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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85. [역경의 열매] 이재서 (1-16) 열병으로 시력 잃고 절망 속으로
1965년 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중학교에 보내 달라고 떼를 쓰며 졸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집안 형편이 안된다며 대신 동네 서당에 보내주셨다. 제사 때 축문이나 지방은 쓰고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더 이상 공부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억울했다. 너무 슬퍼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하나님은 실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인도하셨다. 그것은 실명(失明)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1년 후, 난 원인 모를 열병을 앓았다. 눈 앞의 사물이 뿌옇게 보이며 두세 달 사이에 시력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이 약을 넣으면 나을 거야."
부모님은 나를 병원에 데려가는 대신 5일장을 떠도는 약장수에게서 약을 지어와 눈에 넣어주었다. 하지만 눈은 따갑기만 할 뿐 여전히 잘 안 보였다.
이런저런 약을 달여 마셨다. 7㎞나 떨어진 마을까지 다니며 두어 달 침을 맞기도 했다. 그래도 난 별로 걱정을 안했다. 어린 마음에 군대 간 믿음직한 형이 날 병원에만 데리고 가면 곧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66년 여름, 형이 제대할 즈음 내 눈은 이미 밤낮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형은 곧장 나를 데리고 서울로 갔다. 다급해진 아버지도 논을 팔아 서울 갈 경비를 마련해주셨다. 서울 무교동 K안과에서 수술을 받고 입원했다.
두 달 후 드디어 안대를 푸는 날, 의사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안대를 풀며 물었다.
"뭐가 보이니?"
"아뇨. 안 보이는데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사 선생님은 한숨을 쉬면서 형에게 말했다.
"혹시나 기대를 했는데 결국 안되는군요. 이 아이는 열병의 후유증으로 시신경이 손상됐습니다. 어떤 사람은 귀로 가기도 하는데 이 아이는 시신경에 영향을 주었네요. 현대의학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13시간 동안 완행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집에 갈 때까지 그 긴 시간 형과 나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동네에 들어섰을 때 형은 내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앞으로 내가 책임질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책임질게."
형은 평생 그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그 말에도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했다. 눈이 안 보이는 데 무슨 책임을 지겠다는 말인가. 형의 손에 이끌려 걸어가는 동안 나는 점점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재서 (1) 열병으로 시력 잃고 절망 속으로
* [역경의 열매] 이재서 (2) 너무도 억울한 생각에 죽음도 포기
* [역경의 열매] 이재서 (3) 글 배울 생각으로 맹학교 입학
* [역경의 열매] 이재서 (4) “난 네 개의 눈 중 하나만 잃었을 뿐”
* [역경의 열매] 이재서 (5) 점자책 읽으며 밤새 독서삼매경에
* [역경의 열매] 이재서 (6) 영어학원 걸어 다니며 갖은 고생
* [역경의 열매] 이재서 (7) 이름 모를 이들 도움 받으며 영어공부
* [역경의 열매] 이재서 (8) 배고픔보다 외로움이 더 큰 고통
* [역경의 열매] 이재서 (9) 빌리 그레이엄 목사 설교 듣고 주님 영접
* [역경의 열매] 이재서 (10) 낙향후 표현력 강한 나의 달란트 발견
* [역경의 열매] 이재서 (11) 교회학교서 시작한 영어수업 큰 호응
* [역경의 열매] 이재서 (12) 장애인 선교 위해 어렵게 총신대 입학
* [역경의 열매] 이재서 (13) 대학 3학년 때 ‘한국밀알선교단’ 설립
* [역경의 열매] 이재서 (14) 美 유학 10년만에 귀국,모교 교수로
* [역경의 열매] 이재서 (15) 제자들,편견없이 개인상담까지 요청
* [역경의 열매] 이재서 (16·끝) 장애인 사역 위해 한걸음씩 전진한다
◇이 교수는 1953년 전남 순천에서 출생했다. 서울맹학교와 총신대,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에서 석사학위, 럿거스대에서 사회복지정책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총신대 교수이자 세계밀알연합회 총재 등으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내게 남은 1%의 가치’ ‘밀알 이야기’ ‘사회봉사의 성서 신학적 이해’ ‘담장 밖의 울고 계신 예수님’ ‘기독교 복지의 근원’ 등이 있다.
***[역경의 열매] 이재서 (2) 너무도 억울한 생각에 죽음도 포기
사람이 희망을 가질 때와 절망할 때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병원에 가기 전 나는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렇게 괴롭진 않았다. 하지만 병원에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뒤 극심한 절망감이 몰려왔다.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종일 벽에 기댄 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우셨다. 밤마다 흐느끼시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동네 어른들은 그저 혀만 끌끌 찼다. 친구들도 몇 번 찾아오더니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내가 침울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머쓱해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절망은 고스란히 내 몫으로 남았다. 하루 종일 빛 하나 들지 않는 깜깜한 방에 갇혀 있는 상태가 지속됐다. 책을 볼 수 없고,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으니 정말 답답했다.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삶의 의미도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가족에게 짐이 되지 말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반복적으로 죽을 궁리만 하니 서서히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난 그때 새삼 깨달았다. 눈물은 그나마 고통이 가벼울 때 나온다는 것을. 눈물은 그래도 희망이 있을 때 나오는 사치품이란 것을.
죽으려고 마음을 먹으니 자연스레 뒤뜰에 있는 감나무가 생각났다. 돌담에 기대 있는 감나무는 평소 내 놀이터였다. 감도 따고 새도 잡았던 그 감나무에 목을 매 죽기로 결심했다.
일기장과 평소 소중히 간직했던 물건들을 아궁이에 넣고 불태웠다. 얼마 후 난 감나무에 끈을 묶고 목을 매려고 시도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하지만 죽기도 힘들었다. 결국 포기했다. 억울하다는 생각에 울음이 복받쳐올랐기 때문이다. 이대로 죽기엔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왜 내가 이렇게 죽어야만 하는가.
죽음이 유보된 대신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하루는 너무 길었다. 찾아오는 친구도 없었다. 그동안 봤던 것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있었던 일을 전부 떠올리고 내가 봤던 책도 기억해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 생각하면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면서 친구와 놀았던 기억, 고구마를 캐다 들켜 도망갔던 일, 개울에서 멱을 감고 물장난치던 일을 떠올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렇게 천천히 학교에 다녀왔건만, 산에 가서 나무하는 기억까지 떠올렸건만, 그래도 시간은 너무 많이 남곤 했다.
말을 하지 않고 하루종일 혼자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일터에서 돌아온 가족들은 대꾸도 하지 않는 나에게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날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역경의 열매] 이재서 (3) 글 배울 생각으로 맹학교 입학
1967년 여름. 형은 내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학교에 가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가지 않겠다고 했다. 병원비 대느라 집에 부담을 준 것도 미안한데 다시 돈이 들어가는 학교에 가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희망도 의욕도 상실한 내게 학교는 의미가 없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도저히 실명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앞 못 보는 사람들 속에 섞일 생각을 하니 속이 탔다. 그런데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혹시 거기에 가면 무슨 글자가 있을까?"
며칠 후 형에게 그걸 물었고, 형이 글자가 있을 것이라는 대답을 하자마자 곧 학교에 가겠다고 말했다. 고통스러운 날들을 글로 쓴다는 것, 그것이 내가 서울맹학교에 간 동기였다.
아버지는 반대했다. 앞이 안 보이는 애를 서울까지 보내 어쩌자고 그러느냐고 그냥 점치는 것이나 가르쳐 보자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형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재서를 이대로 둘 순 없어요. 앞 못 보는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곳이 있다고 하니, 거기에 보내 뭔가 살 길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형의 말에 어머니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자"며 동의해 주셨다. 반대하시던 아버지도 결국 동네에서 돈을 빌려 형의 손에 쥐어주셨다.
형의 손을 꼭 잡고 서울맹학교를 찾아갔다. 형이 교무실에서 입학 절차를 알아보는 동안 나는 밖에서 서성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합창 소리가 들렸다. 학교에서 배운 '그집 앞'이란 노래였다.
"누굴까? 혹시 앞 못 보는 아이들? 일반 학교 아이들이 왔나?"
잠시 후 아이들이 떠들썩하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깔깔대며 웃어댔다.
"저 아이들도 너처럼 앞을 못 보는 아이들이야."
형의 말에 난 깜짝 놀랐다.
'어떻게 저런 처지에 노래를 부를 수가 있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 저 아이들은 좀 모자라는 것이 분명해. 그러니까 저런 상황에도 노래를 부르지, 후…."
그것이 바로 당시 마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세상이 그 안에 존재할 것이라는 예감이 문득 스쳐갔다. 이 때 형이 말했다.
"재서야. 지금은 학기 중간이어서 입학할 수가 없대. 점자를 배워 내년에 시험을 치러야 한다네. 시험 때까지 점자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소개받았어. 그곳으로 가자."
67년 9월, 형과 함께 찾아간 곳은 서울 천호동 '오암원'이라는 기독교 기관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먹는 비용만 지불하고 입학할 때까지 머무르며 점자를 배우도록 허락 받았다. 점자를 배우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처음엔 글자 한 자를 손가락 끝으로 알아내는 데 1분도 더 걸렸다. 한 달쯤 지나니 어느 정도 쓸 수 있게 됐고 두 달째는 점자로 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점자를 배우며 나는 시각장애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재서 (4) “난 네 개의 눈 중 하나만 잃었을 뿐”
소년 이재서가 다녔던 서울 신교동 서울맹학교. 그곳에서 그는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1968년 3월, 점자 테스트를 거쳐 서울맹학교 중등부 1학년에 입학했다. 그토록 가고 싶은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기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 학교가 아닌 맹학교에 들어 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가슴이 아팠다.
서울맹학교는 초·중·고교가 함께 있는데 200여명이나 되는 전교생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했다. 뒤늦게 열일곱 살 중학생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나이가 적은 축에 속했다. 동급반 중에는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사람도 있었다. 실명하고 늦게 이런 맹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고 들어와서 그런 것 같았다.
나는 이 학교의 중·고등부 3년씩 6년을 다녔다. 입학해서 몇 년 동안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실명의 아픔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볼 수 없다는 현실, 다시는 볼 수 없는 하늘과 고향 산천, 부모형제 얼굴들…. 이런 기막힌 현실에서 학교가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열심히 공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학교에서 가장 침울한 아이가 바로 나였다. 선생님들이 먼저 내게 다가와 개인 상담을 하자고 할 정도였다.
가끔 외부에서 음식을 들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었다. 방문자들은 으레 먹을 것을 나눠주고 우리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용기를 내라”고 말하곤 했다.
너무 싫었다. 일회성으로 찾아와 쉽게 던지는 그런 말들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식사외 간식을 사 먹을 형편이 안돼 늘 배가 고팠지만 간식을 사들고 온 외부 손님들이 달갑지도 않았고 피하고 싶었다. ‘동냥’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외부에서 누가 온다고 하면 숨어 있다가 사감 선생님에게 들켜 야단을 맞기도 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어느 목사님이 강사로 초청됐다. 그날도 참석하기 싫었다. 하지만 사감 선생님이 몇 차례나 전원 참석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강당으로 갔다. 그런데 놀라운 말을 듣게 됐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 눈이 있습니다. 사물을 보는 육안, 지혜를 터득해 가지는 지안, 마음으로 보는 심안,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영원한 세상을 보는 영안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 어떤 사람도 이 네가지 눈을 모두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 한두 가지씩 눈이 부족한 시각장애인인 셈입니다. 여러분만이 시각장애인이 아닙니다. 육안 하나를 잃었다고 좌절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비록 육신의 눈을 잃었지만 나머지 세 가지 눈을 밝고 건강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설교 한마디 한마디는 마음속 깊이 각인됐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모르던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참 많이 울었다. 그리고 마침내 새 다짐을 하게 됐다.
‘그래, 난 네 개의 눈 가운데 하나를 잃었을 뿐이다. 열심히 세 개의 눈을 가꾸기 위해 노력하자!’ 마음이 평안해지며 새 도전이 일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재서 (5) 점자책 읽으며 밤새 독서삼매경에
실명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 실명 때문에 인생을 포기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뒤, 나의 맹학교 생활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됐고 친구들과 곧잘 어울렸다. 점자로 읽는 독서는 느렸지만 점자책을 밤새도록 읽으며 독서삼매경에 빠지기도 했다.
카네기가 쓴 ‘인생의 길은 열리다’라는 책을 점자로 읽었는데 그 책은 많은 감명을 주었다. “언제나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주변을 돌아보니 정말 나보다 어려운 처지의 친구들이 많아 보였다.
시각장애와 소아마비로 이중 장애를 겪는 친구들도 있었고 가족이 없어 늘 외로워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비록 가난하긴 하지만 부모님이 계시고 나를 끔찍이 아끼는 형, 누나와 여동생이 있지 않은가. 시각장애 외에 다른 장애를 가진 것도 아니고 세상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친구들도 많은데, 나는 그래도 15년 동안이나 보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좋은 것들이 내겐 많았다. 절망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대학 국문과에 진학해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시각장애인이면서 좋은 작품을 쓴 밀턴 같은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여건은 녹록지 않아 보였다. 꿈을 실현하기엔 아직 멀고 먼 일이었다.
서울맹학교는 실업계 학교였다. 시각장애인들의 직업을 마련하는 데 주력하는 곳이었다. 안마나 지압, 물리 치료를 가르쳐 졸업 후 시각장애인들에게 특화된 직업인 안마사나 침술사 직업을 택하도록 했다. 배우는 과목은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6년 동안 병리학 위생학 해부학 생리학 침술학 전기치료학 등 직업을 갖기 위한 의료 과목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대학을 가기 위해 필요한 일반 과목은 전체 수업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따라서 대학에 진학하려면 따로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일반 과목을 공부할 점자 참고서가 없다는 것이었다. 요즘처럼 자원봉사자가 많지 않을 때여서 공부를 하며 함께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경제적 형편이 넉넉지 않으니 개인 과외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때 중학교 2학년에서 3명, 3학년에서 3명 모두 6명이 돈을 조금씩 걷어 ‘영어 실력 기초’라는 책을 점자로 만들기로 했다. 학교 직원 가운데 점자를 아는 사람에게 부탁했다. 영어 수업을 잘 따라간 덕에 그 책은 그리 어렵지 않았고 영어 실력은 하루하루 늘었다.
좀 더 영어 실력을 쌓고 싶었다. 당시 생각한 것이 학원에서 영어 강의를 듣는 것이었다. 학교 전체에서 대학 갈 준비를 시작한 사람은 나 외에도 2명이 더 있었다. 그들은 가정이 부유한 편이어서 개인 지도도 받기도 하고 학원에도 다녔다. 하지만 내 형편에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워할 뿐이었다. 한번은 친구를 따라 학원에 가 보았는데 선생님의 강의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학원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웠다.
***[역경의 열매] 이재서 (6) 영어학원 걸어 다니며 갖은 고생
1970년 서울맹학교 중등부 3학년 어느 날, 한 친구가 “다른 학원에 가게 됐다”며 끊어놓은 영어 학원 수강증을 건넸다. 광화문에 있는 S학원이었다. 돈이 없어 학원 강의를 못 듣던 내겐 행운이었다. 그날 곧바로 학원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학원까지 걸어서 30~40분 정도 걸렸다. 수업을 마치면 밤 10시나 돼야 기숙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저녁식사 때를 맞추지 못해 밥을 먹지 못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배가 고파도 학원에 가서 영어를 배운다는 생각을 하면 절로 힘이 났다. 학원을 오가는 길엔 위험한 순간이 많았다. 차와 충돌해 사고가 날 뻔한 적도 많았다. 손수레나 사람에 부딪혀 넘어지고 길을 잘못 들어 3~4시간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시각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크게 낮았다. 시각장애인들이 흰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는 사실도 잘 몰랐다. 지나가다 부딪치면 “눈 좀 똑바로 뜨고 다니라”며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재수 없다고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다. 길가에 펴 놓은 물건을 밟거나 건드리면 “눈도 안 보이는 사람이 집구석에 있을 것이지 돌아다니긴 왜 돌아 다니냐”고 욕을 하기도 했다.
마음이 아팠다. 화가 치밀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런 일이 가끔 있자 점점 그런 말들은 흘려듣게 됐다.
학원 교실은 5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어서 첫날은 직원이 교실까지 안내해 주었다. 수업이 끝난 다음 누군가 1층까지 데려다 주었으면 좋겠는데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다. 잠시 후 인기척이 들렸다.
“미안하지만 같이 좀 내려가 주시겠어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만 했다. 그래서 다시 내가 말을 걸었다.
“언제 나가실 건가요? 저와 같이 좀 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 책상을 탁 치더니 이렇게 외쳤다.
“우리 당신에게 줄 돈 없어!”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저는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오늘 학원 첫날인데 입구를 잘 찾을 수가 없네요. 도움을 주세요.”
그러자 그 학생은 몹시 당황해 하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아, 제가 오해했군요. 저희는 깡패와 한패인 줄 알았어요. 밑에 내려가면 패거리들이 기다리는 줄 알고 괜히 떨었네요. 학원 주변에 워낙 깡패들이 많아서…. 죄송합니다.”
‘내가 깡패로도 보이는구나‘라고 생각하니 재미있었다. 그 학생들은 다음날부터 학원에서 나를 만나면 기꺼이 도와 주었다.
길에서 도움을 부탁할 때 사람들의 태도는 다양했다. 친절하게 손을 잡고 안내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 우산이나 신문지를 접어 내밀고 잡고 따라 오라고 했다. 어떤 이는 구두 소리를 똑똑 내면서 “여기로, 여기로”라며 강아지 부르는 듯했다. 그럴 때는 도움을 받으면서도 모욕을 느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가 버리는 것이다.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방향 감각을 잃기 일쑤였다. 소리로 방향을 찾아야 하는데 비가 오면 차 소리를 비롯한 주변 소리가 다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비가 오는 날에도 학원을 빠지지 않았다. 그만큼 영어를 배우겠다는 욕구가 강했다. 더군다나 가난한 내 형편에 얻을 수 없는 학원 공부의 기회가 내게는 금쪽같이 귀했다.
***[역경의 열매] 이재서 (7) 이름 모를 이들 도움 받으며 영어공부
영어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그칠 것 같지 않아 그냥 비를 맞으며 학원 문을 나섰다. 그런데 횡단보도가 문제였다. 차 소음인지 빗소리인지 분간이 안 돼 도무지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다들 그냥 가 버렸다.
한 시간가량 비를 맞고 서 있어야 했다. 온몸에 물이 줄줄 흘렀다. 쩔쩔매고 있는데 젊은 아가씨들이 재잘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앞이 보이지 않아 그러는데 횡단보도를 함께 건널 수 있으신지요?”
기다려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이렇게 인정이 없을까 싶어 나도 모르게 “나쁜 계집애들,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라고 좀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랬더니 바로 앞에서 “우리 아직 여기 있어요. 함께 가요”라며 내게 팔을 내밀었다. 간 줄 알았는데 내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욕을 한 것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아무튼 그들의 도움으로 그 비 오는 날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까지 해서 공부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학교 기숙사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돌멩이 같은 것에 걸려 넘어졌다. 툭툭 털고 일어서는데 “어디로 가세요?”라는 여성의 음성이 들렸다. 그녀는 비에 젖은 나에게 우산을 씌워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다,
5년 전 상경해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일한다는 그녀와 학교까지 가는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시각장애인에 대해 신문에서 읽었다는 이야기, 선진국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이 훌륭하게 된 사람들이 많다는데 “실망하지 말라”는 격려까지 해주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학원 근처 건널목에서 사고를 당한 날도 비가 왔다, 건널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혼자 건너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중간쯤 건너다 버스에 눈 윗부분을 부닥쳐 쓰러지고 말았다. 안경이 깨졌다. 피도 많이 났지만 정작 버스는 그냥 가버렸다. 만약 1㎝만 몸이 앞으로 나갔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다행이었다.
마침 지나가는 다른 차가 없어 큰 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날 부축해주었다. 휴지와 손수건을 꺼내 피가 흐르는 이마에 대주며 지혈을 해주었다. 그리고 택시에 태워 학교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택시비도 내주었다,
나중에 감사함을 표시하려고 그를 찾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중부시립병원 응급실에서 열두 바늘을 꿰맸는데 지금도 왼쪽 눈 위에 흉터가 남아 있다. 집으로 돌아와 한참이나 울었다. 다친 데도 아팠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아파서였다.
다음 날에도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다시 학원에 갔다.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면 이 모든 고생은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중도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기엔 너무도 힘든 날들이었지만 내 비전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하나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비전은 상상이고 꿈이지만 그것은 삶을 좌우한다고 난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역경의 열매] 이재서 (8) 배고픔보다 외로움이 더 큰 고통
어린 시절 고향에선 우리 집뿐 아니라 대부분 가난했기에 가난이 그리 큰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게다가 부모님도 계셨으니 적어도 배고픔으로 괴로워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 서울맹학교 생활은 달랐다. 가난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시절이었다. 먹을 게 별로 없었다.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서 차츰 자신감을 회복해갔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늘 고통이었다. 서울맹학교는 국립이었기 때문에 전교생이 무료로 기숙사에서 먹고 잤다. 하지만 한창 자랄 나이라서 그런지 기숙사에서 주는 밥만으로는 허전한 속을 달랠 수 없었다.
밥이라고 해 봤자 보리가 가득 담긴 밥에 반찬 한두 가지가 전부였다. 반찬은 콩나물국, 콩장, 맨간장, 김치가 교대로 나오는 정도였다. 한 달에 한번 정도 쇠고깃국이 밥상에 오르기도 했지만 쇠고기는 한 점도 없고 고기 냄새만 살짝 나는 뭇국에 불과했다. 우리는 그 국을 소가 죽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하여 ‘황소무사통과탕’이라고 부르던 기억이 난다.
여유가 있는 학생들은 교내 매점이나 인근 식당에서 빵이나 외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내 주머니는 늘 돈이 궁했다. 가끔 식당 유리창을 닦아주며 식당 아줌마에게 누룽지를 얻어먹기도 하고 다른 친구들과 식당에 몰래 들어가 남은 밥을 먹다가 들켜 혼이 난 적도 있었다.
점자 종이가 떨어져도 도무지 살 형편이 안 됐다. 궁여지책으로 날짜 지난 달력 종이를 잘라 쓰기도 하고 좀 두꺼운 종이로 만든 헌 잡지책을 싼 값에 사서 사용하기도 했다. 화장품 회사에서 나오는 잡지를 싼 값으로 사거나 얻어 점자 용지로 많이 사용했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이 점자를 한 번 쓰고 버린 것을 주워 물을 묻혀 발로 밟아 말린 뒤 사용했다. 그러나 아무리 꼭꼭 밟아도 오톨도톨한 점자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아 새로 쓴 부분과 헷갈려 읽기가 불편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래도 괜찮았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이 그리운 것이었다. 기숙사에는 시각장애인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외딴 섬에 유배된 것처럼 늘 외롭고 바깥세상이 그리웠다. 다른 친구들은 가족이나 친척들이 맛있는 음식을 싸 들고 찾아오곤 했다. 하지만 나는 6년 재학 동안 한번도 그런 경험이 없었다. 밥 한 그릇 사주는 사람도 없었다. 멀리 있는 가족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서울에 있으면서 찾지 않는 친척이나 고향 친구들은 솔직히 서운했다. 어떤 책에서 읽은 ‘번영은 친구를 만들고 역경은 그 친구를 시험한다’는 말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시절이었다.
돈이 무엇인지? 정말 돈이 뭔데 이런 쓰라린 고통을 주는 것인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겐 교복도 하나, 신발도 하나, 속옷도 한 벌이었다.
한 달에 세탁비로 200원을 내면서도 내가 빨아 입지 않으면 안 됐다. 한 번 빨래를 맡기면 5일씩 걸리니 그 사이에 갈아입을 옷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양말을 찾다 학교 수업에 지각을 해 야단을 맞은 적도 있다.
형에게 편지를 써 놓았음에도 우표값이 없어 부치지 못했다. 이런 모든 것이 내겐 고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몸마저 수척해졌다. 어린 나이에 다 늙은 노인처럼 가죽만 남았다. 교실에 앉아 있으면 기력이 없어 눕고만 싶었다. 건강해야 하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역경의 열매] 이재서 (9) 빌리 그레이엄 목사 설교 듣고 주님 영접
1973년 5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전도대회에 참석하게 됐다. 집회 첫날 100만명이나 모였다는 소문에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이 모이는지 궁금했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그곳에 갔다. 정말 엄청난 인파였다. 행사장은 활기로 넘쳤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설교 주제는 ‘젊은이를 위하여’였다.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을 알고 믿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머리로는 하나님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머릿속에는 악한 영이 자리해 생각을 방해하고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설교 말씀이 사실로 믿어졌다, 평소 따지기 좋아하던 나였지만 이날만큼은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평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개미가 동상을 아무리 기어 다녀도 그 형태를 파악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인간은 우주 만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두뇌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잘 모른 채 자기 잣대로 마음대로 규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래, 난 벌레와 같은 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창조주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죄이다.”
나 자신이 무한히 작게 느껴졌다. 그동안 이 종교, 저 종교를 기웃거리며 갈등했던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치유의 양약이었다. 비둘기 같은 평화가 영혼을 감쌌다.
집회가 끝날 때까지 참석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했고 인생관이 완전히 변했다.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이 어려워 고민했던 마음이 가시고 새 자신감에 젖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의 목표였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어떤 질서와 같은 것이었다, 이런 사실들을 깨달았을 때 가장 큰 변화는 자유로움이었다. 내게 남은 것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두 팔과 다리, 생각할 수 있는 머리, 부모 형제, 친구들, 초·중·고 학력, 책을 좋아하는 습관, 서툴지만 글을 쓸 수 있는 것 등.
왜 내가 그동안 이 많은 것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그동안 눈 하나 없는 것에 파묻혀 많은 것을 무시하고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이제부터 결과의 크기에 연연하지 않고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최선을 다하리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날 학교 기숙사로 돌아오며 중국집에 들렀다. 너무 배가 고파 자장면을 시켰다. 옆 좌석에는 대학생들이 여의도 집회를 화제로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무신론과 유신론으로 나뉘어 논쟁하는데 점차 무신론이 힘을 얻는 상황이었다. 이때였다. 나도 모르게 뜨거움이 밀려 왔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그들에게 다가가 내가 그동안 종교를 비판하고 욕했던 이야기를 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내가 변화된 이야기를 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간증했다. 그렇게 목소리 높이던 사람들이 조용히 내 말을 경청했다. 그 순간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무신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말씀이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무신론자 유신론자 모두 이날 좋은 분위기에서 헤어졌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최초로 전도를 한 셈이 됐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이재서 (10) 낙향후 표현력 강한 나의 달란트 발견
서울맹학교를 졸업하고 전남 승주군 삽재팔동 고향으로 내려갔다. 함께 졸업한 친구들은 대부분 안마나 지압, 혹은 침놓는 분야로 진출했다. 나만 다소 엉뚱한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글을 써 신춘문예 같은 곳에 입선해 5년 내 문단에 데뷔하는 것이 목표였다.
작가의 길을 걸으려는 나를 같이 졸업한 친구들은 몹시 걱정해 주었다. 여의도 광장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뒤, 진로에 대해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하나님이 주신 나의 달란트는 무엇일까?
시각장애인이 된 입장에서 과연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책읽기를 무척 좋아했던 나는 글을 쓰는 일이 내게 최선의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글을 쓰려면 국문과에 진학해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자신감을 회복한 뒤 생각이 달라졌다. 굳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열차에 앉아 문득 유서를 쓸 글자를 배우겠다고 서울로 가던 6년 전 일을 떠올렸다. 글자를 배우긴 했는데 유서가 아닌 소설을 쓰겠다며 고향으로 가는 나를 돌아보고 감회가 새로웠다.
많은 변화를 준 서울맹학교가 고마웠다. 6년의 세월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 시간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셨으니 더더욱 감사했다.
다만 학교를 졸업하고도 다시 부모형제 곁에서 부담을 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고시 공부하듯 머리를 싸매고 글을 썼다. 가끔 서울에 있는 도서관에 점자로 책을 주문하여 읽는 일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글 쓰는 일에 전념했다.
그러나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시골에서 혼자 글을 쓴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자료를 찾고 싶을 때, 사전 같은 것을 찾고 싶을 때 곁에서 도와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그해 연말 몇몇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응모했다. 모두 낙방이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처음은 연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목표로 했던 5년 내 당선까지는 아직 네 번이나 남아 있었다. 당시 내 안에는 종교적인 테마의 글을 써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신앙과 종교적인 감성을 문학에 담아보고 싶은 욕구였다. 예수님을 영접한 일이 너무 고마웠고 감격스러웠기 때문이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실명이 오히려 내 삶을 축복으로 이끄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믿음 안에서 깨달았다. 비로소 내 안에 있는 달란트,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재능을 눈여겨 보게 됐다. 눈이 멀었다는 사실 자체는 바꿀 수 없는 일이지만, 그외 가진 것들은 내가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아니야”가 아니고 “소중한 거야”라고 스스로 속삭이게 됐다. 그 작은 속삭임이 조금씩 삶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부족한 나였지만 하나님이 주신 능력은 표현력이었다. 다들 웅성거리다가도 내가 일단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모주 집중해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시각장애인 중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많지 않은 까닭인지 내가 쓴 글과 편지가 요긴하게 쓰일 때도 많았다. 자신의 달란트를 빨리 찾는 게 지혜다. 그래야 거기에 맞는 미래를 품을 수 있다.
***[역경의 열매] 이재서 (11) 교회학교서 시작한 영어수업 큰 호응
내 고향 삽재팔동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이름은 삽재교회였다. 성경을 배우면서 꾸준히 습작을 한다면 작가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목원섭 담임전도사님을 찾아갔다.
“목 전도사님. 제게 개인적으로 성경을 가르쳐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부탁을 들은 목 전도사님은 대뜸 순천에 있는 한 성경학교를 권했다. 그리고 입학 절차를 밟기 위해 학교를 방문했다. 그런데 담당자는 지금까지 시각장애인이 입학한 예가 없다며 나의 입학을 냉정하게 거절했다.
“앞 못 보는 사람들은 안마를 잘 한다던데, 그런 일을 하고 살면 되지 성경은 배워서 무엇을 하려고 그럽니까?”
그 말에 깜짝 놀랐다. 함께 간 목 전도사님이 “이 사람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면 큰일을 할 것입니다”라고 사정을 했으나 소용없었다. 단단한 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이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의 벽 앞에서 내가 앞으로 겪어야 할 시련의 시작일 뿐이었다.
다음 날 목 전도사님을 다시 찾아가 나의 입학을 통사정했다. 그러길 몇 번, 우여곡절 끝에 전도사님은 나의 입학을 성사시켰다. 그렇게 가게 된 성경학교는 나를 사명의 길로 인도한 또 하나의 뜻 깊은 관문이 됐다.
1975년 3월 입학한 순천성경학교에서 나는 선생님들이 말씀하신 것을 점자로 받아 적어 그것을 손으로 읽으면서 공부했다. 원래 3년 과정인데 고졸 출신은 2년만 하도록 돼 있어 나는 바로 2학년에 들어갔다. 한 학년이 40~50명이었고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했다.
성경 외에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몇몇 학생이 나를 위해 자원봉사를 해주었다. 언제나 책을 읽고 싶어하던 내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때 읽은 신앙서적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하지 얼마 되지 않은 내게 기독교 문화를 이해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성경학교에 들어가자 목 전도사님은 내게 삽재교회 중고등부를 조직해 지도해줄 것을 당부했다. 나 역시 토요일이면 2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고 시골집으로 돌아와 주일에는 삽재교회에 나갔다. 나는 교회 중고등부를 조직해 2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시골 아이들은 내가 시각장애인 선생이라고 해서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따르며 좋아했다. 그 학생들 중 순천여고에 다니는 유난히 수줍음을 타던 아이가 있었다. 이름은 한점숙. 그때는 가르치는 선생과 배우는 제자 사이였을 뿐, 그 아이가 8년 후 내 아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착한 고향 아이들에게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에 영어를 가르쳤다. 교회에서 무료로 영어를 가르친다고 하니 인근 학생들이 거의 모두 교회에 나왔다. 중고등부가 50명까지 늘어났다. 동네 사람들은 앞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영어를 가르친다는 사실에 신기해하고 놀라워했다. 동네 어른들은 수고한다며 고구마를 삶아주기도 했다. 목 전도사님은 당시 서울에서 목사가 되기 위한 신학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래서 자주 내게 수요 설교뿐 아니라 주일 설교까지 부탁했다. 대예배 설교를 할 때도 있었다. 이런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안에서 나를 교육하고 훈련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그땐 몰랐다.
***[역경의 열매] 이재서 (12) 장애인 선교 위해 어렵게 총신대 입학
순천성경학교에 입학해 1년이 지날 때만 해도 성경을 배워 문학 활동에 도움을 얻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차츰 마음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져 있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참진리를 말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1976년 10월, 마침내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결단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 소외 계층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장애인 선교를 하고 싶습니다.”
그해 12월 순천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신학대 진학을 추진했다. 어떤 분이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산하 울 사당동 총신대는 특별히 장애인에 대한 제약이 없으니 그쪽으로 갈 것을 권했다. 총신대에는 이미 장애인도 다니고 있으며 원할 경우 성직자가 되는 데도 어떤 법적 제약이 없다는 말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하지만 총신대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원서 접수 자체를 거부했다. 시각장애인이 공부할 만한 시설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 대학 공부를 시각장애인이 따라가기 어렵다는 것 등이 이유였다. 하지만 형은 원서를 접수해줄 것을 계속 부탁했고 나는 한쪽에 서서 원서를 접수하는 분의 마음을 열어 달라고 1000번도 넘게 기도했다.
형의 간청에 담당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잠시 후 우리에게 말했다.
“일단 원서는 받겠습니다. 신학 공부가 상당히 어려운데 공부를 못할 경우 학교에서 어떤 조치를 취해도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하십시오.”
시각장애인이라서 공부를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원서 접수를 원했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
다음날 난 입학 시험을 치르고 며칠 뒤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합격은 했지만 등록금이 문제였다. 몇 달 동안 순천과 광주 교회와 관청을 전전하며 도움을 청했다.
발바닥이 부르트고 물집이 생길 정도였다. 많은 곳을 돌아다녔어도 단 한 곳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세상 인심이 각박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굳게 결심했다. 나중에 꼭 장애인들을 위한 선교 활동을 하겠다고….
1977년 3월 2일. 그날은 등록 마감일이면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형은 나를 부르더니 포기하고 내려가자고 했다. 그 태도가 너무 강경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독하게 마음먹었다.
“형, 포기할 수 없습니다. 등록만 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그 뒤 문제는 내가 해 보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등록을 마친 형은 나를 배정 받은 기숙사로 데리고 가서 내가 생활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세심하게 해 주었다. 형은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기왕 시작한 공부이니 열심히 해라.”
눈물이 핑 돌았다. 형에게 너무 미안해서였다. 나는 그렇게 형을 희생 제물(?)로 삼아 마침내 총신대 대학생이 됐다.
***[역경의 열매] 이재서 (13) 대학 3학년 때 ‘한국밀알선교단’ 설립
총신대를 힘들게 입학하고 나서의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컸지만 우선 공부할 책이 없었다. 전공서적을 비롯한 모든 책을 다시 점자로 제작해야 했다. 지금이야 컴퓨터로 책을 만들 수 있지만 당시는 일일이 사람이 수작업으로 점자책을 만들었다.
책 읽는 속도가 느린 것도 어려움이었다. 점자책을 읽는 속도는 다른 사람에 비해 다섯 배 정도 느렸고 영어 단어 하나 찾는 데도 손가락으로 점자사전을 찾다 보니 속도가 크게 느렸다.
그런 와중에도 다행히 공부는 재미있었다. 특히 철학과 역사, 외국어 과목을 좋아했다. 공부가 재미있어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내가 공부를 못하면 ‘장애인이니까 못하는 것이지’라는 소릴 들을까봐 신경을 많이 썼다. 그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장애인들에게 누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첫 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여름방학이 되어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한 학기를 마쳤지만 가족들에게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다음 학기 등록금은 여전히 대책이 안 섰다.
방학이 끝날 때쯤 가족들은 내게 휴학할 것을 강력히 권했다. 나도 더 이상 고집할 명분도 기력도 없었다. 하지만 휴학해도 언젠가는 다시 복학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서 그런지 입학 때처럼 안타깝지는 않았다. 더 이상 형과 가족들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휴학계를 낼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올 차비만 갖고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마음 구석에는 하나님 도와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에 와보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1학기 과수석이 돼 7만5000원 등록금 전액이 장학금으로 나와 있었던 것이다. 휴학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 것 같았다. 학교에선 화제가 돼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 인사를 해 주었다. 가족들도 기뻐했다. 형은 축하 편지와 함께 격려금까지 보내 주었다.
나는 장학금의 십일조인 7500원을 고향 삽재교회로 보냈다, 나를 키워준 모 교회에 첫 감사를 바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향교회 전도사님은 거기에 2500원을 더해 1만원을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보내왔다. 나는 그 귀한 돈으로 그토록 갖고 싶었던 점자 팔목시계를 샀다. 시간을 알 수 없어 항상 친구들에게 강의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야 했기 때문에 그동안 많이 불편했던 것이다.
어렵게 들어간 총신대는 내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대학 3학년 때 장애인 선교단체인 ‘한국밀알선교단’(현 세계밀알연합)을 설립한 일이었다. 여섯 명이 창립준비 모임을 가진 이후 1979년 10월 16일 드디어 한국밀알선교단 창립식을 가졌다.
밀알선교단은 일종의 자원봉사 운동이다. 장애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장애인을 돕고 장애인에게 선교하자는 취지다. 따라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일은 단원들의 훈련과 교육이었다. 일반인에게 수화와 점자를 가르쳐 주는 밀알교실을 열었다.
창립 8개월 만에 사무실도 마련했다. 총신대는 물론, 덕성여대, 성신여대 등을 필두로 여러 대학에 밀알 동아리를 결성해 나갔다. 30년이 지난 현재 14개 국내 지부를 비롯한 22개국 69개 지부에서 장애인 캠프, 간행물 발간, 장애인 재교육과 장학금 제공, 북한 장애인 지원 사역 등을 펼치고 있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이재서 (14) 美 유학 10년만에 귀국,모교 교수로
밀알선교단을 창설하고 5년간 리더로 일하면서 마음속에 두 가지 갈등이 계속됐다. 하나는 장애인을 위한 선교 사역은 성경 지식만으로는 어렵다는 인식이었고, 또 하나는 세계 장애인을 위한 선교 기구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궁리 끝에 1984년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그리고 미국 필라델피아 템플대 7주짜리 어학코스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막상 떠나게 됐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모두 걱정이 대단했다. 밀알선교단은 어떡하고 가느냐, 돈도 많이 들 텐데 어떻게 견디려고 그러느냐, 앞도 못 보는데 혼자 가서 어떻게 생활할 것이냐 등 걱정이 끝이 없었다.
사실 나도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즈음 난 생전 처음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1년 전 결혼해 딸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전세였지만 서울 방배동에 방 두 칸짜리 집도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기고 미국을 향해 기도하면서 출발했다. 여기저기서 후원금도 보내 왔다.
어학코스를 마친 뒤 PCB(Philadelphia College of Bible) 기독교사회복지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초교파 기독교 대학인 PCB는 필라델피아 근교 랭혼 지역에 위치해 있다.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과 실천이 무엇인지도 경험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나는 유일한 시각장애인이었다. 학생들은 물론, 교수 직원 하나같이 친절했다. 교실에서나 식당에서 최우선적으로 나를 배려했다. 하도 잘해 줘서 몇몇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전에 시각장애인을 만나본 적이 있어?”
그들은 시각장애인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들의 그런 태도는 약한 이웃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어릴 적부터의 교육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PCB에 들어간 뒤 곧 아내를 초청했다. 아내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잘해 주어도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1985년 2월 아내는 3년 동안 재직했던 학교를 사임하고 내게로 왔다. 돌이 갓 지난 딸은 장모님이 돌봐 주시기로 해서 처가에 맡겼다. 아내가 오니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미국에서 공부를 해낼 자신감이 생겼다.
미국 대학에는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 센터가 많았다. 장애인들이 필요한 것을 요청하면 수시로 지원해 주었다. 자료를 녹음해 주기도 했고 특히 시험을 볼 때에는 점자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시설이 편리하고 이동이 자유롭다고 하여 모든 것이 쉽지는 않았다. 우선 공부해야 할 양이 많았다. 힘이 부치기 일쑤였다. 코피를 자주 흘리고 스트레스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면서 사력을 다해 공부했다.
86년 5월 PCB를 졸업했다. 이어 템플대 사회복지대학원, 92년 6월 럿거스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사회복지정책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마쳤다.
유학 기간 미국 등 여러 곳에 밀알지부를 세우고 10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 모교인 총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됐다. 또 한국을 비롯한 미국 유럽 등 세계의 모든 지부들을 사단법인 ‘세계밀알연합’이란 이름으로 통합해 현재 총재를 맡고 있다. 감사의 찬송이 절로 나왔다.
“하나님, 제게 이런 날을 주시다니요? 제가 이것을 다 가져도 되는 겁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역경의 열매] 이재서 (15) 제자들,편견없이 개인상담까지 요청
귀국하자마자 모교인 총신대에서는 내게 시간강사 자리를 주었다. ‘기독교와 사회복지’라는 과목
이었다. 첫 강의를 하는 날 교문을 들어서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미국 유학과 총신대 캠퍼스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입학했던 학교에 가르치는 사람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 꿈만 같았다.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었다.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시각장애인 교수를 보고 학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걱정이 앞섰다. 혹시 수업 거부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했다.
교실에 들어서려니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의 손을 잡고 강단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강의실은 이내 조용해졌다.
“이번 학기를 가르칠 이재서입니다. 함께 온 사람은 제 아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왜 제 아내의 손을 잡고 강단까지 올라왔는지 아십니까?”
여기저기서 “모르겠는데요”라는 대답이 나왔다. 한 학생이 “사모님을 몹시 사랑하시나 봐요”라고 해서 모두 소리 내어 웃었다.
내 눈은 보통 사람과 외관상 차이가 별로 없어 얼른 봐서는 시각장애인인 줄 잘 몰라 더욱 그랬다.
“저는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육체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여러분의 잘 생긴 외모는 볼 수 없지만, 여러분의 아름다운 마음과 생각은 잘 볼 수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아~!” 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학생들이 놀랍다는 듯, 안됐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정말이세요? 교수님.”
나는 점자로 준비된 노트를 꺼내 높이 들어 보였다.
“이것이 제가 사용하는 글자입니다. 점자를 사용한 것인데요….”
점자가 시각장애인이 사용하는 것이라는 것 정도는 학생들도 대부분 알기 때문에 내가 시각장애인 교수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었다. 몇몇 학생은 신문에서 교수님이 박사학위 받았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설마 자기들을 가르치러 올 줄 몰랐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항상 내 편이었다. 그들에게는 편견도 차별도 없었다. 학생들은 모두 성실히 수업에 임했다. 진로문제나 유학문제, 가정문제 등 다양한 문제로 상담해 오기도 했다.
어떤 학생은 자기가 속한 기관에 특강 강사로 나를 초청했다. 1995년부터는 총신대뿐 아니라 성균관대에서도 강의를 했다. 96년 3월 마침내 나는 정식으로 총신대 교수가 됐다. 소속은 신학과이고 실천신학 분야와 사회과학 관련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마흔을 훌쩍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월급이라는 것을 받는 직장인이 된 것이다. 너무 감사했다. 아버지와 형님, 아내도 기뻐했다. 국내외 밀알 관계자들도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떻게 강의를 할까? 잘할 수 있을까? 학생들의 반응은 어떨까?”
모두 궁금해하는 것들이었다. 여기저기서 축하와 찬사를 보내왔다.
여러 매스컴에서 취재를 왔다. 신문·잡지·라디오에 인터뷰가 나오고 여러 TV 채널에서 강의하는 모습을 방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최고의 전문직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교수로 장애인의 위상을 높이고 가능성을 보였다는 데 큰 보람을 느꼈다.
2001년에는 KBS TV에서 내가 연구하고 강의하는 모습을 찍어 장애인 고용을 장려하는 공익광고를 방송했다. 2002년에는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쑥스러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 것을 통해서라도 장애인 고용의 문이 확대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역경의 열매] 이재서 (16·끝) 장애인 사역 위해 한걸음씩 전진한다
1995년 3월 30일 ‘세계밀알연합’이 출범했다. 한국밀알이 세상에 태어난 지 15년5개월 만이다.
공상처럼 꿈처럼 말하던 ‘세계 기구’를 창립했다. 세계밀알이 출범하면서 밀알운동의 확산은 가속도가 붙었다. 미국 여러 지역과 캐나다 브라질 러시아 중국 태국 등 세계 곳곳으로 확산돼 갔다.
2001년에는 목사 안수도 받았다. 그때 세계밀알은 해외에만 30곳이나 되는 지부를 만들었다. 방학 때는 주로 해외에 다니며 지부들을 돌봤다. 강의 및 세미나를 인도하고 각종 회의를 주재했다. 아내와 함께할 때도 있지만 혼자 다닐 때도 많았다.
2003년부터는 오랜 소망이었던 북한 장애인들을 지원하는 사역을 시작했다. 경제 사정이 안 좋으니 북한 장애인은 더욱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돼 늘 마음이 아팠었다.
4차례에 걸쳐 약 86억원 상당의 물품을 지원했다. 휠체어, 흰지팡이, 목발, 소리 나는 시계, 항생제 등 북한 장애인들이 필요한 물품을 보냈다. 기금은 한국과 미국 등 세계밀알연합 산하 지부들이 함께 조성했다. 매스컴도 특별한 관심을 가져주었다. 북한은 그동안 장애인이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북한의 장애인 문제를 처음으로 세상에 부각시킨 역사적인 일로 평가했다.
2003년 3월과 11월, 1·2차 지원 때는 직접 평양을 방문했다. 앞도 못 보는 사람이 세계적인 단체의 회장으로 여러 사람들을 인솔해 온 것에 북한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내가 갖고 다니며 능숙하게 사용하는 시각장애인용 컴퓨터에 대해서도 그들은 높은 관심을 보였다.
2004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장애인을 위해 일한 것을 평가한 상이라지만 부끄럽고 쑥스러웠다.
이제 오는 16일이면 밀알운동을 시작한 지 꼭 30주년이 된다. 그동안 전개해 온 밀알운동을 통해 수만명의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위로와 도움을 받았고 현재도 밀알지부가 있는 22개국에서 장애인을 위한 복지, 교육, 상담, 재활 관련 시설 및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해마다 밀알의 이름으로 조성돼 전달되는 장애 대학생 및 유학생을 위한 장학금만도 1억5000만원이 넘는다. 15~17일 30주년 기념행사로 서울 방이동 올림픽컨벤션센터, 오륜교회 등에서 장애인 선교전략을 위한 심포지엄과 음악회, 사진전, 기념예배를 드릴 계획이다. 장애인 신학을 목회 현장에서 도움이 되는 실천신학의 장으로 끌어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세계에는 6억명이 넘는 장애인들이 갖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안고 좌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펼치고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려는 것이 밀알운동의 취지이며 목적이다.
장애를 인식하는 순간은 괴롭지만 장애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하나님이 새로 길을 열어주신다. 장애인 가족이 앞장서야 한다. 그래야 사회와 국가도 움직인다.
그분들이 힘과 위로를 얻는 데 세계밀알연합이 그 역할을 해 나갈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의 비전은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다. 장애인 사역을 위해 나는 오늘도 한걸음씩 내딛는다. 많은 분들의 참여와 끊임없는 성원과 기도의 후원이 있을 때 이 모든 일은 더 빨리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할렐루야!(worldmilal.org·02-533-9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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