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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시: 2026년 5월 31일 (일)
2. 날씨: 맑음
3. 경로: 월정교 - 천관사지 - 오릉 - 일성왕릉 - 육부전 - 경주 나정 - 남간사지 당간지주 - 창림사지 삼층석탑 - 포석정 - 지마왕릉 -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 망월사 - 삼릉 - 경애왕릉
4. 거리: 약 12.4km
5. 소요시간: 3시간 25분
6. 코스정보 : 월정교, 오릉, 일성왕릉, 육부전, 경주 나정, 창림사지삼층석탑, 포석정,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망월사, 삼릉
7. 지역: 경주시
8. 트랙:
9. 코스지도
[월정교] 삼국사기(三國史記)에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 19년(760년) "궁궐 남쪽 문천(蚊川)에 월정교, 춘양교(春陽橋)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현장에 배 모양의 교각이 전해지고 있었으나 오랜 고증을 통해 누교(樓橋)를 복원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월정교는 길이가 60.57m이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와 기와가 출토되어 교각 위쪽이 누각(樓閣)과 지붕으로 편평한 누교였을 것으로 확인되었다. 동쪽 약 700m 상류에 인 귀상에 전일 수 있도록 바 받침이 조각 또한 전해지다. 다리의 규모와 축조방법, 석재의 색깔, 재질까지도 유사한 춘양교가 위치하고 있다.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요석공주(瑤石公主)의 사랑 이야기가 얽힌 유교(楡橋)의 흔적도 월정교 19m 하류에 보존되어 있다. 월정교는 신라의 문화적 수준과 교량의 축조기술, 외장, 교통로 등 신라왕경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통일신라의 문화적 품격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남천 위에 세워진 누각 다리[樓橋]" 월정교는 초대로 단청누교의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월정교는 향산강발경(2016년)으로 선정되었고 월정교와 춘양교지는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안내판)
[경주 천관사지]는 도당산 서쪽 기슭 논 가운데에 있는 절터로 김유신과 기생 천관의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절터에는 석재와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팔각의 삼층석탑이 복원되어 있다. 고려 중기 이인로(李仁老)가 지은 파한집(破閑集)에 천관사에 관한 설화가 전한다. 청년 시절에 김유신은 기생 천관과 사랑에 빠져 지내다가, 어머니의 꾸중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다. 어느 날 김유신의 말이 술에 취한 그를 천관의 집 앞으로 데려가자, 김유신은 말의 목을 베고 냉정하게 천관을 뿌리쳤다. 이를 슬퍼한 천관이 목숨을 끊었고, 후에 김유신은 천관이 살던 집에 천관사를 지어 그녀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 절의 역사는 알 수 없으나, 동경잡기(東京雜記)에 고려 중기의 이공승(李公升)이 천관사를 지나면서 지은 시가 전한다. 2000년부터 여러 차례 주변을 발굴 조사하여 천관사 건물터와 담장 터, 우물 등을 확인하였다. 남아 있던 탑의 몸돌과 바닥돌 부재를 참고하여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팔각형의 몸돌을 얹은 삼층석탑 1기를 복원하였다. 이 탑은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연꽃 모양으로 된 점이 독특하다. (안내판)
[경주 오릉] 이곳은 신라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으로 시조인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 기원전 57기원후 4 재위)과 그의 왕후 알영부인(閼英夫人, 기원전 69기원후 4), 제2대 남해왕(南海王, 424 재위), 제3대 유리왕(儒理王, 2457 재위), 제5대 파사왕(婆娑王, 80~112 재위)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는 네 분의 왕을 담엄사 북쪽 사릉원(蛇陵園) 내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시조왕은 기원전 37년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하였고 기원전 32년에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남해왕은 서기 8년 탈해(脫解)가 뛰어난 인물이란 말을 듣고 불러 사위로 삼고 10년 대보(大輔)의 벼슬을 주어 나라의 일을 맡겼다. 유리왕 9년(32)에 6촌을 6부(六部)로 고치고 이들에게 이(李)·최(崔)·손(孫)·정(鄭)·배(裴)·설(薛)의 성(姓)을 주었으며, 17관등(官等)을 마련했다고 한다. 파사왕은 가야와 백제에 대한 방어체제를 정비하면서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해 신라의 영토를 확장했다. 다섯 무덤 가운데 서쪽 무덤이 가장 큰데 직경 약 33m, 높이 약 7m이다. 이 무덤의 동쪽에는 최근에 만든 상석, 표석과 진입부가 있고, 진입부에는 일자 제각(一字祭閣)이 있다. 남쪽 무덤은 봉분 두 개가 이어져 있다. 무덤의 외형으로 보아 가까운 대릉원 일대의 고분처럼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일 가능성이 있다. 능원 안에는 박혁거세왕을 제향하는 숭덕전(崇德殿)과 그 내력을 새긴 신도비가 있다. 동쪽에는 알영부인의 탄생지로 전해지는 알영정(閼英井)이 있다. (안내판)
[알영정 (閼英井)]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우물이다. 옛 문헌에는 알영정이 경주의 남쪽 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알영정에 계룡(鷄龍)이 나타나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어떤 할머니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길렀으며, 우물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알영은 자라면서 뛰어난 용모와 덕행을 갖추었는데, 시조왕께서 소문을 듣고 왕비로 맞아들였다. 알영 왕비는 행실이 어질고 보필을 잘하여 당시 사람들은 왕과 왕비를 두 성인(二聖)이라 불렀다고 한다. (안내판)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제사를 모시는 전각으로 오릉(五陵)의 남쪽에 있다. 조선 세종 11년(1429)에 왕명에 따라 건립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선조 33년(1600)에 다시 세웠고, 숙종 30년(1704)에 고쳐 지었다. 경종 3년(1723)에 '숭덕전'이라는 편액을 걸었고, 영조 11년(1735)에 건물을 수리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영조 때 수리한 모양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 전각 안에는 영조 35년(1759)에 세운 신도비*가 있는데, 비석에는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이 새겨져 있다. 추보현(追報峴) 뒤쪽에 혁거세왕의 왕비 알영이 태어났다고 하는 알영정(閼英井)이 있다. 이 전각은 세종이 삼국 시조들의 사당을 세우라는 조서를 내려 세운 제전(祭殿)이므로 행사는 모두 나라에서 주관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박씨 문중에서 관리하면서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지금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안내판)
[남간사지 석정] 이 우물은 남간사 터에 남아 있는 돌우물로, 깊이가 1.4m 정도 된다. 자연석으로 외벽을 쌓아 올리고, 위쪽은 2장의 다듬은 돌로 원형 틀을 덮어 마감하였다. 우물 틀 둘레에 위아래로 이중 테를 둘렀는데, 윗단은 직각, 아랫단은 곡선으로 조각하여 놓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남간사의 승려 일념(一念)이 이차돈(異次頓)의 순교 내력을 실은「촉향분예불결사문(促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고, 남간사 동쪽에 승려 혜통(惠通)의 집이 있던 은천동(銀川洞)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들에서 남간사가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번창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의 우물은 분황사 석정(문화재자료 제9호), 재매정(사적 제246호)과 더불어 신라 시대의 우물 모습을 보여 주는 유적이다. (안내판)
[일성왕릉] 이곳은 신라 제7대 일성왕(逸聖王, 134~154 재위)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일성왕은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일성, 왕호는 이사금(尼師今)이다.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에는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6대 지마왕(祗摩王)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일성왕은 재위 기간에 정사당(政事堂)을 설치하여 대신들과 함께 중요한 국사를 처리하였으며, 경작지를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다. 이 능은 남산의 서북쪽 산기슭에 있다. 이곳은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 설화가 전해지는 나정(蘿井)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이 무덤은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둘레돌로 보이는 자연석 일부가 드러나 있다. 능 앞에는 1871년에 세운 표석이 있다. (안내판)
[월암재]는 1534년 경주에서 태어나 선조 대 무과에 급제 후 20년의 관직 생활 끝에 훈련원봉사를 사직, 하향하였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김호 장군의 재실입니다. 당시 장군은 의병을 모아 수시로 적진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려 부산 첨사에 제수되었으며, 특히 경주 노곡에서 북상하는 왜군 500여기를 섬멸하는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고 전사하셨습니다. 1758년(영조34년) 다시 형조참판에 추증되었습니다. 월암재는 경주의 걷기 좋은 길로 선정된 '월정교에서 삼릉 가는 길'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인근에는 박혁거세 탄강지 나정, 6부 촌장을 모신 양산재, 신라 최초 왕궁터인 창림사지3층석탑, 남간사지 당간지주, 일성왕릉, 포석정, 노천박물관 남산 등 신라의 정기를 느낄 수 있는 유적지가 있습니다. 최근 '문화재 활용이 보존이다'라는 시대적 흐름에 맞춰 2009년부터 신라문화원에서 개보수 후 고택문화체험 장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안내판)
[육부전 (六部殿)] 양산 아래에 있는 육부전은 진한(辰韓) 육촌장(六村長)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삼국사기의「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가 건국하기 전에 진한 땅에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면서 육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첫째는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둘째는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셋째는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 넷째는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다섯째는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라 하였다. 기원전 57년에 여섯 촌장이 알천(閼川) 언덕에 모여서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의 초대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이 해가 바로 신라의 건국년(建國年)이다. 그 후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이 여섯 촌장들의 신라 건국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육촌을 육부(六部)로 고치고 각기 성을 내렸다. 양산촌은 양부(梁部) 이씨(李氏), 고허촌은 사량부(沙梁部) 최씨(崔氏), 대수촌은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 진지촌은 본피부(本彼部) 정씨(鄭氏), 가리촌은 한기부(漢祇部) 배(裴)씨(裵氏), 고야촌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이다. 이 여섯 성씨가 신라의 초대 성씨이며, 각기 시조 성씨가 되었다. 이 사당은 1970년에 육촌장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이곳을 양산재(楊山齋)라고 부르다가 2019년에 강당을 새로 증축하고 육부전(六部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안내판)
[나정]은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의 탄생과 관련한 설화가 전하는 곳이다. 이곳은 남산 식혜곡과 장창곡 사이의 완만한 구릉에 자리하고 있는데, 주변에 신라 건국과 연관된 유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삼국사기에 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실려 있다. 진한 6촌의 하나인 고허촌(高墟村)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 수풀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말이 있던 곳으로 가 보았으나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어서 그것을 갈라 보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나이가 10여 세가 되자 재주가 특출하고 나이에 비해 성숙하였다. 그 출생이 신기하고 이상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받들고 존경하여 임금으로 삼았다. 6촌의 사람들은 그가 박처럼 생긴 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고, 세상을 밝힌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 순조 3년(1803)에 신라 시조의 내력을 새긴 유허비를 세웠다고 한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4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한 결과 유허비 외에 팔각건물터와 다른 건물터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 건물들은 혁거세의 탄생 설화와 관련된 신궁 또는 국가적인 제사 의식을 행하던 시설로 추정된다. (안내판)
[창림사지 삼층석탑] 창림사지는 '창림(昌林)'이라고 적힌 기와가 발견되면서 그 이름이 확인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 최초의 왕궁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절터는 동쪽이 서쪽보다 높은 지형인데 동편의 가장 높은 곳에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2층으로 된 바닥돌에 3층의 몸돌을 올렸다. 무너져 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하였는데, 이 때 없어진 부분은 새것으로 채워 넣었다. 아래층 바닥돌에는 각 면마다 3개씩 안기둥을 새기고, 위층 바닥돌에는 네 면에 각각 2구씩 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을 조각했는데 팔부신중은 현재 4구만 남아 있다. 탑에서 발견된 탑지(塔誌)에는 신라 문성왕(文聖王, 839~857 재위) 때 부처님의 치아 사리를 이곳에 보관했다는 기록이 있다.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경주 남산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탑이다. 바닥돌 팔부신중의 뛰어난 조각 기술로 보아 8세기경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 천룡팔부중, 팔부중이라고도 한다. 불법을 지키는 8종의 신으로 천(天), 용(龍), 야차(夜叉), 아수라(阿修羅), 건달바(乾達婆), 긴나라(緊那羅), 가루라(迦樓羅), 마후라가(摩睺羅伽)를 말한다. (안내판)
[경주 포석정지]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장소로 추정되는 유적이다. 유상곡수연이란 굽이도는 도랑물에 술잔을 띄워 놓고 그 술잔이 자기 앞에 오면 시를 읊던 놀이를 말한다. 원래 돌거북이 있었다고 하는데, 돌거북이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내보내면 이 물이 돌로 만든 구불구불한 물길을 따라 흘러 되돌아오는 구조이다. 물이 흐를 때 주 흐름에 반해서 생기는 회돌이 현상을 이용하여 물이 흘러가는 경로를 다양하게 했다. 신라 헌강왕 (875~886 재위)이 포석정지에 와서 남산신의 춤을 보고 따라 추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1999년에 포석정지의 주변을 발굴 조사할 때 '鮑石(포석)'이라 새겨진 기와와 함께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또, 포석사(鮑石祠)에 대한 기록, 이곳에 큰 규모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발견되면서 포석정이 연회를 즐기던 장소가 아니라 통일 신라 후기에 조성된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라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안내판)
[지마왕릉] 이 능은 신라 제6대 지마왕(祗摩王, 112~134 재위)이 묻힌 곳으로 알려져 있다. 파사왕(婆娑王)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었다. 지마왕의 재위 기간에 신라는 백제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가야와는 낙동강 하류를 둘러싸고 패권을 다투었다. 왜인(倭人)들이 동쪽 변경(邊境)을 침범하였으나 교섭하여 강화를 맺었고, 북쪽에서 말갈(靺鞨)이 쳐들어오자 백제의 도움을 받아 물리쳤다. 무덤은 포석정에서 남쪽으로 200m쯤 떨어진 남산의 서쪽 자락에 있다. 왕릉 중에는 작은 편에 속한다.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외형과 입지로 보아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일 가능성이 있다. (안내판)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은 이곳 주변에 부서진 채 흩어져 있던 조각들을 모아 1923년에 다시 세운 불상과 보살상이다. 인근에서 '禪房寺(선방사)'라고 새겨진 돌이 발견되어 '선방사 삼존불'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지명을 따서 배동 삼존불이라 한다. 이 삼존입상은 미소를 머금은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 모습이 특징적이다. 중앙에 자리한 불상은 이중으로 된 상투 모양 머리에 네모나고 통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 원통형의 몸은 목이 거의 없고 두 손은 큼직한데,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올리고 있다. 왼쪽의 보살상은 작은 부처가 새겨진 보관*을 쓰고 왼손에 정병을 든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왼쪽의 보살상과 달리 굵은 목걸이와 구슬장식을 발목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이 점 때문에 두 보살상의 제작 시기를 다르게 보기도 한다. 이 삼존입상은 어린아이의 얼굴과 몸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7세기 신라 불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안내판)
[경주 남산 선방곡 제2사지(망월사)] 선방곡의 명칭은 매월당집(1583)에 기록된 선방사(禪房寺)에서 유래되었다. 선방곡 제2사지는 망월사와 그 일대로 추정한다. 인근에 7세기 신라 불상의 대표작인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이 위치한다. 망월사는 원효종의 중요한 사찰로 꼽히는 곳이다. 대웅전과 삼성각, 대명전에 초석 등 옛 사지의 유구가 활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옆 연못 가운데에 삼층석탑이 있다. 1, 2층 옥개받침에 연꽃무늬가 있어 일명 연화탑이라 부른다. (안내판)
[경주 배동 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졌다.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경주 배동 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 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애왕릉] 이 능은 신라 제55대 경애왕(재위 924~927)이 묻힌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경애왕은 신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생이다. 왕건이 후백제를 침범할 때 군사를 보내어 고려를 도왔다. 927년에 포석정에서 제사를 지낸 후 연회를 베풀던 중 그곳을 기습한 후백제의 견훤에게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록에는 남산 해목령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남산의 북서쪽 자락에 있다. 무덤의 가장자리를 바라가며 둘레돌로 보이는 석재가 일부 드러나 있다.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안내판)
[삼릉솔숲]은 경주 남산 서쪽에 위치한 소나무 숲으로 삼릉(신라의 왕 세 분의 능)이 위치해 있으며 '큰 구부러진 아름다운 소나무(춤추는 듯한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경주 남산(南山)은 국토의 중앙인 서울(京)과 남쪽의 오악인 지리산(智異山)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국사를 논의하던 지방의 중심지이면서 초기 궁궐터, 왕릉, 불교조각 등 수많은 문화유산이 분포되어 있는 신라의 신성스러운 공간이다. 그리고 김시습(1435~1493)이 남산 금오산(金鰲山)에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 등 다양한 저술활동을 한 문학의 고향이기도 하다. 경주는 다양한 피사체를 간직한 풍경도시로 사진작가들에게 솔숲지기로 가장 유명하다. 특히 2005년 소더비(Sotheby's) 경매에서 삼릉솔숲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팝가수 엘튼 존(Elton John)이 매입한 이후로 솔숲숲의 정취를 사진에 담고자하는 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구불구불한 소나무들 사이로 내리는 햇살은 가히 환상적이며 봄날 소나무 사이로 피는 진달래도 한몫을 톡톡히 한다. 경주 남산은 국가유산문화재 사적(1985), 세계문화유산(2000)으로 지정되었고, 삼릉솔숲은 형산강팔경(제8경)에 선정되었다. (안내판)
[남산]은 경주의 남쪽에 위치한 신라 천년의 성지이다. 이곳은 남북 약 8km, 동서 약 4km 크기의 타원 모양 지형으로, 소중한 문화유산과 화강암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지질 경관이 분포되어 있다. 남산의 불교 문화재들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강암은 마그마가 땅속 깊은 곳에서 천천히 식어 만들어진 암석으로 대리암이나 석회암에 비해 단단하다. 남산의 수많은 문화재가 오랜 시간 잘 보존된 것은 화강암의 이러한 특성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남산의 화강암은 석영의 함량이 높고, 함철광물 불순물이 적어 다른 지역 화강암에 비해 밝은 색을 보인다. 또한 내부에 미세한 기포가 많아 비교적 가공이 쉽다. 남산에 특히 불상과 석탑이 많은 데에는 이와 같은 지질학적인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이다. 남산 화강암의 갈라진 면(절리면)에는 선각육존불이나 마애석가여래좌상 등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특히 열암곡(새갓골)에 있는 거꾸로 넘어진 마애여래입상은 신라시대에 발생한 지진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내판)
[재매정財買井]은 신라 전성기의 화려한 대저택을 일컫는 금입택* 35채 중 하나인 재매정택에 있던 우물이다. 재매정택은 김유신(金庾信, 595~673) 집안의 종택이다. 삼국사기「김유신전」에 따르면 645년 1월에 백제가 매리포성을 공격하자 김유신이 상주 장군에 임명되어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그런데 백제군이 다시 침범하여 온다는 급보를 받고 다시 출정하였다. 이때 김유신은 집에 들르지 않고 지나쳐 가다가, 50보쯤 가서 말을 멈추고 사람을 시켜 집에 마실 물을 떠오게 하여 물을 마시고는 집의 물맛이 그대로라며 전장으로 떠났다고 한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의 종가의 인물로 재매부인이 등장하기도 한다. 재매정은 깊이가 5.7m, 가장 넓은 부분의 너비가 1.8m이고, 바닥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보기 드문 정사각형의 우물이다. 우물 옆 비각에는 조선 고종 9년(1872)에 경주 부윤 이만운이 김유신의 거처임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세운 '김유신유허비'가 있다.
*금입택(金入宅) : 글을 입힌 집 또는 금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쇠드리댁' 또는 '금드리댁'을 의미하는 말, 신라 왕경에 거주하던 진골 귀족의 대저택 (안내판)
[사마소司馬所]는 조선 시대 생원과 진사 시험에 합격한 유림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유풍을 진작시키며, 지방 행정의 자문과 정치를 논하던 곳이다. 향리들의 횡포를 막는 등 지방 행정과 교화에도 큰 도움을 주었으나, 한편으로는 향권을 장악하여 세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조선 연산군 때 제도가 폐지되었다가 중종 때 다시 설치되었다. 경주 사마소는 원래 신라 시대 세워졌던 일정교(효불교) 근처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선조 25년(1592)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이곳에는 효종 2년(1651)에 세운 풍화루와 연산군 때 폐지된 사마소를 중종 때 다시 세웠다는 기록을 적은 '사마소중건기' 등의 현판이 보존되어 있다. 현재 건물은 'ㄱ'자형의 풍화루와 'ㅡ'자형의 사마소 건물이 서로 마주 보고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1984년에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다. (안내판)
[경주 교촌마을]은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세운 국학이 있었던 곳이다. 국학은 고려시대의 향학, 조선시대의 향교로 이어졌다. 마을 이름이 '교촌' 또는 '교리', '교동'이라 불린 것은 이 도시에 향교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마을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온 '경주 최부자집'이 있다. 최부자집은 12대 400년 동안 만석꾼을 유지하면서도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았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광복 후에는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기부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진정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교촌마을에는 한옥들과 함께 조선시대 고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주변의 계림, 월정교, 첨성대 등 가람들과 한데 어우러져 경주만의 독특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안내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