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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치기로 삼척, 속초를 거쳐… 결국 춘천에서 스러지고 맙니다. 마지막 취재를 마치고보니 이미 한밤중, 몸은 천근만근 무겁지만 쉬이 잠들지 못합니다. 젊은 날 이곳에서의 낭만과 추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서울에서 청춘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춘선에 얽힌 기억 하나쯤은 가슴에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강을 끼고 이어지는 경춘선 인근에는 젊음을 만끽할 수 있는 필요충분적 요소를 갖춘 명소가 정말 많았습니다. 주말이면 먹거리를 잔뜩 담은 배낭과 기타를 든 청춘들로 열차는 그야말로 콩나물시루였습니다. 지금도 그러하고요. 경춘선은 청량리에서 출발하여 덕소, 청평, 가평, 대성리를 거쳐 종착역인 춘천까지 운행되고 있으며, 역마다에는 북한강을 배경으로 한 풍치 좋은 젊음의 성지, 민박집들이 즐비합니다. 그런 즉 추억의 도시-춘천, 낭만의 철도-경춘선이라는 등식은 70년대 청춘들은 물론 지금의 청춘 그리고 미래의 청춘들에게 쭉∼ 그리고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나에게도 경춘선에 대한 추억이 많습니다. 청평, 가평, 대성리도 그러하지만, 특히 춘천에 얽힌 사연이 많은데 성심여대생을 여친으로 둔 죄로 경춘선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지금은 부천에 있는 가톨릭대학교의 전신인 성심여자대학이 춘천에 있었으며, 입대 전까지 열열이 사랑했던 여자아이가 그 학교에 다녔기 때문입니다. 한적한 도시 그리고 전원 기숙사 생활하는 은둔의 여학교라는 프리미엄으로 한때 이 학교 여학생들이 오히려 이대생들보다 인기가 많았습니다.
각설하고, 자욱이 밤안개가 내려앉아 있던 춘천호가 특히 기억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이디오피아 다방에서 커피 잔을 마주한 채 그녀에게 입대 사실을 통보하고 만남을 끝내기로 했습니다. 사람 사랑하는 일보다 큰 어려움이 있던가요? 고립된 공간에서 사람 그리워한다는 게 너무 허망하고 외로울 것 같다면서 갖은 폼을 다 잡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오글거린다는….
그녀와 헤어진 후, 심란한 마음 달래려 마시면 애꾸가 된다는 소문이 자자하던 유사 럼주 ‘캡틴큐’ 한 병 사들고 서울행 마지막 열차에 올랐을 때의 치기. 그러나 추억은 영원히 아름다운 법. 손주 여럿 거느리고 있을 현재 그녀의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전역 후 종로2가 뒷골목 ‘반쥴’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쪽 팔림’을 무릅쓰고 다시 시작해보자며 지분거렸더니 남자가 생긴 지 오래이니 꿈도 꾸지 말라고 했습니다. 문득 선배 말이 떠올랐습니다.
놓친 버스와 여자는 따라가지 마라. 뒤에 또 온다.
명언! 이후로는 이 말을 잠언처럼 여기어 단 한번도 여자에게 질척거리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경춘선과 춘천하면 바로 두 노래가 연상됩니다. 정태춘의 <북한강에서>과 함께 ‘조금은 지쳐 있었나봐’로 시작되는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 이 노래들은 아마 90년대에 청춘을 보냈던 이들에게 추억의 노래로 추억의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노래의 백미는 단연 보사노바 리듬입니다. 보사노바라는 장르는 우리나라 대중가요사에서 역사가 그리 길지 않습니다. 1980년대 말쯤에야 최성수의 <후인>을 시작으로 우리 가요계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합니다. 경쾌한 사운드가 특징인 조덕배의 <그대 내 마음에 들어오면>,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감동을 주는 박학기의 <향기로운 추억>, 귓가를 잔잔하게 속삭이는 듯한 장필순의 〈어느새〉, 이소라의 〈청혼〉 등이 다 당시에 시도되었던 보사노바 풍의 노래들입니다. 가장 최근에 이수영이 <꿈에>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같은 옛곡들을 보사노바 버전으로 커버하기도 했습니다.
보사노바는 참 아름답고 세련된 리듬의 음악입니다. 경쾌하면서도 가볍지 않습니다. 블루스나 알앤비처럼 끈적거리지 않아 쉽게 질리지도 않습니다. 보사노바와 쿨재즈가 서로 경계를 넘나드는 것도 이 리듬의 오묘한 특성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리듬은 격정적인 삼바 리듬에서 나왔습니다. 템포만 다를 뿐 박자는 거의 그대로입니다.
삼바는 흑인들의 한恨에서 시작된 음악입니다. 포르투갈 식민지배 시절, 사탕수수농장의 인력수급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흑인 노예들. 고된 노동에 지친 서러움과 사무치는 고향땅의 그리움을 어찌 달랬겠습니까? 그저 고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밥그릇이나 양동이를 두드리면서 장단을 맞추고 춤과 노래로 풀어냈겠지요. 그것이 브라질의 대표 무곡 삼바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삼바는 정체되지 않고 진화합니다. 1950년대 말, 서양음악을 공부한 작곡가 안또니우 까를로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영어식 발음-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과 루이스 본파Luis Bonfa가 영화 〈흑인 오르페〉에서 처음으로 보사노바라는 새로운 음악을 선보입니다. 삼바에 쿨 재즈를 결합한 느린 템포와 감성적인 멜로디의 음악. 포르투갈어로 Bossa는 ‘경향’ Nova는 ‘새롭다’는 뜻이니 ‘신경향’ ‘새 물결’의 의미를 지니는데, 보사노바는 태동하자마자 가사가 없는 삼바가 가지지 못한 낭만성을 바탕으로 브라질 대표음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어 부부 가수 조앙 질베르뚜Joao Gilberto와 아스뜨루드 질베르뚜Astrud Gilberto와 쿨재즈의 대가이자 테너 색소포니스트인 스탄 게츠Stan Getz에 의해 미국에 소개되면서 보사노바는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됩니다. 특히 아스뜨루드 질베르뚜가 부른 <이빠네마의 소녀 A garota de Ipanema(A girl from Ipanema)>는 금세기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노래 중 20위 안에 들 정도의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이 곡은 보사노바의 창시자 조빙이 고향 이빠네마의 해변에서 음악작업을 하던 중 해변을 거닐던 소녀에게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입니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나 하면, 비틀즈 전성시대였던 당시에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안또니우 까를로스 조빙은 브라질을 대표하는 예술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의 케네디공항, 프랑스의 드골공항 등 외국의 국제공항들은 그 도시를 대표하는 인물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브라질 대표도시 리우데자네이루 국제공항의 공식명칭은 ‘똥 조빔(영어식-톰 조빔) 공항’입니다. ‘똥 조빙’은 안또니우 까를로스 조빙의 애칭입니다. 브라질인들은 당당하게 고향 이빠네마 해변을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었으며, 리우를 사랑했고 리우가 사랑한 한 음악가 조빙을 도시 간판으로 내세웠습니다.
보사노바와 삼바는 음악 태동의 배경과 느낌이 상이하지만, 결코 대척점에 서 있지 않습니다. 보사노바가 재즈와 삼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공통분모 때문이라기 보다는 워낙 브라질 사람들이 두 장르의 음악을 나라의 대표음악으로 인정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삼바와 보사노바는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 브라질이라는 나라와 가장 잘 부합하는 음악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사는 테제와 안티테제로 맞서거나 융합하면서 화합을 이루어나갑니다. 새가 한 날개로 날 수 없듯이 열정과 여유, 긴장과 이완, 일상과 일탈…. 어느 한쪽으로만 쏠리게 되면 사람이든 사회든 결코 건강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안토니오 송Antonio’s song>이란 보사노바 풍의 멋진 노래가 있습니다. 미국인 가수 마이클 프랭스Michael Franks의 노래입니다. 가사는 보사노바의 창시자 안또니우 까를로스 조빙을 헌정하는 내용으로,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감성적인 멜로디의 부드러운 재즈 선율로 리우국제공항에 이어 까를로스 조빙이 다시 국제적 명성을 드높이게 되는 계기를 만든 곡이기도 합니다.
마이클 프랭스에 대해 잠시 소개한 다음 글을 마치려합니다. 본디 음악적 재능이 특출했지만, 부모님의 권유에 의해 어쩔 수 없이 UCLA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정의 끈을 놓을 수 없어 부전공으로 음악을 부전공으로 택합니다. 그후 오리건 대학교(종손님께서 공부하셨던 오리건주립대학교와는 다른 학교임)에서 현대 문화로 석사 과정까지 마친 후, 다시 UCLA로 돌아와서 음악 이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어쩌면 그의 부모님의 인문학 권유는 신의 한 수였을 수도 있습니다. 클래식 작곡자 비발디를 헌정한 그의 또다른 히트곡 <비발디 송> 등 그가 쓰고 노래한 많은 곡들의 가사가 자체로 시입니다. 대학에서 전공한 인문학적 소양이 결국 대중예술에서 큰 힘을 발휘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모습은 대중가요 가수라기보다 대학교수 타입인데, 버클리 대학에서 오랜동안 대중음악 이론을 강의한 적도 있습니다. 영화 <잔디의 신부 Zandy's Bride> 사운드 트랙 작업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지만, 역시 대중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안토니오 송Antonio’s song> 발표 이후부터입니다.
오늘은 두 곡을 올립니다. 미국의 떠오르는 싱어송라이터 앨리스 트루우가 커버한 <A girl from Ipanema>, 마이클 프랭스의 <안토니오 송Antonio’s song>입니다. 함께 소개했던 <춘천 가는 기차> 등 국내 곡들 모두 명곡들이니 짬내시어 유튜브에서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올려주신 음악 즐겁게 감상 잘하고 가옵니다.
좋은 음악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