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南의 5·18을 木浦와 光州인근을 중심으로 한 항쟁으로 나눠 보았다. 이제 光州인근지역을 제외한 서남권으로 눈을 돌려보자. 서남권 항쟁중에 서도 海南의 항쟁은 눈여겨 볼만하다. 海南항쟁은 공수부대가 아닌 향토사단과 시위대가 충돌, 대량의 인명피해가 난 지역이기 때문이다. 당시 全南 농민운동의 근거지였던 海南은 朴正熙 정권과 유신에 반대하는 수많은 청년운동가와 민주인사를 배출하는등 전통적으로 야세가 강한 지역 이었다.
21일 당시 海南의 농민운동 인사들은 光州 北동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농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光州에 와 있었다. 이때 이들의 공백을 메운 그룹이 청년회의소 회원들. 읍내 JC회원들의 주도로 海南의 자체시위가 시 작됐다.
金덕수씨(당시 JC 회장)를 중심으로 30여명의 JC회원들은 21일 회의를 갖 고 민주인사석방과 민주회복·독재자 추방·계엄해제등 5개항의 요구를 내 걸고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오후 3~4시께 3천여명의 읍민들은 海南교육청 앞에서 성토대회를 갖고 시 가행진에 들어갔다. 이때 光州에서 6대의 차량에 분승한 시위대가 도착, 全南도청앞 집단발포소식을 전하자 열기는 더욱 고조됐다. 일부 청년들은 시위대와 합세, 光州로 향하고 일부 청년들은 20~30대의 차량을 동원, 인근면과 莞島·珍島 등지로 떠났다.
이들은 海南읍~삼산~화산~현산~북평~송지면 등을 경유해 밤 10시 莞島읍까지 진출, 야간시위를 벌였다. 22일 시위대는 새벽부터 海南읍 인근을 돌며 시위를 벌이는 한편 오전에는 康津읍·木浦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이들은 시위도중 계곡지서·옥천지서·월송지서등 6개 지서에서 다량의 무 기를 획득하고 오후 5시30분께는 海南경찰서 무기고를 습격, M1과 카빈 4 백정을 탈취했다.
시위대는 당시 海南의 향토방위 부대인 31사단 93연대 2대대로 몰려가 실 탄을 요구하다 결국 23일 우슬재에서 이 부대의 총격을 받게 된다. 검찰의 「5·18관련 사건 수사결과」문건은 「우슬재 사건」을 다음과 같 이 기록하고 있다.
『海南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는 5월 21일부터 22일 사이 에 수차에 걸쳐 무장시위대가 부대에 접근, 무기와 탄약을 요구하였으나 대대장이 거부하고 이에 시위대가 야간에 부대를 습격하겠다고 돌아가자 2 대대장은 부근 우슬재에 병력을 매복시키고 시위대의 습격을 대비하던중 23일 오전 5시30분과 10시께 두차례에 걸쳐 시위대와 계엄군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그 과정에서 박영철(27) 김귀환(나이불상)이 총상으로 사망하였음』
검찰의 이같은 발표는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과 사뭇 다르다. 金성윤씨(55·黃山면 복지계장)는 사망자 수가 2명이 아닌 최소 4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사회과 보건계원으로 근무하던중 23일 오전 6시께 군부대로부터 사 체를 수습하라는 연락을 받고 이날 새벽 총격전이 벌어졌던 우슬재와 상등 리 고갯길에 가 보니 우슬재 정상 도로가에 사체 3구, 상등리에 1구가 각 각 총상을 입은채 숨져 있었다. 이들을 군부대에서 지급해준 군복으로 갈 아입힌 뒤 연고자가 나타날 것에 대비해 군용천막을 치고 그 천막안에 사 체를 안장해 두었다. 사태후 군부대에 가보니 현재의 수송부 자리에 4기의 묘가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또 당시 부대 기습 목적도 없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海南 청년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들이 21일과 22일 군부대 앞에서 무기를 달라고 시위를 하긴했으나 22일 밤 군부대에 대부분의 무기와 실탄을 반납 한 상태였고 시위대로부터 무기탈취 위협을 느껴 이를 방어하려 했다면 군 부대 근방에 초소를 설치해야 마땅한데 읍에서 군부대로 가는 도로와 전혀 관계없는 우슬재와 상등리에 초소를 설치해 놓고 시위대가 군부대를 습격하 러 오기 때문에 발포했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海南 시위 참가자들은 당시 대대장 張윤태씨(중령·前光州시 北구의회 의원)를 95년 5·18학살자로 고발해 놓은 상태이고 海南신문 편 집국장 朴상일씨(40) 등을 중심으로 이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작업을 벌 고 있다.
海南과 지근거리인 康津에서도 항쟁의 불길은 타올랐다. 21일 오후 1시께 康津에도 光州시위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18일 끝난 도 민체육대회에 참가했던 체육회 인사들은 光州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았 기 때문에 光州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康津군민들은 체육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시위대에게 밥과 음료수를 제공 하고 숙소를 마련해 주는 한편 시위대를 따라 인근지역을 돌며 시위를 벌 였다. 당시 康津읍 교회 목사는 민주화투쟁으로 지명도가 높았던 尹기석 목사. 교회는 항쟁기간 이지역 항쟁의 본부역할을 하게 된다.
康津에서는 특기할만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무기들을 이미 군부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康津은 長興·寶城에 항쟁의 열기를 전파하고 동참을 유도해 내는 역할을 해낸다.
寶城에서도 21일 오후 2시 무장한 시위대 40여명이 트럭을 타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筏橋를 거쳐 이날 오후 10시께 莞島까지 진출, 지서를 습격했다.
21일 全南 동부권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에 전파됐던 시위 상황은 전교사 작전일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한편 계엄군은 光州 주요 외곽도로를 봉쇄한데 이어 2차로 각 지방도로를 차단, 무장시위대의 光州진출을 막는데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光州진입에 실패한 시위대는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통일성 없이 각지방 에서 각개약진 식으로 이루어진 항쟁은 光州상황이 소강상태에 빠지가 곧 지리멸렬해지고 말았다.
계엄군의 이같은 작전으로 全南 각지에서의 동시다발적인 항쟁은 불발로 끝나 버리고 光州는 더욱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지게 된다.
첫댓글 광주시민의 민주화 항거에 숙연해지네요.
우리 모두 감사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