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명의 유의태 /9]
허준이 구일서와 헤어져 주막에 이르자 기척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희미한 초롱불이 내비치는 주모의 방에서 다희가 나와서 다소곳이 맞았다.
이어 그 주모의 방에서 나오는 어머니의 안색도 아들의 등에 업혀 유의태의 집에 달려가던 때의 고통은 씻은 듯이 사라진 환한 얼굴이었다.
"차도가 계시오니까?"
"오냐 다 나았어. 여태 유의원 얘기를 듣느라 ..."
"유의원 얘길 누구에게 말입니까?"
대답 대신 손씨가 다희와 함께 쓰는 주모의 곁방으로 들어갔다.
"유의원 얘기라니? 누구에게 무슨 얘길 들었습니까?"
방에 둘러앉은 뒤, 허준은 다시 어머니가 주모에게 들었다는 유의태에 관한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냄새를 맡다니요?"
"주모의 말인즉, 유의원 그분이 배를 타고 멀리서 온 걸 알아맞힌 건... 무슨 점장이 같은 예언이 아니라, 유의원이 우리가 오랫동안 해로를 거쳐오며, 몸에 밴 바다냄새를 맡아낸 것 이라는구나."
"이미 하륙하여 여러 날이 지났는데, 어찌 아직 우리 옷자락에 바다냄새가 남아 있습니까?"
"저도 어머님도 그런 말을 했더니, 주모가 웃으면서, 그 양반 코는 유별나서 아무리 옷을 갈아입고 와도, 대엿새 전 장례를 치르고 온 상주의 몸에서 송장 냄새까지 맡아낸다 합니다."
" ...!"
"우리 일을 알아맞춘 것 말고도, 그 유의태란 의원은 남이 흉내내지 못할 기행이 많은 의원 이라는구나!"
"대체 무슨 얘길 또 들었습니까?"
다희가 어머니 대신 대답했다.
"어떤 때는 병이 깊어 찾아온 사람에게 약을 지어주는 대신 돈 닷 냥을 건네주며, 가서 맘놓고 쓰라고 하더랍니다."
"약 대신 돈을 주어?"
"예."
"자세히 들은 대로 얘기해보오."
"그 병자는 주모도 잘 아는 사람이랍니다. 그런데, 그 병자에겐 팔십 노부가 한 분 계셨는데 시름시름 앓으며, 아들에게 고깃국을 실컷 잡숫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조르시는데... 아들은 마음은 있지만, 어려운 살림에 도저히 그 소원을 들어 드리지 못해 생긴 생병 이었답니다."
" ...?"
"그래서 유의원이 내준 닷 냥으로 그 병자가 노부에게 마음껏 고기도 사 드리고, 새옷도 마련해 드려서 몇 해나 더 천수를 누리시다가 편안히 눈을 감으셨답니다."
" ..."
"그쯤 사람 속을 꿰뚫어본다면, 우리가 여러 날 배를 타고 온 것쯤 알아맞추긴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허준이 그 어머니를 보았다.
그 허준의 뇌리에 또 한번 유의태의 도도한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듯한 안광이 떠올라 압도하듯이 다가왔다.
"유의태, 유의태...."
이날 밤! 허준은 지금까지 구일서와 만난 얘기를 어머니와 다희에게 털어놓았다.
그의 소개로 사냥꾼과 약초꾼을 만난 얘기, 그리고, 짐승의 피를 묻히며, 사냥꾼으로 생업을 삼기보다는 약초꾼이 되는 쪽을 택했다는 것과 기왕사 약초를 만질 바에야 유의태 밑에 일고 싶은 생각이나 그 유 의태가 제자를 자원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냉랭한 인간인가도 구일서에게 들은 그대로 들려주었다.
"하오면... 장차 의원으로 입신하실 생각이오니까?"
허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약초와 의원은 상관관계가 많으리라. 그러나, 그 의원의 의자도 약초의 약자도 겨우 오늘 알았을 뿐이잖은가.
"좋은 생각이다. 잘 생각한 게야."
아들의 침묵을 말없는 긍정으로 안 손씨가 사뭇 감격 어린 소리로 찬성했다.
그러자, 허준은 자신의 뇌리에 버티고 선 유의태의 강렬한 인상에 자신도 모르게 한발 물러나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누구처럼, 온갖 냄새를 맡아낼 유별난 코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또,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사람 밑에서 5년, 7년, 10년씩 허송세월할 생각은 없소. 단, 지금 당장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는 사정이니, 약초꾼이 됐건 그 집 마당이나 쓰는 마당쇠가 됐건, 잠시 의탁해볼 생각이나 ..."
"무엇이냐?"
"큰 기대 갖지 마십시오. 제가 그 집에 몸담을 경우 보장되는 건 저 혼자의 입뿐입니다.
일 부지런히 한다 하여 그 딸린 식구에게 따로 쌀밥을 퍼주는 예도 없고, 봄 가을에 옷이나 한 벌 해주는 것이 고작이라니, 가서 잠시 몸을 의탁해 있어 보다가 이도 저도 아니다 할 땐 다시 나와야지요."
침묵 끝에 손씨가 입을 열었다.
"사람이 무엇인가 이루고자 할 때, 애초 뜻이 굳세어도 종단에 이루지 못하는 일이 많다 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잠시 몸을 의탁하는 그런 마음으로야 어찌 네 뜻만큼 이를 수 있느냐! 혹, 우리 둘의 호구 때문이라면, 그건 에미가 무슨 짓을 하여서라도 꾸려나갈 것이다."
"무슨 짓이라니요? 어머니가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남정네처럼 마연동 사철광에 가서 남 대신 부역을 할 수 없을 게구요..."
이번에는 다희가 입을 열었다.
"서툰 솜씨라 누가 알아줄진 모르오나, 서방님께서 뜻을 세우신다면, 제가 바느질 솜씨를 팔아서라도 어머님을 모시겠습니다."
구일서의 집은 산음 관아에서 동쪽 정곡역으로 가는 한 마장 거리의 속칭, 감골이라는 마을에 있었다.
주위에 널린 척박한 땅이며, 마을의 살림이 유족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벌판에 부는 쌀쌀한 바람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온 동리가 초봄의 햇살이 가득하여 따사로웠다.
전날, 기별을 받아선지 퇴청하는 구일서를 따라 허준 일가가 앞 개울의 건너 언덕배기에 올라서자, 마을 앞 우물가에서 몇 마을아낙들 속에서 반찬거리를 씻고 있던 구일서의 아내가 아이를 엉덩이에 업은 채 종종걸음으로 다가왔고,
이렇게 폐를 끼칠 수 없다며, 허리 굽히는 손씨와 다희에게 마주 허리를 굽히며, 짐보따리를 받으려 했다.
살갗이 희고 눈가에 주근깨 자국이 많은 그러나, 심성이 퍽 따뜻해 보이는 여자였다.
구일서의 집은 그 마을 꼭대기 집이었고 일행이 삽짝을 들어서자, 봄볕이 가득 내리쬐는 쪽마루에 앉아 시래기를 다듬던 구일서의 노모가 기척을 듣고도 보이는 듯이 흰자위가 많은 눈을 휘번덕이며 반색해 내달았다.
이날 허준은, 구일서와 그의 방에 함께 누워 밤을 새우며, 앞으로 유의태의 집에 들어 가겠노라며 다시 그의 도움을 청했다.
"제자라니?"
유의태는 출타중이었고, 허준을 소개하고자 함께 왔던 구일서가 관아로 돌아가자, 전날 낯익은 마당쇠 중에서 장쇠라 불리는 털보가 갑자기 허준을 뒤꼍 헛간으로 끌고 가더니 대뜸 눈을 치뜨며 물었다.
스승이 없는 틈을 차, 마을에 내려가 낮술 몇 잔을 걸쳤는지 감 썩는 냄새를 풍기며 녀석의 말은 처음부터 시비조였다.
"그렇소. 나도 유의원 밑에서 의술을 배워보고자 ..."
허준은 사람이 없다 하여 돌변한 그 세 녀석의 험악스러운 눈빛을 향해 나직이 대꾸했다.
"누구 맘대로?"
장쇠가 또 물어왔다.
"그건 유의원님께 허락을 받을 참이외다."
"이 집에 제자로 들어올 놈은 유의원님 한테보다 우리한테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해."
"어째서 그렇소?"
허준이 되묻자,
"어따, 이자가 제법 말 높이하네! 유의원님이라니 황차 네가 무엇이기에 유의원 밑에 님자를 뽑아.?"
저희끼리 영달이라고 불리는 작달만한 마당쇠가 갑자기 핑계를 찾아냈다는 듯이 허준의 어깨를 탁 쳤다.
"우리도 제자가 될지 말진데, 왜 엉뚱한 놈이 또 끼여들어?"
"우리하고 재주를 겨뤄보려는 수작이여."
"그게 아니오. 나는 ..."
그 허준의 변명하는 턱을 장쇠의 삿대질이 건드렸다.
" ..."
"보아하니 먹물깨나 먹은 얼굴인데 ..."
"형님은 가만 기슈."
키가 작달만한 녀석이 가로막고 나섰다.
"허우대 히여멀끔한 놈이 어디서 빌어먹을 데가 없어서 우리 밥을 뺏어먹으려 들어?"
" ..."
"눈치 없는 놈에게 말귀 가지고 됩니까? 담박 알아듣도록 해줘야지."
갑자기 허준의 입에서 피가 터졌다.
이어 세 녀석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잇따랐다.
사람 치는 데는 이력이 난 자들인 듯했다. 사람이 달려왔다. 놈들보다 고참인 방안에서 촛불과 손수건과 병부를 들고 유의태를 시종하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녀석들은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들도 빙글거리며 나뒹구는 허준을 보고 있었다.
일어나려던 허준은 또 한번 뜨거운 통증을 허리에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내일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