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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7대 왕 세조의 광릉(光陵)의 원찰 봉선사(奉先寺)다.
이 사찰 초입에 자리한 일주문(一柱門)이다.일주문의 현판은 그 사찰의 주소와 사찰 이름을 밝혀주는 일종의 문패다.
'운악산 봉선사', 운악산 자락에 자리한 봉선사라는 뜻이다. 대부분 사찰은 한자로 쓴 현판을 달고있다.
이곳 현판은 보기 드물게 한글로 '운악산 봉선사'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 일주문도 극히 불안전한 역(逆) 삼각형의
구조를 하고있다.그 문은 별 탈도 없이 수많은 세월을 굳건하게 견뎌내며 봉선사의 산문(山門)으로의 그 기능을 다 하고있다.
왕릉의 원찰이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하마비(下馬碑)가 봉선사 초입에 설치되어 있다. 그 옆에 하마비 설명문이 있다.
부처를 모시는 본전(本殿) 큰 법당이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大雄殿' 등과 같이 한자로 된 전각의 현판을 달고있다.
봉선사는 일주문과 같이 본전의 현판을 '큰 법당' 한글로 표기하고 있다.이렇게 한글 현판을 대하게 할 수 있는 데는
운허(耘虛)스님(1891∼1980 속명 李學洙)의 각별한 한글사랑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든다.
주련(柱聯)도 누구나 읽기 쉽고 알기 쉽게 한글로 쓰고있다.
1975년 12월 중순 어느날, 눈이 소복히 내렸다. 눈길을 뚫고 찾은 봉선사에서 주지 운허스님이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운허스님은 사찰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면서 정성껏 설명해 주었다. 아주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에서 정이 묻어났다.
아는 것도 참으로 많았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퍽 재미났다.특히 6촌 형 춘원 이광수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봉선사 절 담 옆에 방 하나를 마련해 6촌 형 춘원 이광수이 머물게 했다.
형은 이곳에서 법화경을 탐독하며 <돌벼게> 등을 집필하였다."
춘원 이광수의 수필 ‘돌베개’에도 이와 관련된 글이 있다,
1945년 해방 후 친일변절자, 반민족행위자로 낙인 찍혀 갈곳없이 헤매던 6촌 형 이광수다.
“<산에서>는 내가 봉선사에 들어가 있는 동안의 일기다. 나는 오랫동안 세상을 떠나서 수도생활을 할 작정으로
꽤 크고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봉선사로 간 것이었다. 내가 봉선사를 숨을 곳으로 정한 까닭은 광동학교의 교장으로 있는
내 삼종 운허당 이학수(耘虛堂 李學洙)를 의지함이었다. 아이들 작문장이나 꼬나주고 영어 마디나 가르쳐주면
밥은 먹여준다는 것이었다." -이광수, <돌베개> 서문에서 ”
당시 춘원 이광수는 봉선사에 머물면서 광동중학교에 잠시 교편을 잡고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운악산 구름속이 우리들 배우는 집’으로 시작되는 광동중학교 교가 역시 춘원이 작사했다. 현제명이 작곡한 이 교가는
지금도 광동중 교가다.
운허스님은 그 방 앞에 추사체로 '다경향(茶經香)' 액자를 걸어주었다. 그리고 다경향실로 이름해 주었다.
그때 그 집은 현재 헐렸다. 그 자리에 한옥을 신축했다. 지금의 현재 조실스님채로 쓰이고 있다.
봉선사 입구의 오른쪽 산기슭에는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옆에는 운허 스님의 부도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춘원의 기념비는 당초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에 세워질 예정이었다.일부에서 반민족 행위를 문제삼아 무산되자 운허 스님이
직접 나서 봉선사 입구에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의 1,371자나 되는 글은 유명한 소설가 주요한이 짓고, 글씨는 김기승이 썼으며
모두 순수한 한글이다.
비면(碑面)에는 ‘춘원 이광수기념비’, 비음(碑陰)에는 행적기, 좌측 비면과 우측 비면에는
그의 글이 각자되어 있다. 그중 우측 비면의 글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춘원의 글 …… 그러나 내 자식들이나 가족 또는 친우들이 내 죽어간 뒤에 구태여
묘를 만들어 주고 비를 세워 준다면 그야 지하에 가서까지 말릴 수 야 없는 일이나
만일 그렇게 되어진다면 내 생각으로는 이광수는 조선 사람 을 위하여
일하던 사람이다 하는 글귀가 쓰여졌으면 하나 그도 마음 뿐이다-1936년
먼길 가는 손님네야 내 노래나 듣고 가소 다린들 안 아프리 잠깐 쉬어 가소
변변치도 못한 노래 그래도 듣고 가소 시원치도 못한 얘기 그래도 듣고 가소
길가에 외로이 앉어 부르는 노래를 저기 저 손님네야
한 가락만 듣고 가소 가도 또 길이요 새면 또 날이다
끝 없는 길손 불러 끝없는 내 노랠세-1936년
나는 사는 날까지 이 길가에 앉어 있으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하렵니다
누구시나 행인은 들어오셔도 좋습니다 가고싶으면
아모때에 가셔도 좋습니다-1937년
벗님네 날 찾으심 무얼보고 찾으신고
값없는 이몸 인줄 아마도 모르시고 행여나
무엇인가 하여 찾으신가 합니다-1940년
내 평생에 지은 이야기 스물 서른 어느 분 읽으신고
어느분 들으신고 그 얼굴들 눈앞에 그려 놓으면
모두 반가오셔라 살 닿은듯 하여라-1949년
춘원 이광수 기념비는 ‘내 생전에 그분의 기념비라도
세웠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춘원의 부인 허영숙(許英肅)여사의
말을 듣고, 봉선사 주지 운허(耘虛)스님 주요한(朱耀翰),
그리고 삼중당 출판사에서 세웠다.
제막식은 1975년 10월 11일 오후 2시 ‘공식적인
제막식 행사도 없이 쓸쓸히 치러졌다.
1945년 8월 16일 아침.
경기 양주(현 남양주) 진건면 사릉리에서 살던 춘원 이광수는 집 근처 사릉천변에 산보를 나갔다.
하지만 풍경이 예전과 달랐다. 개천가에서 일본 군인의 감독 아래 자갈을 파는 노역을 하던 근로보국대
대원들이 웬일인지 일을 하지 않고 삽을 든 채 서성거렸다.
그 수도 평소보다 훨씬 적어 보였다. 게다가 일본 군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때 운허 스님이 두루마기 고름을 풀어헤친 채 바쁜 걸음으로 냇둑을 걸어오며
6촌 형 춘원 이광수를 향해 소리쳤다.
“형님, 일본이 항복하였소.
어저께 오정에 일본 천황이 항복 방송을 했다오.
나는 지금 서울로 가는 길이오.”
이광수는 혼란스러웠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제2차 대전이 일본의 패색으로 짙어 가던 1944년 3월,
춘계 허 영숙여사는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사능리 520번지에
조그마한 기와집 농옥을 한 채 짓고, 춘원과 세 남매를 소개시켰다.
그 당시 춘원은 훼절자로서의 비난과 친일의 강요로
‘몸은 지칠대로 다 지쳐서 글 쓸 기력도 없었다’고 할 만큼 건강이 나빴기 때문에,
휴양을 겸해서 세상만사를 잊고, 농사나 지으며 살려는 사능생활이 시작된다.
아들 영근과 큰딸 정란, 작은딸 정화들은 모두 이 사능생활이 아버지 춘원을
가까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모셨던 시절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8·15 해방 후에는 근 4년 동안 지난날에 대한 스스로의 채찍질로 돌베개를 베었다.
1949년 반민법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 이어 불기소처분을 받으면서,
춘원의 가정은 그의 생애 중 가장 평온하고 행복했던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그 평온하고 행복했던 시절도 잠시 동안이었다.
고혈압과 폐렴을 치료하던 1950년 6월 6·25사변이 일어났다.
피난을 가자는 허 여사에게 “서울까지야 오겠소?
대한민국이 그렇게 약하지는 않소”하면서도,
“내일 떠나야지”하고 벼르다가,
그해 7월 12일,
평복에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선두로 한 세 사람에게 끌려갔다.
“담배 서너 곽만 주시오”해서 “혈압도 높으신데 한 곽만 가져가세요”라는
허 여사 말대로 한 갑을 말없이 받아 넣더라는 얘기다.
문 밖에는 ‘조그만 하이야’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춘원이 납북 되어가던 날의 마지막 모습이었던 것이다.
춘계 허여사는 동경여의전 재학시절에 결핵 3기로 사경을 헤매던 그를 소생시켰다.
그리고 병약한 그가 작가 활동을 하는 사이 병원을 개업, 가정을 꾸며 나갔다.
큰딸 정란은 말한다.
“어쨌든 아버지는 작품 말고는 여러모로 인생의 실패를 한 분이었다”라고.
때문에 그는 생활이 무능력하고 현실에 적응 못하는 이상주의자였는지 모른다.
허여사는 문호의 아내라는 명성의 그늘에서 파란중첩의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그 허여사는 미국에 있는 자녀를 방문하고 돌아와
춘원 문학비를 세우던 1975년 9월 7일 10시 30분
지병인 폐렴이 도져 문학비의 완공도 보지 못한 채 별세했다.
향년 80세였다.
‘춘원의 아내’ 허영숙 여사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샘내 천주교 묘지에 묻혀 있다.
춘원 이광수 기념비 바로 옆에는 6촌 동생 운허(耘虛) 스님의 <耘虛堂大宗師追慕碑>가 있다.
운허 스님(속명 이학수)은 평북 정주에서 경제적으로 부유하였고 사헌부 장령(정4품)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학식있는 집안에서 태여난다.
6세 때에 한글을 깨우친 이학수는 7세에 고향집 사랑방에 연 한학당인 회보재에서
14세까지 한문을 배웠다. 이때 춘원 이광수는 같은 학우였다.
이학수는 17세에 사서(四書)를 마치고 정주 향교에 임시로 세워진 측량학교에
입학하여 산술과 평면측량법을 배웠다.
이학수는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만주로 떠난다.
그는 친구들의 권유로 평양에 돌아와 대성중학교에 입학했다.
대성중학교는 안창호 선생님이 설립한 민족학교로서 1911년 이학수가 2학년때
105인 사건이 일어나 이 학교의 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학수는 조국 광복을 위해 만주로 떠나 만주 봉천성 환인현에 동지들과 함께
동창학교를 세우고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비밀 독립 투쟁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대종교에 귀의하고
이름을 이시열(李時說)로 고쳤다.
호는 시조 단군을 염두에 두고 단총(檀叢)이라 하였다.
이시열은 동창학교, 흥동학교, 배달학교에서 학교 설립과 운영에 적극 관여하였다.
당시 교사로서 이시열과 함께 활동한 사람들 가운데는 단재 신채호, 정인보, 이극로,
안호상, 안재홍 등 후에 유명한 애국지사들이 적지 않았다.
운허는 이들 교사 학생들과 백두산과 광개토대왕비 등을 답사하며 민족 의식을 드높였다.
덕언면 출신으로 배달학교 학생이었던 조경연은 ‘그리운 스승’이란 후일담에서
“선생님은 재미있고 엄격하신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항상 우리들에게 이 학교는
배달학교이고 배달 민족을 만드는 곳이라고 강조하셨다”고 회고하였다.
30세이던 1921년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운동을 더욱 활성화시키려던 청년 이시열은
일제 경찰의 추격을 피해 무작정 금강산으로 피신하여 심산의 텅 빈 암자에서 홀로 한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암자에 있던 불경을 보면서 소일하던 이시열은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고
이듬해 눈이 녹아 돌아온 주지 스님을 통해 불교에 귀의하였다.
이후 경기도 봉선사 월초스님 문하에서 불도에 정진하며 경학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35세이던 1926년 가을 금강산 유점사에 동국경원을 세우고 경전을 연구하였다.
37세이던 1928년에는 서울 동대문 밖 개운사에서 전국 강원 학인대회 소집하여
상설 기관으로 조선불교학인연맹을 조직하였다. 38세이던 1929년 불가 입문 8년 만에 만주로
돌아와 보성학교를 세우고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였다가 41세이던 1932년 봉선사로 다시 돌아왔으나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매서운 감시는 계속 되었다.
45세이던 1936년 봉선사에 설치된 홍법강원에서 강사를 맡았다.
54세이던 1945년 해방이 되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같이 하던 동지들과 함께 조선혁명당의
재건 정치활동을 한 것은 30대 독립투사의 열정이 아직도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운허 스님은 현실 정치에 한계를 절감하여 동지들과 협의하여 정당을 해체하였다.
이후 운허 스님은 봉선사 부속 사찰들과 지역민이 힘을 합쳐 광동중학교를 개설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운허 스님과 김구 선생의 인연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1948년 김구 선생은 남북 협상을 위해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기 전에
봉선사를 찾아 운허 스님에게 불안한 출발에 앞서 “괜찮겠는가?” 라고 의견을 물었다.
운허 스님은 “괜찮습니다. 별일 없이 돌아오시게 될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
김구 선생은 평양 방문을 무사히 마치고 38선 이남으로 내려온 후 봉선사에 들려
운허 스님과 북한에서의 일을 의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