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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다가오기 시작할 무렵 초동친구 입에서 설악산 이야기가 단초를 제공하였습니다. 아직 막연한 이야기라 생각하지만
산 길을 걷다 보면 멀쩡하게 서 있던 산 벚나무가 허리가 끊겨 너부러져 있는 것을 보고 은연중에 자신의 나이테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속 빈 강정처럼 육신의 안과 밖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아니라 강변하여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직은 이르다 하면서도 조금 전까지 생생하게 가지에 달려 있던 아름다운 능수화가 한 눈 판 사이에 뚝하고 덜어진 것을 보며 생명의 끝은 한순간에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그냥 우물쭈물하고 있다간 자각이나 인식을 할 사이도 없이 허물어져 자취도 없이 사라져 갈 것이라는 생각이 참 마음을 무겁게 하면서 마냥 자신의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에 침울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이 느려지니 행동도 굼뜨게 되고 혈기마저 잔불에 피어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연기의 모락같은 신세라는 생각이 점점 처연해질 무렵 초동친구면서 평생을 함께 걸어온 악동(岳童) 입에서 동병상련 말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겉으로 표현만 하지 않았지 동패들이 이외로 많았습니다. 이야기가 파급을 타자 동행할 악우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를 확인한 후 단박에 일정과 준비물, 예산과 관련된 자료를 집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회람하여 함께할 사람을 선정하고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등반일 전날 설악동에 도착하여 일박을 한 후 이른 새벽에 출발하였습니다.
정적이 감도는 설악 소공원 새벽 전경, 동안 드나들던 옛 추억이 안개빛처럼 다가왔습니다. 하루 종일 걸려 도착했던 설악산, 당시 수학여행으로 찾아왔던 학생들이 많아 숲 사이로 에델바이스 압화와 지팡이, 안마기 등을 팔던 노점과 산나물 팔던 현지인들, 그리고 식당들이 옹기종기 비선대까지 모여 있었습니다. 산으로 오를수록 전쟁의 잔재물들이 심심하지 않게 발견되던 시절도 있었으며 중청에는 질 좋은 약수와 함께 산마늘 등 산채가 줄 비하였으며 그곳에 베이스켐프를 만들어 놓고 극지 등반법을 이용하여 서북주능, 오색, 용대리, 저항령, 황철봉 등을 이용하여 종주 등반을 완성한 후 설악동을 거쳐 낙산해변에서 등반 마무리를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고희(古稀)를 넘겨 고산등반은 어렵다는 생각에 치우치다가 더 지체하다간 생애에 다시는 설악, 지리, 한라, 오대 등을 오를 수 없다는 자괴감에서 도전을 해 보는 것입니다.
등반을 하기 전 설악의 파노라마를 응시하며 화채능선 권역, 천불동 권역, 공룡 능과 저항령 권역을 나누어 보고 서 있었습니다. 오늘 내가 걸어야 할 공룡 능 방향을 응시하며 등짐을 추슬렀습니다. 등반 전 항상 대원들의 손을 모아 합친 후 힘차게 소리치던 Dash~~ 라는 구호를 마음속으로 삭이며 첫걸음 딛었습니다. 그리고 부르던 산노래를 떠올리며 챙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북양 양을 지나칠 때 폭우성 비를 보면서 걱정을 많이 하였는데, 지금은 소강상태지만 전반적인 설악권역의 기상 조건을 관찰해 보았을 때 종일 비가 온다는 확신을 갖고 철저하게 운행 계획과 우장 구를 챙겨 두었으며 만약을 대비하여 비상식과 행동식도 넉넉하게 준비해 두었고 시간을 단축, 절약하기 위하여 아침과 점심도 도시락으로 대체하여 각자 지니고 출발하였으며, 생존장비로 원형의 두거운 비닐 주머니고 각자 3m 식 준비를 시켰습니다. 폭우로 고립되었을 때 비를 피할 목적입니다. 몸이나 복장이 젖으면 저체온증으로 빠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젖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체온이 가장 많이 빨리 빼앗기는 산체 부위는 머리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체온 유지에 모자는 필수입니다.
가을장마는 일조량을 부족하게 만들어 단풍 드는 것을 방해합니다. 멋진 단풍에 대하여 당초에 포기하고 우중산행에 백미인 운해를 친구 삼기로 작정하며 걸으며 힘찬 물소리와 더불어 운해와 깨스가 연출하는 서정적 설악의 아름다움에 침잠되어 가도록 전신을 설악에 맡겼습니다. 노루목에서 와선대 비선대까지의 풍경은 정말 아름답던 곳입니다. 세월이 무심하게 흐른 까닭일까요? 오래된 나무들이 기후의 변화의 영향 때문이지 오래전에 보았던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수종(樹種) 변경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 같은데...
노도처럼 밀려드는 계곡물은 우레와 같은 굉음을 내며 동해바다로 내달리고 있었습니다. 설악 안부로 접근할수록 눅눅한 습기와 함께 깨스가 천지사방을 막아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보수공사로 인하여 각종 공사자재가 쌓여 있어 설악 고유의 풍경을 감상에 방해를 하였지만 더 좋은 탐방로 변화되어 찾는 이들이 효율적인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이내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고산지대까지 와 공사에 임하시는 관계자들에게 경외심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설악골을 지나 계곡을 가로질러 놓은 다리를 건너 천불동 계곡의 수호신 같은 귀면암으로 오르는 데크에 올라섰습니다. 귀신을 닮아 이름이 지어진 귀면암, 옛적엔 비탈길을 기슬링을 매고 오르려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계단으로 바뀌었지만 나름대로 고도감이 있어 힘든 곳입니다. 정상부에 오르자 전망대 역할을 하도록 길게 빼낸 곳 부근에 공사자재들 쌓여 있어 답답함을 느껴야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아침 도시락을 먹기로 일정을 잡아 둔 곳입니다.
이곳에서 떡갈비 중심으로 만들어진 아침 도시락을 대원들과 함께 챙겼습니다. 식사를 거의 끝나갈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옷을 살짝 적시는 안개 비가 아니라 가을비였습니다. 다시 오버 트러스 쟈켓을 챙겨 입은 후 목 주변 지퍼를 끌어올리고 소매를 조여 주었습니다. 아주 천천히 귀면암 전망대에서 내려와 천불동 계곡을 우측에 두고 거슬러 올랐습니다.
설악은 암봉이 많은 산입니다. 천불동 계곡 양 쪽으로 천 개의 불상이 있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처럼 멋진 암봉이 일렬횡대로 놓여 있는 곳입니다. 비만 오면 암릉과 암릉 사이 파인 협곡만 있다면 폭포를 이루며 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을 이룹니다. 경사지를 오르면서 만난 급조된 폭포입니다. 서서히 단풍이 든 모습을 보면서 다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또다시 고도를 높여야 왼쪽 계곡 사이로 만나게 되는 오련 폭포입니다. 비는 계속 내리고 고도를 높여 갈수록 짙은 깨스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고도와의 싸움은 고통이 수반됩니다. 이 싸움은 정상으로 다가 갈수록 지속적으로 변합니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바로 산악등반의 본질입니다. 이 조건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행위이지요. 이를 수행하는 지혜는 단 하나 극복 심입니다. 강요된 극복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극복이면서 삶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정신, 육체적 수행이라 느껴집니다. 걸으면 걸을수록 다리에 힘을 만드는 건각이 생기듯 고행의 극복은 마음 깊은 속에 고요한 심줄을 만들게 됩니다. 그럼 극복 후에 얻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완성에서 얻어지는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생각이 제 자신의 산악관입니다.
왼쪽으로 틀어서 자 이 계곡 안부로 곧장 치고 오르면 신선대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곳입니다. 지름길이지만 상당히 급경사지라 열정과 인내심을 준비하지 않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길입니다.
아름다운 오련폭포, 1972년 설악을 찾아 오련 폭 위쪽으로 치고 화채 능 방향으로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선등자가 돌을 건드려 돌발적으로 낙석이 생겨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 이를 피하기 위하여 등을 돌려 사면으로 달라붙는 순간, 굴러 떨어진 돌이 아킬레스근을 쳐 끊어지는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산 길에 엄청 고생한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들것에 담아 옮겨 주었던 대원들의 모습이 마음 깊은 곳에 고스란히 담겨 있답니다.
추억의 삼매경에 빠지는 순간 엄청난 깨스가 밀려와 오련폭포 전경을 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중 산행에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몸을 적시지 말아야 하고 기상변화가 심해진다는 것을 간파하고 특히 깨스가 지독하게 끼면 자신이 움직이는 동선을 파악하기 위하여 표식 리본을 50m에 하나씩 걸어 두어야 비상시 탈출로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오련폭포의 물 흐름을 잠시 보면서 회상의 시간으로 조망하다 다시 길을 열었습니다. 어서어서 걸어 천당폭포 지나 음폭을 본 후 무너미 고개를 잡은 후 신선대에 올라 안갯속에서 신선의 유희를 경험하고 공룡의 등줄기를 밟고 말안장처럼 생긴 마등령에서 하산 길로 접어들어야 하기에 장딴지에 힘을 모아 육신을 한 단개 더 끌어올렸습니다. 활엽수 사이로 멋진 계곡과 물이 보였습니다.
산에는 산과 물이 조합되어 주제를 이루고 소나무와 각종 섶나무들이 부재로 등장하여 멋진 산수화를 그려 놓습니다. 때로는 구름이 끼어들기도 하고 새들과 짐승도 한 몫하면서 주제와 부제의 위치가 바뀌어가면서 자연의 그림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폭 상단으로 올라서서 천불동 암봉 전시회를 관람하려 하였으나 시계가 짧아 불가능하였습니다. 신선대에서 설악의 전경을 드론과 카메라를 이용하여 가을의 아름다움을 채집을 계획은 수정해야 하였습니다. 과거에 보았던 상상의 나래를 재현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 안개는 미혹의 시간을 재촉하며 회칠을 더해 오고 계획의 희망 문을 닫을 무렵 양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양폭처럼 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 바로 권금성, 백담산장, 봉정암, 소청 산장입니다. 60년대 후반 등산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할 무렵입니다. 서울 광교 부근에 명산을 안내하는 관광업소가 몰리게 되고 이어서 동대문 종합터미널에 주말마다 관광버스가 출발하면서 70년대 들어 산 인구는 세를 더 늘려 갔습니다. 더불어 산악사고도 대형화하면서 십이선녀탕 가톨릭의대 산악부 조난사고, 오대산 고대 불교 학생회 수련회 때 급류에 휩쓸린 사고, 에베레스트 등반대 죽음의 계곡 눈사태 사고 등과 그 외 사고 등이 전국에서 발생하여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과 한국산악회, 국가정책에 의거하여 전국에 산장을 신축하게 됩니다.
콘크리트 라멘조로 1층에는 거실 형태의 취사 및 식사 공간을 배치하고 그 옆으로 나무 침상을 2층으로 만들어 숙면실을 2층까지 만들고 넓은 테라스는 산을 조망할 수 공간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산을 찾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산장은 전국 명산마다 건축되었습니다. 이 전에는 서울 삼각산 백운대 아래 이영구 씨가 대를 이어 한국산악회 도움을 받아 개인적으로 운영하고 있었으며 설악에도 백담산장은 개인이 사비를 들여 건축하여 운영을 하다 인제군에 넘겨주고 삼둔으로 옮겨 가 맥을 잇기도 하였습니다. 희운각에도 산막 형태의 대피소가 있었지만 관리가 전혀 안된 상태였습니다.
정부 주관 아래 설악에 신축된 산장은 권금성 산장과 양폭 산장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자 아우 형제가 산악인으로서 명성을 날린 털보 유창서는 권금성 산장으로 들어와 평생 산장지기로 그의 형은 서울 도봉산 산장에서 등반학교와 더불어 산장지기로 지냈으며, 양폭산장은 1970년 비어 있던 양폭산장으로 들어와 77년까지 설악동에서 살던 주유동 씨가 들어와 관리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관리자가 바뀌면서 개수선을 하면서 많은 우여곡절 속에 온돌방도 만들고 투숙객들에게 숙박비를 받으며 운영하다 매점을 설치하여 잡다한 산중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팔기도 하였습니다. 한 때는 전남 여수가 고향인 엄흥길이 부모가 원도봉으로 이사하여 망월사 가는 산중 길목에서 사하촌 형식의 매매점과 산악인들을 상대로 식당을 운영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자란 엄흥길은 군대 가기 전 양폭산장으로 잠시 들어와 짐을 나르며 근력을 키우고 생활하며 산악인들과 안면을 트고 군대를 해군 특수부대를 지원하여 강철 같은 몸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반들이 훗날 에베레스트 14좌를 정복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산악인으로 성장하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1983년부터는 외설악에서 발생한 조난사고 영향에 힘 입어 외설악 적십자구조대가 상주하며 공원관리공단과 계약을 체결하고 사용하였습니다. 1992년 이후에는 관리공단에서 직접 개수 선하여 운영해 오다, 2012년 1월 21일 화재로 전소되어 멸실된 후 재건축되어 현재에 이루고 있습니다.
양폭산장은 대청, 공룡릉과 설악동을 오고 가는 천불동 안부 긴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적설 기나 우기에도 대피소로 제 역할을 하던 장소였습니다.
현재의 양폭산장 전경,
점점 깨스는 농도가 짙어져 가고 가을비는 오버트러스 쟈켓을 툭 툭 툭 건드리며 땅으로 흘러 떨어진다.
양폭으로 오르는 계단을 올려다 보자 가시거리도 짧아졌다. 장딴지에 힘으로 모은 후 근육을 풀기 위하여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하다 단숨에 치고 올라섰다.
깨스를 뚫고 양폭 까지 올라서서 떨어지는 폭포수를 보면 잠시 옛 추억에 잠겼다. 음폭, 염주 폭, 죽음의 계곡 등 치고 오르던 70년대 초, 중, 말까지의 설악 행각, 자주 찾던 설악도 79년 결혼을 하면서 회사일과 가정 일로 인하여 좀처럼 찾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었다. 북한산과 도봉산은 주말을 이용하여 종주 산행과 rock climbing 겸하며 오르고 있었지만 당일 이외 가 시간을 조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설의 보수로 설치해 놓은 비계와 각종 자재들이 쌓여 좁은 통로가 더 더욱 좁게 느껴지는 계단 길, 마주 오는 산객이 있으면 몸을 움츠려 주어야 한다. 비는 계속 이어지고 깨스의 밀도는 더욱더 많아져 가시거리가 점점 사라졌다. 장딴지를 부풀리며 힘겹게 고도를 높이자
천당폭포가 마중 나왔다. 폭포수가 지르는 낙수 소리는 옹골차게 느껴졌다. 다가 서자 냉기가 나를 휘감았다. 추위를 이기려는 마음으로 다시 계단을 딛딤하며 고도를 높여 나가자
천당폭포 상단 계곡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계곡 양 사면으로 단풍이 들기는 들었지만 비에 젖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너부러져 갔다. 단풍의 생명력은 높은 하늘과 밝은 가을빛이 만들어 주 주는 것인데 가을장마가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단풍을 마음에 담아둘 요령으로 계곡으로 내려가 사면 길을 걸어 무너미 고개로 접근해 갔다.
폭포 상단에 서서 물소리를 듣는 순간 하단 폭포 물소리와 상이하게 들려왔다. 받는 마음 과 주는 마음이 다르듯 떨어지는 소리와 흘러가는 소리는 전혀 틀렸다. 아쉬움과 환호성의 차이처럼 구별되었다.
무박으로 한계령이나 오색에서 새벽 3시경 출발한 산객들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을 뒤로하고 오르고 올라 산마루에 섰다.
가시거리는 제로, 비도 거세졌다. 카메라를 비닐봉지에 넣은 후 다시 방수포에 넣고 안전하게 다시 카메라 전용 knap sack에 넣어 두었다. 안전하게 회귀하기 위하여 스틱을 꺼냈다. 안전한 걸음 속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발 뒤꿈치를 사용하며 발을 내딛기를 반복하자 느낌이 이상하여 걸음을 멈추고 등산화를 확인하자 뒤축이 떨어져 나갔다. 앗! 불싸~~ 수선 장비를 꺼내 우선 수리를 하기로 하였다. 아무래도 하산 길이... 대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한 후 나 홀로 하산을 재촉하며 설악산을 빠져나왔다. 소공원 광장에 서서 마등령을 바라보자 이미 어두움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나를 뒤따르던 후배도 많이 뒤처졌다. 숙소로 곧장 가겠다는 소식을 전하고 숙소로 돌아와 젖은 짐을 정리한 후 샤워 후 하산할 대원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기 시작하였다. 안주를 만들고 야채를 씻고 고기를 준비해 놓고 연어 회를 썰어 놓고 모든 준비를 해 놓고 전화를 걸어 대원들의 위치를 확인하자 비선대에 도착하였다는 전갈이 왔다. 아직도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소요가 예상되는 지점이었다. 거의 밤 10시경 숙소에 도착하였다. 서둘러 모여 앉아 설악 건각에 대한 추억을 소환하고 오늘 일정에 대하여 소회 하며 회식의 기쁨을 만끽하며 하루를 정리해 두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짐을 꾸려 숙소를 나온 후 학사평에 있는 산악박물관으로 가 일정을 소화한 후 내린천 부근 자작나무 숲으로 가려하였지만 주차장에 만차라는 소식을 접한 후 포기하고 귀경을 하기 위하여 미시령 옛길을 넘는 순간 행락객으로 주차할 곳이 없었다. 연휴가 만든 단풍객들의 모습, 차라리 귀경하는 것이 바른 판단이라는 생각에서 오후 5시 귀경하여 대구탕 전문 집으로 몰려 가 해단식을 갖은 후 모든 일정을 끝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