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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리에 이르는 길 원문보기 글쓴이: 知友
내면으로 들어간다 함은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근원적 의식차원과 통해있는 이 물질 우주의 근본자리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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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세상에서는 오랜 명상수행이나 깊은 관법등 여러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지만 사실 그원리를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자기가 <이것이 나>라고 여기며 빠져있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허구의 (생각, 감정, 인간관계, 감각,시간, 공간 등) 여섯가지를 객관적으로 보고 그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
그러면 우리는
수없이 말하는 <존재>그자체를 느끼게 된다.
<존재>란 한마디로
<내가 여기 있다는 가장 근원적이며 궁극적인 느낌>이다.
그렇다고 <존재>가 곧 느낌이란 말은 아니다.
존재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소프트웨어같다.
우리가 밤에 깊은 잠을 잘때 우리는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한다. (무의식속으로 들어간다, 끊어진자리로 들어간다. 초월된자리로 들어간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 없다는 것조차도 자각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없음이다.
하지만 누군가 우리를 흔들어 깨우면 우린 그때 반응하면서 깨어난다.
정확히 말하면 이때 깨어나는 존재는 평소 자기 식스존속에 갇힌 우리의 개체마음이다.
그러므로 의식할수 없다해서 아주 없는 것도 아니요,
있다해서 아주 항상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란 결국 이처럼 <무의식+ 의식>으로 된 집합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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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불교에서는 진공묘유라고
다른 표현으로도 멋지게 미화해서 말한다.
하지만 자각 인식하는 기능을 중심으로 한
우리는 의식을 벗어날 수 없는 의식자체이다.
내면으로 들어간다함은 곧 의식의 좀 더 밑바닥 근원적인 존재가 있는 그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깊은 의식의 바다속으로 침잠해 들어갈때 우리는 내적인 고요와 평화스러운 안온감에 심취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외부의 소음이나 자극에 좀 둔감해지게 되는데
이렇게 의식이 어느하나에 집중하여 다른것에 대해 산란한 관심을 거두게 될때 그것을 우리는 삼매라고 부른다. (삼매와 몰입은 사촌지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잠을 잘때 깊은 삼매상태가되는 것 같다. 이것을 깨어 볼수 있다면 --)
삼매라는 존재방식은 평소에 그러한 존재방식에 익숙해짐으로서 달성된다.
그래서 평소에 깊은 삼매상태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일상에도 깨어있으려면 자주 명상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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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알고보면
모든 우주의 동식물들,
심지어는 광물들까지도
그들 차원에 맞는 수준의 삼매상태에
자주 또는 일시적으로 들어가 있다.
모든 물질적인 개체의 존재들은
사실은 그마음의 근원인
우주무상삼매(자기가 없는 잠과 같은 상태)와 분리되어서는
그 개체란 존재방식자체를 오래 유지할수가 없는 법이다.
내가 과거에 한 방법중 내면으로 들어가
유상삼매를 거쳐 깊은 무상 삼매상태에 들어가는
효과있는 방법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이름하여 <가라앉기 명상>이다.
하루에 몇분을 명상하든 (일반적으로는 한번 앉으면 최소 20분이상은 하는게 좋다) 명상을 하면서 호흡을 할때마다 천천히 <더깊이>라는 명상만트라 주문을 외운다.
한번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때마다 실제적으로 <더깊이>가라앉고 의식이 내면속으로 더깊이 들어간다고 느낀다.
일분에 대충 열번은 호흡하므로 십분에 백번을 <더깊이>라는 느낌을 자각하게 되는 셈이다.
보통사람일 경우 이렇게 만번정도를 하면 (하루 백번씩 백일이나 이백번씩 오십일) 그는 다시는 돌아 나오지 않는 깊은 내면의 의식차원에 들어가며
그렇게 머무르다가보면 나중엔 그러한 깊은 <삼매의 바다>그자체가 자기가 된다.
그러면 마치 자기가 고요한 깊고도 아주 맑은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된다.
그리고 그어느것도 그고요하고도 청명하며 평화스러운 전체성의 느낌을 해치지 못하며 흔들지도 않게 된다.
이러한 내면에의 성숙한 체험이 있어야 사람은 변하게 된다. 그것도 서서히....
이제 그의 과거 성격이나 특정하게 반복되던 개인적 습관은 더이상 그를 지배하는 힘을 서서히 상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과거의 그가 더이상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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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참나를 찾는다면서
평생동안 <나>를 말로만 찾거나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로 진리를 찾겠다면
생각만 하지말고 <나>속으로 직접 들어가라.
그리하여 <나>를 깊숙히 골고루 체험하라.
<나>란 놈은
있음과 없음조차 다 만들어 낸다.
이것은
때론 생각이며
때론 감정이고
때론 기에너지이며
때론 상념이기도 하며
때로는 맑은 정신이기도 하다.
이 <나>란 것은
이처럼 다채롭고 그나타남이 신출묘용하니
일반인들은 그속에 들어앉아 있기에
마음을 매일같이 쓰면서도
그마음을 객관적으로 직관하여 찾을줄을 모른다.
<나>란 것도
생각이고 느낌이니 곧 마음이다.
이것은 제 과거 생각이나 느낌으로 찾는자에겐
도무지 아리송하며 있는듯 없는듯 하다.
그러므로 제가 아는
과거의 그<나>란 개념이나 생각으론 찾을 수가 없다.
나를 찾는 방법은
제가 아는 그<나>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삶을 참으로 살줄 아는 이는
마치 바다밖에서
<저것이 바다>라고 생각만 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바다속으로 뛰어들듯이
그렇게 삶을 직접 창조하며
다양한 체험속을 걸림없이 산다.
바다는 그저 바라다 보라고 있는게 아니라
그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수많은 것을 경험하고
건져올리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찾고자하거든
<나>속으로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
<나>란 말이나 개념을
계속 읊조리거나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거다저거다 시비분별하거나 옳다그르다 따지는 것은
다 제가 정리해가진 작은 정보경험에 불과하다.
그런것을 넘어서야
참으로 나조차 만들어내는
마음이전의 참마음인 <참나>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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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통해
내면의 아득한 세계속으로 들어가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은 깨달음이 무어라 말할 자격이 없다.
신기한 것은
내가 내속으로 들어갔는데
지금의 내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이다.
명상속에서는
일체의 것들이 다 떨어져 나간다.
내육체,
나란 생각들,
내추억들….
그런 것들이 너무나도 아득하게 멀어진다.
그리고 그안에는
존재의 거대한 심연세계가 펼쳐져있다.
그 거대한 심연세계는
모든 크고 작은 만물들속에 두루 편재한다.
그속에서 우리의 초점의식은
자기를 상실하고 전체적 의식과 조우하여
과거의 그생각 보따리속에서 분별하며
시끄럽던 자기를 떠나거나 조용하도록 죽여버린다.
비로소 그때부터 우리의 내면은 고요해지기 시작하며
우리는 <있는그대로>를 보기 시작한다.
우리가 보는 겉으로 드러난 이세상이란
내면의 심오한 다원적인 세계에 비하면
하나의 꿈 같은 한 표상세계에 불과하다
그세계는 심연과 같이 거대하고 무한하지만
또한 동시에 우리내면이 깊어지는 만큼
그차원에 맞는 수많은 비누방울과도 같은
환상의 세계들을 동영상처럼 품고 있다.
그것들은 수많은 개체[마음들의 활동의 결과인
상념체와 감정욕망체가 만든 세계들이다.
하지만 명상수행을 제대로 할수록
이세계안에서 내가 존재의 호흡과 파동이 낮아지면서
나의 표면적 유체,감정욕망체,상념체등등은 희미해지고
점점더 근원체와 원인체만이 각성화된다.
명상수행이란
바로 이와같이
나의 내면속으로 더깊이 들어가
마침내 그존재의 중심은 돌아나올수없는 정신체이상(원인체와 근원체)의
차원적 존재로 존재의 중심이 확실하게 이동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그세계안에서
근원적인 존재의 뿌리적인 존재방식과 조우하게 된다.
그것은 더깊어지고
더거대해지는 주시자이며
동시에 그주시자의 몸통인 초월적 법신불자리이다.
그것이 멸진정이며 대반열반이다.
하지만 그것이 공부의 끝이며 궁극의 전체성체험은 아니다.
그것은 이제 겨우 나무의 뿌리이자
나의 존재방식의 뿌리만을 본것이다.
그다음에 할일은
나무전체를 보고 체험하는 것같이
우주의 전체적인 존재방식에
구석구석 확실하게 눈뜨는 것이다.
이것이 법신불을 자각한 이후의 보신불 공부이다.
진짜 마음공부(보신불)는
이제부터 시작인셈이다.
비유하건대
내가 나무라면 뿌리만 알고는
<나무 다알았다,끝이다> 할게 아니라
나무전체를
어디가 줄기이고 가지이고
무엇이 꽃이고 잎이고
이나무의 특성은 무엇이며
무엇이 열매인지
전체를 제대로 다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김연수님 내면에 들어가는 법에서 발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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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상을 통해
내면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는 법은
그어디에서도 제대로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그냥 표면적인 단어로 스스로를 <자각하라>고나 말한다.
이것은 화두참선이나 관법이나 다른 수행단체들도 매한가지인듯하다.
하나 사실을 말한다면
그것은 아직 한참 부족한 이론적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내면의 무한한 깊은 정신세계로 들어가려면 세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이것과 이것 아닌것 즉 자각(自覺)과 방임(放任)이다.
정신없이 혼침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식은 어느정도 깨어있으되 내면에 일어나는 율려(律呂;존재에너지의 흐름)에 그냥 나를 내어 맡기는 것이다.
초보인 사람이 스스로 어찌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
우선 가만히
정좌하여 의식이 순수하게 가라앉고 맑아지는 것은
아주 첫단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기서 더 깊이 내려가지 못하는 이유는
자꾸 제 의지로(사실 이것은 미세한 번뇌이다) 잡념을 물리치려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물에 들어간 사람이
자꾸 가라앉지 않을려고 손짓을 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진정 물에 자연스럽게 뜨려면
가라낮지 않으려하는
그반대적 저항적 의지보다는
오히려 완전히 내어맡기는 방임의 태도가
초보때일수록 더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방식을 중심으로 한 이후에
가라앉으려할때(혼침해지거나 상념이 떠오를때)
자연스러이 손발을 움직이듯 <자각>이란 수단을 사용하여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자각하는가?
우선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해
다만 집중한 의식으로 맑고 투명하게 바라볼뿐
그어던 의지나 조작도 행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기를 텅비운채
마치 깊은 심해에 깊이깊이 가라앉는 잠수함같은 느낌을
살짝 가져보는 것이 중요하다(이게 아주 중요하다.
그러면서 가만히 있어본다.
시간이나 공간도 의식하지 말고 그자체로서.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세번째 요소인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실재하는 우주적 그리고 내면적 인 섭리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면 처음에는
언어와 개념의 세계가 끝나고
모든 세상적 관계가 점점더 아득하게 멀어지기 시작하는
그런 아지랑이 속 같은 상태가 온다.
그속에 깨어있는채 좀 머물다보면
모든것이 처음처럼 서서히 맑게 비치며 새로와지기 시작한다.
모든것은 이제
그이름이나 형상적 가치같은 것이 중요하지 않으며
그냥 존재자체로서 나타나고 다가오기 시작한다.
존재만이 순수한 존재로서 다가오고 물러가는 세계.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떠받치는 그배경의
미지의 공간이 빛속에서 드러나는 신비로운 세계.
이렇게 되면 그대는 이제
아주 어린아이의 순수하고도
그러나 그어디에도 머무르려 고집하지 않는
무의지적인 본성의 자연스러운
본래상태속에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체험되면
그다음에는 그러한 존재방식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하루의 대부분을
명상한다는 자세를 취하거나
의도를 갖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이 그러한 분위기속에
존재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명상에서
아주 중요한 문지방을 넘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에고(잠시 상락아정을 맛보더라도 그것은 아직 에고가 욕심내는 상태이다)에서
우주의식,본성의식으로 존재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자연스러이 자기가 바뀌고 존재가 변형되어
스스로 의도하지 않아도 자기안에 세번째 요소인 섭리적 그무엇
(나는 이것을 기독교 용어를 빌려 성령(聖靈)이라고 부른다)이 임재하는 것이다.
(2)
이제 이런 상태가 되면
세상사는 단지 평화로운 거대한 침묵속에 바라다보는
슬로우 비데오(slow-video)와 같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개념과 단어만이 난무하는 겉세상과는
현격한 거리를 둔 피안에 존재하는 미지적 존재임을 자각하게 될것이다.
왜 미지적 존재라고 말하는가?
더이상 자신이
과거의 그가 아님을 스스로 너무나 잘알게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느끼기에
자신은 더이상 과거의 아무개라 이름 붙여진
육체가 아닌 그어떤 미지의 신령스러운 눈에 보이지 않으나
충분히 스스로에게 감지되는 에너지같기도 하고
마음이전의 그어떤 영성체(靈性體)같은 자각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그의 내면에는 그러한 상태나 존재방식을 사랑하고
충분히 즐기는 감정과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우리가 음악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적인 말과는
다른 느낌의 신비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세계(존재방식)속에서는
새로운 감각과 느낌속에서 존재의 본성에 대한 깨어남의 예지가
번득이기 시작하는 가슴벅찬 감동적인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아름다운 이성을 처음만나
막 설레이는 가슴으로 사귀기 사작하는 상태와도 같다.
기존의 명상선생들이나 스승들은
그런것을 잘모르기도 하고
무조건 버리라고 무식한(?) 소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본성적인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품에 안긴 본래적 의식속에서 엄마를 알아가며 느끼는
그런 푸근하고도 애틋하며 아련하고도 충만한 사랑과 동경심 같은 것이다.
나는 이제 당신에게 그것을 찾으면
그것속으로 더 깊이깊이 들어가라고 충고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을
성숙하고도 고상한 성인남여가
정신적으로 하는 정열적인 사랑으로까지
키우고 승화시키라고 말한다.
그것에 충분히 열중하고 빠져서 누려라.
그것은 그동안 그대가 수행하고 진리를 찾는다고
고생했던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십대초반의 소년소녀가 하는 첫사랑같이
순수하고 아련하게 시작하지만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윽고 그것은 아주 뜨겁고 정열적인 사랑과 정열이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중에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카타르시스(절정체험;peak experence)나 쾌락, 열락과 법열이 솟아오른다.
인도의 성자나 고도의 수행자들이
길거리에서 몰아지경에 들어 웃고 앉아있는 것은
바로 이경지에 들어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보통사람들이
최고의 쾌락으로 치는 섹스나 음악삼매,춤삼매등이 주는 쾌락과 비할바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단단한 고기가죽을 고기로 알고 씹다가
진짜 안심을 만나 맛보는 것과도 같다.
무아지경속에서 자기 육체를 잊는 것은 보통이며
때로는 다른 차원의 존재방식
(영계출입이나 우주적 무변허공으로의 파동적 존재방식등)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적인 사랑이 끝까지 성숙해지면
마침내 그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있다.
(그것에 대해선 붓다존에서 소개하고 가르치려고 한다)
여하튼 명상이란
세간에서 수박겉만 핥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공(空)이나 무(無)가 되는 것이 최종적 목표가 아니며
그것은 단지 방편으로서 개체의 내가 공과 무가 됨으로서
그다음에 자연스러이 나타나는 우주적 본성의 율려와 향연을 누리며
스스로 전체이되 동시에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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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음악
영혼을 울리는 명상의 음율
'오늘'이란 너무 평범한 날인 동시에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 괴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