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군 오천읍 문충리에 있었다는 포은선생 생가 터 라고 주장하는 곳을 사진에 담아 보았습니다,
마을 입구 부터 차례 대로 올려 봅니다,
입구에 마을 회관이 서 있고,,,
여기가 정포은(鄭圃隱) 고향 마을로 생가 터 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지요,
여기는 포은선생께서 태어난 마을이나 포은선생에 대한 교육이 현재 아이들에게 교육이 없어서 아이들은 이 마을에 유래된 선생의 이야기를 모른다는 아쉬움을 표현한 돌비가 자그만 하게 서 있구요,
마을에 들어 서니 수령이 오래된 나무아래에 수원김씨 비가 있었습니다,
*옛 부터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에 이 마을은 포은 정몽주가 태어난 마을 이라 했답니다,
실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살펴 보면, 수월재공 수원김씨 김현룡(金見龍) 실기에~ 김공께서 남기신 글에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의병들을 모집할 당시 김선생의 격문에서 5월에~이 마을 고장은 포은선생의 고향의 고장으로 문(文)과 충(忠)이 있는 곳 으로 왜놈이 처들어와 이 고장을 더럽히고 있으니 우리는 분분히 일어나서 적들을 물리처야 하겠다...하셨고,
*우암 송시열은 영일현을 가리켜서 군자지향(君子之鄕)이라고 했다, 즉 君子의 고향 영일은 포은선생의 학문과 忠의 정신을 이어받아 집집마다,충신과 효자가 넘쳐 난다고 하였으며, 곳 군자의 사람들은 나라가 위급할때 마다 나라를 위해 온몸을 던졌다 라는 것으로,이 고장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도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을 무찌른, 이 일대의 영일,흥해,장기,죽장,기계,각각의 사람들이 고려의 충신 포은선생 학문과 충절의 정신을 이어받아 나라를 지킨 선비들이란 것입니다,
또 조선 영조임금 시에 부터 남성설단을 지어시려고 끝없이 힘을 쓰신,훈지수 양수(훈수:정만양,지수:정규양 형제분)선생께서 우리 오천정가 시조님(형양공:정습명)의 산소를 찿으려 다니실때 남기신 말씀에~ 옛 나이 많으신 어른분들의 말씀에 이곳은 오천정씨의 고향으로 높으신 정씨 어른의 집 터 라 전해 진다고 하였고,~ 양수선생께서 그 산소를 찿으려 수소문 하여 찿아 설단을 지은 곳의 남성제 자리에,,,옛 늙은 선비들이 이 곳이 고려때 유배 오신 鄭氏가 죽은 자리라 했다고 전해지니, 그 자리에 설단을 지었다고 합니다,
저기 보이는 빨간지붕 옆자리가 포은선생의 생가 터 라고 전해지고 있다지요,
가르키는 그 터는 빈 터로 현재는 밭을 일구고 있었습니다,
글쎄요~ 내가 보기엔, 옛날 집 터 라고 보기엔 풍수지리 설론 적합하지는 않아 보이고,,, 구지 본다면 빨간지붕 집 뒤산 아래 양쪽으로 뻗은 대나무밭 아래가 적합 했지 않았나 보여집니다,
아묻튼 이 마을이 옛날 鄭氏의 마을이라는 것엔 사실인것 같으나,포은선생의 출생지는 영천 임고 우항리 입니다,
영천의 고장은 대대로 오천정씨의 집성 고장으로,포은선생의 마을 우항리엔 고려 공민왕이 정몽주에게 부모상(喪)을 양부모 모두에게 3년 시묘살이를 하여 부모에게 효(孝)를 다 하였다고 하여 이 마을에 효자비를 내려 세웠 답니다,
조선조 명종시(1553)년에 포은선생의 방손이신 노촌 정윤량(魯村 鄭允良)께서 영천 임고 고천리 부래산 아래에 임고서원을 창건하여 우리나라 2번째로 서원사액을 받았고,,,
선조임진년에 왜놈이 처들어와서는 노촌공의 아들,호수 정세아(湖수 鄭世雅)와 그의 아들 정의번(宜藩),정안번(安藩),정수번(守藩),부자(父子)분이 책과 붓을 던지고 분분히 일어나 의병을 모집하여 향리의 모든 선비들과 사람들이 호수 정세아를 영천의병장으로 추대하여 그로 하여금 영천복성과 경주성을 탈환 하였지요,
또 임진란이 평정되자 (1603)년에 호수 정세아는 왜란때 불탄 임고서원을 고을의 선비들과 유림들을 설득하여 임고서원을 복원 하였답니다,(불탄 서원을 호수 정세아께서 처음 발의하여 선비들의 대표하여 담당을 복재공 정담을 책임자로 정하여 복원함)
임고서원은 그 후에도 호수공 정세아의 손자 명계(明溪)공 정호의(鄭好義)가 유림의 장으로 관장 했고, 1643년에 여헌 장현광,1727년에 지봉 황보인 선생을 추향 하다가 고종8(1871)년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계령이 내려,철거된 것을 1965년에 호수공 후손들이 유림의 도움을 얻어서 영천 임고 우항리에 복원하였고,이때 부터는 서원에 포은선생 만 봉향 하였다,
서원 창건 부터 대대로 오천정씨 노촌공 후손들이 힘써 관리를 해 왔으며,대한광복 후에도 꾸준히 그 후손들과 유림들이 보수 관리 해 오다가,,, 내가 기역 하기론 나의 3종숙께서 서원 총무를 하셔실 당시 1986년 쯤 하여 영천시와 문화재청에 건의하고 건의하여,확장 공사를 하여 오다가 현재의 임고서원 복원공사를 폭 넓게 하여 1차 산업을 이어 2차 산업의 공사에 포은선생 생가 집을 복원하는 중이랍니다,
첫댓글 포항이 포은 생가터이고 고향인데 태생지가 현재 영천 임고로 되어 있지요.
여기서 재미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포항이 태생지다.영천이 태생지다 서로 주장하며 싸우고 있었는데,,,
큰인물이 태생지가 되면 그지방 네임밸류가 올라가지요.
위에 나오는 노론 영수 우암 송시열(이조실록에 이름이 왕보다 많이 나오지요,아마 3000번인가?)
님이 포은 태생은 영천 임고다 했답니다.
이 내용 때문에 포항은 큰 소리 못치고 있지요.
옛날엔 여인들이 주로 친정에서 몸을 풀었지요.
영해 괴시리에 가면 목은 이색 비가 있다..
나는 의아하게 이해가 안되든데...
알고보니 외가에서 태어났더군요.
영해 남씨 본거지인데;;;
영해읍 괴시리는 양동 마을 처럼 동네 전체가 의리의리한 기와집 고가들이 마을 전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남이 장군이 영해 남씨이고, 남이 장군 모친이 세종 여동생입니다.
그러니 남이 아버지가 부마지요,대단한 집안이지요.
남이는 이시애난을 평정하고,병조판서 까지 한분인데...
이런 집안에서 조차 목은 이색비를 마을 한복판에 세웠더군요,
참고로 목은,포은은 영남학파 원조입니다.
@세상알기 님의 의견에도 존중합니다,
문충리 마을 분들도 하시는 말씀은 포은선생 생가 터 는 정확한 것이 없고,다만 국부인 이씨께서 포은선생을 여기서 임신하여 영천으로 가서 회임했다는 야사가 있다고 하나, 자세한 문헌은 없다,라고 하더군요,,,
어쨌든 문충리에 포은선생 먼 선조님의 고향 이라는 것엔 의의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보)정정용 저도 야사내용은 알고 있습니다.어디까지나 야사지요.
오천에서 회임하신 건 맞고요.야사에도 나오지요.
원채 유명하신 분이라서 여러가지 설화가 있으서,,,,,그러느니 합니다.
문제는 옛날에 이조시대 때에 정확한 문헌이 없으서 포은선생의 출생지가 불분명해서
말이 많앗다고 합니다.영천쪽은 외가인 영천이다.포항쪽은 고향인 포항이다 라고 서로 논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종,숙종 때에 송시열이 영천이다.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이양반 어떤 근거로 했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후부터는 임고가 정설로 통하고 있다 합니다.
이에 현재 포항쪽은 반론을 못펴고 잇는 실정입니다.
두 선생 모두 훌륭한 분들입니다. 문충은 포은 선생의 시호입니다. 영천의 우리 일가들이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저는 포은선생 본손입니다. 감사합니다.포항 남성제때 서로 뵙지요.
아무튼 영천에 생가가 복원되어 10월 17일 준공을 앞두고 있다니 반갑고
내용 중 1965년 복원 우항리를 양항리로 바로 잡아주세요.
시간이 되면 참석할 예정입니다.
유서깊은 곳에 문명의 때가 묻어 있지 않아 더욱 정감이 갑니다.
포은조께 고향이 어디냐 물어보면 아마 한참 고민 하셨을 겁니다.
태어난곳은 포항이지만 정든곳은 영천이라 ..ㅎㅎ
영천.포항 모두 우리 영일정문의 소중한 장소성을 가진 곳이고
이렇듯 고향같은 정감을 주니 더욱 자랑스럽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