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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천교수, "역사 속 그 남자의 비밀"- "명인들 건강장수 비결"-기로소(耆老所) 집안 1| 건강백세약초이야기
정지천교수, "역사 속 그 남자의 비밀" 방송
정지천교수가 2017년 2월 9일(목) 오전 8시 25분 KBS 1TV "아침마당"을 찾았다. 방송된 "목요특강"에 정지천 동국대학교 일산한방병원장이 출연했다. 정지천교수는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허고 부속한방병원 전공의 과정을 거쳐 한방내과 전문의가 되었으며 동 대학원에서 한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1년부터 동국대 한의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서울 동국한방병원 병원장, 서울 강남한방병원 병원장, 동국대 서울캠퍼스 보건소장, 대한한방내과학회 부원장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동국대 교수와 일산한방병원 병원장을 맡고 있다.
연구 논문으로 ‘二精丸이 노화과정에 미치는 영향’, ‘고지방 식이 흰쥐의 비만에 미치는 三精丸의 영향’, ‘二至丸의 고혈당 조절 작용 및 기전에 관한 연구’ 등 당뇨병, 노인병, 남성병, 항노화 등에 관한 150여편을 국내 외에 발표하였다.
저서로 『명의가 가르쳐주는 약이 되는 생명의 음식』, 『조선시대 왕들은 어떻게 병을 고쳤을까?』,『 우리집 음식 동의보감』,『 명문가의 장수비결』,『 남성보감』외 더수가 있다.
다산 정약용, 농암 이현보, 고산 윤선도, 퇴계 이황, 3대 기로소집안, 황희, 추사 김정희, 백사 이항복, 우암 송시열, 조헌, 허균, 연암 박지원, 성호 이익, 중국-건륭황제, 모택동, 등소평, 소동파, 서태후, 측천무후 조선-세종대왕, 영조대왕 정조대왕, 철종, 연산군과 광해군, 내시들의 장수, 궁녀의 직업병을 알아 봅시다.
<조선 명문가 장수비결은 '청빈과 일'>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교육자인 퇴계 이황과 실학자 성호 이익, 조선 세조 때 권신 한명회.이들에게는 모두 70세를 넘겨 장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황은 젊은 시절 공부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어 몸이 약했지만 71세까지 살았다. 부친이 54세였을 때 태어난 이익은 83세로 장수했고 칠삭둥이로 태어나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한명회는 73세까지 살았다.
조선 시대 평균 수명이 40세가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환갑은 물론 70세를 넘긴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이들의 장수 비결은 무엇일까.
정지천 동국대 한의학과 교수가 그 해답을 내놨다.
정 교수는 최근 펴낸 '명문가의 장수비결'(토트 펴냄)에서 역사적 배경과 식생활습관, 가문의 고유한 전통 등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명문가의 장수 비결을 분석한다.
정 교수는 우선 명문가 자손들이 장수에 유리한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고 말한다. 명문 집안 출신인 부모에게서 건강한 유전자를 물려 받은데다 엄격한 가풍 속에 마음의 건강까지 수련했기 때문이라는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명문가 출신으로 건강하게 오래 산 사람들 중에는 청빈하고 검소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황, 이익, 정약용 등이 대표적이다. 청빈한 삶을 살았던 이들은 소식하며 기름진 음식과 술을 즐기지 않았다.
또 결혼과 벼슬살이를 늦게 한 경우 장수하는 비율이 높았으며, 노년기에 들어서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한 사람이 오래 살았다. 이익, 박지원, 정약용, 김정희 등은 노년에도 학문에 손을 놓지 않았으며 제자를 양성하고 저술 활동을 계속했다.
물론 명문가 자손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장수한 것은 아니다. 정 교수는 장수에 영향을 미친 변수로 혼인과 성생활, 삼년상, 과거공부, 벼슬살이 등을 꼽았다.
퇴계의 손자인 안도와 순도는 부친 사후 시묘(부모상 중에 3년간 그 무덤 옆에서 움막을 짓고 사는 것)를 하는 동안 건강이 크게 나빠져 각각 44세와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귀향도 사대부들의 정신과 육체에 영향을 주는 변수였다. 귀향은 형벌이었지만 당쟁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을 편히 하는 휴식시간이 되기도 했다.
89세까지 장수한 중국 청나라 건륭황제를 비롯해 공자, 서태후, 측천무후 등 중국 역사 속 인물들의 장수 비결도 소개한다.
명문가의 장수 비결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문화와 풍습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어 당시 사대부들의 생활상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1. 조선시대 삼대 기로소(耆老所) 집안-1
기로소(耆老所):조선 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 태조 3년(1394)에 설치하여 영조 41년(1765)에 독립 관서가 되었고, 이때부터 임금도 참여하였다.(늙을기,늙을로,바소)
■ 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기로소(耆老所)
조선조 명문가의 상징 기로소, 회원수 2위는 안동 김씨, 1위는?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경로사상이 있었고 임금이 직접 경로정신을 실천함으로써 노인을 존경하는 기풍을 조성하며 노인으로 하여금 여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 제도 중에 구체적인 것으로 ‘기로소(耆老所)’라는 명예기구가 있었습니다. 기로소는 조선시대에 연로한 문신(文臣)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되어 왕과 조정 원로의 친목, 연회 등을 주관하였는데, 1394년부터 1909년까지 존속되었습니다.
● 기로소의 유래
기로소는 1394년에 태조 이성계가 60세를 넘자 기사(耆社)라는 명예관청을 설치하여 70세 내외의 정2품 이상의 관료를 선발하여 기사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임금 스스로도 이름을 올린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올린 신하들에게 논밭과 노비, 고기 잡는 기구 등을 하사하고 매년 봄과 가을에 군신이 함께 어울려 연회를 베풀며 즐겼습니다. 태종 즉위 초에 이것을 본격적으로 제도화하여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라고 하다가 세종 때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개칭하여 ‘기로소’가 된 것이죠.
태조 이성계 어진 태조 이성계 70세까지 장수한 중신들은 누구나 기로소에 들어갔을까?
조선 중기 이후에는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나이만 되면 무조건 되는 것이 아니고 문신으로서 정2품 이상의 관직을 거치고 70세 이상인 자로 한정하였는데, 반드시 문과에 합격했던 자만이 가능했습니다. 즉, 음직(蔭職)이나 무과 출신자에게는 입사 자격을 주지 않았던 것이죠. 그리고 나이와 벼슬 품계에 한 가지 더하여 인격의 3요소까지 갖추어야만 입사가 가능했으니 상당히 까다로웠습니다.
조선 말기의 헌종임금 때 정리된 ‘기사제명록’에는 572명이 기록되어 있고 그 중 14명이 연령 미상입니다. 70세가 되어 벼슬에서 물러난 치사(致仕)자가 130명인데, 그 중에 불과 50여명만 기로소에 입사가 되었던 것이죠. 심지어 70세에 입사한 신하는 20명뿐이고 나머지 536명은 71세를 넘어 수년 내지 십여 년이 지나서야 입사가 되었습니다.
● 기로소에서 입소한 중신들에게 준 것은?
임금의 탄일과 설날, 동지,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왕이 행차할 때, 모여서 하례(賀禮)를 행하거나 중요한 국사의 논의에 참여하여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습니다. 대사례(大射禮), 즉 활쏘기 대회도 하였는데, 성적에 따라 우수한 자에게는 활을 하사하고 성적이 좋지 않는 자에게는 벌주를 내렸다고 합니다. 벌주를 마시지 않으려고 평소 활쏘기 연습도 했을 것이니 운동이 되지 않았나 싶군요.
그리고 기신들에게 하사품을 지급하였습니다. 쌀이나 한약은 매월 지급했고, 주식과 의복을 비롯하여 과일, 해초류에 세찬(歲饌)까지 지급하여 노신들의 영양보충에까지 신경을 썼습니다. 또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 그리고 생일, 회방(回榜), 회혼(回婚) 외에 자손 및 서손(婿孫)들의 대소과(大小科) 축하연에 드는 비용 및 부의금도 지급하였습니다. 한약재를 살펴보면 여름에 필요한 제호탕(醍醐湯)과 익원산(益元散), 우황청심원(牛黃淸心元), 안신환(安神丸), 소합환(蘇合丸), 그리고 앵두(櫻桃), 우유(牛乳) 등도 있습니다. 이처럼 양식과 몸에 좋은 음식을 잘 먹을 수 있고 계절에 따라 필요한 한약 처방과 구급약도 받아 제때 복용할 수 있으니 노인의 건강관리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겁니다.
국가에 헌신한 노신들이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정말 신경을 많이 썼던 것이죠. 후생복지가 잘 되었다고 여겨지는데, 그래서 기로소에 입소하는 것을 개인의 영광은 물론이고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게다가 기로소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참여하는 특성상 관아의 서열에서는 으뜸을 차지하였던 것이죠. 물론 70세가 넘은 임금이 많지 않았기에 기로소에 이름을 올린 임금은 불과 몇 명뿐입니다. 그런데 왕의 경우에는 70세가 되지 않아도 입소하였습니다. 특별 대우였죠. 태조는 60세에 기로소를 만들면서 들어갔고, 숙종은 59세에 입소하였으며 영조와 고종은 51세에 입소하였습니다. 당연히 숙종과 영조 때 하사품이 더욱 풍족했다고 합니다.
기사계첩 연회장면
조선 숙종 때 왕과 기로소 신하들의 연회를 기록한 '기사계첩'. 기로소에 입사한 사람이 많은 집안 그야말로 장수집안이고 명문집안이라고 할 수 있고, 장수 DNA가 전해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기로소 배출 순위가 조선조의 진짜 명문과 문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1위는 파평 윤씨 23명, 2위는 연안 이씨, 청송 심씨, 안동 김씨 각 21명, 5위는 동래 정씨와 남양 홍씨 각 20명, 7위는 한산 이씨와 안동 권씨 각 19명, 9위는 대구 서씨와 풍양 조씨 각 16명씩입니다. 그런데 왕족인 전주 이씨는 48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70세에 퇴직을 요청한 신하 중에 특별한 경우에 지팡이를 하사하는 ‘사궤장(賜几杖)’ 제도가 있었습니다. 최고의 영예가 되었고, 재물도 하사하고 그 자손에게는 특채의 혜택까지 베풀었다고 합니다. 사궤장자를 배출한 가문으로는 전주 이씨, 파평 윤씨, 동래 정씨, 광주 이씨, 안동 김씨를 비롯하여 총 44가문에 64명입니다.
● 일반 백성들 중에 노인을 대접하는 행사는?
조선시대에 실시된 기로 정책 중에 가장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로 ‘양로연’이 있었습니다. 기근이 드는 경우에도 변함없이 시행되어야 할 국가의 중대사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세종대왕 이래 10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연초에 쌀을 주고 매월 술과 고기도 주었고, 9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매년 술, 고기와 작(술잔의 일종)을 주고, 8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지방관으로 하여금 향응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로연에는 신분의 존비를 문제 삼지 않았기에 천인들도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 기로소 들어간 인물들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 기로소에 들어간 사람은 7백여 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최고령자는 현종 때의 윤경(尹絅, 1567~1664)이라는 분으로 98세였고, 다음으로 숙종 때 97세의 이구원(李久源, 1579∼1675)과 96세의 민형남(閔馨男, 1564∼1659) 등이 있었습니다. 세종대왕 때의 명재상인 황희(黃喜, 1363~1452)도 90세까지 장수했으니 당연히 ‘기로소 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밖에도 조선 초기의 명재상 맹사성(孟思誠, 1360∼1438), 용비어천가를 짓고 한글창제에 참여한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어부가를 지은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 영의정을 5번이나 지낸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 조선 중기 한문학 4대가로 동의보감 서문을 지은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1564~1635), 대동법을 시행한 김육(金堉, 1580~1658), ‘동창이 밝았느냐’를 지은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등이 있습니다.
■ 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윤경
●90세에 공조판서(건설부장관) 지낸 윤경의 장수비결
‘윤경(尹絅, 1567~1664)’은 기로소에 들어간 분 중에서 가장 장수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이 분의 경력을 보면 더욱 놀랄 겁니다. 23세에 소과에 급제하고 30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것은 다른 분들과 비슷하지만, 79세에 공조참판(요즘의 건설부차관)에 오르고 80세에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 요즘의 장관급)가 되어 비로소 기로소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더욱이 84세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요즘의 서울시장)에 오르더니 무려 90세의 나이에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진한 뒤 겨울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 요즘의 건설부장관)에 임명되었습니다.
● 90세 나이에 판서 근무가 가능했을까?
만약 지금 90세 되는 분이 장관에 임명되었다면 어떤 평들이 나올까요? 이 분은 시국이 한가하고 몸이 늙었다고 하여 조금도 직무를 게을리 하지 않고 날마다 삼가 힘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금이 특별히 우유죽을 그가 근무하는 관아로 보냈고, 그 때부터 해마다 거듭 우유죽을 하사하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분이 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들리면 임금이 번번이 어의를 보내고 내의원(內醫院)의 약을 내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도 70세면 벼슬에서 물러나 편히 쉴 수 있었고, 50대나 60대의 관리들도 많았을 것인데 어떻게 90세나 되는 분에게 판서를 맡겼을까요? 우선 그 당시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혼란기였기 때문에 인재가 부족한 탓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많은 관리들이 목숨을 잃었고, 양대 전란 중에 임금을 호종하지 않고 도망친 관리들은 다시 관직에 임명되기 힘들었죠. 그리고 인조반정이나 이괄의 난 등으로 인해 죽음을 당한 관리도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윤경의 건강상태와 정신상태가 매일같이 궁중에 출근하여 근무를 보는데 전혀 이상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 윤경은 언제까지 현직으로 근무했나?
91세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임명되었습니다. 직무가 없는 한직으로서 녹봉만 받는 일종의 명예직인 셈이죠. 92세에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고, 94세에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벼슬을 유지했던 것이죠. 그리고 이 분은 그렇게 장수하는 바람에 ‘회방연(回榜宴)’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회방연’은 소과(小科)에 급제한지 60년이 되어 열리는 연회죠. 소과는 진사(進士)와 생원(生員)을 뽑는 과거인데, 각기 100명씩 합격합니다. 기본적으로 3년에 한 번씩 열리고 특별한 경우에 열리기도 하지요.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합니다. 윤경이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니 83세 때가 사마방(司馬榜)이 돌아오는 해였죠. 방목(榜目)에 실려 있는 2백명 중에서 오로지 윤경, 심액(沈詻)만이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같은 해 합격한 동방(同榜)의 자제들이 그 두 분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회방연을 맞이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죠. 회혼례(回婚禮)보다 더 힘들죠.
● 98세까지 장수한 ‘윤경’의 장수비결은?
윤경은 30세에 벼슬길에 올라 네 분의 임금을 대대로 섬겨서 60여년이나 벼슬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위는 재상에 이르렀으나 스스로 낮추는 자세를 가져서 포의지사(布衣之士)와 같았다고 합니다. 바람과 비를 제대로 막지 못하는 초가집에 거처하면서 적은 양의 곡식도 없었지만 여유가 있었다고 하지요. 성격은 화려하고 사치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남과 교유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오로지 타고난 그대로 꾸밈없이 평안하고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을 숭상하였다고 합니다. 항상 서쪽 교외의 외진 거리에서 숨어살면서 꽃과 나무를 많이 심고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소요하였습니다. 언제나 좋은 때를 만나면 여러 노인들을 불러서 술을 마시고 시가를 읊으면서 소일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검소하고 욕심 없는 삶을 살았으니 당연히 장수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데에 더욱 그 정성과 예절을 다하였고, 돌아간 부모님의 제삿날을 만나면 지극히 비통해 하였다고 합니다. 나이가 90세가 넘도록 제사는 반드시 몸소 지내고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하는데, “내가 아직 죽기 전에는 반드시 내가 몸소 스스로 정성을 다하고자 한다” 하였답니다. 충효를 실천하는 것이 장수의 길입니다.
■ 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삼대 기로소(표엄 강세황)
● 3대가 내리 장수하고 출세도 한 표암 강세황 집안
조선시대에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은 ‘가문의 영광’으로서 정말 힘든 조건들을 갖추어야만 가능했는데, 한 사람도 아니고 3대가 내리 기로소에 들어간 경우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가 연속으로 문과 급제에다 종2품 이상의 벼슬, 그리고 70세 넘게 장수했다는 것이니 정말 특별하고도 대단한 집안이죠. 모두 5가문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진주 강씨 집안의 강백년, 강현, 강세황의 3대가 기로소에 들었고, 사천목씨 집안의 목첨, 목서흠, 목래선 3대가 역시 들어갔습니다. 강세황 집안은 당연히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로 불렸는데, 그 편액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이 썼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
미술에 관심이 있거나 특히 동양화, 사군자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2)을 잘 아실 겁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자 미술평론가로서 당시 화단에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와 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했던 분이죠. 특히 조선 후기의 유명한 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나 정조대왕으로부터 ‘삼절(三絶)의 예술’이란 소리를 들었고, 궁중화원부터 재야의 선비까지 신분과 지위를 넘나든 교유를 하였기에 ‘예원(藝苑 : 예술계)의 총수’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표암 강세황은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일등 공신이라고 합니다.
● 4대를 내려온 장수집안
표암의 증조부인 강주(姜籒, 1566∼1650)는 무려 85세까지 장수했습니다. 호가 죽창(竹窓)인데, 그가 소속된 당파인 소북파(小北派) 문인의 한시 모임 동일회(同一會)에서 ‘죽창선생집(竹窓先生集)’이란 문집을 발간했다고 합니다. 원래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의 시풍을 추종한 소북파 문인 중에서 죽창이 두보의 시를 가장 잘 소화해냈다는 평을 듣는다고 하는데, 그 대표작 중 하나가 열 살 때 지은 오언절시(五言絶句) ‘제길상사(題吉祥寺)’라고 합니다. 열 살 때 이런 시를 지었다니 천재시인이었다고 해야겠죠.
細雨靑山夕 보슬비 내리는 푸른 산 저물녘 桃花錦繡天 복사꽃 비단처럼 고운 절기로다 隔林橫一笛 숲너머 들려오는 한 곡조 피리소리 何處紫霞仙 붉은노을 탄 신선은 어디메뇨?
표암의 조부인 강백년(姜栢年, 1603∼1681)도 장수 유전자를 이어 받아 79세까지 장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유전자도 이어받아 역시 대단한 시인이었습니다. 25세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였고 뒤에 문과중시에 장원하였으며 벼슬이 승지, 관찰사, 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는데,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청백리로 녹선되었습니다. 이 분이 지은 시도 많이 전해오는데, 그 중에 ‘제야차고촉주운(除夜借高蜀州韻)’이란 시가 있습니다. 섣달 그믐날 밤에 이런 시를 읊으면 참 좋겠죠.
酒盡燈殘也不眠(주진등잔야불면) 술이 다하고 등불이 다해도 잠은 오지 않고 曉鐘鳴後轉依然(효종명후전의연) 새벽 종소리 울린 후에도 여전히 뒤척이네 非關來年無今夜(비관내년무금야) 내년을 생각마라 오늘 같은 밤 다시 오지 않으니 自是人情惜去年(자시인정석거년) 이제부터 사람들 마음 가는 해를 아쉬워하리
● 표암의 부친, 강현
강현(姜鋧, 1650~1733)도 역시 84세까지 장수했습니다. 26세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31세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조참판, 경기도관찰사 등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고, 형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이후로도 한성판윤, 좌참찬을 지낸 뒤 기로소에 들어갔습니다. 대제학을 지냈으니 학문이 높았음을 알 수 있는데, 청백리에 올랐을 정도로 매우 가난했다고 합니다.
● 장수유전자, 예술유전자를 물려받은 표암
표암은 아버지 강현이 낳은 3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무려 64세나 된 너무 늙은 아버지로부터 태어났으니 사실 장수하기 쉽지 않은 조건이었음에도 79세까지 장수했습니다. 부친에게는 손자보다도 어린 자식으로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였기에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버지 무릎에서 학문을 시작하여 여섯 살 때부터 글을 짓기 시작하더니, 열 살 때 숙종임금이 승하하시자 국상에 바치는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일찍부터 그림에 자질이 있어 열 살 때 예조판서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도화서(圖畵署) 생도(生徒) 취재(取才)에 심사관으로 직접 나서 등급을 매긴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보면 국립 미술대학 선발시험에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심사위원이 되었다는 얘기죠. 심지어 표암이 13살 때 쓴 글씨를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병풍까지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말 천재였다고 해야겠죠.
강세황 초상화 우여곡절 많은 표암의 고달픈 인생 표암의 일생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부친이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늦게 낳은 막내아들이었기에, 21살 때 부친이 여행 중 객사하시고 28세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자식 중에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었죠. 이 정도는 당시로는 보통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집안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소북계 남인(小北系 南人)인데 노론(老論)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기 때문이죠. 여기에 맏형인 강세윤(姜世胤, 1684~1741)의 과거시험 부정사건이 아버지의 청탁에 따른 것으로 밝혀지고, 이어서 맏형이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유배를 가게 되면서 강세황의 집안은 역적으로 낙인찍히고 벼슬길도 막히게 되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표암은 25세 때 남대문 밖 염천교 근처인 처가의 빈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때 자신의 작은 서재를 산향재(山響齋)라고 이름 짓고 그림을 감상하고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소일하였습니다. 서재 벽을 온통 산수화로 그려 붙이고 거문고 줄을 고르며 연주를 하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옛 곡조의 고상한 음운이 산수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을 느꼈기에 힘든 일상 속에서도 넉넉하고 너그러운 풍류의 정취를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32세 때는 처가인 안산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30년 가까이 머물렀습니다. 조선 시대 몰락한 양반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도 돈은 벌지 못하였으니 그의 가정은 빚더미에 오를 정도로 궁핍했고 식구들의 건강도 악화되었죠.
30년 궁핍에도 문인화의 전통을 이어 나가다
가난한 선비들은 그야말로 삼순구식(三旬九食), 즉 한 달 동안 아홉 끼니를 먹을 정도로 몹시 빈궁한 생활을 했습니다. 누가 가장 고생이 될까요? 표암의 부인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족들을 돌보며 고생만 하다가 45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듯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도 표암은 양반의 체면을 지키면서 그림을 벗하며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며 살았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의 위기를 서예에 몰두하면서 극복했다면, 표암은 그림이었죠. 그랬기에 30년이나 되는 기나긴 백수(白手) 시절이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학문과 예술 전반에 두루 전념하였고, 성호 이익 선생과도 교류했습니다. 또 당시의 이름난 화가였던 정선, 심사정, 강희언 등과 교류하고, 김홍도와 같은 제자를 키우기도 했습니다.
● 61세에 벼슬살이를 해 출세가도를 달린 표암 강세황의 비결
안산에서 30년 고생한 표암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림과 글씨에 빠져 있던 강세황은 환갑을 맞이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이 왔습니다. 장남인 강인이 과거에 합격하여 궁중의 연회에서 영조대왕을 만나게 되었는데, 영조는 부왕인 숙종 시절에 알았던 표암의 부친 강현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영조가 표암의 근황을 물으면서 옛 충신의 아들인 표암이 나이 육십이 넘도록 벼슬도 하지 못하고 안산에서 궁핍하게 생활한다는 사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조는 표암에게 최말단 벼슬인 종9품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제수하였습니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던 강세황은 곧 사임을 하였죠. 하지만 강세황이 곧 사임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영조는 다시 종6품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했습니다. 무려 6계급 특진이죠.
● 뒤늦게 출세가도를 달린 표암
61세에 벼슬살이를 시작한 강세황은 63세에 한성부 판관이 되었는데, 학문이 워낙 뛰어났기에 64세 때 기로과(耆老科)와 66세 때 문과정시(文科庭試)에 당당히 장원급제했습니다. 이후 한성부 우윤과 좌윤, 호조와 병조참판을 거쳐 71세에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정조대왕 때는 호조판서까지 지내게 됩니다. 고진감래라는 말처럼 늙은 나이에 탄탄대로를 질주한 것이죠. 당시로 보면 엄청나게 늦게 전환점이 왔지만 결코 늦은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만하면 연세 많은 분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림 대신 평론으로 관직에 몸담게 되면서부터 강세황은 그림 그리기를 중단했습니다. 그에게 벼슬길을 열어준 영조대왕이 “그림 그리기는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하명했던 것을 전해들은 탓이죠. 표암은 감격하여 3일 동안 눈이 부어오를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영조는 표암을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고, 그 마음을 헤아린 표암은 붓을 태우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것을 다짐했으며 이 결심은 영조가 살아 있는 동안 변치 않았다고 합니다.
표암은 다시 붓을 잡기까지 10년 동안 미술평론가로서만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겸재 정선(謙齋 鄭歚·1676~1759),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1707∼1769) 등 유명 서화가들의 작품에 방대한 양의 평을 남겼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대신 그림을 보고 평론을 했던 겁니다.
● 강인한 의지와 체력이 표암의 장수비결
표암의 삶은 예술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기에 그것만으로 장수 비결이 되기에 충분할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장수 비결을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역경을 딛고 60세가 넘어서도 20년 가까이 많은 활동을 한 표암의 삶을 느껴보는 그 자체가 우리 건강에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이겨내는 분들을 볼 때마다 새삼 힘이 솟는 것을 느끼게 되지 않나 싶군요.
표암은 73세 가을에 천추부사(千秋副使)로 연경(燕京·베이징)에 갔습니다. 당시에 연경을 다녀오려면 6개월 넘게 걸리는데다 추위로 인해 고생이 이만저만 아닌데, 그것도 70세가 넘어서 다녀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죠. 그것은 당시 청나라 건륭황제가 자신의 칠순 맞이 축하연에 70살이 넘은 사신을 보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건강하지 않으면 다녀올 엄두를 낼 수도 없고, 다녀오더라도 병들어 죽기 쉽지요. 송강 정철 선생은 58세에 중국에 사은사로 다녀온 뒤 병이 온데다 동인들의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그 해 세상을 떠났죠. 그런데 표암은 잘 다녀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서화는 중국에까지 이름이 나서 그림이나 글씨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73세에 육로로 베이징을 다녀오다니 표암 선생의 건강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 표암의 건강 비결
표암의 부친이 청백리였고 가난했던 데다 집안이 기울어 젊은 시절부터 삼순구식(三旬九食)할 정도로 궁핍하게 생활했으니 기름진 음식과 술을 즐겨 생기는 성인병에 걸릴 일은 없었다고 봐야죠. 그리고 직접 산에 가서 풍경을 보고 산수화를 그렸으니 운동이 많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혹은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입니다. 반면 그냥 전부터 내려오는 모델을 가지고 그대로 그려내는 것을 관념산수화(觀念山水畵)라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지방 관리들이 친한 벗들을 초청하여 명승을 구경하고 이를 글과 그림으로 남기는 문화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표암은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을 남겼는데, 45세 때인 1757년 개성유수였던 친구의 초청을 받아 개성 일대를 여행하고 그린 16점의 그림을 한데 엮은 것이죠. 또 57~58세 경에 전북 부안을 배경으로 그린 ‘우금암도(禹金巖圖)’가 있습니다. 우금암도는 둘째아들 강흔(姜俒)이 부안현감으로 재임할 때 이틀에 걸쳐 변산 일대를 유람하며 그린 산수화인데, 미국LA 카운티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국내에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76세 때는 회양부사에 임명된 맏아들 강인을 따라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기행문과 실경사생화 등을 남겼습니다. 표암은 “진경산수는 그곳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속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그림”이라 생각했고, 그런 면에서 시보다는 기행문이, 기행문보다는 그림이 낫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표암의 아들 중에 둘이나 과거에 급제했으니 그것만으로도 건강장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요즘처럼 등산로가 잘 되어 있지도 않은 그 당시에 76세의 나이로 금강산을 유람하며 산수화를 그렸다니 정말 대단하죠.
강세황의 우금암도.
강세황의 태종대
표암은 서화를 너무나 좋아하였기에 진경산수화는 물론이고 자화상과 초상화도 많이 그렸는데, 말년에 다시 붓을 들어 자신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몇몇 그림을 내어 놓았습니다. 표암은 초상화는 산수를 그릴 때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대상물의 형태를 그대로 닮게 그리기를 강조하였습니다. 요즘의 사진보다 더 생생하게 그려진 초상화로 볼 수 있지요. 자화상은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가 그린 것이 국보로 유명하고, 세계적인 화가로서 강렬한 색채가 특징인 후기인상파의 거장 빈센트 반 고흐도 유명하죠.
또 표암은 노년에 들어서도 중국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서양 채색화법에 관심을 갖고 서화에 대한 안목과 식견을 쌓으며 발전시키려는 노력과 열정을 계속했습니다. 79세로 붓을 놓을 때까지 꾸밈없이 소박한 필치, 맑고 고운 채색법 등으로 자신만의 개성 있고 독자적인 화풍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표암이 즐겨 그린 그림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강세황 자화상. 표암이 즐겨 그렸던 사군자
사군자(四君子)는 동양 수묵화의 기본으로 중국 북송 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시대에 도입된 이후 조선시대에 문인 사대부 등이 여가가 날 때 틈틈이 즐겼던 것입니다. 고결함과 선비정신을 상징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전까지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하나씩 독립된 소재로 그려왔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매난국죽을 묶어서 한 벌로 그리게 되었는데, 바로 표암이 선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매난국죽(梅蘭菊竹)을 사군자로 묶은 새로운 형식의 창안자였다는 것이죠.
표암이 가장 자신 있게 그린 것이 난죽(蘭竹)이었다고 하는데, 특히 묵죽(墨竹)에 치중했습니다. 대나무는 묵죽화(墨竹畵)에서 바람에 흔들려도 절대 꺾이지 않는 곧은 정신을 상징해 옛 선비와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린 소재였죠. 선비들은 사군자를 즐겼기에 건강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 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삼대 기로소(사천목씨)
● 선비들이 귀양갈 때도 건강을 위해 꼭 가져갔던 물건
3대를 내리 기로소에 들어간 명문가에 사천 목씨 집안이 있습니다. 목첨(睦詹·1515-1593, 79세), 목서흠(睦叙欽·572-1652, 81세), 목래선(睦來善·1617-1704, 88세)의 3대인데, 몇 대를 지나 목만중(睦萬中·1727-1810, 84세), 목인배(睦仁培·1794-1877, 84세)도 기로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은 역사적 명성에 비해 인구수가 매우 적은 편입니다. 지난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사천 목씨는 2492가구 총 8181명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장수한 분이 많고,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도 33명이나 된다고 하니 정말 좋은 유전자가 내려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수 정예 같지요. 사천 목씨 상징 조형물. 대전 효문화 뿌리공원에 있는 성씨별 조형물 중 하나다.
● 사천목씨는 성씨별 인구분포에서 몇 번째일까?
김해 김씨가 412만명으로 1위, 밀양 박씨가 303만명으로 2위, 전주 이씨 260만명으로 3위, 경주 김씨 173만명으로 4위, 그리고 경주 이씨가 142만명으로 5위입니다.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풍산 류씨가 1만3341명으로 269위니 사천 목씨는 300위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 사천목씨 집안의 장수비결
집안에 내려오는 가풍과 생활습관이 좋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청백하게 살며 절제하는 것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록을 보면 목첨 공은 효도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공이 젊어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부친을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모시기를 엄중한 스승처럼 하였습니다. 항상 효도하려 해도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음을 가슴 아프게 여긴 나머지 그 당(堂)의 편액을 머무를 두(逗)자를 써서 ‘두일(逗日)’이라고 하고 호로도 삼았는데, 대체로 날을 아끼는 뜻을 취하여 종신토록 사모하는 뜻을 붙인 것이었죠.
목첨 공은 학식과 인품이 뛰어났기에 벼슬이 종2품(從二品)이었지만 신하들의 주청에 의해 선조 임금이 격식을 깨뜨리고 기로소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원래는 반드시 정2품(正二品)이라야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었죠.
● 이 집안에 또 어떤 비결이 있었나?
목첨 공은 성품은 검소하고 간략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는 손님이 왔는데 당하(堂下)에 있는 동자(童子)의 입은 옷이 수수하고 거칠므로 손님이 노복인가 의심스러워 물었더니, 공이 웃으면서 “나의 손자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집은 청파(靑坡)의 후미진 곳에 있었는데, 문에서 수응하는 하인이 겨우 한두 명이었고 문밖에는 거마(車馬)가 없었다고 합니다.
목첨 공이 78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워낙 연로하여 의주로 피난 가는 임금을 호종하지는 못했지만 강화도로 들어가 의병을 규합하였는데, 그 군사의 명칭을 ‘일의군(一義軍)’이라 하였답니다. 다음 해 병이 들어 왕릉이 파헤쳐진 것을 보살피라는 명을 받고 출발하려 할 때 병이 위독하여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나이에도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건강하게 장수했던 것이죠.
● 기가 강해야 건강장수에 유리
78세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이렇게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선비 집안이나 대대로 장수하는 집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기(氣)’가 강하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중봉 조헌, 동계 정온, 미수 허목, 우암 송시열, 고산 윤선도 등을 비롯하여 백사 이항복,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선생 등이 보여준 대단한 정신력과 집념의 원천도 역시 샘솟듯 솟아나는 ‘기’에서 나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힘든 귀양살이를 오래 하면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 역시 그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사천 목씨 집안은 당파로는 남인에 속했는데, 목래선이 벼슬에 있을 때 노론과의 당쟁이 매우 심했습니다. 그 때가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두고 노론과 남인이 치열하게 정쟁을 벌이던 시기였죠. 목래선은 좌의정으로 있다가 당쟁에서 패하여 무려 78세의 나이로 완도에 딸린 섬 신지도에 위리안치되어 5년을 가시나무로 둘러싸인 집안에서 귀양살이했습니다. 문헌에 의하면 신지도 최초의 유배인이라고 하는데, 그러고도 5년을 더 살아 8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 늙은 나이에 귀양지에서 건강을 지키려면
늙은 나이에 귀양지에서 정신력만으로는 건강을 지킬 수 없죠. 대부분의 선비들은 오래 공부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건강을 돌볼 수 있었고 자신의 질병이나 가족들의 질병을 직접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학을 공부한 선비들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의학입문(醫學入門)’이라는 한의서를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의학입문’은 명나라의 ‘이천(李梴)’이라는 유학자이자 한의사인 분이 저술했는데, 단순히 입문서가 아닙니다. 기초 이론과 생리, 병리, 진단, 약물을 비롯하여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피부과 등의 각종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이 있는 종합 임상의서입니다. 특히 선비들이 공부하기에 편리하도록 한시체(漢詩體)로 되어 있지요. 의학에 관심이 많아 의서를 깨우쳐 의술에 조예가 깊었던 분들이 더러 있는데, 그런 분들을 ‘유의(儒醫)’라고 합니다. 유학자이면서 의사인 것이죠.
중산층 이상의 선비 집안에서는 약장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동네마다 의원이 귀해서 갑자기 환자가 생기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유의 집안에선 중병이 아닌 경우에 집안 어른이 한약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한약재를 상비해 둬야 했기에 약장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죠. 특히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이 편찬되어 나오면서 약장은 선비 집안의 필수 목가구가 되었습니다. 선비들이 당쟁으로 유배를 떠날 때도 반드시 지참해 갔던 물건이 바로 약장이었다고 합니다. 동의보감
● 동의보감 선비들의 건강을 지킨 다른 비결
의학입문에는 유학적인 수양론(修養論)과 양성론(養性論)이 많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을 닦았기에 정신건강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죠. 원래 양생법의 으뜸은 정신수양입니다. 그리고 도인법(導引法)인 호흡법, 체조법을 했습니다. 물론 꾸준히 운동도 했는데, 그것은 공자님 때부터의 전통입니다.
● 사군자와 선비의 건강
매화는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이른 봄 먼저 꽃을 피워 진한 향을 전하고, 난초는 때 묻지 않아 고결청초하면서 은은한 향을 내고, 국화는 서리 내리는 늦가을에 가장 늦게 고고하게 꽃을 피우고,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데다 곧게 뻗어 강인한 기상을 지녔습니다. 이처럼 사계절과 때를 같이하는 매난국죽은 각각의 특성이 덕과 학식을 겸비한 군자의 인품에 비유되고 있어 선비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선비들의 스트레스 해소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퇴계 선생은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였기에 평소 매화를 주제로 시를 즐겨 써서 104수로 된 ‘매화시첩(梅花詩帖)’도 남겼습니다. 추사는 스스로 ‘매화구주(梅花舊主)’라고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항상 매화를 좋아하였습니다. 자신이 그린 매화병풍을 서재에 둘러치고 매화의 시경(詩境) 속에서 매화차를 마시며 매화 백영시(百詠詩)를 지었고, 자신이 있는 곳을 매화 백영루(百詠樓)라고 하였습니다.
부채도 매화가 그려져 있는 매화선(梅花扇)을 즐겨 사용하였으니 얼마나 매화를 사랑하였고 매화 속에서 청고한 경지를 찾고 느끼고 하였는지를 알 수 있지요. 또, 다산 정약용도 매조도(梅鳥圖)를 그렸고, 미수 허목도 묵매도(墨梅圖)를 그렸습니다. 이 분들은 모두 70세 혹은 80세 넘게 장수하신 분들이죠. 미수 허목,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연암 박지원(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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