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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용정에서 보다
무엇이나 아는 만큼 보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말이 맞다.
십여 차례 용정에 다녀왔다. 그 동안 용정을 보는 나의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 다양한 시각으로 용정을 보노라니 1900년대 초반의 40년간 용정은 그야말로 팔팔 끓는 거대한 가마솥이었다. 조선이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부터 일제가 패망하는 1945년까지 용정 일대의 조선인들은 오늘 한국사회와 교회가 안고 있는 것과 같은 내부적 갈등과 대립, 정체와 위기를 겪으면서 외부적으로는 중국의 토비와 관원들의 횡포, 일제의 학대와 치욕에 굴하지 않고 폭압과 회유를 견디며 면면연연 독립운동을 견지해 갔다.
학창시절에 선구자를 부르면서 마음에 그렸던 용정은 조국을 찾기 위해 말을 달리던 독립투사들의 마을이었고 “별을 헤는 밤”이나 “서시”를 읽으면서 상상했던 용정은 나라 잃은 슬픔으로 잠 못 이루는 구국열정을 가진 저항시인의 마을이었다. 그러나 용정 바로 옆에 있는 도시 연길에 와서 살면서 나의 환상은 깨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족 170여년 용정 역사에서 민족주의 망명 지사들과 기독교의 독립운동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1920년 중반을 기점으로 하여 조선족 사회에서 영향력이 점차 잃었으며 시인 역시 시를 썼다는 사실 말고는 용정의 독립투쟁사에 남긴 흔적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던 일천한 상식과 다르게 용정일대는 1925년을 기점으로 해서 사회주의 물결에 휩쓸렸으며 사회주의 독립투사들의 기반이 되었다. 용정에서 중공공산당 산하의 조선인공산당이 최초로 결성되었으며 한국인들에게 비교적 친숙한 명동학교, 은진학교는 물론이고 대성학교, 중흥학교에서 반종교 투쟁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이들의 활동으로 인하여 역사의 주체로 깨어난 농민과 노동자, 남녀청년들이 독립 투쟁에 생명을 아낌없이 바쳤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투사로서 독립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청년들이 무려 1만 3,000여명에 이르며 연변 110개의 향(진)에 610개의 조선족 독립열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인구 비율을 생각하면 140명중 1명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산화하였으니 1930년대 용정은 한국독립투쟁의 최대 항쟁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용정을 망명 독립투사들의 본거지, 시인의 고향으로 인식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을 배제할 수밖에 없는 해방 후 한국 정치상황과 기독교 영향력의 산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다른 인식을 우리가 계속하고 있는 것은 시류에 민감한 TV 방송과 언론 매체들의 보수성과 중국과 수교 이후 연변 관광의 길이 열리며 여행사들이 한국인이 익히 알고 있는 “청산리전투”, “일송정과 용드레 우물”, “윤동주 시인과 명동촌” 그리고 “이상설의 서전서숙”을 여행상품으로 개발하여 그것만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의 용정에 대한 인식이 고착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정을 잘 보려면 먼저 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으며 일본이 패망하기 전 대략 100년의 역사를 크게 3개의 시대로 구분해 본다.
첫 시기는 1850년대부터 1905년까지이다. 이 시대는 가난한 소작농민들과 노비들이 조선에서 살 수 없어 도망쳐 나와 연변을 비롯한 동북삼성의 강을 따라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수전을 일구어낸 농민들의 활동기로 수전민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둘째 시기는 1905년에서 1925년으로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관료, 양반 사대부들이 들어와서 학교를 세워 반일민족교육과 함께 독립 투쟁을 펼친 시대로 망명 지사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셋째 시기는 1925년에서 1945년으로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농민대중과 청년들이 조직화되고 의식화되어 주체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시대로 대중 항쟁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한국사회는 이 세 시기 중 월강 조선 이주민, 수전민의 시대를 거의 모르고 관심도 없다. 그러나 선구자, 수전민 시대야말로 망명 지사들의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었으며 오늘날 조선자치주탄생의 시점으로서 다각적으로 심도 있게 다루어야 할 시대이다. 무책임하고 무능했던 망국의 역사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평가 없이 새 역사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이 글에서는 두 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망명 지사들의 시대를 다루며 그들의 교육운동과 독립운동을 소개하며 그런 속에서 출현한 사회주의의 활동을 보고자 한다.
두 번째시기에 해당하는 1905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은 망국과 식민치 통치 속에 들어갔다.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고 군대가 해산되고 결국에는 일본에게 자주권을 넘기는 나라의 멸망이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연변으로 대대적인 이주를 시도하였다.
1904년에 연변지역에 이주해온 조선 이주민은 50,000여명에 달하였고 1907년에는 71,000여명, 1909년에는 85,000여명, 1910년에는 109,500여명, 1911년에는 126,000여명, 1912년에는 210,000명에 이르며 1920년에는 277,000여명에 이른다. 일본 척무성의 자료에 의하면 1920년에 이르러 만주 동북지역 조선이주민 인구는 457,000여명에 이른다.
이 시기의 이주민들은 나라가 망하기 전후에 들어온 정치 이민으로 집단 또는 개인적으로 이주를 하였다. 특별히 ❮신민회❯,❮서북학회❯,❮청림교❯,❮대종교❱계열의 인사들, 홍범도와 수하 의병들, 이진룡과 수하의 의병들과 함경북도 성진군 학성면 달래동의 양씨 일가친척 150여명은 집단 이주를 하였으며 개인적으로 망명한 이들은 이상설, 안중근, 안명근, 양기탁, 서일, 안희제, 안무, 조맹선, 전덕원, 김중건, 김좌진 등등이 있다. 이 시기를 주도한 망명 지사들은 조선인들의 반일 정서를 고양시키며 독립투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항일단체 조직과 독립운동 인재 양성을 위한 사립학교 설립 및 조선인의 이주와 함께 따라온 기독교를 비롯한 민족종교의 전파를 통하여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1. 1905년~1925년대의 망명 지사들의 활동을 살펴보자
첫째로 그들은 항일단체 설립과 항일교육과 계몽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1909년 이동춘의 발기로 ❮간민교육회❯가 설립되었다. 이동춘은 당시 변무공서교섭과 통역관원으로 등용되어 간도에서 조선족교육체계 확립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13년 2월에는 김약연과 이동춘, 구춘선, 김립 등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조선이주민들의 자치와 연합을 위하여 ❮간민회❯를 만들었다.
이동휘와 용정 일대의 기독교 인사들이 ❮삼국전도회❯를 세우고 복음전파와 함께 일제에 맞서는 반일 교육을 하는 사립학교를 설립 운동을 펼쳐 나갔다.
1911년 봄에 왕청현 덕원리로 망명한 서일은 1912년에 계화, 현천묵과 함께 반일독립단체인 ❮중광단❯만들어서 청년들을 군사 훈련시켰으며 1919년 3.13 만세 시위 후에는 대한정의단으로 개편하였으며 그 휘하에 무장독립단체인 ❮대한군정회❯만들었다. 1920년 봄에❮대한군정회❯는 청산리전투의 주력부대인❮북로군정서❯로 이름이 바뀐다.
1904년에 이범윤의 통역관으로 러일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안중근과 단지동맹을 결성하였던 황병길은 백삼규, 오병묵과 반일교육과 활동을 주 목적으로 하는❮기독교우회❯조직하였고, 상인들의 계몽과 교육을 위해❮훈춘상무회❯를 조직하였다.
황병길, 오병묵, 이종호, 윤해 등은 한족과 연합하여 조선의 독립을 회복하고 일본의 연해주 병탄을 방지하기 위한 ❮둔전영❯을 조직하였다.
1910년에 김익근과 김문호는 왕청현 라자구에 농업과 상업을 흥성시키며 일본을 배척하고 한국을 회복시킨다는 취지로 ❮라자구농상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대별남구에서는 송익준이 주도하여 무력투쟁단체인 ❮창의소❯를 만들었다.
1915년에 이동휘, 장종휘 등은 ❮만국개량회❯를 조직하여 연해주와 간도가 긴밀한 연락 속에서 대일작전을 추진키로 하였다.
1919년 3월에 구춘선을 회장으로 하는 반일단체인 ❮독립기성회❯가 조직되었다.
1919년 3월 간도에서 가장 큰 ❮국민회❯가 만들어졌다.
1919년 4월에 동년현, 훈춘현의 대표들이 훈춘 탑도구에 모여 ❮훈춘현국민회지부❯를 설립하였다.
둘째로 그들은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하며 항일인재를 양성하였다.
항일인재 양성을 위한 사립학교가 동북삼성 곳곳에서 세워졌다.
사립학교는 반일민족단체에서 세운 사립학교, 조선족종교단체와 그 인사들이 세운 학교,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광범위한 민중들이 세운 학교로 농촌지역의 농민들이 세운 학교가 있었다.
❮만주국교육방안❯에 나오는 1928년 통계에 의하면 반일민족 단체인 정의부 22개, 신민부 10개, 참의부가 2개의 학교를 세웠다.
같은 책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족종교단체와 지도자들이 세운 학교는 기독교에서 세운 학교는 64개, 천도교, 시천교, 원종교 대종교 등의 민족 종교 단체가 세운 학교가 25개 였으며 ❮최근간도사정❯에 나오는 1926년도 통계에 의하면 외국인 선교사에 의하여 세워진 학교가 19개 였다, ❮만주국교육방안❯에 나오는 1928년 5월 통계에 의하면 조선족 마을이 있는 곳마다 농민들에 의해서 세워진 개량식 서당학교가 328개 였으며, 외국인을 포함한 조선인이 세운 사립학교의 총수는 470개 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조선인들의 반일교육의 의지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1928년 통계에 의하면 중국인이 세운 조선족 관립학교는 174개 였으며 일본이 세운 조선족 학교는 148개였다.
조선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근대사립학교는 1906년 말에 세워진 서전서숙이었다. 그러나 설립자인 이상설의 1907년 봄, 헤이그밀사행과 일본 ❮통감부간도파출소❯의 억압으로 강제로 문을 닫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서 창동학교, 정동학교, 광성학교, 명동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계속해서 왕청현에 명동학교, 훈춘현에 신풍학교, 북일학교, 연길에 길동학교, 용정에 영신학교, 명신여학교, 일공학교, 은진학교, 동흥학교, 대성학교, 광명학교, 동양학원, 노동학원, 동아학교 등등이 세워졌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1916년 12월까지 동북3성내 조선족 사립학교가 238개소, 학생이 63,000여명이 있었다. 만주국 시절에 기록된 ❮만주국교육방안❯의 1928년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족사립학교는 470개소, 학생은 16,929명이었다.
민족사립학교는 1911년 8월에 선포된 ❮조선교육령❯이 조선인을 충성된 식민지 백성으로 만들고자하는 민족말살정책과 동화정책에 반대하는 반일을 교육의 취지로 삼았으며 민족의식과 독립을 고취하는 교육과목에 중점을 두었으며 종래의 한학과 유교의 윤리도덕교육을 혁파하고 근대적인 새로운 문화 지식을 교육하였다. 국어, 역사. 생리, 화학, 지리, 수학, 체육 등 학과목을 중시하였으며 3.13 만세 시위 후 군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군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립학교들은 조기공산주의자들과 진보적인 지식인에 의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사회주의혁명사상을 전파하는 기지가 되었으며 다양한 종교재단이 세운 사립학교에서는 사회주의 사조의 파급으로 교육과 종교 분리운동이 일어났다.
대성유교회 계열에서 세운 대성학교에서는 공자의 위패가 제거되고 매월 초에 드리는 제사가 사라졌으며 중흥학교에서도 천도교 재단으로부터 분리가 되어 일체의 종교 행위가 중단되었으며 기독교 학교도 마찬가지 시련을 겪어야 했다. 명동학교도 반 종교투쟁과 사회적 여론의 압력으로 교장인 김약연이 1928년 교장직무를 사임하고 용정촌으로 떠난 뒤 오을열이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학교가 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은진학교는 1927년 졸업을 앞두고 졸업이 취소된 최성회로 말미암아 졸업생 전원이 졸업을 거부하고 해산하였으며 이에 2,3학년들이 최성회에게 졸업장을 수여할 것과 성경 과목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결국 150명의 재학생들이 대성학교와 증흥학교로 단체로 전학을 가는 바람에 폐교에 위기에 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1928년에는 11명이 졸업하였고, 1929년에는 7명이 졸업하였으며 1932년에는 2명이 졸업하는 진통을 겪어야 했다.
민족사립학교는 많은 항일지사들을 양성하였으며 이들의 활동은 3.13 만세 시위, 각 지역의 만세 시위, 15만원 탈취사건을 비롯하여 일본 군대와 경찰서, 관청을 습격하는 일로 나타났다.
일반사립학교에서는 학식을 갖춘 지도자를 배출해내는 것에 중점을 두었지만 무장투쟁을 예상하며 직접 독립군을 양성하는 무관학교도 세워졌다. 이종호의 지원으로 이동휘와 김립이 라자구에 세운 무관학교, 1920년 3월에 서일, 현천묵, 계화가 김좌진을 소장으로 초빙하여 세운 북로군정서 산하의 ❮무관연성소❯,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지원하여 신흥학교에 세운 ❮신흥무관학교❯, 길림성화전현에 세워진 ❮의용군강습소❯, 1920년 5월에 국민회 주관으로 연길현 숭려향 이정배에 세워진 사관학교, 화룡현 삼도구 능지영에 세워진 사관양성소, 안도현 내두산에 설립한 사관학교, 길림성 교화현 남강자에 설립한 검성중학, 신민부가 목릉현 팔리평에 설립한 성동사관학교 등이다. 이들 사관학교에서는 군사교육과 실전 훈련을 실시하였으며 임전무퇴의 군인정신을 배양하였으며 하루에 10여 시간씩 강훈련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장투쟁의 최전선으로 수송하였다.
셋째로 제 종교 포교와 전도활동 및 신도들의 모임으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한다.
천주교 인사들이 3.13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방우룡은 김종담, 김연과 함께 천주교를 기반으로 하는 항일무장부대 ❮의민단❯를 조직하여 홍범도연합부대에 가담하여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다.
캐나다 장로교에는 이동춘, 정재면, 박무림, 홍순국, 남공선, 황병길, 오병묵, 구춘선, 안무, 마진, 강백규, 김약연, 이성국, 등 많은 망명 지사들이 모였다. 그들은 ❰서전서숙❱을 효시로 하여 각처에 교회와 신식학교를 세웠으며 교민회를 만들어서 반일 계몽운동을 벌였으며, 용정 3.13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였으며, 각처의 만세 시위를 조직하여 주도적으로 이끌어 갔다. 그들은 간민회를 기초로 하여 장로교인 중심의 연변 최대의 반일단체인 ❮간도국민회❯를 조직하여 ❮국민회군❯를 만들었고 독립군양성소를 세웠다. 국민회군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황병길, 오병묵 등은 훈춘에서 ❮기독교우회❯,❮훈춘상무회❯,❮둔전영❯, ❰훈춘한민회❱을 조직하여 반일교육과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동휘와 김립 등은 대한기독교회를 통하여 연길, 훈춘, 왕청에 교회학교를 세웠고 3국전도회 이름으로 왕청현 라자구에 무관학교를 세웠다.
나철, 김교헌, 윤세복, 서일, 계화, 현천묵, 김규식, 김복, 김장, 이장녕, 김규식(우사 김규식과 동명이인) 등은 대종교 교세확장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꾀하였다. 1911년에 연변지구에서 포교를 시작한 이래로 교우 자녀들을 위하여 화룡현 청일학교, 환인현 동창학교, 무송현 벽산학교, 밀산현 대흥학교, 용정현 문명학교, 중흥학교, 왕청현 명동학교, 훈춘현 진동학교, 영안현 대종학교 등 많은 학교를 세웠다. 김교헌은 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으며 서일, 현천묵, 계화 등은 1912년에 교도 중심의 반일단체인 ❮중광단❯을 만들었고 1919년 말에 김좌진을 무관양성소 교관으로 초청하여 독립군양성소❮사관양성소❯를 세웠으며 대종교 교도를 기반으로 하는 무장단체인 ❮북로군정서❯ 조직하였다. 북로군정서는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역사에 길이 남는 전투를 치루었으며 그 후❮대한독립군단❯으로 재정비되었다. 1920년 당시 밀산에 모인 조선독립군 부대는 모두 3,500여 명이었는데 대종교 계통의 군인이 2,500여명에 이르렀다.
이범윤, 황운세, 홍두극은 유림인사를 중심으로 하는 반일무장단체 ❮광복단❯을 만들어 왕청현 춘양일대를 근거지 삼아 반일무장투쟁을 벌였으며 청산리전투에도 참여하였다. .
임창세, 신포, 오석영, 김광숙, 윤좌형, 현기정, 지창욱, 임방혁 등은 청림교를 기반으로 하여 무장독립단체인 ❮야단❯을 조직하였으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병력과 군복 등을 지원하였다. 왕청현의 청림교도들은 1922년에 명신소학교를 짓고 80명을 모집하여 반일교육을 하였으며 1920년부터 청림교 지도부는 백두산에 올라 일본의 멸망을 기원하고 나라의 독립을 비는 단군제를 드리며 청림교도들에게 반일의식을 고취하였다.
2. 망명 지사들이 활동을 시작하는 즈음에 일제 또한 동북진출을 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3.13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무장단체들이 결성되어 독립전쟁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경신대토벌이 일어나고 독립군들이 하나의 단체로 정비된다. 그리고 동북 조선이주민 사회는 사회주의 사조에 휩쓸리었다.
첫째 일본제국주의의 동북 진출을 살펴보자.
수탈과 억압을 피해 도망쳐 나온 용정, 연변의 1세대 수전민들은 1905년부터 다양한 망명 지사들 2세대와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거센 물결을 맞이하였다.
1905년 이후 제국주의 일본은 ❰간도의 조선인을 보호 한다❱명목으로 1907년 8월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다. 1909년에는 ❰간도조약❱을 맺고 파출소를 철수하고 그 자리에❰간도일본총영사관❱을 설치하고 연길, 투도구, 배초구, 훈춘에 영사관 분관을 두었고 화룡현, 남양평, 동불사, 로투구, 명월구, 개산툰, 이도구, 남평, 삼도구, 석현 등 19 곳에 경찰서를 세웠다. 뿐만 아니라 총영사관 산하에 ❰일본인거류민회❱,❰동양척식주식회사 간도지점❱,❰조선인민회❱,❰조선은행 용정지점❱,❰용정금융부❱,❰광명회❱ 등 정치, 경제, 문화적 침략 기구를 설치하였다.
간도총영사관은 동북의 각종 정보를 탐지하며, 동북의 재산을 약탈하고,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며 동북을 제 2의 식민지로 삼으려하는 일본 제국주의 본부로서 악명을 날렸다.
일본은 동북거주 조선인들에게 탄압과 회유 양면정책을 취하여 민족을 이간질시켰으며 황민화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인과 차별과 동화를 전제로 한 일본어 중심, 일본 문화 중심의 실업교육을 실시하였다. 1928년 5월 조사에 의하면 식민지교육정책의 기본 방침에 따라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세운 조선인을 위한 학교는 148개 이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족 공립보통학교 41개, 만철회사의 조선족학교 12개, 조선총독부가 운영비를 보조한 보조학교 82개, 이민회사의 조선인학교 4개, 일본인의 사립학교 9개로 모두 다 식민지 노예화 교육의 첨병들이었으며 조선의 청소년들을 친일기회주의자로 양산하여 독립운동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용정의 조선인들은 일본의 감시와 탄압, 회유와 이간질에도 불구하고 항일과 독립 의지를 불태웠고 한껏 고양된 민족의식이 바야흐로 1919년 ❰3.13❱ 항일시위로 나타났다.
둘째 연변조선들의 ❰3.13❱항일 시위를 살펴보자.
조선의❰3.1❱운동이 전국을 휩쓸자 그 불꽃이 동북지역에도 거세게 타올랐다. 연변의 항일 지사들은 상해와 연해주의 독립 운동가들과 연계하며 즉시 호응하여 항일집회를 준비하였다. 3월 13일 연변 각지에서 모인 30,000여명의 농민들과 사립학교 학생들은 일본총영사관 소재지가 있는 용정에 모여 항일집회를 열고 독립선언서를 읽고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성토하였다. 일제의 압력으로 중국지방당국은 평화시위를 잔혹하게 탄압하여 그 자리에서 10명이 총에 맞아 숨지고 40여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7명의 중상자가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3월 17일, 1,500여명의 조선인들이 희생자들의 시신을 들고 다시 항의 시위를 하였다.
연변일대에서 ❰3.13❱시위 후에 30여 지역에서 58차에 걸친 항일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연길현의 이도구, 팔도구, 투도구, 용두산, 국자가 등지에서 수천 명이 참석하였으며 왕청현의 배초구, 라자구, 석현 등지에서, 안도현의 현성과 관지에서 훈춘현의 현성과 횡부자구, 로황구 등지에서 항일시위의 횃불이 연일 타올랐다. 3월부터 4월 말까지 만세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은 86,670여 명이었다.
58차에 걸쳐 86,670명이 참여한 독립 만세시위는 세계적인 동정의 여론을 불러일으켰지만 일본제국주의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만주 여기저기서 독립무장단체들이 결성도기 시작하였다.
셋째 결성된 무장단체들과 독립전쟁을 살펴보자.
비폭력 평화 시위였던❰3.13❱시위가 일본의 폭력 앞에 좌절을 겪으면서 독립투사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활동지역에서 무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며 독립군부대를 결성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여름에 연변지역에는 2,900여 명의 독립군 장병들이 2,600여 자루의 보총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홍범도와 박경철의❰대한독립단❱,구춘선과 안무의❰국민회군❱,최명록의 ❰군무독군부❱,서일, 현천묵, 김좌진의❰북로군정서❱, 이흥수의 ❰신민단❱,외에도 ❰의군부❱,❰의민단❱,❰한민회❱등이 있었다.
여러 무장단체들은 창건 후 바로 조선 국내진공작전을 펼쳤으며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단❱은 혜산과 갑산의 일본수비군을 습격하여 많은 무기와 군수품을 포획하였고 만포진, 자성, 회령, 온성, 종성을 습격하였다.
1920년 재만 독립군들의 국경 3도(함북, 함남, 평북)에서 전개한 국내진공 유격전수는 총 1,700건에 이른다. 국내진공작전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는 한국 독립전쟁사의 백미이다.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4일❰신민단❱이 종성군 강양동초소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제의 ❰월강추격대❱는 독립군을 얕잡아보고 봉오동까지 쳐들어 왔다. 대기하고 있었던 ❰대한독립군❱,❰국민회군❱,❰도독부❱,❰신민단❱등 연합부대들이 홍범도와 최명록의 지휘 하에 매복전을 펼쳐서 일제 침략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봉오동전투❱의 연합부대의 승리였으며 중국 땅에서 펼쳐진 조선의 독립군과 일본의 정규군의 최초의 전투로 조선인과 중국인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봉오동전투 이후 일제는 중.일 합동수색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토벌을 실시하였으나 중국 지방정부가 미온적인 자세로 응하자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화계획❱을 세우고,❰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그들은 1920년 10월 2일, 중국의 마적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인 민가와 영사관 분관을 습격하여 일본인 13명,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에 중경상을 입히게 만들었다. 일제는 훈춘사건을 빌미로 하여 중국에 피해배상을 요청하면서 바로 대대적인 병력을 동북으로 침입시켰다. 조선군 19사단을 주력부대로 하여 블라디보스토크파견군, 북만주 파견군 및 관동군이 합세한 약 2만여 명의 대부대였다. 일본군의 만주 진출의 정보를 접한 독립군부대들은 연합부대를 결성하였다.
청산리전투의 주역인 서부전선의 독립군은 홍범도와 안무 등이 인솔하는 연합부대에는 ❰대한독립군, 약 300명❱,❰국민회군, 약 250명❱,❰의군부군, 약150명❱,❰한민회군, 약 200명❱,❰광복단군, 약 200명❱,❰의민단군, 약 100명❱,❰신민단군, 약 200명❱❰야단❱,❰대한정의군정사❱등으로 총 병력은 1,400여 명이었으며, 연합부대에 참여하지 않은 ❰북로군정서❱의 병력은 약 1,000명 정도였다. 그들은 동북지역 조선인들의 생명과 안전을 우려하여 지역 근거지에서 나와 백두산 서쪽으로 이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청산리전투가 시작되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까지 홍범도가 인솔하는 연합부대와 북로군정서는 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만리구전투, 어랑촌전투, 고동하전투 등 10 여 차례 걸친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사하여 발표한 바에 의하면 일본 침략군은 1,200여 명의 전사자와 2,100여 명의 부상자를 냈으나 독립군측은 130여 명의 전사자, 220여 명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청산리전투는 2,000여명의 독립군이 2만 여명의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한국의 독립전쟁사에 길이 남을 치열한 전투였다. 홍범도를 비롯한 각 부대 지도자들의 탁월한 전략과 협력, 민간인들의 희생적인 협조와 수고, 군인들의 애국애족의 정신이 발현의 결과물이었으며 수전을 개척하고 자녀들을 독립군으로 보내고 세금을 내서 독립군을 지원한 동북 조선인들의 자주독립에의 염원이 피워낸 꽃이었다.
청산리전투는 당시 서부전선으로 떠나 연합부대의 승리였고 한 편에는 러시아쪽 가까이 왕청현 밀림, 동부전선으로 떠난 연합부대가 있었다. 이들은 서일 총재가 거느린 북로군정서 군인들과 훈춘지역과 왕청지역에서 결성된 무장단체의 독립군으로서 서부전선으로 간 독립군들에게 군수품을 보급하며 블라디보스트크 쪽에서 들어오는 일군의 서진을 막았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제 침략군은 독립군의 모체가 되는 조선인사회의 초토화작전을 감행하여 흔히 ❰경신참변❱이라 불리는 조선 민간인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그들은 연변지역 뿐 아니라 서만(서간도)에서도 조선인촌락을 습격하여 사람들을 살해하고 부녀자를 강간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옥, 학교, 교회에 불을 질렀다. 그들의 학살행위는 1921년 4월까지 계속되었다. 일제 침략자들에 의한 조선인의 총 피해는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았으며 1920년 10월 하순에서 11월 까지 연길, 화룡, 훈춘, 왕청 4 지역에서 당한 피해만해도 살해 당한 자들이 3,664명, 체포된 자들이 155명, 소실된 민가가 3,520여 채, 소실된 학교가 59개, 소실된 교회당이 19개소나 되었다.
경신대토벌로 조선인사회에 일제 침략군의 대학살이 일어나는 사이에 독립군들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1920년 12월 중순에 북만 밀산에 도착하였다. 밀산에 집결한 ❰대한독립군❱,❰북로군정서❱,❰간도국민회군❱,❰신민단❱,❰도독부❱,❰광복단❱,❰혈성단❱,❰야단❱,❰대한정의군정사❱등은 진지한 토론과 협상 끝에 총재를 서일, 부총재를 홍범도, 조성환, 김좌진으로 하는❰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총 병력이 3,500여명에 달하는 ❰대한독립군단❱은 3개 대대로 나누고 1개 대대에 3개 중대를 두고 1개 중대에 3개 소대를 두어 총 27개 소대를 이룬 그들은 밀산에서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 이만에 도착하였다. 러시아에서 상반된 정세 판단을 내린 김좌진을 비롯한 일부 지도자들은 북만으로 돌아오고, 볼셰비키만이 조선독립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홍범도, 이청천, 안무, 최진동 등은 계속 북으로 이동하여 자유시에 이른다.
이만에서 돌아온 독립군들과 밀산❰대한독립군단❱에 참여하지 않은 남은 자들이 구춘선을 중신으로 하는 ❰국민회군❱은 돈화와 액목현에서 ❰신민단❱은 영고탑에서 ❰광복단❱은 대한목단강,에서 ❰한민단❱은 동녕현 등지에서 진영을 재정비하였으나 전력의 손실로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활로를 모색하기 위하여 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과 대한통의부, 참의부, 정의부가 형성되었으나 독립투쟁의 길은 험난하였고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의 출현으로 독립운동에 대대적인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어쨌든 독립군의 대 이동 후 연변 땅에서 독립군무장활동이 자취를 감추었고 활동중심이 남만과 북만으로 넘어갔다.
이렇듯이 망명 지사들이 학교와 항일단체를 세우고 무장단체를 만들어서 독립운동에 전념하고 있을 때, 러시아의 10월 혁명의 승리의 영향으로 사회주의가 용정을 중심으로 하는 연변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용정의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과 종교 활동은 침체되었지만 용정은 사회주의자들의 거점이 되어서 새로운 차원의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추진한다.
3, 1917년 10월에 일어난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의 여파가 조선 이주민 사회에도 밀려왔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승리는 많은 조선 독립투사들과 청년들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신뢰와 꿈을 심어주었다. 레닌의 피압박민족의 해방에 대한 관심과 지원 약속은 조선의 독립투사들에게 한 가닥의 희망이 되었다. 이에 고무된 이동휘, 박애, 박진순은 1918년 6월 26일연해주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고 김철훈, 이성은 또한 1919년 9월 5일에 하바롭스크에서❰전러시아 고려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이동휘는 레닌의 자금으로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잡지❰새벽종❱과 소책자등을 만들어서 동북지역에 배포를 하였다. 조선인이 집중되어 있는 연변에는 다양한 루트를 통한 신문과 잡지 그리고 여운형이 번역한❰공산당선언❱을 비롯하여 ❰노동조합독본❱,❰레닌❱,❰우리 무산계급이 나아갈 길❱등의 책들이 재빨리 들어 왔다.
공산주의 간행물들이 밀물처럼 들어오자 이를 연구하기 위한 모임들이 속출하였다.
1922년부터 1923년에 이르는 기간에 용정의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의 진보적인 학생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는 비밀 학습단체인❰광명회❱를 설립하였다. 은진중학교 학생까지 망라한 30여 명으로 구성된 ❰광명회❱학생들은 이인구와 이주화의 지도를 받았다.
1923년 2월 초에 최웅렬, 한상오, 오성륜은 북경의열단원인 김강, 이열과 함께 영안현 영고탑에서 비밀 결사인❰적기단❱을 결성하였다.
김사국은 1923년 3월에 조선에서 용정으로 와서❰동양학원❱을 꾸리고 동북의 조선인은 물론 연해주의 조선 청년들까지 받아들여 공산주의 사상을 학습시켰다.
박윤서와 주청송 등이 1923년 9월에 연해주에서 용정으로 와서 동흥중학교의 진보적인 학생들을 담합하여❰사회과학연구회❱,❰학생친목회❱등을 조직하고 과외시간을 이용하여 사회주의를 선전하였다.
상해 공산주의 단체에서 1924년 7월, 장기영, 주건 등을 연변에 파견하여 옹성라자를 중심으로 청년학생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였다.
1924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고 용정에 돌아온 김봉익, 오리근, 주채희 등 공산주의자들이 ❰노동학원❱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에게 공산주의와 노농혁명사상을 가르쳤으며 ❰노농동맹❱을 창설하였다.
1924년 12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김응섭의 발기로 ❰한족노동당❱이 조직되었고 기관지 ❰노동보❱를 통하여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924년 11월 반석현에서 반석일대 11개 단체의 22명 대표가 참석한 회의에서 ❰남만청년총동❱을 창립하였다.
1925년 11월에 ❰북만노력청년동맹❱이 결성되었고, 1926년 12월 봉천성 홍경현에서 ❰남만청년연맹❱조직되었다.
1926년 1월 25일 용정에서 동진청년회 등 20개 단체의 대표 28명이 모여 ❰동만청년총연맹❱을 창립하였다..
1926년 8월에 조선공산당 중앙에서 파견된 조봉암 등이 용정에 조선공산당 동만구역국을 설치하였으며 산하에 9개구와 16개 지부를 건립하였으며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에 4개의 지부가 있었다. 동만구역국의 상부인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1926년 초에 중동선 일면파에서 건립되고 본부는 영고탑에 두었으며 산하에 동만구역국 외에 남만구역국, 북만구역국을 두었다.
1926년 10월에 고려공산청년회 동만도위원회가 창설되었다.
1927년 12월에 용정에서❰전간도조선인단체협의회❱와 ❰동만여자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1927년 10월에 중공만주임시성위가 설립되었고 1928년 5월에 동북조선족의 최초 공산당지부가 용정에서 건립되었고 8월에 중공동만특위가 건립되었다.
사회주의 사상이 일파만파가 되어서 연변조선인 사회를 뒤흔들었다.
양반상놈의 계급사회에서 숨을 죽이고 살았던 소작농민 출신의 1세대 이주 조선인들과 2세대들은 착취 없는 세상, 평등한 세상과 대중적 투쟁에 대하여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다.
조기 공산주의자들은 연변의 조선족을 사회주의 세계로 인도하였고 사상을 접한 진보적인 학생과 청년들은 농촌순회 공연을 통하여 농촌 남녀청년들을 조직하여 문화와 사상학습을 시키며 몸소 실천에 앞장을 섰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및 그 산하의 각 구역국과 기층조직들은 동북각지의 조선인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항일혁명사상을 선전하고 민족문화교육을 발전시키는 활동을 추진하였다. 기층 조직인 정치 야학교, 농민조합, 노동조합, 청년단체를 확장하여 동북의 도시와 농촌의 조선인 거주지에서 반제와 반봉건의 불길을 일으켰다. 1928년부터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하여 각파 성원들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에 파견하거나 민족유일당촉성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청년학생들과 조선 농민들을 이끌고 수차례나 항일시위운동을 벌려 일제침략자들에게 타격을 가하고 조선이주민들의 항일투지를 고무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은 거듭 탄압을 받았다. 일제는 1927년 10월, 1928년 9월, 1930년 4월에 걸쳐서 제1차, 제2차, 제3차 공산당검거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의 수백 명 간부와 당원, 군중들을 체포, 감금하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그 기층 조직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생명을 걸고 저항하는 항일유격대와 동북항일연군을 괴멸시키지 못하였다.
4. 마지막으로 망명 지사의 시대의 역사적 의미와 기여를 생각해 보자.
어렵게 긴 글을 쓴 것은 그 시대의 의미를 음미하며 그 시대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찾기 위해서다. 용정의 이주조선인 사회의 흐름과 명암, 망명했던 지사들의 의식과 활동에서 보게 되는 명암이 평화로 가는 길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사회에 익히 알려진 대부분의 독립투사들의 이 시대에 만주로 망명을 한 지사들이다. 그들이 독립운동사에서의 차지하는 비중과 위치, 이주 조선인 사회에 끼친 영향이 자못 크다. 봉건사회에서 바야흐로 근대정신의 맹아가 싹트고 있는 시대를 살아야 했던 그들이 우리 역사에 남긴 유산이 무엇인지 먼저 긍정적인 부분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망명 지사들의 첫 번째 기여는 조선 이주민들에게 항일민족 의식을 심어준 것이다.
1907년 만주에 진출한 일제는 자기들의 정치적 군사적 침략의 기반을 닦으면서 경제적 약탈을 감행하는 한편 사상문화침략을 강행함으로 식민지강점을 하루 속히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간도조선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조선인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며 식민지 민족말살정책과 우민화교육을 실시하였다. 일제의 이런 정책에 반대하여 망명 지사들은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신학문을 수용하여 잃어버린 국권을 찾는 일에 전력을 다하였다. 당시 사립학교 설립자나 교사는 다 독립투사였고 애국자로서 긍지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교육과 계몽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투철한 항일정신을 배양하여 조선인들을 독립투쟁의 길로 이끌었다.
두 번째 기여는 기존의 교육을 혁파하고 신교육의 체계를 정비한 것이다.
조선 500년 동안 서당, 서원, 항교, 학당에서 교육된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사서오경 등 공맹을 공부하며 주자학의 도덕윤리를 가르쳤던 교육체계를 과감히 혁파하고 근대적인 새로운 문화지식으로 교육을 전면적으로 개혁하였다. 새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서 교과목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연길에서는 간민교육회가 산하에 우수한 학자를 초빙하여 사립학교를 위한 교과서를 편찬하였다. 용정, 동변도, 하얼빈에서도 사립학교 교과서가 편찬되었다. 이런 교재는 민족 언어, 민족 문화, 민족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지식을 전수하는 한편 과학, 정치, 수학, 외국어 과목도 중요시 되었으므로 후세대가 세계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특별히 남존여비사회에서 여성교육은 망명 지사들이 이루어낸 교육 혁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 번째 기여는 전쟁 없이는 독립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사대교린의 외교정책으로 임진전쟁, 정유전쟁, 정묘전쟁, 병자전쟁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유지해온 조선의 사대부들은 국방을 튼튼히 세우기보다는 주변의 큰 나라에 적당히 기대는 사대정책을 선호하였다. 아이가 부모에게 기대듯이 큰 나라에 기대어 나라를 유지하며 권력을 잡으려고 했던 친청파, 친러파, 친일파, 친미파로 얼룩진 대한제국의 역사가 당시 사대부들의 나라의 주권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를 잘 보여준다. 헤이그밀사파견,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 임시정부의 외교론, 상해파공산주의자들의 레닌 의존 등도 망명 지사들의 사대주의적인 자세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한국사회가 무저항, 비폭력 시위로 자랑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3.1운동은 외교로, 평화로, 지혜로, 인내로, 여론으로, 지배자를 감복시켜서 독립을 얻으려는 사대부들의 자기도취의 결과물이 아닌가! 결국 조선반도가 일제에 의해 다 유린당하고 난 뒤에야 전쟁 없이 독립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망명 지사들은 3.1운동 후부터 독립군 양성을 위해 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단체를 만들지 않았는가 말이다.
네 번째는 신분과 파벌에서 벗어나 연합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망명지에서 인간관계나 생활도 그대로 조선 생활의 축소판이었다. 관내나 동북지방이나 할 것 없이 기호 출신은 기호 출신 끼리, 서북인은 서북인 끼리, 한 사부 밑에서 공부한 동문들은 동문 끼리, 대종교는 대종교끼리, 천주교는 천주교끼리, 개신교는 개신교끼리, 왕당파는 왕당파끼리, 공화파는 공화파끼리, 양반은 양반끼리, 상놈은 상놈 끼리 어울렸다.
1907년 용정에 통감부 파출소가 세워지면서 일제의 만주 진출로 고난과 시련에 직면한 이주조선인 사회와 지도자는 간민교육회, 간민회를 통해서 비로소 자기 단체와 집단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연합활동을 시작하였다. 3.13 만세시위는 교파, 지연, 신분을 벗어나서 하나 된 망명 지사들의 위대한 연합활동의 결과물이었고 이로서 연변의 조선인들은 파벌과 집단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독립투쟁을 위해 하나로 뭉치기 시작하였다. 봉오동전투에서 신민단, 도독부, 국민회군, 홍범도부대가 연합하였고, 청산리전투에서는 9개 이상의 무장단체가 연합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일반 백성들 또한 연합해서 군자금 모금과 독립군 지원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하나 된 조선인의 긍지와 승리의 기쁨을 함께 누렸다. 연합이 살길임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명 지사들의 한계점은 분명하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봉건사회의 장자라는 태생적인 한계가 그들의 의식과 활동을 제약하였으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 조선 이주민사회의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들의 구호가 ❰반제반봉건❱이었다는 것과 1917년 10월 혁명 이후 10년도 채 안 되는 상간에 조선이주민사회가 사회주의 물결에 휩쓸렸다는 것 자체가 그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그 이후로 동북3성은 사회주의노선의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 근거지가 되어 1920년에 있었던 전투보다 더 치열한 항일 독립 투쟁을 벌였다. 20년 상간에 항일투쟁으로 희생된 열사가 무려 13,000여명, 연변자치구에 세워진 조선족 열사기념비가 무려 610개에 이른다는 것이 바로 그 증표다.
첫 번째 망명 지사들이 가지고 있는 큰 문제는 망명으로 애국애족의 의지를 천명하였지만 그들의 사고가 여전히 봉건의식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나라가 망했어도 그들은 유교사회의 신분질서와 계급차별, 사대부가 누리는 기득권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권위의식과 우월감, 배타성으로 독립운동의 암초가 되었으며 파벌과 갈등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평등과 인권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가당착에 빠져있었다. 사실 그들은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조선의 관료, 양반사회를 주도하면서 나라를 멸망의 지경에 이르도록 일반백성들을 수탈하고 억압한 계급의 장본인들이었다.
두 번째 그들은 이주 조선농민대중의 능력과 역량을 과소평가하였다. 그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위대한 존재이며 역사를 바르게 견지할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으며 농민대중들 속에 들어가서 대중을 조직화하거나 의식화 교육과 훈련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들이 일반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을 때, 사회주의가 출현하여 농민 대중과 청년들 속으로 들어가서 봉건타도와 혁명을 외치며 교육과 훈련을 하자 그들은 신속하게 조직화되었고 연대되어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폭발적인 역량을 발휘하며 항일투쟁의 전선으로 나아간 것을 30년대 역사에서 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며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유교의 신분질서 속에서 상층계급으로 살아온 그들은 폭풍처럼 몰아쳐온 사회주의 사조 앞에서 혼란스러웠고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였으며 이론적으로 실제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민족주의와 유교신분질서를 강조하였으며 종교의 근본주의에 집착하였다.
크리스천은 신을 부정하는 사회주의자가 될 수 없었고, 신을 부정하는 사회주의자들은 크리스천이 될 수 없어서 교회를 등져야 했다. 민족주의자는 민족을 부정하는 사회주의자가 될 수 없었고 사회주의자는 민족을 부정해야 했기에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1국1당 만 허용한다는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중공공산당에 가입하여 먼저 중국의 해방을 위하여 싸워야 했다. 이로부터 시작된 갈등과 대립은 독립운동사에 오점으로 남게 되었고 지금도 남북으로 유전, 계승되어 한국인의 발목을 잡고 있음을 본다.
망명 지사들과 종교단체가 최선을 다하여 세운 학교가 사회주의자들의 활동기지가 되고, 그들의 탈종교 운동으로 말미암아 입지가 좁혀지자 제 종교들이 민족문제와 사회문제에서 벗어나 영혼구원으로 돌아가 버리는 일이 왕왕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 후반을 통과하며 제 종교는 사회주의 이론 앞에 무너지며 배타와 침체의 늪에 빠져 더 이상 조선 이주민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쇠퇴하며 자기 아성에 갇히게 되었다.
한 시대와 사회의 문제를 풀기위해서 사람이 만든 이념과 사상, 제도가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이전투구로 몰아가고 있는 현실이 몹시 가슴 아프다.
지도자에 따라 정책이 뒤바뀌면서 남북한 8,000만 국민이 그토록 원하는 평화로 가는 길이 끊기고 막히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옛날 독립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평화 교류의 물꼬가 속히 트이길 빌면서 일송정 비암산 일송정에서 수전민들이 일군 평강벌과 서전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노고 위에서 출발된 망명 지사들의 시대를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의 숙제가 바로 그 시대의 숙제였음을 본다.
2019.3.26.
우담초라하니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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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선,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16년
양소전, 차철구, 김춘선, 김철수, 안화춘,⌜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연변인민출판사, 2009년
관봉 엮음, 중국조선족유래와 20세기초기의 학교,
첫댓글 독립운동에 관한 좋은 정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