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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시각장애인을 향한 희망 청사진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는 김선태목사
경제가 어렵다. 세상이 험악하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욱 선명해진다. 교회가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 하는 시기이다. 그리스도인이 희망이 되어야 하는 때이다. 선교, 목회, 봉사의 현장에서 빛이 되고 희망을 주는 이가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실로암 안과 병원장 김선태목사(68).
그는 시각장애인이면서 다른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성자이다.“땅에서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하늘이 주신 소망으로 다시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수많은 성경 인물 중에서 우리 성직자와 성도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아마도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그의 생애는 온전히 복음을 위한 헌신과 봉사였기 때문입니다. 저의 선교활동을 사도 바울의 사역과 비교한다면 실로 부족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를 사랑하셔서 큰 상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또 상을 주시는군요. 월간 더 프라미스(The PROMISE) 창간호의 표지 모델을 시켜주시다니...제 코가 복 코라서 좋은 일이 많이 생길거라더니 그 말이 맞긴 맞군요..하하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쟎아요.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구요. 저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힘 들때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헤쳐왔는데 아무쪼록 더 프라미스(The PROMISE) 편집진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선교의 사명을 다하기를 기도합니다.”
The PROMISE 창간호를 기획하면서 편집진은 커버스토리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여러 차례 회의를 하면서 고심했다. 창간호 커버스토리는 The PROMISE의 정체성 및 지향점과 관련해 상징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The PROMISE가 수많은 크리스천 대상자들 중 커버 인물로 유독 김선태 목사를 선택한 이유는 그가 그의 삶을 통해 세상적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해 온 리얼 크리스천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부흥회를 위해 미국 L.A에 체류 중이다. 이 기사는 장시간의 전화 인터뷰와 자서전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상
김목사는 그동안 한국에 희망을 주는 ‘남자 헬렌켈러’ 라고 불리며 1981년 보건사회부 장관상 수상을 시작으로 대통령 표창(‘85), 국민훈장 동백장(’89), 호암상 사회봉사상(‘98), 막사이사이상(2007), 국민훈장 모란장(2008)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특히 2007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리핀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부문을 수상하면서 교계는 물론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갖게 했다.
그 당시 김선태목사의 막사이사이상 수상은 단지 장애를 극복하고 수많은 시각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전한 그의 개인적인 삶에 박수를 보내는 의미뿐만 아니라 한국 교계의 섬김과 봉사가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그는 막사이사이상 시상식에서 “개인의 상이 아니라 실명 예방과 개안수술을 도와주신 많은 분들을 대신해 받는 것‘이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어찌 그 사역의 길이 꽃길, 비단길이었겠는가?
최근 희망의 사도로서의 그의 삶이 자세히 소개된 그의 자서전 <땅을 잃고 하늘을 찾은 사람>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는 가운데 김목사는 그동안의 사역의 길을 회고했다.
“사실 넉넉한 선교자금 없이 선교활동을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업신여김과 외면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선후배를 찾아가 선교비를 도와달라고 하면 외면하면서 마지못해 돕는 경우를 여러 차례나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를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 하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감사한 마음으로 제게 주신 사역을 열심히 해 온 것입니다.”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결식아동을 도왔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굶주림의 연속이었다. 굶어 죽기 직전의 그녀를 구해준 것은 유엔아동기금의 구호물자였다. 그녀는 과거의 아픔을 떠올리며 죽는 날까지 이 단체의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김선태 목사의 사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가난한 사람, 앞 못 보는 사람들의 고통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땅을 잃은 사람
“저는 세상 적으로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해, 그 때 제가 열 살이었는데 폭격으로 부모님을 여의었고 파편으로 두 눈의 빛도 잃었고 친구도 잃었고 친척도 잃었고 건강도 잃었습니다. 부모 없는 고아가 게다가 두 눈까지 잃었으니 그 고생이 얼마나 심했겠어요? 친척집에서 구박을 엄청 받았어요. 하루는 밥 밑에 숨겨둔 양잿물을 마시고 죽게 생겼길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고통에서 벗어난 것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친척 집에서 탈출을 시도했어요. 한마디로 오 갈 데 없는 거지가 된 것입니다.“
난데없이 떨어진 폭탄으로 부모를 잃고 시력마저 상실한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을까? 세상은 온통 혼란스러운 전쟁의 소용돌이에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하루하루 힘겨운 생존투쟁을 벌여야 했던 소년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그저 하나님께 매달리는 일이었다. “하나님, 이 생명을 지켜주신다면 앞으로 목사가 되어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혼자만의 기도였지만 그 기도는 응답을 받았고 앞을 볼 수 없었던 그 소년은 시각 장애인의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준 목회자가 되었다.
추운 겨울, 그는 밖에서 잠을 자다 한쪽 다리가 동상에 걸려 썩어들어 가는 고통을 겪고 또 앞을 볼 수 없으니 상한 음식을 얻어먹고 식중독에 걸려 죽을 뻔도 했다. 온 몸에 옻이 올라 진물이 줄줄 흘러 마치 나병환자처럼 되었을 때 주일만은 지켜야한다고 믿었던 그는 예배드릴 교회당을 여기저기 찾아 나섰다.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쫓겨나야 했던 그 때마다 주님께 눈물로 호소했다.
"저 사람들이 보기에는 천한 거지이지만 언젠가 제 참모습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수모들을 능히 견딜 용기를 주세요.“
겉모습은 거지이지만 하늘나라 왕자다운 마음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소년 김선태. 동냥한 돈 중에서 가장 깨끗한 돈을 주일 헌금으로 바쳤고 동료 거지들과 나눔을 통해 왕초가 되기도 했다. 섬기는 리더십이 먹힌 것이다. 주변 거지들의 사랑과 신뢰를 차지했던 그는 거지 왕국에서 풋내기 전도사 역할까지 맡았다. 그 시절 그를 버티게 해 준 신앙의 근본은 주일학교에서 자란 순전한 믿음 덕분이었다.
“한번은 전라도 마을에서 옻나무를 가득 쌓은 남의 집 창고에서 잠을 자다가 온몸에 옻이 올랐어요.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갔죠.” 그 때 평생의 은인이 된 한 할머니가 그를 집으로 데려가 간호를 해줬다. 크리스천이었던 할머니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고 목회자의 삶을 꿈꾸게 된다.
“다 낫고 나서 할머니가 그러시대요. 나는 돈은 없지만 일평생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앞으로 세계를 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훌륭한 종이 되어다오‘ 저는 그 꿈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고아원에서 살면서도 그는 학교를 빼먹지 않았고 성적도 우수했다.
“점자로 공부했죠. 반 친구들이 8시간 잘 때 저는 5시간만 잤어요.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빵과 물로 배를 채우며 공부했어요.”
그렇게 시각장애를 가지고 일반인들과 함께 숭실중, 고등학교를 마친 당시 그는 박사 학위 3개를 따는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뤄간다. 헬렌 켈러도 박사 학위가 3개였다.
“헬렌 켈러처럼 가난하고 앞 못 보는 이들을 돕고 싶었어요. 그런데 박사 학위가 있어야 제게 현실적인 힘이 생길 것 같았죠. 희망을 주려면 제 자신부터 극복하고 성공하는 삶을 이루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대학갈 길이 막히고 말았다.
“5.16 군사 정부가 새로 손질한 문교 정책이 장벽이 되었어요. 대학에 가려면 국가고시를 봐야 했는데 당시에는 앞 못 보는 사람은 국가고시를 볼 수 있는 길이 없었지요.”
그는 문교부를 찾아가 매달렸다. 그러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서른 두 번이나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했어요. 결심을 했지요. 훗날에도 공부하고픈 시각장애인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자고 말이죠.”
그는 무작정 문교부 장학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작대기를 들고 휘둘렀다.
“마침 신문기자들이 와있더군요. 앞을 못 보는 제가 그들의 눈길을 끌었죠. 결국 기자들이 장관실로 데려 가더군요.”
문교부 장관은 그에게 국가고시를 볼 수 있는 특전을 주었고, 그는 시험을 거쳐 숭실대에 입학했다. 이후 장신대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을 전공했고, 미국 매코믹대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땄다. 훗날 명예 철학 박사학위와 명예 신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헬렌 켈러 이후 처음으로 세 개의 박사학위를 가진 시각장애인이 된 것이다.
청빈과 가난은 그에게 있어 훈련이라기보다 현실이었다.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에 하루 한 끼씩 금식할 수밖에 없던 대학 시절, 점심을 굶으며 산책하면서 그 시간을 명상과 주님과의 교제에 바쳤다. 그가 단벌의 옷으로 2년을 버티었던 것 역시 수도자로서 필히 걸어야 할 무소유의 삶을 걸었다고 고백하는 김선태 목사.
하늘을 찾은 사람
그는 공부를 마친 후 넉넉지 못한 중에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회를 세우고, 점자 성경과 점자 찬송가를 소개했다. 또 앞을 못 보는 1,00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석사,박사를 배출했고 1986년에는 재계의 지원을 받아 서울 등촌동에 실로암 안과 병원을 세우는 주역이 되었다. 지금까지 개안 수술로 어둠에서 밝은 빛을 찾아 준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른다. 또 실명 위기에 처한 35만 명에게 무료 안과 진료를 실시했다. 최근에는 46인승 리무진 버스에 안과 시설을 갖추고 돈이 없어 진료를 받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김목사의 선교활동은 국내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미 중국을 비롯한 해외 각 지를 순방하면서 수많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시술받게 함으로써 광명을 찾아주었다.
쉽지 않은 일을 꾸준히 해 올 수 있었던 힘을 김목사는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주님의 사랑 덕분이라고 이야기 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모습을 그릴 때 ‘체휼하는 그리스도’라는 이미지를 사용했는데, 제 몸 속에 그 느낌이 흘러들어오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걸렸어요. ‘체휼하다’는 말의 영어는 ‘동감’이라는 뜻의 'sympath'쟎아요. ‘sym'은 ’with' 곧 ‘함께이고, ’pathy'는 ‘passion' 곧 ’열정‘ 이란 뜻으로 이 둘을 합한 'sympath’는 ‘동감 한다’, ‘동정 한다’, ‘상대방과 똑같이 느낀다’는 뜻으로 풀이되는데,,그렇습니다. 체휼은 몸으로 상대방의 고통이나 아픔을 자기 것같이 느끼며 나눈다는 ‘고통의 참여 및 분담’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까지 달려온 인생 여정은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아파하시는 깊은 사랑의 여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그래서 아무리 험난한 길,사망의 골짜기와 같은 길이었어도 나와 함께 울고 웃고 부르짖으시는 그리스도로 인해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거듭 강조하는 김선태목사에게는 이처럼 체휼하는 그리스도 사랑을 실천하며 그를 보필해 온 동역자가 있다.
“일본 시각장애인들의 희망의 등불인 이와하시 다케오란 분이 있어요. 그가 실명했을 때 자살시도를 했는데 그의 아내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당신 곁에 하나님과 내가 있는데 왜 절망합니까? 내가 당신을 위대하게 만들게요. ’그러고선 남편을 데리고 영국에 가서 에딘버러대학에 입학을 시켰죠. 돈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었어요. 이 부부의 식사 에피소드가 그걸 말해주는데, 어느 날 아침 식사 시간에 한 사람 분의 식량밖에 없었대요. 그것을 눈 먼 남편에게 다 주고 자기는 빈 접시에 포크질을 하며 먹는 척을 했답니다. 남편은 이상하다 싶어 부인의 접시를 만졌죠. 역시 빈 접시임을 알게 된 남편은 아내에게 사연을 들은 후 굳은 결심을 했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위대한 지도자가 되어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겠노라고. 그리고 그는 실천했습니다. 제게도 이와하시 다케오 만큼이나, 아니 더 훌륭한 아내가 곁에 있습니다”
바로 40여 년 동안 김목사의 눈과 발이 되어 준 김정자사모(67)가 없었다면 오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김선태목사. 김목사는 부인과 두 딸이 있어 얼마나 감사한 지 모른다고 했다. 모든 것을 잃은 후에 하늘을 구하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은 귀한 가정을 선물로 주셨다고. 큰 딸은 성악을 전공하고 작은 딸은 피아노를 전공해 각 자의 길을 성실하게 걸어가고 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의 짐, 고통의 짐, 불행의 짐을 대신 져주시고 우리의 좌절과 슬픔을 행복과 평안으로 바꿔 주십니다. 나는 힘겨웠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면 주님께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던 모습, 로마 병정들에게 욕설을 들으시고 발로 차이시고, 온갖 고난을 받으시던 모습을 생각하곤 합니다. 내가 메야했던 십자가, 내가 받아야 했던 고난, 내가 당해야했던 형벌을 주님께서 대신 당해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내가 겪었던 작은 고통들이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고난의 은총임을 이제야 알 것 같아 더욱 감사드립니다.”
신약시대 믿음을 대표하는 12사도들 중에, 어떤 이는 참수 당했고 어떤 이는 십자가에 달렸으며 어떤 이는 돌에 맞아 죽었다. 어떤 이는 처형당하고 몸이 채찍에 갈겼으며 고통과 이별, 슬픔 속에 살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 가지 소망이 그들을 기쁘게 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이었다. 그들은 그래서 이 땅에서는 어렵고 힘들었으나 행복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가시를 없애달라고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역설적인 응답으로 “내 은혜가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고 하셨다. 사도 바울은 자랑거리가 있다면 자신의 약함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는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김선태목사 역시 육신의 약함을 통해서 큰 은혜를 경험했다고 말하며 인생의 고통의 가시가 불행과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약함 속에 깊은 은혜를 깨달았기에, 이 땅에서 그 은혜를 더 나누고자 더 큰 꿈을 준비하고 있다. 올 해말 완공되는 실로암 아이센터가 바로 그것이다.
김선태목사는 막사이사이상 수상 후 상금 5만 달러를 실로암 아이센터 건축 헌금으로 드렸다.
전 세계 시각장애인을 향한 희망 청사진
“‘실로암’은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간헐천의 이름이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성경을 읽고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실로암 아이센터에서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한국은 물론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돈 때문에 개안 수술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아이센터는 150억 원의 건축비가 필요하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사람들은 절망적인 말을 한다. 그러나 김목사는 할 수 있다고 믿고 추진했다. 왜냐하면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 자신은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주님의 일꾼으로 유의웅 실로암 아이센터 상임 위원장과 김건철 건축위원장을 붙여주셨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한 동역자인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성을 믿는다고 강조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5,000명 중 5명을 선택해서 5개의 떡을 나눠주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작은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기적을 창출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셨죠. 예수님은 ‘너는 먹고 너는 굶어라’가 아니 ‘모두가 먹으라’는 승리의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의술은 최상의 선교 도구입니다. 아이센터 건축은 하나님의 명령이지요. 병원이 곧 선교센터입니다. 바자를 열어 수익금을 보내온 교회도 많고 재활용품을 되팔아 병원 한 칸 건축비를 보내온 분도 있습니다. 의료선교를 가려면 최소한 다섯 명의 의료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올 해부터 ‘1030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1,000 교회가 매월 30만원씩 지원하는 운동이지요. 이 운동이 정착되면 아이센터를 중심으로 수많은 선교사들이 해외에 나갈 수 있습니다”
지난 해 실로암 안과 병원에서 16,781명이 무료 진료를 받았다. 무료 개안 수술을 받은 사람도 1,280명에 이른다. 중남미에서 우리에게 의료선교를 요청해 오고 있다고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면서 ‘너희들도 나의 일을 본 받으라’고 말씀하셨어요. 사회의 약자인 시각장애인을 위해 사랑을 베푸는 것이 바로 제자의 삶입니다. 아이센터는 돈으로 짓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와 헌신의 결정체입니다. 올 연말이면 세계 최대의 안과 전문 병원이 대한민국에 세워질 것입니다. 신앙과 실력을 겸비한 의사들이 지구촌을 순회하며 의료선교에 나설 것입니다. 아프리카와 중남미는 우리의 주요 목표입니다”
김목사는 모두가 힘든 이 때,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고 말한다. 사랑은 고난의 때에 비로소 위력을 발휘한다고. 우리의 작은 사랑이 기적의 재료가 된다고. 우리가 예수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야 한다고.
영국에는 밀턴이 있었고 미국에는 헬렌켈러가 있었고 일본에는 이와하시 다케오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주었듯이 한국에는 땅을 잃고 하늘을 찾은 사람 김선태목사가 희망의 빛을 주고 있다.
전쟁고아, 그것도 앞 못 보는 소년 거지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하늘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하고는 그 숱한 역경 속에서도 마침내 목회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지킨 김선태 목사.
그리고 성공해서 소외되고 약한 자를 돌보겠다고 울부짖으며 하늘 향해 쏘아 올렸던 기도를 실천하고 있는 김선태 목사.
그가 살아온 삶이야말로 한국 교계와 혼탁한 우리 사회를 향해 던지는 통렬한 메시지이다.
그의 소망에 많은 기독교인들의 진정한 나눔과 섬김이 어우러져 지구촌 곳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해지길 기대하며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