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독서에 등장하는 가말리엘은 훗날 바오로 사도로 불리는 사울의 스승입니다. 사도행전은 가말리엘을 랍비(율법교사)이자 바리사이로 소개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랍비나 바리사이는 대부분 사리사욕과 위선을 일삼는 유대교 지도자로 비취집니다. 그럼에도 가말리엘만큼은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사도행전이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과는 다른 면모를 가졌음이 분명한데요. 무엇 때문에 백성들이 그를 존경했던 것일까요?
사울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지금의 신천지처럼 무척이나 맹목적인 생각으로 율법을 준수하였습니다. 맹목적인 생각은 지식의 많고 적음을 떠나 신중함을 결여하기 때문에 성급함과 편협함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입니다. 나아가 쉽사리 폭력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폭력을 동반한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격분했다는 것이죠. 어제 오늘 1독서에서 보듯이 그들은 침착함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맹목적인 생각, 맹목적인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울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사울이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맹목적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가말리엘이 백성에게서 좋은 평판을 얻은 까닭이 가말리엘의 탁월한 지성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가말리엘의 '사려깊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사려깊음은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관념들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자라납니다. 다양한 가능성들을 함께 고려하여 하나의 판단에 이르는 것이죠. 이를 철학에서는 헤겔의 변증법적 사고라고 부릅니다. 하나의 의견이 있다면 항상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상정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을 일컫습니다. 당대의 지성인이라 부를 수 있는 가말리엘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침착함과 사려깊음은 바로 이런 변증법적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최고 의회에서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내보낸 뒤 동료 의원들에게 지나간 두 가지 동일한 사건을 예로 들며 자신의 입장을 개진합니다. 하나는 테우다스의 사건이고 또 하나는 갈릴래아 사람 유다와 관련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동일한 과정과 결말을 주시한 가말리엘은 사도들의 일에 관여하지 말자고 말합니다. 사도들의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이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우리 힘으로 저들을 없애려 해도 없애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은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하느님을 대적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생각하는 가말리엘에게서 다른 지도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려깊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살아계셨다면, 아니 살아계실 때 가말리엘이 예수님을 만났다면 과연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 상상해 봅니다. 니코데모가 이해하지 못한 위로부터의 태어남을 가말리엘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그에게도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까요?
코로나19 사태로 신앙의 활동이 위축되어 있고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회의적인 시선도 곱지만은 않습니다. 사려깊은 가말리엘의 지성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첫댓글 때론 거짓인줄 알면서 주위 분위기로 정의롭지 못한 판단에 휩쓸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해와 상처로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가말리엘처럼 사려 깊은 지혜가 필요한 절실함을 깨닫게 합니다.
휩쓸리고 맞서지 말고 한번더 생각하고~ 한걸음 뒤에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지혜의 성령을 청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