분들과 또, 가족과 어울려 비디오로 찍어 기록으로 남겨두세요."
"나중에 자손들이 아버님 생각나면 언제라도 다시한번 볼수있도록요....."
"가족 고별 행사쯤으로 생각하시고,... 행사를 하시고..
그리고, 일단 저는 밴드는 취소 된것으로 알겠습니다."
마무리 인사를 하고..
한참동안 혼자 멍하니 고인이된 나의부모님 생각에 잠겼다.
부모님 살아생전에 즐겁게 우리와 놀던 자연스런 모습 사진 영상하나 없었던 것이 항상 마음 아쉽게 생각했었다.
몇일이 지났다...
행사가 있을 전 전날에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힘없는 목소리로..
여기 안성인데요....
가족회의를 했는데요..
가족들이 동네 어른들 이해시키고,
행사를 진행하기로했으니.. 상황을 잘 이해하실 테니깐...
행사밴드를 꼭 좀 부탁드린다구요.=중략=
행사는 들꽃 필무렵 논밭 길을따라 5월1일 안성에 작은 연못을 갖춘
"빛고은가든"에서 동네 어르신들 40~50분을 모시고 오전10시30분쯤 시작되었다.
행사의 헌주는 격식에 따라 시작되었다.. .
큰 아들 내외...일배~.....큰 아들 내외는 절을 올리고 일어나질 않는것이다..
머릴 박고 울고 있는것이였다..
일어나~세요..
그만하고 일어나~세요.
그렇게 세번 절을 올리고 일어나니 동네분들...
야 임마! 이 좋은날 왜 울어 야! 임마! 큰 아들 너! 노래한번해라!
형식에 없이 동내 어르신이 큰 아들에게 마이크가 쥐어주고.. .
울고넘는 박달재가 연주되고 동내 분들 박수치고,....
박달재가 큰아들 슬픈 마음을 담아 그렇게 불려졌다....
둘째의절....역시 첫 절을 올리고 쉽게 일어나질 않았다....
그리고, 동네분들의 주문으로 노래가 불러졌고...셋째...넷째....헌수는 눈물로 번벅된채 끝이나고....
주빈이신 아버님이 내빈께 인사를 하신다고 혼자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부축받으며 일어 나셨고....
아버님은....목소리가 없이 눈물을 닦으면서 소리모양으로 입술만 움직여졌다....
당신도 노래를 하신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족들이 우르르 아버님을 감싸 안으며 아버님!....하면서
볼맨 소리로 몇마디씩 하면서 울었다..
부모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는 자녀가 있다면 그들은 효자다...
그때 동네분들이 큰 역활을 해주었다.
자! 자! 자! 이제 그만울고 놀자! 잔치한다고 사람들 불러놓고 왜 울어 좋은날 자! 자! 자! 놀자!...
자!~ 박자 기사님 디스코 합시다. (우~으하하.. 이 동내에서 난생 처음들은 연주자(밴드)를 호칭하는말 "박자기사님")
그날 가족들의 마음을 달래느랴 동네분들은 한분도 자릴뜨질 않았고,.. .
고래고래 소리치며, 정말 가족들 슬픔을 달려며 열심히 놀아주었다..
행사는 한참을 즐긴후에 가족들이 아버님을 쉬게하시기 위해 행사를 마무리하면서...
동내분들과 가족들의 고맙다는 인사를 뒤로하고 서울길로 올랐다.
그리고, 한달뒤...
지인한테 전화가왔다.. .
아버님은 행사후 2주 뒤 돌아가셨고, 삼후제 땐 친척 가족들이
모여 행사때 촬영해서 보내준 비디오를 보고 많이 울었습니다.고
행사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고
"............"
그날 행사에는 소개한 친구와 나, 그리고, 내 아내가 있었다.
지금은 그분의 이름도 전화번호도 남아 있질 않지만..
그 때의 기억으로 코끝이 찡해온다...
다시 연결이 된다면.
그 때의 행사 비디오 테입을 한번 꼭 보고싶다.
이 글을 쓰고보니 마음이 좀 그렇다...
마음을 풀기위해 글 하나 더 소개한다..
여성 한분의 밴드지원 문의 전화가 왔다.
그때 행사중이여서 직접 받지못하고,
이름과 전화번호를 받아 두었다가..
행사후 전화를 해보니..
인터콘티XX홀에서 11월11일 낮12시에 회갑행사를 한다면서..
"밴드출장" 오실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것이었다.
나는 "물론 지원해 드린다고 하니깐".
그 분은 가격을(밴드 출장비)오만원만 깍아 달라신다..
"출장비 깍아드리고.. 팁을 요구하는 방식이 싫어요.."
그래서 "기본 출장비용은 깍아드리지 않습니다.".하니깐,
문의자 왈.. "오셔서 식사 하찮아요."
거긴 음식비도 비싼데 오만원이 넘는 걸로 맞추었는데 우리가 내야하는데
깍아줘요.
하는것이였다.
나는 별로 그 행사에 지원하고 싶지않아서 거절했다.
깍아 드리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행사지원해주는데 밥값!!!!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다.
마음이 가난한 부자...
:) 잔치는 베푸는 마음으로 해야한다..
옛날에는 잘사는집 잔치는 동네 사람들이나 이웃 마을 거지도 잘 먹은집
(인정있는집)으로 기억하고 다음해 잔치날을 기다리기도 했단다.
나는 행사를 구걸할 필요도 없었고 또 거지도 아니고 도와주려는 사람이다. =생략=
긴~글이지만 한토막 적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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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준비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