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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동계 스리랑카 여행 >
일시 : 2015. 12. 23(수) ∼ 2016. 01. 03(일) - 10박 12일
장소 : 중국 상하이 및 스리랑카 일원
참가자 : 정성철, 안창성, 한경호, 윤한석 (4명)
< 스리랑카 여행 예산 >
항공료 : 682,600원
호텔 및 차랑 예약 :950,000원
식비, 입장료, 잡비, 비자비 (30$), 안내책자(10$) : 410$.
합계 : 1,632,600원 + 410$
< 여행 일정 >
1. 1일차 : 김해에서 상하이로
• 2015년 12월 23일 수요일
• 10시 까지 김해공항 국제선 터미널 약국 앞에 모임
• 12:35~13:20 (MU5044) 김해 → 상하이 (시차적용-1시간)
• 공항 도착 후 호텔로 이동 check in
• 숙박 : Shanghai Airlines Travel Hotel Pudong Airport Branch
(조식, 셔틀버스, 푸동공항에서 3km이고, 차로 10분)
• 시내로 이동하여 (시간이 되면 상해 박물관 관람) 시내 관광. 저녁식사 후 호텔로 복귀
2. 2일차 : 상하이에서 콜롬보로
• 2015년 12월 24일 목요일
• 12시 까지 푸동공항 도착 및 수속
• 14:10~19:00 (MU231) 상하이 → 콜롬보 (시차적용-2.5시간)
• 호텔에 pick up service (신청)
Chauffeur Guide/vehicle details-(Subject to change)
Vehicle Model :NissanA/Cvan
Chauffeur Guide Name :Mr. Chaminda (차민다)
Contact number :0094(0)776560687
Hotline-General :0094777864479-Kosala
Hotline-General :0094772932104-Khalid
3. 3일차 : 콜롬보에서 시기리야로
• 2015년 12월 25일 금요일 (성탄절)
• 전용차량으로 시리기야로 이동하여 (약4시간소요) Hotel check in
• 점심
• Sigiriya Rock 관광 (30달러 /1인)
4. 4일차 : 아누라다푸라 관광
• 2015년 12월 26일 토요일
• 호텔 조식 후 10C까지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로 이동 (약2시간소요)
•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 이스루무니아 사원
• 루완웰리세야 대탑
• 마하세나 궁전, 스리마하 보리수 참배
• 미힌탈레로 이동 (약40분소요)
• 마하세야 대탑, 암바스탈라 대탑 유적지 탐방
• 시기리야 숙소로 복귀
5. 5일차 : 폴론나루와, 민네리야 투어
• 2015년 12월 27일 일요일
• 호텔 조식 후 폴론나루와로 이동
• 고대 도서관이었던 포트굴비하라, 갈비하라, 수수께끼 석립상 관람
• 옛 궁궐 터, 원형불탑, 바타다게, 갈포타 등 관람
• 민네리야 국립공원 사파리 투어
6. 6일차 : 시기리야에서 캔디로
• 2015년 12월 28일 월요일
• Hotel check out 후 담불라로 이동
• 담불라 석굴사원 관람 후 마탈레(Mathale)로 이동
• 스리랑카 최고의 폐엽경을 보존하고 있는 알루비하라 참배
• 캔디로 이동하여 불치사, 식물원 관광
• Hotel check in
7. 7일차 : 누와라엘리야 관광
• 2015년 12월 29일 화요일
• 누와라엘리야로 이동하여 차밭, 차공장 관람
• 호튼플레인 국립공원 트레킹
• 캔디 호텔로 귀환, 전용차량 계약 만료
8. 8일차 : 휴식과 캔디시내 산책
• 2015년 12월 30일 수요일
• 콜롬보행 기차 예약
• 캔디시내 관광 및 쇼핑
• 충분한 휴식
9. 9일차 : 캔디에서 콜롬보로
• 2015년 12월 31일 목요일
• Hotel check out 후 기차편으로 콜롬보로 이동(소요시간 : 약 2시간반)
진행 방향의 왼쪽에 앉아야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다.
• 콜롬보 도착하여 Hotel check in 후 콜롬보 시내 관광
• 켈라니강 관광
• 켈라니야 불교사원 관람
• 포트지구, 강가라마야 사원 관람
10. 10일차 : 갈레 관광
• 2016년 1월 1일 금요일
• 고속버스 또는 기차편으로 갈레로 이동
• 갈레지역 관광
• 갈레지역에서 점심
• 콜롬보로 복귀하여 저녁 신년 행사
11. 11일차 : 콜롬보에서 상하이로
• 2016년 1월 2일 토요일
• 콜롬보 시내 관광 및 쇼핑
• Hotel check out 후 공항으로 이동
• 20:20~6:00 (MU232) 콜롬보 → 상하이 (시차적용+2.5)
12. 12일차 : 상하이에서 김해로
• 2016년 1월 3일 일요일
• 공항에 머물다가
• 9:05~11:35 (MU5043) 상하이 → 김해 (시차적용+1)
• 김해공항 도착 후 구포로 이동, 점심식사 후 해산
< 스리랑카여행팁 >
•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MIND : 사원을 방문할 때에는 신발과 모자를 벗도록 합니다. 반바지는 불가하니 긴 바지(7부) 준비합니다. 허가되지 않은 곳에서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을 하지 않도록 합니다.
• 스리랑카 의사표현에 익숙해지기 : 머리를 약하게 좌우로 흔드는 것은 'YES'라는 의미이며, 반면 고개를 흔들지 않거나 좌우로 세게 흔들 경우 'NO'라는 의미이다.
• 개인 상비약은 반드시 챙겨가기 : 스리랑카는 병원시설이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에 외국인이 안심하고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 많지 않다. 간단한 개인상비약은 반드시 준비하도록 하자.
• 간단한 우의 및 보온 의류 준비 : 스리랑카는 연중 더운 날씨이긴 하지만 지역에 따라 늦가을 날씨인 곳이 있고, 예고 없는 강우에도 대비해야 한다. (예:누와라 엘리야)
• 스리랑카는 유럽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나라 : 스리랑카는 오랜 세월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TIP문화 등 스리랑카의 관광문화도 유럽식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먹고 즐기고 쉬는 것을 좋아하는 유럽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호텔 부대시설이 생각보다 훌륭하다. 수영복은 반드시 준비하도록 하자.
• 스리랑카 음식 : 더운 지방이라 우리 입맛에 짜고, 달다. 요리 주문시 참고하도록 하자.
< 필수준비물 >
1. 여행자료
여권, 항공권, 한국 돈, 현지 화폐, 신용카드, 여행자 보험증, 가이드북 등
★ 항공권, 호텔바우처, 이비자확인서 등은 전자노트에 저장한다.
★ 해외여행시 여권이 가장 중요하니 보관에 유의하시고, 여권 분실에 대비하여 여권의 사진 있는 면을 스마트폰에 저장해 두는 것이 좋다.
2. 가방, 의류
• 가방(Carrier) 및 보조가방
• 현지 날씨에 대비한 옷 : 긴팔 셔츠, 반팔 셔츠, 긴 바지, 반바지, 잠옷, 런닝, 팬티, 양말, 오리털 패딩, 방수 바람막이(비옷 대용), 바람막이(여름), 등산 자켓, 모자, 선글라스, 수영복, 장갑, 마스크 등
• 신발 : 트레킹화, 샌들(슬리퍼) 등
3. 위생용품
• 칫솔, 치약, 수건, 비누, 샴푸, 세제(가루), 화장품(로션), 선크림, 면도기, 빗, 휴지, 물티슈, 손톱깎이, 면봉 등
• 비상약품 : 진통제, 해열제, 소화제, 감기약, 지사제, 일회용 밴드, 연고, 버물리, 모기 퇴치제, 소독약, 평소 복용하는 약 등
4. 식품
• 주류 : 1인당 소주 3병 준비 (20도, 640ml 페트병 기준)
• 안주 및 반찬 : 볶음 고추장, 볶음 김치, 씻은 묵은지, 깻잎 통조림, 컵라면, 햇반, 즉석국, 고들빼기 김치, 라면스프, 마른 안주, 김, 멸치, 고추 밑반찬 등
• 기타 : 커피(믹스), 개인용 건강차 등
5. 전자제품
휴대폰, 카메라, 캠코드, 전자노트, 충전기 및 만능 플러그(콘센트), 와이파이 공유기 등
6. 기타 유용한 물품
개인용수저, 포크, 여행용 쿠커, 맥가이버 칼, 비닐 봉지(지퍼백), 우산, 여행용 목베개, 미니 전기담요, 빨랫줄, 가벼운 선물 등
< 스리랑카의 개략적 이해 >
남부 아시아 남쪽 인도양의 섬나라 스리랑카 18세기 영국 식민지에서 1948년 영국 연방 자치령으로 독립하여 1972년 국명을 실론(Ceylon)에서 스리랑카공화국으로 바꾸고 영국에서 완전 독립하여 스리랑카 민주 사회주의 공화국(Democratic Socialist Repuplic of SriLanka)으로 국명을 바꾸었다. 실론(Ceylon), 동양의 진주(Pearl of the Orient), 빛나는 작은 섬(Resplendent Isle), 인도의 눈물(Teardrop of India)등의 수식어는 스리랑카가 얼마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나라인지를 대변해주고 있다. 경치 뿐 아니라 인도 문화를 받은 불교와 고대 문명이 녹아든 아름답고 독특한 매력을 가진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이다. BBC선정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50곳으로 선정되기도 한 나라이다.
• 국명 :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
• 독립일 : 1948. 2. 4 (영국으로부터 독립)
• 면적 : 65,610(남한의 약 2/3)
• 인구 : 약2,186만명, 콜롬보시 약120만명.
• 인종 : 싱할라족(74%), 타밀족(18%), 무어족(7%) 등
• 종교 : 불교(69%), 힌두교(11%), 회교(7.6%), 기독교(7.5%) 등
• 언어 : 싱할라어, 타밀어, 영어(공용어)
• 수도 : 콜롬보
• 정부형태 : 대통령중심제이나 의원내각제를 가미한 형태
• 국회 : 단원제 (225석, 임기 6년)
• 화폐단위 : 루피(Rupee) (1$=130rupee, 1루피= 약 9원) - 2015년 12월 기준
• 1인당 GDP : 3,818$
• 시차 : 한국보다 3시간 30분 늦음 (GMT보다 4시간30분 빠름)
• 주요농산물 : 차, 코코넛, 고무
• 기후 : 고온다습한 열대 몬순기후이다. 사계절의 구분이 없으며 강설도 없고, 서리는 고산지대에서 볼 수 있다. 콜롬보의 월평균 기온은 24℃~31℃이며, 연강수량은 2,365mm, 기온이 가장 낮은 12~1월의 평균기온은 25.5℃, 기온이 가장 높은 4~5월의 평균기온은 29℃로서 그 한서의 차이가 3.5℃에 불과, 연중 고른 기온분포를 보인다. 동북해안은 비교적 건조하여 연강수량이 600~1,800mm, 남서부 지방은 2,000~4,000mm 정도이나, 중부지방은 습윤 지대로서 5,000mm 이상이다.
강수량은 몬순에 지배되며, 지역에 따라 강우량과 시기가 큰 차이를 이루고 있음. 남서 몬순은 4~6월 중, 동북 몬순은 10월~2월에 내습한다. 건조지대에서는 관개수로 및 하천을 중심으로 수도작 및 전답농업이 성하며, 전 인구의 60~70%가 거주하는 습윤 지대는 전통적인 작물인 홍차, 고무, 코코넛의 주산지이다.
< 위까지의 이야기는 여행 안내서에 나오는 객관적이며 일반적 이야기이기에 가치 판단이 들어 있지 않다. 실제 스리랑카에서의 여행과 그들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으니 과연 내가 본 것을 제대로 전달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영화 「벤허」의 감독 월리엄 와일러가 한 말을 나도 글의 마지막에 할 수 있게 되면 좋으련만. “ 오! 신이시여, 과연 이게 제가 만든 작품입니까? " >
♠제1일 (2015.12.23.수) 김해 – 상하이 : 여행의 출발
12월 16일, 첫딸이 손녀를 낳아 드디어 나도 할아버지가 되었는데 애 낳은 지 일주일이 되자마자 바깥으로 떠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안선생의 말 대로 “손녀가 할아버지라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손녀가 할아버지라 불려 주었을 때 그는 손녀에게로 와서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김춘수의 “할아버지”라는 시구처럼 나는 외부적 관련에서 인식이 되는 할아버지일 뿐, 손녀가 아직 나를 할아버지로 인식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할아버지라 할 수 없다는 기괴한 논리를 내세우면서 자신을 정당화하기로 했다. 이번 여름방학에도 아마 할아버지라는 말은 못 익힐 것 같으므로 할아버지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것이고 여행도 한 번 더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
10시까지 김해공항 국제선 터미널 약국 앞에 모이기로 약속했기에 청도에서 8시 52분 출발해서 구포역 9시 39분에 도착하는 무궁화호를 타기 위해 역으로 갔더니 8분 정도 연착이란다. 구포역에서 택시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할 계획이었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으나 시간이 넉넉해 별 탈이 없을 듯 했다. 구포 기차역 앞 승강기를 이용해 도시철도 3호선 구포역으로 가서 세 정거장 째인 대저역에서 환승해 경전철로 다시 세 정거장 가면 김해국제공항이다. 게다가 이 계획을 위해 일부러 교통카드까지 발급받지 않았던가. 처음으로 사용하는 터라 상당히 기대를 하고 왔는데 그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개찰구의 동그란 데 지갑을 대니 파란불이 들어오는 것을 즐기다가 가방이 걸리는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드디어 나도 버스, 지하철, 경전철 등 국내 모든 교통을 장악할 날개를 장착한 느낌이었다.
12:35분 발 동방항공 MU5044기를 타고 14:20에 상하이 푸동 공항에 도착해 시차적용을 1시간하여 13:20분으로 시간을 맞추었다. 비행기 안에서는 한국인 아가씨가 내 자리 근처에서 카메라를 잃어 버려 그걸 찾느라고 부산했다. 어디에서 잃었는지 확실하지도 않고 자리에 두었는지, 위의 짐칸에 둔 지도 몰라 스튜어디스 아가씨가 혹시 바닥에 떨어졌을까 해서 허리를 굽혀 바닥까지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스튜어디스 아가씨 아주 열성으로 카메라를 찾아 주려고 노력했는데 과연 찾았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는 머리 위 짐칸에 다른 짐에 밀려 뒤에 숨겨진 것 같아 사람들이 짐을 다 빼면 찾을 것 같았다. 얼빵한 여자 같으니.
< 동방항공의 기내식은 처음에는 나름 맛이 있었다. 게다가 다양하여 만족스러웠다. >
공항 도착 후 호텔로 이동하기 위해 셔틀버스를 타야 했는데 겨우 공항 내 안내소를 찾아 물으니 12번 게이트로 나가라고 했다. 문제는 12번 게이트가 닫혀 있어 10번 게이트로 나와 어떤 한국 아가씨가 있어 셔틀버스 정류소를 물으니 옆에 있던 청소부 아줌마에게 중국말로 다시 물어 길을 건너가라고 했다. 건너갔더니 전혀 정류소와 거리가 멀었다. 호텔은 푸동공항에서 3km 떨어져 있고, 차로 10분 거리라니까 택시를 타야하나 하고 생각하던 중 그 청소부 아줌마가 다시 나타나 우리를 12번 게이트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 곳에 호텔 셔틀 버스 시간표가 적힌 표지판이 있었다. 12번 게이트로 나가라고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10번 게이트로 나와 거기서 정류소를 찾은 우리의 성급함이 문제였다. “가르쳐 준 대로 행동하라.” 이번 여행의 첫 번째 교훈이었다. 그리고 잘못 가르쳐 준 것을 알고 다시 찾아와 준 청소부 아줌마, 참 고마웠다.
호텔은 Shanghai Airlines Travel Hotel Pudong Airport Branch였다. 일단 짐을 두고 셔틀버스로 공항에 와서 다시 5선이라 적힌 버스를 1인당 20위안을 주고 타서 45분 정도 지나 상하이 시내의 인민광장에서 내렸다. 마침 유학 중인 한국인 여학생이 앞자리에 있어 도움을 받았다. 버스에서 안선생과 윤선생이 감자는 뿌리냐 줄기냐로 1만 원 내기를 했는데 도착 후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감자는 괴경(塊莖), 고구마는 괴근(塊根)이라고 해서 안선생의 승리였다. 시간이 되면 상해 박물관과 시내 관광을 하고 저녁 식사 후 호텔로 복귀할 계획이었지만 엄청난 미세먼지로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 공항에서 상하이 시내로 가는 버스에서 바라본 시가지 풍경. 오후 4시경이었는데 사물이 흐릿해 보일 정도로 미세먼지가 많다 >
나는 베이징의 지독한 미세먼지에 대한 뉴스를 보고 미세먼지는 몽골사막에서 불어오는 황사와 베이징의 대기오염이 합해져서 생기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는데 상하이의 경우는 인근에 사막이 없으니 도시 자체의 대기오염으로 인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겠다. 이렇게 될 정도로 대기 오염이 심하다면 도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하루하루를 생활하는지 정말 궁금했지만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보다는 빨리 도망치고 싶을 따름이었다. 잔기침이 한참 나온 후에야 겨우 내 몸도 적응한 듯했는데 대부분의 상하이 사람들은 늘 그래 왔기에 오늘도 그러려니 하는지 아주 무관심해 보였다. 아마 몇 년 후 그 후유증이 심각히 나타날 때쯤이면 오늘의 무관심을 후회하겠지. “관 뚜껑의 못 박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후회하지 않을 놈이군.”이라는 무협지에서 흔히 보던 구절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상하이는 여전히 무질서했다. 교통질서는 지켜지지 않고 사람들은 빨간 불에도 예사로 건너갔고 곳곳에 쓰레기가 널려 있어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남경로(난징루)를 찾아 가기 위해 계속 물었는데 이때는 윤선생의 단문짜리 중국어 실력도 도움이 되었다. 남경로의 연운루(燕云樓)는 과거 안선생이 방문해본 바 있는 음식점이라 믿고 들어갔다. “중화 노자호”(中華 老字号)라는 놋쇠로 된 명패가 입구에 떡하니 붙어 있었다. 우리 식으로 본다면 “맛집”이라고 할까, 아니면 “전통 음식점”이랄까. 100년 이상 된 집에 붙이는 명패가 있는, 그런 제법 이름난 음식점이라고 했다.
< 오래된 가게에 이런 식으로 국가가 인증해 주는 것은 좋은 생각인 듯했다. 우리는 방송국이나 요상한 단체에서 이런 명패를 주다 보니 어떤 경우 뒷돈이 오간다든지 객관성이 부족하다든지 하는 부조리가 생기기도 한다. >
< 북경오리 전문점이라 해서 북경오리 한 마리와 얌(야콘)요리, 팽이버섯요리, 불도장 2개와 맥주 2병을 시켰다. >
북경오리(1마리 : 158위안 – 28,500원)는 껍질이 잘 구워져 바싹바싹하니 먹을 만했는데 오리탕을 주지 않아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했지만, 영어가 통하지 않아 물어 볼 수 없었다. 다른 자리에서는 냄비 위에 끓고 있는 것이 오리탕인 듯했는데 확인해 볼 수 없었다. 불도장(1그릇 : 38위안 – 6840원)이라고 나온 것은 재료부터 싼 것을 넣고 간도 맞지 않아 이 냄새를 맡고 담을 넘었다는 승려의 미각을 의심하게 하는, 이름만 불도장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위의 사진에 작은 종발에 담긴 오이채와 대파 채 썬 것이 떨어져 다시 시키니까 한 종발에 5위안씩 10위안(1800원)을 계산에 추가하고, 안선생이 실수로 맥주잔을 쏟아 물수건이 필요하다고 하니 물수건이 모두 필요하냐고 물어 4개를 시켰더니 1.5위안씩 6위안을 계산에 보태는 것이었다. 식사 전 손을 씻도록 배려하는 것은 음식점이 손님에게 제공해야할 기본적 서비스가 아닌가? 북경오리를 담은 쟁반 값을 받지 않는 것이 다행이랄까? 참! 백년명점(百年名店)이라는 명함의 선전이 낮 부끄러워지는 행동이었다. 오리고기의 양에 비교한다면 오이채와 대파채는 당연히 부족한 양인데 주문시 아예 부족하게 주고 다시 추가비용을 받아 100년의 이름난 점포가 되었구나. 아이고, 추접스런 중화노자호(中華老字号)여.
황당한 일은 다시 계속되었는데 계산대가 분명히 나의 오른쪽에 있고 입구가 내 맞은편에 있는데 정선생과 안선생이 정면에 보이는 화장실로 가더니 나와서는 왼쪽으로 가서는 오지 않는 것이었다. 왼쪽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번에는 정선생이 화장실에 가더니 나와서는 다시 왼쪽으로 가서 나 혼자 자리를 지켜야 할 판이었다. 도대체 왼쪽에 무엇이 있어 사람들이 가서는 오지 않는 것일까? 5분 이상 자리를 지키다가 궁금증을 도저히 이기지 못하여 나도 가보니 그곳에 계산대가 또 있었다. 우리 측 3명이 계산대에 붙어 무어라고 말하는데 계산하는 아줌마는 카드는 안 되고 달러는 못 받겠으니 위안화로 달라는 것이었고 위안화가 모자라니 일부 카드로 받아라고 하는 것이 우리 측 이야기였다. 결국 비자카드는 안 되니 마스터카드로 계산을 하자고 해서 347위안을 안선생 카드로 54$로 계산해서 해결을 보았다.
기분도 좀 잡치고 해서 바로 호텔로 귀가하기로 했다. 돌아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소에 도착했는데 버스가 오지를 않아 옆 사람에게 물어 보았지만 영어가 통하지 않았다. 마침 한 여학생이 영어를 잘해 물어 보니 자기 알기로는 20분 간격으로 온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다시 공항까지 택시를 탈까하는 의견이 나왔지만 45분 거리를 택시로 가면 요금 폭탄을 피할 수 없을 듯해서 계속 기다리기로 결정해 조급증을 참고 기다렸더니 결국에는 5선이라 적힌 버스가 왔다. 모든 것이 내 바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조급해 하지 말자. 이번 여행의 두 번째 교훈이었다.
공항에 도착했는데 이상하게 우리가 셔틀버스를 탄 곳이 보이지 않고 장소도 완전히 처음 오는 곳처럼 보이는 등 분위기가 이상했다. 시간은 셔틀버스의 30분 간격이 다 되어 가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로 밖을 내려다보니 우리는 3층에 있는 것이었다. 급히 1층으로 내려가 겨우 출발하려는 셔틀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편의점에서 맥주를 4캔 준비해 호텔로 들어오니 마침 내몽고 특별식이라고 해서 식당이 열려 있었다. 소고기 안주 하나와 양고기를 주문했는데 양고기는 시간이 오래 걸려 안 되는 듯했다. 맥주 2병으로 무사 귀환을 자축한 후 다시 우리 방에 모여 캔맥주 4개와 가지고 간 소주로 간을 해서 반성회을 가진 후 해산을 했는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계획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필름 끊김 현상”부터 반성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별로 동의할 사람이 없을 듯해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청도에서 상하이까지 이동을 한 첫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지만 모두 다 잘 해결된 상태로 지친 몸을 침대에 눕혔다.
♠제2일 (2015.12.24.목) 상하이 ― 콜롬보로 : 스리랑카를 향해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어제와 달리 제법 공기가 깨끗해져 조금 멀리도 보인다. 그러나 곧 버스와 자가용과 인간들이 밤새 가라앉은 먼지들을 다시 일으켜 어제와 같이 뿌연 하늘을 만들겠지. 하지만 난 그들이 공격하기 전 도망갈 거야. 오늘은 이동의 날이다.
< 호텔의 아침 뷔페식사 >
TV를 켜니 BBC 뉴스에서 베들레헴에서 복면을 한 청년들이 돌을 던지는 장면, 탈레반이 총을 쏘는 장면 등 여전히 세상은 예수의 사랑과 평화와 대척되는 행동으로 탄생 전야를 준비하고 있다. 사람들이 물질에 물든 이후 세상은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 성인들이 주장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에서 벗어난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것. 물질은 많고 적음이 가시적이고 유한한 것이기에 끊임없는 소유욕을 자극하여 투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사랑과 예절, 공경은 아무리 흘러 넘쳐도 불가시적인 것이고 무한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소유를 다투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고 예절을 지키고 공경하는 것으로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다만 그 사랑이 한 여자를 사이에 둔 여러 남자의 경우라면 그 사랑은 가시적 물질로서의 여자에 대한 소유욕을 자극하기에 멀리는 트로이 전쟁으로부터 요즘의 치정에 얼킨 살인까지 다양한 투쟁의 형태를 보이는 것이다. 요즘 TV에 산으로 돌아가 사는 사람들에 대한 프로그램이 자주 보이는데 공통점이 외부세상에서 실패 내지는 질병, 그리고 욕심을 버리고 자연으로 들어 왔더니 훨씬 삶이 풍족하더라 하는 것. 12월 24일 아침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비행기는 2시 10분발이기에 12시 정도까지 공항에 가면 되는데 여유시간에 상하이로 가서 놀 수도 있지만 목이 벌써 깔깔해지는 것이 바깥 외출이 부담스럽다. 일단 푸동공항에 가서 놀기로 하고 11시에 셔틀버스를 탔다. 중국인들이 버스에서나 공공장소에서 기본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번의 여행을 통해 익히 알고 있던 바였는데 이 날의 버스에서는 그리 시끄럽지 않아 혹시 이들이 본토에서는 다른가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잠깐 나의 착각이었다. 아가씨 두 명이 타더니 한 명은 앉고 한 명은 서서 가는데 그 말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 아가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달아서 말을 이어가는데 잠시의 쉴 틈이 없었다. 잠시라도 생각해서 말하는 건지, 머리 따로 입 따로의 재주가 있어 생각 없이 말할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거의 10분간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피로감이 엄습해 왔다. 이 여자가 내 아내라면… 염라대왕이 별다른 지옥을 마련하는 수고는 덜겠구나. 이번 여름 북해도에서의 중국인민들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콜롬보행 비행기(MU231)가 3시 50분발로 1시간 40분 지연되었단다. 지연된 이유라든지 비행기가 연착해 미안하다든지 하는 말은 일절 없이 그냥 연착이 되었다로 멘트 끝. 시차가 –2.5시간이 적용되므로 오후 7시 도착이 8시 반 정도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호텔에 pick up service를 해 두었고 기사 이름이 Mr. Chaminda (차민다)였는데 ‘연착임을 알고 잘 기다려 주겠지.’ 게다가 여행사에서 호텔에 디너 제공을 부탁했다니 ‘일단 도착 후 식사, 그리고 취침하면 되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푸동공항에서 어제 ‘감자가 줄기냐, 뿌리냐’ 내기의 승자인 안선생이 커피를 자기가 사겠다고 해 가장 헐한 집이라고 들어간 곳이 커피 한 잔에 8$(9,600원 정도)하는 곳이었다. 호의에 비해 4잔은 엄청난 출혈이라서 2잔을 시켜 4명이서 잔 두 개 더 달라고 해서 나누어 마셨다. 마치 예비군복을 입은 듯이 한국에선 평상시 하지 못할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재미있다. 공항 내 판소리라는 한식집에서 비빔밥(35위안-6,300원) 4그릇을 시켜 먹었는데 나는 아침 먹은 것도 소화가 안 되는 듯해서 반 그릇을 남겼다. 그리고 수속을 밟고 공항 내 들어가 지금까지 경비 계산한 종이를 분실해 계속 찾아도 없어 결국 새로 작성했다. 윤선생 책에 꽂아 둔 것이 나중에 발견되었다.
< 다시 공항 대기실에서 계산에 열중하는 두 수학선생님. 앞에 예의 없는 중국인의 발이 보인다. >
비행기에 탑승 후 계산해 보니 7시간 20분을 기내에 머물러야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상하이에서 중국 남쪽 해남도로 해서 통킹 만(灣)을 지나 베트남으로 들어가 메콩 강(江)을 건너 라오스로 진입 후, 다시 태국을 지나 미얀마로 해서 안다만 해(海)의 안다만 제도(諸島)를 지나 뱅골 만(灣)으로 접어들어 남서쪽으로 인도양을 향해 날아가야 도착할 수 있는 섬나라가 스리랑카이기 때문이다. 비행 기록에 의하면, 바깥 온도는 섭씨 –51°이며, 고도는 11,590m. 속력은 시속 870㎞∼932㎞이므로, 상하이에서 스리랑카까지의 거리는 평균 시속 900㎞에 비행시간 7시간 20분으로 잡으면 대략 6,600㎞이다.
안다만 해(海)는 1987년 11월 29일 KAL 858기가 북한 대남공작원 마유미(김현희)가 설치한 폭약에 의해 공중 폭파되어 115명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이는 당시 대선에서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한 사건이다. 나는 김현희가 북한 대남공작원인지 아닌지, 혹은 당시 안기부가 대선을 위해 기획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다만 무고한 생명을 115명이나 살해한 살인마를 어떻게 지금까지 살려 두는지 – 당시 매스컴에서는 김현희의 얼굴이 예쁜 것에 초점을 두기도 했는데, 정말 얼굴이 예뻐서 살려 준 것인지 -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게다다 2012년 김황식 국무총리는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의 주범인 김현희씨가 가짜라는 의혹에 대해 "가짜가 아니며 칼(KAL)기 폭파의 주범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는데 주범이라면 당연히 사형을 시켜야하는 것이 아닌가? 또 흉악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과 같은 레퍼토리로 “종교에 귀의해 속죄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 사죄의 이유도 되지 않는다면 115명을 살해한 테러 주범을 살려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다만 해(海)는 보기에도 겁나는, 끝 모를 깊이의 속살을 다만 시퍼렇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스리랑카는 일반적으로 붙여 쓰는데 의미상으로는 스리 랑카로 띄어 쓰는 것이 맞다. “스리”는 “빛나는”이란 뜻이고, “랑카”는 “섬”이란 뜻이니 “스리랑카”는 “빛나는 섬”이란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혼여행으로 몰디브에 가기 전 들르는 나라 정도로 알려졌다. 크기는 남한의 2/3 정도이다.
< 연착하는 바람에 점심인지 저녁인지 애매하게 제공된 식사. 닭고기에 떡처럼 흰 것은 밥이고 전체적으로 같은 동방항공인데 어제 기내식보다 못한 느낌이었다. 이처럼 내가 기내식에 집착하는 이유는 기내에서 그것 밖에 신경 쓸 일이 없기 때문이다. 8시 40분경에 도착할 때는 배가 고플 지경이었지만 물만 제공되었다. 이 사진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빵이 담긴 용기를 윤선생이 챙겨와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락앤락 빈 통을 하나 챙겨 가서 각종 반찬, 과일을 담는 용도로 사용하다가 올 때는 파손우려가 있는 것을 담아오는 용기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어쨌든 네곰보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입국 수속 시 비자 시청을 하지 않은 사람은 공항에서 비자 신청을 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ETA 비자를 신청했기 때문에 바로 나갈 수 있었다. 소주가 제법 많아 살짝 걱정을 했는데 별다른 짐 검사가 없이 통과하였다. 특히 공항 내에서 한국 돈을 바로 환전해 주었는데 환율은 0.1125여서 여권과 한국 돈 10만원을 주었더니 11,250LKR(스리랑카 루피)로 바꾸어 주었다. 스리랑카 여행자가 한국에서 원화를 달러로, 다시 스리랑카에서 달러를 루피로 바꾸는 것보다 스리랑카에서 한국 돈을 바로 루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대단한 Tip이다. 공항은 어수선하면서도 이상하게 친근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 이유가 우리가 국내에서 흔히 보던 간판들이 공항 여기 저기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공항 내에서 냉장고와 에어컨도 살 수 있는 모양이다.
< 공항 내의 면세점, 텔레비전과 세탁기, 에어컨, 냉장고 등을 구경하는 손님이 제법 많았다. 왼쪽 집은 보이는 점원만 셋으로 상당히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다. LG전자가 호텔의 에어컨이나 시내의 간판 등에서 흔히 보였다 >
30대 중반 정도의, 검은 갈색 얼굴에 코가 유난히 긴 기사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름은 이미 외워두고 있는 “차민다”였다. “반다라나아이크 국제공항”은 ‘네곰보’에 있고 숙소인 콜롬보까지 고속도로로 약 40분 정도(통행료 450LKR) 가야 했다. 주차장에 대기해 있던 NissanA/Cvan으로 차를 갈아타고 콜롬보 Galle Main Rd(갈레 메인 로드)에 있는 2성급의 ‘Sapphire hotel’(우리는 사파이어로 읽었는데 현지인들은 새피어라 발음했다)로 출발했다. 여기서는 A/C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같았는데 에어컨이 없는 건 대략 일반 버스이고 에어컨이 있으면 '럭셔리 버스'라고 불리는 것 같았다. 날씨가 더우니까 모든 차에 당연히 에어컨이 가동되리라 믿는 나에게 30° 찜통 더위에 에어컨이 없는 버스는 경험한 바가 없었지만 후반기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동을 많이 하니까 아마 경험할 날이 있을 것이다.
‘새피어 호텔’은 시내 중심부에 있는 호텔인데 오래되어 시설이 낡았다. 마침 늦은 저녁인데도 우리는 흔히 볼 수 없는 이슬람식의 결혼식이 있었다. 혼자 생각건대 호텔에서 결혼하는 것으로 보아 상류층에 해당하는 하객들이라 나름 번듯하게 차려 입은 것 같았고 신부인지 신부 친구인지 몰라도 아가씨들도 날씬하고 꾸민 것도 세련되어 보였다. 상류층이라 생각한 것은 단순히 호텔에서 결혼해서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옷차림새와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슬리퍼를 신든지 맨발이든지, 웃옷은 벗었든지, 입었지만 지저분하든지 인데 여기 하객들은 전부 구두를 신고 양복이나 전통복장을 좋은 천으로 재단해 입은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상 여행사에서 디너를 제공하게 되어 있어 프런트 데스크에 있는 매니저에게 물어 보았더니 디너는 이미 끝이 나 먹을 수 없다, 당신들은 내일 아침부터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녀석이 되지도 않은 한국말까지 섞는 것이 꼴불견이었다. 아마 우리가 연착을 해 그런 모양이라고 단념을 하고 밖으로 나와 조금 가니 스리랑카의 현지인이 출입하는, 정말 허름한 식당이 있었다.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일단 들어갔더니 벌써 전체 4개의 식탁 중 3개의 식탁에서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있었다. 치킨 비리야니 2개와 나시고렝 1개, 펩시콜라 작은 병 4개를 시켰는데 나는 먹지 않기로 해서 한 개를 뺐다. 그 이유는 요리사가 바지 대신 치마 비슷한 사롱을 입었고 웃옷은 입지 않아 꼬불꼬불하고 허연 가슴 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지나친 문화적 충격이 아니라 참을 수 있었는데 식당 전체적으로 청결하지 못했고, 더구나 요리사가 사롱 위로 사타구니를 벅벅 긁는 것이 두 번이나 눈에 띄어 일단 3그릇을 나누어 먹기로 했다. 식탁 위에 신문지를 네모지게 잘라 통에 넣어 둔 것이 있어 무엇을 하는 것일까 궁금했는데 식사 후 입을 닦는 용도였다. 사람들은 식사 전 손을 씻고 오른 손으로 식사를 했는데 그렇게 할 자신도 없고 손에 음식을 묻히는 것이 지저분하게 보여 스푼 4개를 신청했다. 아침 옆자리에 있던 40대 정도의 사내가 한국에서 왔느냐고 물으면서 자기도 한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일하다가 IMF 때문에 회사가 망해서 돌아 왔다면서 한국에서 참 재미있었다라고 추억했다. 이런 사람이 예상 외로 많아 몇몇 사람을 더 만날 수 있었다.
음식은 예상 밖으로 맛이 있었다. 좀 짜고 조금 매워서 그렇지 전체적으로 먹을 만 했다. 그리고 양이 많아 3개 시킨 것이 적당했는데 이걸 경험 삼아 다른 식당에서 양 조절을 해서 계획적 주문을 해야 했는데 습관을 이기지 못해 결과적으로 실리를 챙기지 못했다. 가격은 치킨 비리야니와 나시고렝이 각 100루피, 펩시콜라 작은 병도 100루피 해서 총 700루피였다. 우리 돈으로 6,000원 정도.
밖으로 나오니 폭죽 터뜨리는 소리에 온 거리가 소란했다. 마트에 가서 과일과 과자, 케슈너츠 등을 사고 맥주를 사려고 했더니 오늘은 POYA DAY라서 술을 팔지 않는다고 한다. 내일도 성탄이라서 안 팔고. 술 진열대는 한 달에 한 번씩은 반드시 폐쇄해야 하니까 슈퍼 한 구석에 따로 설치해 아예 폐쇄하기 좋게 해 두었다. POYA DAY는 공휴일이라니 술을 안 팔아도 괜찮은 제도 같다.
POYA DAY는 불교가 전파되기 이전 달력이 없던 시절에 고대 아시아 고행자들이 보름달이 뜨는 날에 종교적 의식을 행하였으며 이날은 모든 활동을 금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현재는 매월 보름달이 뜨는 날이 국가적인 공휴일로 지정되어서 관광서와 술과 고기를 파는 가게는 문을 닫는다. POYA DAY에 스리랑카 사람들은 상하의 모두 하얀색 옷을 입거나 혹은 상의든 하의든 하얀색 옷을 입고 우산 하나 챙겨들고 돗자리 하나 옆에 끼고, 수건 하나 목에 두르고 실론티가 담긴 보온병을 하나씩 챙긴 뒤 각 도시에 있는 절이나 다고바(塔)을 찾아 간다. 스리랑카는 연중 기온이 따뜻한 나라로 이렇게 외부에서 밤을 지새우시더라도 크게 어려움이 없으며, 부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같이 밤을 지새우므로 안전에 큰 문제가 없다.
과일과 과자를 가지고 호텔로 돌아오니 데스크에 있던 매니저가 자기 식당에서 디너를 먹지 왜 다른 곳에 가 디너를 먹었느냐고 한다. 얼씨구! 이 자식이 쥐약을 처먹었나. 헛소리를 시작하는구나. 아마 여행사에서 확인한 모양이다. 당신이 끝났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아니란다. 이런 놈들 때문에 전체 이미지가 나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새피어 호텔에 다시 돌아와서 이틀 더 자야하는 것을 매니저는 계산에 넣지 않은 듯 했다. 여행사에서 제공했지만 우리가 못 먹은 디너는 나중에 우리가 와서 찾아 먹으면 되는 것이다. 결코 4명분의 식사비를 헛되이 날릴 이유가 없고 특히 너 같이 간교한 놈에게 손해 볼 우리는 아니다. - 말만 그렇고 사실 우리는 좀 바보다.
우리 방으로 다시 모여 문배주와 소주 640㎖를 미니바에 있는 맥주 2병과 섞어 마시고 취침했다. 오늘은 엄청난 거리를 이동해서 몸은 피곤하되 내일부터는 본격적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친 것이 아니라 밤새도록 폭죽 터트리는 소리와 불꽃놀이에 자다가 깜짝깜짝 놀라 여기는 IS나 탈레반이 없는 스리랑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잠을 청해야 했다. 어떤 폭죽은 정말 옆에서 폭탄이 터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소리가 컸다.
스리랑카 사람들아 잠 좀 자자. 모두 피곤하게 자다 깨다한 밤이었다.
♠제3일 (2015.12.25.금) 콜롬보에서 시기리야로 : 내륙을 향해
여전히 생활리듬은 3시간 30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새벽 4시 조금 지나 일어났다. 잠을 설쳐서 모두 피곤했지만, 시내 구경을 나가 보자는 의견이 있어 아침 일찍 나가 보았다. 어제의 광란의 흔적으로 거리 곳곳에 폭죽 껍질이 깔려 있었다. 거리에는 포야데이 겸 성탄 전야를 축하한 폭죽 흔적이 허옇게 남아 있다. 우리가 자는 호텔 한 쪽 면만 보았는데 길바다이 허옇게 될 정도로 터뜨렸으니 대체 어떻게 잠을 잘 수 있단 말인가?
< 숙소 옆 st. Lawrence church. 우리 문을 열어준 사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조금씩 기어가는 모습이 아스라이 보인다 >
마침 오늘은 성탄절인데 바로 옆이 성당(st. Lawrence church : 성 로렌스 처치)이라 신자를 따라 들어가 보았더니 마리아상과 성인상 등이 열대야자의 큰 키 옆에서 조용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기도하는 신자들도 눈에 보였다. 한참을 거닐다가 더 볼 것이 없어 나오는데 늙은 할머니가 성당 입구에 앉아 있었다. 정체가 뭘까 생각했더니 구걸하는 노파인 듯했는데 결코 적극적 동냥은 하지 않고 그냥 주기를 기다리는 식으로 앉아 있었다. 원래 동냥은 승려가 돈이나 물건을 수행 중에 시주로 얻으려고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동냥 행위가 승려에게도 필요한 것이지만 동냥을 주는 사람에게도 적선(積善 - 착한 행위를 쌓는 일 )의 기회를 주는 것이기에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굳이 거지노파가 적극적으로 구걸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대개의 스리랑카 거지들은 이런 관계를 잘 아는 듯하여 달라붙거나 애절한 소리로 동정을 구하지 않았다. 즉 상대방에게 적선의 기회를 주는 떳떳한 거지인 것이다.
< 거리에 세워 둔 툭툭이. 앞바퀴와 앞 범퍼의 간격만큼 앞차에 붙이니까 30㎝ 정도? 우리는 깜짝깜짝 놀랄 수밖에 >
엄청나게 곧고 큰데다가 단단하기도 해서 목재로서 참 좋겠다고 생각한 야자나무 밑에 노란 열매가 하나 떨어져 있어 일단 주워보니 이게 일단 먹는 것인지 아닌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 노란 열매는 우리 것이 아니어서 얼른 제 자리에 두었는데 문득, 야자와 코코넛이 어떻게 다르냐가 궁금해졌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성당에서 본 야자는 가장 크고 곧게 자라 조경용으로도 많이 쓰인다는 대왕야자였다. 야자는 캄보디아에서 먹어 보았는데 푸른색의 둥근 모양이었고 마신 후 속을 파먹기도 했다. 여기서는 좀 마름모의 황금색 과일에 크기가 캄보디아의 것보다 작았다. 그래서 둥글고 푸른색이 야자이고 황금색 마름모가 코코넛이 아닌가 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상식이었고 인터넷에서도 검색해보니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야자는 대추야자, 기름야자, 부채야자, 대왕야자 등 무려 2,000여 종류가 되며 이를 통틀어 야자나무라 한다. 심지어 가정에서 키우는 홍콩야자도 있지 않은가? 우리가 말하는 팜유는 기름야자에서 짜고 코코넛 오일은 코코스야자 열매인 코코넛에서 짠다. 대추야자는 옛날부터 실크로드가 지나는 서남아시아에서 건조해 팔기도 했다는 대추만 한 것이다. 즉 야자의 종류가 아주 많고 그 중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야자는 코코스 야자나무의 열매를 말한다. 코코스 야자나무에 달리는 것을 우리는 흔히 야자(椰子)라고 하고 이를 영어로는 코코넛이라 한다. 즉, 야자나무는 palm이고, coconut은 코코스 야자나무의 열매로서 배젖에서 야자유(椰子油)를 짜며, 이것을 말려 코프라(copra)를 만든다. 열매 속에는 달콤한 코코넛 밀크액(milk液)이 있다고 사전에 나와 있다. 아주 고급진 정보다.
< 콜롬보 칼레 메인로드에 바로 붙은 뒷골목. 가난하지만 사람 사는 정취가 난다. 좌측에 보이는 작은 푸성귀 밭에서 그리고 오른쪽 빈약한 성탄 트리에서 >
식사는 대개 7시에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어 3층 식당에 갔더니 종업원들이 모두 반갑게 인사를 한다. 벨보이도 그렇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친절한데 딱 한 놈 매니저 놈이 나쁜 놈이다. 스리랑카 호텔이든 일반 식당이든 식사 매뉴는 한결같이 치킨커리, 피쉬커리, 달커리, 삼발소스 등이 기본이다. 커리는 우리 식으로 본다면 비빔밥이다. 커리를 손가락으로 먹는 것이 촉감으로 느끼는 맛이라 하지만 글쎄, 어제 밤 들린 누추한 일반 식당에서 다른 사람은 손가락을 사용하여 커리를 먹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일했다는 중년의 사내는 숟가락을 사용하고 있었다. 결국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발달한 것이고 그래서 편한 것이다.
< 새피어 호텔의 첫 식사. 아침은 가볍게 먹는 편이라 대강 챙겼는데도 양이 많다. 여기에 나중에 과일까지. 이 호텔의 경우 식사 등급은 “중” 정도 >
8시에 차민다를 만나니 다짜고짜 악수부터 청한다. 하긴 오늘이 성탄절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사람들은 상당히 사교적이어서 악수도 잘 하고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자마자 대화도 스스럼없다. 차에 짐을 싣고 시기리아를 향해 출발했는데 콜롬보 시내 풍경이 한가롭고 여유로워 보였다. 이 한가함과 여유는 엄청난 오해였다는 것을 이 해가 가기 전인 12월31일 깨닫게 된다. 즉 오늘이 12월 25일로 공휴일이라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어제가 포야데이라 밤 늦게까지 즐긴 사람들이 아침잠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한가하니, 여유가 느껴지니"라는 정말 헛소릴 해댄 것이다.
차는 시내를 지나 콜롬보 포르 쪽으로 갔는데 옛날 영국 식민지 시절의 건물들이 고색찬연하게 남아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사용되는 듯 했다. 베이라 호(湖) 주변에 포트 역과 레이크 하우스 버스 정류장이 있어 이곳이 콜롬보 교통의 요지임을 알 수 있어야 했는데 이는 대중교통으로 골병이 들고 난 다음 깨달은 나중 일이다. 시내 여기저기를 안내하는 차민다의 영어를 들어 보니 발음이 스리랑카 식인데다가 억양도 이상하고 전체적으로 말이 빨라 쉬운 말도 알아듣기 어려웠다. 예를 들면, ‘normally’란 발음을 우리는 [노:멀리]의 ‘노’에 힘을 주고 끝을 내리는데, 차민다는 [노말리]라고 붙여 말하면서 ‘리’에 힘를 주고 빨리 발음하면서 끝을 올리는 것이었다. 이 말을 자주 사용했는데 나중에서야 “일반적으로, 대개”라는 뜻으로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시기리아로 가는 도중에 마을 입구나 길옆에 불상이 조성되어 있었고 시주를 할 수 있도록 구멍도 뚫려 있었다. 이런 불상은 매우 많아 역시 스리랑카는 불교의 나라임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불상만이 아니었다. 식민지 시절의 영향인 듯 가톨릭의 성인상도 길가에 여러 개 만들어져 있었다. 이들에게 종교는 정말 생활과 결합한 것 같았다. 물론 이슬람교도들도 보였지만 전혀 종교적 갈등은 느껴지지 않았고 전체적으로는 불교가 대세인 듯했다.
같이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 콜롬보로 교육 연수를 받기 위해 왔을 만큼 발전된 나라였는데 1983년부터 2009년까지 스리랑카와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 사이에 진행된 26년에 걸친 스리랑카 내전으로 나라가 피폐해졌다고 한다. 결국 스리랑카 정부군이 LTTE의 지배 지역을 제압하여 내전은 종결했다. 그래서 타밀 족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스리랑카의 타밀족은 다양한 집단과 카스트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의 절반을 차지하는 실론타밀족은 주로 실론 섬(지금의 스리랑카)의 북부지역에 산다. 이들은 비교적 교육 수준이 높고 다수가 성직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이른바 인도타밀족은 19, 20세기 영국인들에 의해 차 농장의 노동자로 실론 섬에 오게 되어 다른 종족들로부터는 이방인으로 취급되었다. 실론타밀족과 인도타밀족은 상이한 카스트 체계 하에 조직되어 있으며, 사회적 교류가 거의 없다. 1980년대에 실론타밀족과 스리랑카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싱할라족 간에 긴장이 고조되어 타밀족은 북부지역에 자치국가를 세우려는 희망 속에 군대를 조직하여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스리랑카 내전이다.”
스리랑카의 교통은 곳곳의 도로 공사나 다리 공사 등으로 인해 더욱 복잡하다. 시내의 경우,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시외로 가는 경우도 고속도로(왕복 4차선)를 제외하면 거의 2차선이다. 게다가 중앙선의 개념이 모호해서 2차선을 3차선처럼 사용하고 있다. 즉, 추월을 하려면 우측 깜빡이를 넣고 중앙선을 타고 달리면서 속도를 높이고 맞은편 차는 속도를 줄이고 내 차선의 옆 차는 갓길로 피해주는 식인데 핸들의 방향과 도로의 방향이 영국식이라 한참이 되어서야 겨우 구경하는 것이 적응되었다. 이런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도착한 날 충돌사고 난 것을 보았고, 며칠 후 트럭이 도로 옆으로 전복된 것도 보았다. 도로사정상 교통사고가 날 수밖에 없어 수시로 구급차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차의 속력도 낼 수 없어 시외의 경우 시속으로 치면 30㎞정도로 달리고 빨라야 40㎞ 정도로 달린다고 보면 된다. 나는 차를 공짜로 준다고 해도 운전은 사양할 생각이다.
다음 숙소까지 4시간 정도 걸린다기에 2시간 쯤 달린 후 휴게소에 들러 설탕을 넣은 달콤한 홍차와 초콜릿을 먹었다. 마침 눈앞에 코코넛 나무가 보이기에 코코넛은 어떻게 따느냐고 물어보니 사람이 직접 올라가 딴다고 한다. TV에서 원숭이를 훈련시켜 따는 것을 보았는데 여긴 그런 동물의 노동 착취는 없는 모양이었다. 넓게 펼쳐진 코코넛 농장이 많았는데 그 넓은 농장 중앙에 전원주택이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어 보기에 좋았다. 그러나 한 나무에 한 20개쯤 달린 저 많은 코코넛을 일일이 사람이 올라가 딸 걸 생각하니 구경하는 것과 그곳에 직접 생활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 절감되었다. 흰색의 왜가리와 연꽃이 핀 습지도 많았고 코코넛과 옥수수를 파는 상인들도 길가에 많았다. 호객행위도 없고 차를 세워 사면 사는 것이고 말면 말라는 식이다. 일 년에 3모작이 가능하니 한 번 농사로 자기들이 먹을 것은 해결될 것이고 나머지는 팔든지 자식 교육에 보태든지 어쨌든 살림에 여유가 있어 아둥바둥거릴 필요는 없는 듯했다.
Dambulla(담불라)를 지나 Sigiriya(시기리아) 쪽으로 가다가 중간쯤에 있는 “Fresco water villa”란 숙소에 도착했다. 상당히 풍광이 좋다. 넓은 풀밭 한쪽에는 아침마다 종업원들이 관리를 해 깨끗한 풀장도 있고, 비단잉어와 역돔과 작은 구피가 바글바글한 연못 위에 3층 건물을 지어 시원한 느낌이 든다. 아마 물을 순환시키기 위한 장치가 어딘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빌라 옆에 제법 현대적 시설의 순환조가 있었다. 게다가 주변은 우거진 나무숲이라서 이름 모를 새소리도 끊임없이 들린다. 터줏대감격인 비둘기와 털이 깜다 못해 청색이 도는 까마귀와 나무위에 앉은 제법 큰 새도 눈에 띄었고 새파란 잉꼬도 볼 수 있었다. 해오라기, 왜가리, 공작, 독수리, 박쥐, 펠리컨, 오리 등도 다른 곳에서 보았다.
< 넓은 정원에 풀장도 있고 여행 중 묵은 숙소 중 가장 좋았다. 음식도 좋았고 >
< 건물 아래는 연못이라 고기를 키운다. 나와 안선생의 방은 2층 우측이고, 정선생과 윤선생은 좌측이다 >
오늘 오후 일정 중 문제는 시기리야 바위에 올라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젠데, 고소공포증이 있는 안선생은 출발 전 아예 올라가지 않는다고 해서 다리도 불편한 나도 굳이 오를 필요가 있을까 해서 숙소에서 빨래나 하기로 했다. 여행에서 욕심을 내거나 체력적으로 무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짐을 풀고 나와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기 전 차민다에게 일단 점심을 먹고 정선생과 윤선생은 시기리야 바위에 가고 나와 안선생은 다시 숙소로 온다고 했다. 그랬더니 한참을 못 알아듣더니 드디어 알겠다고 해서 출발했다.
얼마 가지 않아 근처에 허름한 곳에 차를 대더니 보트를 타고 마차를 타고 그 외 여기저기 구경하는 tour-program을 소개하더니 1인당 20$이라고 했다. 안선생과 나는 여기서 놀라는 것 같았다. 식당으로 가는 줄 알고 있던 우리는 아주 불쾌해졌다. 그래서 싫다 식당이나 가자고 했더니 "Hungry Lion restaurant"으로 우릴 안내했는데 우선 가이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여행을 망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음식도 별로고 가격도 비싼 편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 뷔페식이라고 해도 가짓수가 얼마 되지 않아 별로 먹을 것이 없었다. 식당 이름이 왜 헝거리 라이언 식당인지 알겠다. 먹을 게 별로 없어 사람들이 굶주려 화난 사자같이 되는 식당이라 뜻이겠지. 값은 물 값까지 4,675루피 나왔다 >
시기리야 바위 입구까지 배웅하고 이 부분의 기행문은 정선생이 맡기로 하고 우리는 빌라로 돌아와 남방이며, 양말, 티셔츠 등을 빨아 뒤 베란다에 빨랫줄을 걸고 열대의 오후 햇살에 젖은 빨래가 마르는 동안 소맥을 한잔하고 한숨 더 잤다.
< 와이파이가 제대로 되지 않아 가지고 간 공유기를 설치하려니 이건 또 무슨 일! 오른 쪽 전화선의 잭의 구멍이 우리 것보다 작아 들어가지 않는다. 동그란 스위치를 눌려야 전원이 들어오며, 가지고 간 멀티 소켓으로도 제일 아래 구멍 세 개 달린 놈은 해결되지 않았다 >
< 스리랑카 중앙에 위치한 시기리야는 밀림으로 뒤덮인 광활한 평원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산으로, 정상부의 해발 고도가 349미터이다. 넓은 평원에 느닷없이 솟은 바위산은 절해고도 같은 그 모습으로도 충분히 특이한데, 이곳이 한때 왕조의 수도였고 그때의 유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더욱더 신기해 호기심을 자아낸다. >
< 정성철 특파원이 시기리아 정상에서 보내온 글 >
시기리아는 저만치 있었다. 진회색 살결에 황톳빛 띠를 두른 바위 덩어리로 있었다. 하늘에 떠있는 성채 시기리아가 저만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장료는 30달러. 반나절 여행지치고는 매우 비쌌다.
성채를 들어가자면 먼저 성을 에워싼 두 겹의 해자(垓子)를 건너야 한다. 예전에는 해자 속에 악어를 길러 성곽 방어용으로 썼다고 한다. 코발트 빛 물 위에 고목의 녹음이 어우러져 한낮의 더위를 식혀 주었다. 성벽을 건너면 물의 정원(Water Gardens). 고대 싱할라 왕조의 공든 정원이 펼쳐진다. 진입로 역할을 하는 물의 정원은 데칼코마니처럼 좌우 균형을 맞춘 사각형 연못으로 우기에는 모든 연못에 물이 차게 되어 건기 때 사용할 물 저장고 역할을 했단다. 이 사각 연못을 지나면 황토가 날리는 진입로가 곧게 뻗어 수목으로 가려진 시기리아 바위의 아랫도리와 이어진다 물론 진입로 양쪽에는 ‘여름정원’이라는 원형의 연못도 만난다. 싱할라 왕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 불치(佛齒)에 정성을 쏟았고 통치를 위해 수리관개(水利灌漑)에 힘을 쏟았단다. 그 덕분에 스리랑카에는 저수지가 많아 일 년에 3모작의 복록을 누리고 있다. 연못의 유구(遺構)가 끝나는 지점부터 우람스런 바위가 열병식을 하듯 늘어섰다. 여기가 돌정원(Boulder Gardens)이다 바위 사이에 돌담을 쌓아 외적을 막으면서 진입로를 고부라지게 해서 방어시간을 벌려고 했던 듯하다. 1,500년의 시간이 흘렀건만 바위에는 터실터실한 돌옷이 보이지 않는다. 우거진 밀림과 습기에 익은 탓인지 돌과 벽돌에 얹혀사는 연두색 이끼의 자태가 고울 따름이다. 돌 정원을 지나면 테라스 정원(Terraced Gardens)을 만난다. 경사진 지형을 평평하게 만들려고 벽돌과 돌로 쌓은 축대 안쪽에 흙을 넣어 평지를 조성한 모양이 테라스 같다 하여 테라스정원으로 명명했다. 큰 바위가 많은 이곳에는 곳곳에 석굴이 많아 승려들의 수행처로 사용되었고 채색 벽화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 엄청난 인파가 줄에 줄을 이어 바위를 오르고 있다. >
돌계단은 가파르게 이어지는데 오늘은 크리스마스 휴일이어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좁은 돌계단을 두 줄로 오르는데 꼬마들은 날다람쥐같이 헤집고 다니는데 오르기를 포기한 노인네들이 떼지어 내려오는 통에 길은 혼란의 극치다. 사람의 궁둥짝을 빼닮은 쌍바위를 거쳐 계단 길을 몇 굽이 지나고 나니 엄청난 암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시기리아 사자봉이 눈앞에 다가선다. 천인단애(千仞斷崖)가 바로 이것이구나. 잔도(棧道)가 바로 저것이구나. 촉도지난(蜀道之難), 촉도의 험난함이여, 난어상청천(難於上靑天),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구나. 이백(李白)이 노래한 촉도난(蜀道難)의 그 길이 하늘 밑에서 가장 험난하다고 배웠는데 오늘 시기리아의 계단 길을 이백이 보았다면 자신의 시구를 시궁창에 처넣고 말겠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 설치한 철제 계단은 정상까지 모두 1,200개라고 한다. 녹 쓸고 가는 쇠 난간에 기대어 발을 떼자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난간 옆 벼랑에 원숭이 두 마리가 뛰어다니는데 무슨 심통이 났는지 쇠 난간을 내려치니 그 소리가 암벽에 부딪쳐 굉음을 내니 모두들 화들짝 놀라 가슴을 쓰다듬는다. 두 줄로 서서 계단을 내딛는데 만약 한 사람이라도 넘어진다면 천 길의 잔도는 인간 도미노 판이 되고 말 텐데․․․․․․ 대피 공간도, 안전장치도 없다. 오직 신에게 나를 맡겨야 한다. 그런데도 입장료는 30달러다. 헐 헐 헐. 진땀을 쏟고 애를 태우며 한참 가니 둥근 계단 벽이 나타난다. 이제는 수직의 꼬불꼬불한 나선형의 철계단을 돌아가야 하는데 앞 사람의 히프에 시선을 맞춰야지 조금만 아래로 돌리면 아스라한 절벽 끝이 바로 눈에 철썩 붙는다. 오금이 저린다. 어휴.
< 워낙 사진을 찍어 오지 않아 입장권의 사진을 오려 붙인다. >
철계단을 다 오르면 갑자기 내부 공간이 넓어지며 우측으로 움푹 들어간 바위벽에 보관(寶冠)을 쓴 미녀상이 나를 반긴다. 시기리아의 암벽화다. 진한 호박빛 살결, 얇은 천의(天衣)로 가린 풍만한 가슴, 큰 엉덩이에 잘록한 허리, 미묘한 미소로 다가오는 군상(群像)들, 하반신을 구름으로 가렸는데 저마다 손에 꽃을 든 모습이 여성상이 분명하다. 도대체 깎아지른 수직의 절벽 위에 어느 정신줄을 놓은 화공(畫工)이 이런 섹시한 여인들을 그려냈단 말인가?
이 사정을 밝히자면 시기리아 성채의 역사를 더듬어야 한다. AD 436년에 싱할라 왕조는 남인도 타밀족의 침략으로 수도 아누라다푸라가 함락되어 27년간 타밀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때 다투세나(Dhatusena)라는 영웅이 타밀을 몰아내고 왕이 된다. 왕은 배다른 두 형제를 두었는데 평민 신분의 아내에게서 장남 카샤파(Kasyapa)를, 귀족 신분의 아내에게서 차남 목갈라냐(Moggallana)를 얻었다. 장남은 호전적이고 성질이 급했으며, 차남은 논리적이고 차분한 성격을 가졌다. 세월이 흘러 왕위계승 문제가 대두될 때 왕은 차남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싱할라 전통은 장남이 왕위를 계승해야 했다. 이에 카샤파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으로 등극했다. 차남인 목갈라냐는 남인도로 탈출해서 목숨을 구했다. 왕이 된 카샤파는 죄책감과 공포감에 시달려 정신분열 증세까지 나타났다. 시기리아 바위 위에 궁전요새를 짓고 14년간 통치했지만 타밀의 도움을 받은 목갈라냐에게 패배해 자살하게 된다. 목갈라냐는 수도를 다시 아누라다푸라로 옮기고 성채는 승려들의 수행처로 돌려주었다. 이 당시 우리나라 정세는 고구려가 남진 정책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갈 때로 백제가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나라를 부지하기에 급급한 형편이었다.
시기리아 암벽화에 대해 '론리 플래닛'(lonely-planet)은 제작 시기는 카샤파 통치 기인 AD 5세기를 더 소급할 수는 없고, 여성상은 밀교(Tantric Buddhism)의 주요 보살인 타라(Tara)를 형상한 것이고, 양식은 인도의 아잔타(Ajanta) 벽화와 닮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통설은 카샤파왕이 수도를 이곳에 옮긴 후 고승의 충고로 부왕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춤추는 천녀(天女) 압사라(Apsara) 500명을 그렸다고 한다. 보관(寶冠)과 가슴, 허리 모습은 앙코르 와트의 조상(彫像)과 똑 같다. 안내인들은 왕비이거나 왕의 첩이라고 말한다. 섹시한 압사라인지 요염한 궁중 여인인지 지금은 18상만 남았다는데 나는 7상만 감상할 수 있었다.
시기리아 암벽화는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아시아 전역에 볼 수 있는 프레스코(fresco)화이다. 프레스코 화(畵)를 그리자면 먼저 돌의 표면에 미세한 입자로 점성(粘性)과 가소성(可塑性)이 있는 점토를 발라 밑바탕을 만든다. 그 위에 석회와 모래를 섞은 점토를 칠한 뒤 수분이 마르기 전에 대상을 그린다. 안료(顔料)가 습기를 따라 바탕으로 스미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도 그림은 원형을 유지하게 된다.
고구려 고분벽화와 시기리아 암벽화는 제작 방법과 시기도 비슷하고 그림의 구도도 매우 닮았다. 인물들의 몸은 검은 선이나 붉은 선으로 그어 대상과 경계를 짓고, 신분의 차이에 따라 인물의 크기를 달리 한다. 대상은 가까이 있는 것은 작게, 멀리 있는 것은 크게 그리는 역원근법(逆遠近法)을 쓰고, 가까이 있는 것은 아래쪽에, 멀리 있는 것은 위쪽에 그리는 원상근하(遠上近下)의 배치를 하고 있다. 석양의 햇살을 받으면 이 여인네들이 우루루 뛰어 나올 텐데 지금은 천막으로 전경을 가리어 시무룩하고 답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벽화를 뒤로 하고 계단을 내려오면 좁고 긴 3미터 높이의 거울 벽(Mirror Wall)이 나타난다. 벽화가 거울 벽에 비치게 만들었다는데 지금은 여러 군데 새겨진 벽 낙서가 싱할라 언어 문자의 전개상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가 되어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거울 벽이 끝나면 바로 넒은 광장이 나타나는데 여기가 라이언 플랫폼(Lions Platform)이다. 여행객들은 광장에 앉아 다급한 숨을 고르는데 광장 가운데 검둥개 한 마리가 늘어지게 자고 있다. 인도의 소처럼 스리랑카에는 개가 무척 많다. 한길이든, 사원이든, 카페든 절제된 몸집을 하고 한가롭게 돌아다닌다.
늙은 왕의 잘못된 선택, 시기 많은 형, 박해받는 아우, 세계 민담의 단골 화소(話素)를 골고루 보여주는 왕궁에 들어갈 차례다. 지금부터는 바짝 긴장해야 한다. 수직의 절벽에 걸쳐진 계단을 건너야 한다. 원래 시기리아라는 단어는 ‘사자의 언덕’ 혹은 ‘사자의 목구멍’이란 뜻을 가졌다고 한다. 바위 모양이 사자를 닮았는데 카샤파왕은 산중턱에 거대한 사자상을 지었다. 궁전에 들어오자면 반드시 사자의 아가리를 지나게 해서 ‘누구든 내 목구멍으로 들어온 자는 반드시 내 먹잇감이 되리라.’는 의미로 자신을 사자로 각인시켰다. 지금도 날카롭고도 매서운 발톱 한 쌍이 왕의 불편했던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암벽에 갈지자형으로 걸쳐진 철계단 옆에는 깊숙한 홈이 바위 위에 촘촘히 새겨져 있다. 카샤파왕이 가설한 나무계단의 흔적이다. 좁은 계단을 오르는 이와 내려오는 이가 몸을 틀어 용하게 피하는데 상하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오뉴월 무논에 개구리 울 듯 요란스럽다.
<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 사자 발톱. 윤선생은 곧 중국 사람으로 인식이 되는데 스타일이 중국 사람이라 오해할 만도 하다. >
계단의 끝이 바로 왕궁의 동쪽 진입로로 연결되는데 바로 사자의 아가리 자리이다. 사방 붉은 황토와 벽돌이 메마른 먼지만 날리고 있을 뿐 그날의 독기는 보이지 않는다. 발길을 재촉하여 정상에 올랐다. 적을 살피던 전망대 자리라고 한다. 정상에서 바라본 사면의 풍광은 갈맷빛 수목의 잔치. 나무들은 제가끔 까치발을 하고 시기리아 바위에 눈을 맞추는데 그늘도 없는 왕궁터에 바람은 시원하기 그지없다. 폐허가 된 왕궁은 벽돌 더미들이 구획을 지어 삶의 흔적을 더듬게 하고, 정성스레 가꾼 잔디는 그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여기에 연회장도 있고 정원도 있고 수영장도 있고 수백의 여인들도 살았단다. 코끼리를 이용하여 승강기를 만들고 물의 압력 차를 이용하여 대나무 파이프로 물을 정상까지 끌어 올렸단다. 물을 대주던 저수지가 암벽 아래 보인다. 왕궁에 올라온 물은 여러 저수지와 연못에 담아 썼기에 그 유구(遺構)가 왕의 돌의자와 함께 그대로 남아있다. 그릇된 욕망과 질투 때문에 불안과 광기로 나날을 보내야 했던 카샤파왕의 전설 현장을 보며 나도 일상에 배어 있는 욕망을 덜어내야 하지 않을까?
< 교양과 배려, 예절이라고는 전혀 없는 요즘 중국의 젊은이들, 이들은 무뢰하기 짝이 없다. >
버켓 리스트의 단골인 시기리아 성채, 세계 8대 불사가의에 등장한 바위 궁전. 이곳에 내가 두 발로 딛고 섰다는 뿌듯한 감흥에 젖어드는 순간,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린다. 젊은 남녀가 피 터지는 설전(舌戰)을 벌이고 있었다. 사금파리 조각으로 사기그릇을 긁는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검은 바지에 얇은 티셔츠를 입은, 피부가 하얀 이십 대 낭자(娘子)가 젊은 공자(公子)의 눈알을 뽑으려는지 오지창(五指槍)으로 찌르며 고함을 지른다. 청바지에 반소매 셔츠, 색안경을 낀 공자는 낭자의 얼굴을 요절내려고 두 해머를 휘두르며 핏대를 올린다. 사방에 모인 각국의 여행객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모여든다. 목소리는 갈수록 옥타브가 올라간다. 십여 분 흘렀을까? 낭자가 결심한 듯 한쪽 다리를 쇠난간에 걸쳐 넘으려 한다. 구경꾼들은 비명을 지르고 공자는 낭자의 팔을 무자비하게 잡아당긴다. 저 난간을 뛰어나가면 저 낭자는 시기리아의 낙화(落花)가 되어 새로운 전설이 되리라. 웬 서양 아낙네가 윤선생에게 싸움을 말리라는 시늉을 한다. 윤선생 외모가 중국 분위기인가? 헐!!! 엉거주춤 일어난 윤 선생 왈 “ I am a Korean.” 평소와 달리 오늘 따라 발음이 아주 유창하면서 단호하다. 시진핑 선생이 그렇게 당부해도 막무가내인 요우커의 몰염치한 민낯들. 이번 여행에도 또 만나게 되었다.
하산은 외국인 전용 코스를 택했다. 라이언 플랫폼의 남쪽 통로에서 좌측으로 곧장 내려오면 주차장에 와 닿는 지름길이다. 매우 한적해서 오가는 이가 없다. 다리품을 많이 팔아 코에 단내가 슬슬 나는데 갑자기 머리털이 오싹하다. 길가에 직립한 회갈색 바위는 거대한 킹코브라가 머리를 곧추 세우고 독을 뿜는 형상이다. 여기가 바로 코브라 동굴(Cobra Hood Cave). BC 2세기경 나구리(Naguli)족장이 승려에게 보시한 동굴이다. 예전엔 주변에 꽃과 동물 그림으로 치장한 수행장이었단다. 동굴을 지나니 바로 주차장이다. 착한 우리 기사 차민다가 우릴 반겨 맞았다.
< 이상은 시기리아 정상에서 정성철 특파원이 보낸 글이었습니다, 정성철 특파원 수고 많이 했습니다. >
저녁식사는 빌라 내의 식당에서 했는데 1인 당 1300루피를 받는 뷔페식이되, 음식의 종류도 다양하고 맛도 좋아서 만족스러웠다. 식사 후 나는 다시 자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소맥으로 입가심을 하고 취침했다. 이제 이곳에서 사흘을 머무니까 가방정리를 하지 않아도 된 것이 좋았다.
오늘도 하루가 저물었구나.
♠제 4 일 (2015.12.26.토) : 첫 번째 수도 아누라다푸라.
6시에 일어나 7시에 호텔 조식 후 8시에 tour를 시작하기로 했다. 오늘의 주요 일정은 10세기까지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로 이동해 근처의 유적을 볼 예정이다. 아누라다푸라는 ‘깨달음의 나무(tree of enlightenment)’인 스리마하 보리수 주변에 건설되었다. 이 보리수의 가지는 아소카(Asoka) 왕의 딸인 상가미타(Sanghamitta)가 기원전 3세기에 가져왔다고 하니 2,300년이 된 것이다. 그래서 몇 군데 사찰의 그림에도 배에서 보리수를 건네는 모습을 그린 것을 보았다.
< 26일 아침. 한쪽에서는 계란을 두 개 풀어 양파, 소금, 후추 등을 뿌려 계란 스크램블을 해 주는 사람이 있어 매 끼니 빠뜨리지 않고 챙겨 먹었다. 계란이야말로 여행자들의 변하지 않는 영원한 친구이다. 세계 어딜 가니 계란 맛은 같으니까 >
<인도에서 온 배에 있는 사람이 보리수나무를 주고 있다. >
스리랑카 중북부 아루비아루 강변에 있는 이 고대 도시는 스리랑카 싱할라족의 첫 수도이다. 기원전에 380년에 판두카바야 왕이 도시를 건설한 뒤로 계속해서 도시 기능을 정비하고 도시를 점차 확대시켜 나가는 한편, 제 3대 데바남피야 티사 왕이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뒤로 찬란한 불교문화를 일구었다. 스리랑카 역사에서 가장 융성한 황금시대를 이루었으며, 1,300년 동안 119명의 왕이 집권했다. 11세기에 남인도 촐라족의 잦은 침입으로 수도를 폴론나루와(Polonnaruwa)로 옮기면서, 아누라다푸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랜 세월 밀림에 묻혀 있던 이 고대 도시는 19세기에 한 영국인이 발견하면서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인터넷 참고)
아누라다푸라까지 약 2시간소요된다고 하니 아마 거리로 보면 60㎞ 정도라고 추측이 되었다. 가는 도중 차를 세워 30대 중반 쯤 되는 남자가 파는 1개에 50루피(430원 정도)짜리 킹 코코넛 두 개를 사서 빨대를 꽂아 마셨다. 마시고 나니 칼로 다시 코코넛을 반 잘라 주는데 그 안의 과육이 상당히 부드럽고 맛이 있었다. 우리가 신기한지 옆에 서서 빙긋빙긋 웃고 있는 그의 키 큰 아내의 품에 안겨 두려워하는 눈초리로 우릴 보는 어린 딸에게 20루피를 주었다.
< 이 작고 소박한 상점을 보라. 오직 코코넛 단일 품목만 판매하고 있다. >
< 키 크고 마른 아내와 눈이 크고 수줍음 많은 딸을 둔 이 상인은 돈을 벌면 가게를 확장하여 옥수수도 굽거나 쩌 팔 것이다. 20개도 안 되어 보이는 코코넛을 팔려고 기다리며 그는 무엇을 생각할까? 그러나 그 남자가 가난해 보이지는 않았다. >
1인 25$의 아누라다푸라 통합입장권을 사서 처음 들른 곳은 쌍둥이 못이었고 그 때부터 주변에 개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차민다에게 떠돌이 개냐고 물으니 주인이 있는 개라고 한다. 어떤 개는 건강 상태가 좋아 보였으나 심하게 비루먹은 개도 눈에 띄어 스리랑카 관광청에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종류가 거의 같은 고유종 같았다. 즉 믹스견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외래종이 아직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고 이는 아직 애완견을 키울 정도의 경제적, 문화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불교국가인지라 식용이 될 염려도 없어 참 순해 보였다. 사람에게 달라붙지도 않고 낮에는 시원한 곳을 찾아 자는 게 일상인 듯했다. 여행 내내 개끼리 서로 다투는 것을 한 번밖에 못 보았다.
< 비루먹어 거의 털이 다 빠졌고 걸음도 비틀거려 안타까웠다. >
< 한 자리에 여섯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자거나 긁거나 구경하고 있다. >
< 차에서 내리자 바로 불상(Samadhi 부처상)이 보였는데 차민다가 신을 벗어야 한다기에 멀리서 사진을 찍는 걸로 패스. 여기서 자세히 보면 불상의 왼쪽 팔과 가슴 사이의 공간이 막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상당히 예술성이 높은 불상이라고 하는데 그 때는 보였으되, 깨닫지 못 했다. >
< Abayagiriya(아바야기리야) 다고바. 계단 위의 돌기둥들은 부속 건물을 지탱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
< 원래의 모습. 지금의 다고바 위에 흙으로 덮여 있다. 이는 단순히 세월이 흘려 흙이 덮힌 것이 아니라 이를 ‘지제’(支提)라 하는 것이다. >
이러한 대탑은 dagoba(다고바)라고 하는데 사전적 의미는 “인도에서 지제(支提) 속에 안치하는 불탑의 하나. 형식은 보통의 불탑과 같으나 안에 불사리(佛舍利)를 넣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지제(支提)”란 “흙이나 돌이 쌓인 무더기라는 뜻으로, 부처의 복덕이 쌓여 있는 것을 이르는 말”이라 되어 있다. 지금의 다고바의 모습은 원래의 모습에서 지제를 걷어낸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을 보니 부처를 모신 석굴을 조성하고 이를 다시 지제(흙으로 덮었다)한 점에서 문득 석굴암도 다고바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닭들도 소들도 개도 사원 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
< 생긴 모양이 쟈스민과 닮아 냄새를 맡으니 별 냄새를 느낄 수 없었다. 여자애들이 이 꽃을 따서 종이 컵 하나에 20루피 정도 받고 있었다. 연꽃을 바치기도 하는데 저렴하고 흰색을 좋아하는 듯 이 꽃도 많이 봉양하였다. >
< 아바야기리야 다고바 앞에는 와불이 모셔져 있는 불당이 있었는데 크기가 매우 컸다. 앞에 있는 것은 연꽃인데 입구에서 팔고 있었다. >
< 바닥에 깔린 돌에 이런 문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보존해야 하지 않을까 >
< 그 외에도 바닥에 여러 가지 그림을 새긴 돌들을 깔아 두어 보존해야 할 문화재를 방치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
아바야기리야 다고바에서 차를 타고 3분 거리에 있는 Mahasena’s Palace로 왔다. 여기의 Moon stone 유적이 유명한 곳이다. 흔히 문스톤(月長石)이라면 보석이라고 알고 있는데 문스톤은 사원이나 대탑 입구에 놓여 있는 반원형의 장식돌로 이 앞에서는 모자와 신발을 벗어야 한다. 맨 가에 코끼리, 말, 사자, 소 등의 조각이 새겨져 있고 다음에 오리, 마지막으로 연꽃으로 생로병사에서 해탈까지, 인간이 부처에 이르기까지의 수행과정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 상당히 아름답다. 대탑이나 절의 입구에 조각되어 있어 출입할 때마다 항상 너 자신이 중앙에 있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생로병사의 인간임을 잊지 말라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다. >
< Moon stone을 지나 좌우에 조각상. 스리랑카는 사자를 엄청 좋아 한다. 사자상이 귀엽다. >
< Moon stone을 지나 정면. 본존불이 있던 자리인데 부처는 사라지고 기둥만 남았다. 지붕은 아마 목재로 한 듯 대부분의 유적지에 기둥만 남아 있다. >
아바야기리야 다고바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Ruvanvelisaya Dagoba(루완웰리세야) 대탑에 도착했다. 관광을 시작하기 전 요도 길이가 짧은 사람들이 많아 화장실에 갔더니 10루피씩 화장실 사용료를 받았다. 게다가 대탑 입구에 신발 보관소가 있어 20루피를 주고 신발을 맡겼는데 일반인들은 여기저기 신발을 벗어 두고 맨발로 들어갔다. 아마 나는 ‘내 신발은 비싼 거니까 이 사람들이 훔쳐갈지 모른다. 그러니 차라리 20루피를 주고 맡기는 것이 좋겠다.’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실상 이들은 휴일을 맞아 모처럼 마음을 내어 기도하기 위해 사원을 찾은 것이다. 그런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오는 사람들을 나는 내 기준에서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사원에 들어갈 때의 예절은 모자를 벗어야하고 바지의 길이가 무릎을 덮어야 하며, 맨발로 들어가야 한다. 또 하나는 부처상을 찍는 것은 괜찮으나 부처상을 배경으로 인물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리는 있는 것 같다. 부처를 찍는 것은 부처가 주(主)가 되지만, 후자의 경우 사람이 주(主)가 되니까 금지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 꼭대기에 금으로 장식을 한 루완웰리세야 대탑. 그러고 보니 사원마다 입구에 깃발이 있었는데 스리랑카 국기도 아니고 무엇인지 모르겠다. >
이 다고바는 원래 110m였는데 지금은 55m 높이로 남았다. 아마 이 다고바 위에 지제(支提)의 의미와 다고바 보호의 목적으로 목재로 된 지붕 형식의 건축물을 지었는데 그게 사라진 모습인 것 같다. 저 위에 보이는 기둥이 증거가 아닐까? 차민다가 일 년에 한 번씩 이 대탑에 흰 페인트칠을 한다고 한다. 10년 정도 벗겨지지 않고 닦으면 되는 페인트를 만들어 수출을 하면 좋겠다. 마침 공휴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경배를 하고 있고 이들은 사원에 올 때는 순결의 의미로 흰옷을 입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바로 앞에 붉은 옷을 입은 늙은이는 스리랑카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ㅋㅋ. 폴로나루와 박물관에 이러한 다고바의 구조를 설명한 것이 있었는데 마침 전통복장을 한 안내 아가씨의 미모에 눈이 팔려 사진을 찍지 못했다. 전통 복장을 설명할 아가씨도 못 찍고. ㅠㅠㅠ.
< 이 다고바 주변을 둘러싼 코끼리는 365마리라고 한다. 신앙이 무엇인지. >
비가 오려고 하더니 박물관에 도착하니 날씨가 화창하게 갠다. 박물관 입구에 아가씨가 나와 우릴 안내하는데 참 예쁘다. 한국에서는 하루에 예쁜 여자 한 명 보기가 힘든데 오늘은 주차장과 여기서 벌써 훨씬하게 늘씬하게 키 크고 아름다운 여성 두 명을 보았다. 싱할라족 여자들은 키가 175㎝ 정도에 얼굴이 얼마나 작은지 거의 9등신에다가 원래 서양에서 온 혈통인지라 코가 높고, 눈은 깊고 크며, 속눈썹도 저절로 위로 말리면서 길다. 입술의 윤곽이 뚜렷하고 입이 그리 크지 않아 입은 전체적으로 도톰해 보인다. 머리는 자연스레 길러 보통 허리까지 길렀으되 위만 한번 묶어 굽실굽실한 웨이브가 살아 있다. 이들 신체상 특징이 팔다리가 아주 가늘어 연약한 느낌을 주며, 다리가 상체에 비해 길고 엉덩이가 발달해 상대적으로 허리가 가늘어 보인다는 점이다. 피부가 흑갈색인 것을 빼면 바로 우리나라로 데려와 모델로 세워도 될 정도이다. 한국의 나름 날씬하다는 175㎝ 여자애와 비교한다면 몸무게에서 7㎏ 이상 차이가 날 것 같다. 그 이유는 태생적으로 이들의 뼈가 새처럼 가늘기 때문이다.
< 공원에서 만난 청년의 얇은 다리. 여자는 더 얇다. 버스에서 만난 아가씨의 긴, 자연산 속눈썹. 나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
차를 타고 스리마하 보리수를 보기 위해 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차민다는 차에 준비된 우산을 우리에게 주었다. 고맙기는 했지만 어제 차민다가 우리를 등치려 했다는 생각에 여전히 경계심을 풀 수 없었다. 다시 신을 벗고 보리수나무에 갔더니 예상과 달리 큰 보리수나무가 아니라 큰 보리수나무 곁에 있는 연약한 가지가 2,300년이 된 보리수라는 것이었다. 철저히 세속화된 나는 그 말에 오히려 믿음이 갔다. 이 나무는 기원전 3세기에 인도 아소카 왕의 딸 상가미타 공주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의 보리수 가지를 꺾어 스리랑카에 준 것을 심어서 자란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뒷날 보드가야의 보리수가 이슬람교도에 의해 불타 버렸을 때 이 스리마하 보리수 가지를 꺾어다 다시 심었다는 사실이다. 즉, 이 나무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나무의 자식이고 지금 인도에 있는 나무는 이 나무의 자식이니 원래 보리수나무의 손자가 할아버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하겠다.
사원 주변에는 작은 보리수나무를 심어두고 주변에 펜스를 쳐서 보호하는 것이 있었는데 아마 2,300년 된 보리수의 자식인 듯 했다. 세속적인 나는 문득 “보드가야의 보리수 가지를 꺾어 스리랑카에 준 것을 심어서 자란 것”이란 생각에 보리수는 꺾꽂이가 잘 되는 나무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다면 이 작은 보리수 가지를 꺾어가 대량 번식을 시켜 팔면 좋겠다, 내지는 보리수나무를 번식시켜 그 열매를 따서 한 알에 십만 원 정도의 비싼 값에 한국의 불교신자들에게 팔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드가야의 보리수와 스리마하 보리수와 내가 파는 보리수의 DNA가 같다는 보증서를 첨부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2,300년 된 보리수 주변에 여러 보리수나무들이 있었는데 이처럼 사람들이 자기의 소망을 적은 헝겊을 달고 기도하고 있다 >
예수가 죽임을 당한 십자가가 크리스트교의 상징물이 되듯이 보리수나무도 부처와 인연을 맺음으로써 종교적 상징화가 되었다고 하겠다. 흔히 코브라는 부정적 인식의 동물이되, 부처가 비 맞는 것을 가려 주었다는 설화와 접목됨으로써 종교적으로 긍정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는 점 역시 십자가는 범죄자를 처형하는 형틀이란 부정적 가치에서 긍정적 가치로 전환하듯 누구와 만나느냐 하는 인연이 참 중요한 것 같다.
< 금빛 장대로 받치고 있는 것이 원 보리수나무이다. 옆의 보리수나무와 비교한다면 곁가지도 안될 만큼 예상 밖에 너무 연약하다. 나는 이 보리수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찍음으로써 내 얼굴을 나무에 걸어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빌기로 했다. 발상의 전환 >
신을 찾아 신고 나오니 수도가 눈에 띈다. 발을 씻기 위해 가려니 차민다가 그 곳은 발을 씻는 곳이 아니라 손과 꽃을 씻는 곳이라고 한다. 참나, 오른손과 왼손의 역할이 다른 줄은 알았지만 수돗가도 그 역할이 다르다니. 어쨌든 좀 더 오니 또 다른 수돗가가 있었다. 아까 전의 것과 비교하니 아까의 것은 아래에 시멘트로 만든 대가 있어 조금 위에 있었고 이번 것은 바로 바닥에 물이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처녀애들이 씻고 있어 먼저 씻으라고 했더니 뭐가 웃기는지 거저 힐끔거리며 웃고 있었다. 참 잘 웃는 민족이다.
아누라다푸라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제 ‘헝그리 라이언 레스토랑’의 안 좋은 기억이 있어 현지인들의 식당으로 가자고 차민다에게 부탁했더니 길가의 이층으로 된 ‘패밀리 베이커 식당’에 안내한다. 스리랑카 치킨커리를 주문하니 200루피였는데 역시 맵고 짜다. 그리고 맥주가 있느냐고 했더니 EGB(elephant ginger beer)가 있다고 한다. 맥주병에 담긴 생강 맛 나는 음료였는데 알코올 성분은 없는, 모양만 맥주였다.
담불라 시내에서 사롱을 1장에 400루피를 주고 색깔과 모양이 비슷한 걸로 단체 구입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롱 입는 방법을 배웠는데 어려워서 나는 내가 편한대로 입기로 했다. 문제는 팬티는 입는지 안 입는지 몰라 실수를 대비해 일단 입기로 했다. 그리고 와인스토어가 있어 맥주 20캔, 빨래를 위한 세숫비누, 안주 등을 구입하고 숙소인 “Fresco water villa”에 도착하니 4시 반 경이다.
< 다음날 바로 사롱을 착용 후 관광에 나섰는데 비가 와서 옷이 자꾸 걸친다. 게다가 소변을 보려고 하면 사롱을 다 들어 올리든지 아니면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봐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구입 후 세탁하지 않고 바로 입었는데 피부 발진이 생겼다. 빨았더니 염료가 엄청 빠졌다. 다른 빨래와 구별해 세탁해야 한다 >
빌라에서의 저녁식사 시간은 7시 30분이었는데 이는 관념적 시간이고, 나의 신체적 시간은 밤 11시였기에 이러한 둘 사이의 부조화가 빚는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 저녁식사 시간은 최소한 6시로 당겨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봐야 우리 시간으로는 밤 9시 30분이다. 한국에서의 저녁식사는 6시 30분경이니 지금과 3시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식사 후 방에 모여 한잔하면서 오늘 다녀온 일정을 살펴보니 원래 계획되었던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 이스루무니아 사원은 가지 못했다. 미힌탈레에 있는 마하세야 대탑과 암바스탈라 대탑 유적지는 언덕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이 네 지역으로 나뉘어 있고, 각 계단은 1,840계단이나 된다고 해서 7,360계단을 오르는 것 자체가 무리라서 포기했지만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 이스루무니아 사원은 차민다가 고의로 빠뜨렸는지, 의사 전달 상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잘 챙겨 다니기로 하고 10시경에 취침했다. 실제의 유적 탐방의 하루가 지났다. < 1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