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史記 50회]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
2. 여(呂)씨 천하를 만들려 했던 여태후(呂太后)
고조 유방의 뒤를 이은 사람은 여태후의 유일한 아들 유영(劉盈)이며 그때 17세였습니다.
자연히 어머니 여태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혜제(惠帝) 유영은 어머니 여태후가 척부인을 끔찍한 방법으로 죽이고 의붓동생 여의를 동시에 죽이는 것을 보고 어머니에 대해 환멸을 느껴 정사를 외면하고 술과 놀음에만 빠졌다가 폐인이 되어 약관 24세에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유방에게는 아들이 8명이 있었는데, 유방이 죽은 뒤에 여태후는 자기 뱃속으로 낳은 혜제 유영과 후궁 박(薄)씨의 소생인 유항(劉恒 : 나중에 文帝가 됨)을 제외하고 다 죽였습니다.
그 정도로 악녀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유방은 한나라 각 지방을 다스리는 지방장관을 자신의 일곱 아들과 영포, 번쾌, 진평 등 건국 공신들을 왕(王)으로 봉해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유방이 죽은 뒤에 여태후가 여씨 천하를 만들려고 그 왕들에게 자신의 조카딸들을 강제로 시집을 보내 왕후가 되게 하여 왕으로 있는 의붓 아들들의 비리를 캐내어 사약을 먹여 죽였으며 "어찌 유(劉)씨만 왕이 되라는 법이 있느냐?"며 양, 조, 연은 태후의 조카들인 여씨를 왕에 봉하였습니다.
그리고 궁중의 관리들은 대부분 친정 여씨들로 채웠습니다.
특히 군사를 총괄하는 상장군도 자기의 동생 여녹을 임명하였으며 또 다른 동생 여산은 승상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여태후는 유방 사후의 한나라를 혼자 마음대로 요리하였습니다.
2대 황제 혜제가 죽은 뒤 혜제의 본실에는 자식이 없어 후궁에서 낳은 아이로 대를 이으면서 그의 어미를 죽이고 황후 장씨가 낳은 아이로 속였는데, 이 아이가 세상의 이치를 알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태후가 자기 어머니를 죽이고 나를 왕후 장씨의 소생인 것처럼 속였다는 것을 알고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여태후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여태후는 즉시 이 아이를 독방에 가두고 "황제가 깊은 병이 들어 종묘사직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며 폐위하고 또 다른 후궁 소생을 황위에 앉혀놓고 세상을 마음대로 요리하였습니다.
그래도 신하들은 아뭇소리 못하고 순응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이라 여태후도 죽음은 피할 수 없었는지 기원전 180년 향년 61세로 한많은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여태후가 죽고나니, 숨소리도 못내고 전전긍긍하던 황족 유(劉)씨들과 유방의 신하들이 여(呂)씨 토벌에 나섰습니다.
일종의 혁명이었습니다.
선봉에 나선 사람들은 유씨 문중을 대표하는 유장이었으며 이에 적극 협조한 사람들은 진평, 영포, 주발 등 옛 유방의 신하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여씨 일족을 토벌하고 난 후 여태후가 세운 황제 소제(少帝)는 출생신분이 불명확하다며 폐위시키고 고조 유방의 세번째 첩 박(薄)씨의 소생인 유항(劉恒)을 황제로 삼으니, 그가 漢나라 5대 황제가 되는 문제(文帝)입니다.
여하튼 여태후는 유방이 첩실들에게 파묻혀 있는 동안 쌓이고 쌓였던 불구대천(不俱戴天)의 한(恨)을 풀기 위해 악행을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너무 심했던 것 같습니다.
중국에는 수렴청정이라는 명분으로 황제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며 악명 을 떨쳤던 세명의 태후가 있었는데, 이 여태후와 당나라 측천무후, 청나라 서태후가 그들입니다.
#불구대천(不俱戴天)의 한(恨) :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을 정도로 쌓인 깊은 원한 이라는 뜻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