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곳에서 아는 지인이 오신다해서(거의 십년만이다) 그 반가움을 무엇으로 전할까 고민했다. 꽃은 곧 시들어 꽃도 사람도 쓸쓸해질 것이고 새나 동물은 좋아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민폐가 될 것이고, 뿌리가 있는 식물이 좋겠다 싶었다. 그러나 화분이란 것은 식물들에겐 유배 생활 같은 것이어서 오랫동안 건강하게 돌본다는 것이 꽤나 신경을 쓰게 만들것 같았다. 그분의 정신적인 깊이로 치자면 난초 같은 귀한 식물도 자생할만한 토양이지만 평소에 별로 호감을 두어 본 적이 없는 식물이라 선뜻 내키지 않았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나는 어쩐지 비싸고 까탈스러운 물건과는 인연이 없다. 내가 기르는 개도 발바리 똥개고, 내가 한 오년간 함께 살아 온 식물도 개운죽이라 불리는카메룬이다. 근친종족들과 주로 교배를 하는 애완견 품종과는 달리 동네방네 눈 맞은 개와 들판에서 제 맘 내킨 사랑만 나누는 발바리는 생명력이 강하다. 웬만하면 피부병이나 소화 불량이 없고 똑똑하고 발랄하다. 또한 개운죽 역시 물만 주면 자란다. 나 역시 잘 먹고 일 잘하고, 지갑에 만원짜리 한 장 없이도 어떻게든 몇일을 버틴다. 그런 내가 가장 경멸하는 가치는 희소 가치다. 귀하다며 내가 볼때는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것중 정말 귀한 것을 별로 보지 못한 까닭이다. 다이아몬드, 샤넬 가방, 로렉스 시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몇 억대의 외국 자동차, 몇백만원이 넘는 옷들…단지 흔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가치가 귀해지는 것들, 그것을 소유하는 순간 혹시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상하지는 않을까? 내 마음까지 그 물건에 저당잡혀야하는 물건들을 가깝게 할 수도 없거니와 가깝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한 숟가락의 밥과 그 만큼의 다이아몬드를 바꾸어야할 이유가 내겐 없다. 뭐에 쓸것인가? 내가 항공기나 우주선을 만들어야한다면 부품으로라도 사용하겠지만(?) 먹을수도 없고, 손가락에 꿰차면 설겆이 할때마다 걸리적 거릴 것이고 밥 한 숟가락만큼 그것이 내집에 있다면 열쇠를 채우지 않고 외출도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밥 한 숟가락만큼 그 물건을 사려면 평생 먹을 밥을 다 팔아도 모자랄 것이다. 꼭 반지가 갖고 싶다면 시내 차없는 거리 리어카에서 한개 사도 내겐 한참을 들여다볼만한 호사가 된다. 날이면 날마다 식당 밥그릇을 씻느라 돼지 앞발처럼 불은 손가락에 과분한 호사다. 그래서 나는 식물도 희소가치와 거리가 멀면 멀수록 눈길이 간다. 언제부터인가 서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이 꽃도 열매도 보이지 않는 이 식물이 우리나라 도로가의 코스모스처럼 웬만한 사무실, 식당, 점포, 가정집, 우리나라의 실내라는 실내는 거의 장악을 하다시피 퍼져 있다. 나는 처음에 대나무의 일종인줄 알았다. 작은 토막들을 끈으로 묶어서 얌전하게 앉혀 놓은것부터 키가 내 가슴까지 닿는 훤칠한 녀석들까지, 어떤 때는 한달이 넘도록 물을 갈아주지 못해도 얼굴빛깔하나 변하지 않고 생글생글 새로 돋은 잎을 내밀고 있다. 식물에서 군자의 덕을 찾는데 사군자의 하나인 난초가 조금만 물을 적게 주거나 많이 주어도 금새 상이 노래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사의 덕이다. 겨울이 와도 땟깔을 바꾸지 않고 곧게 자라 대나무가 군자라는데 절개와 기개 또한 물 한모금에 바쳐지는 이 푸름만할까 싶다. 국화는 초목이 시들어가는 가을에 꽃을 피워 군자의 절개와 고고함을 비유한다는데 이 또한 물 한모금에 난 자리를 버리지 않는 개운죽에는 무색하다. 매화가 겨울에 꽃을 피운들 화무십일홍이다. 봄이 오나 여름이 오나 가을 겨울이 와도, 애지중지 닦아주고 뿌려주고 하지 않아도 환기도 잘 되지 않고 볕도 잘 들지 않는 거의 반지하나 다름 없는 집에 푸르른 덕을 베풀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사를 왔더니 키가 쑥쑥 자라 커튼을 대신해주기까지 한다. 학식이 높고 인품이 좋으면 뭣하나, 저 혼자 깊고 높아 맹자왈 공자왈하는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한 묶음 만원 헐값에도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선들선들 주방 냄새 찌든 우리집까지 와서 볕도 흙도 탓하지 않고 어쩌다 주는 물 한바가지에도 한두달 거뜬한 이 푸름이 군자의 덕이라 생각한다. 이 푸름의 덕은 잘 나가는 제자를 많이 둔 훌룡한 교수님의 서재나 대통령 접견실에서 까탈스럽게 베풀어지는 덕이 아니라 아무리 못사는 집 지하 단칸방 신발장 위에도 한 토막씩은 베풀어지는 만인의 덕 만덕(萬德)이다. 텃밭에서 똥물을 마시고 자라도 만인의 식탁에 제 푸름을 베푸는 상추나 배추나 벼의 덕이다. 만약 옛 선비들의 사군자가 상추 보리 벼 목화 였다면 몇 천년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헐벗지 않았을 것이다. 백성들의 사군자를 착취해서 부른 배를 두드리며 온실속의 군자들끼리 모여앉아 들판이나 산이 아니라 화선지 위에 뿌리고 거둔 식물들이 사군자 아니였던가? 겨울에 꽃 피고, 깊은 산중에 오래 향기롭고, 가을 무서리에 꽃 피고, 겨울에 푸르고 휘지 않고 곧다는 것, 이 모두 어떤 식물이 지닌 희소적인 가치에 들인 눈독들 아닌가? 좀 배웠다고(군자의 덕목에 가장 먼저 꼽히는 높은 학식) 어떤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무지하고 서러운 사람과 함께 나누지 않은 것 아닌가? 배불리 먹이고 입히고 닥나무처럼 종잇장이라도 한 장 내주는 보편적이고 따뜻한 가치를 숭상했어야할 사람들이 자신들끼리의 정쟁이나 권력 다툼에서 필요로 했던 의리나 절개 따위를 절대 가치로 내밀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식물은 볕을 보고 자라면 곧게 자란다. 사람도 따뜻하고 배부른 쪽으로 살게 되어있다. 의리나 절개 따위 강조하지 않아도 따뜻하게 해주고 배부르게 해주는 사람에게 의리를 맺고 절개를 가질수 밖에 없다. 춥고 배고프니까 의리고 나발이고 없는 것이다. 얼어죽고 굶어죽더라도 우리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것인가? 뱃속이 텅빈 대나무가 되라는 건 그런 뜻인가? 원래 식물이란 사군자가 아니라 천군자 만군자 억만군자다. 말 많고 욕심 많고 의리 없는 식물은 없다. 한번 씨뿌린 자리를 사람이 억지로 옮기지 않으면 바꾸지 않는게 식물의 천성이다. 배에 구멍을 뚫고 산채로 수액을 뽑아가도 아! 소리도 내지 않는다. 사람 중에 군자라는 자들이 한 철 살다가는 풀 한포기 만큼만이라도 군자라면 참 세상 푸를 것이다. 괜히 산중에서 군자 노릇 잘하고 있는 풀을 뽑아다가 부잣집 거실에 유배 시켜 놓으니 식물의 품성도 악에 받혀 까탈스러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너무 멀리 왔다. 그래서 하는 얘긴데 오늘 만날 그분에게 우리집 베란다의 군자 개운죽을 하나 뽑아다가 선물 해야겠다. 우리 아이들의 배고픈 사춘기와 나의 생활고와 술주정과 우리집 개의 청춘을 고스란히 엿듣고 엿보고도 묵묵히, 그 푸른 천개의 손가락으로 다둑이고 덮어주던, 한 모금 물을 선식처럼 마시고 사는 군자라기 보다는 도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