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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1절-19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목석이나 금수처럼 만들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인간은 영과 이성과 본능과 감각성과 감정과 자연생명과 물질인 신체를 가진 인간입니다.
물질인 신체와 감각성과 본능은 인격성은 아닙니다. 이성과 영이 인격성이기 때문에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하는 그 말은 이성과 몸이 죽었다는 말이 아니고 영이 죽었다는 그 말입니다. 선악과 따먹고 영이 죽었다 그 말이요.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지금 영이 죽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이 죽어 있는 거 그들이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왜 모르지요? 죽어있으니까. 죽은 자가 자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나? 모르지. 살았으면 알지. 그렇잖아요?
영은 죽었지만 그건(이성과 몸) 다 작용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꼬집으면 ‘아야’하고 그러지. 생각도 할 줄 알고. 그리고 영이 죽은 사람도 종교성은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성은 영에서 발생이 된다고 꼭 그렇게 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영은 죽어있고 이성은 살아있으면서, 영은 죽었어도 예수 믿는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도 얼마든지 가지고 사는 것을 볼 수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이 종교를 가졌어도 영은 그대로 죽어 있고 이성은 작용을 하고 또 종교생활은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학적 용어로 본다면 하나님과 단절됐다. 영이 하나님과 단절이 되어버리면 영은 동작을 하지 못하고 중지상태로 돼버립니다.
그리고 이성은 영과 단절이 되어도 이성은 작용을 합니다. 영은 무엇과 끊어지면 활동중단이 된다고? 하나님과. 하나님과 끊어졌어도 이성은? 작용을 한다. 그리고 그 이성이 영과 단절이 되어도 이성은 작용을 한다. 하나님과 끊어져도 이성은 작용을 하고 영과 끊어져도 이성은 작용을 한다.
그래서 이 종교성이 영에게서만 나온다 그렇게 보지를 않고 이성에서 얼마든지 의지성과 의뢰성을 가지고 종교성은 가질 수가 있다. 영혼이 죽어있고 중생을 못한 자라도 종교는 찾고 종교는 믿는다 그 말이요. 뭐가 그래서 그런 작용을 한다고요? 이성입니다. 잘 알아야 돼요.
이게 벌 걸 아닌 것 같아도 굉장한 공부에요. 성경 깨달음이고. 대학교나 종교계 그런 데서 이거 못 깨닫는 거요. 불교 팔만 대장경 속에도 이런 건 없어요. 오직 성경에만 있어요.
불교는 영은 중생치는 않았지만 이성이 주격이 돼가지고 종교성을 신봉하고 믿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영은 죽었어도 무엇은 가질 수 있다? 종교는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종교는 이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영이 죽었다고 해서 인간이 아닌 산짐승이 된 것도 아니고 영은 죽었어도 역시 인간은 인간입니다. 이성은 생각하고 이해타산을 따질 줄 알고 하는 기관이 이성이지요. 불신자들이 그건 다 가지고 있지요. 그 이성이 들어서 그런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살기는 살았는데 병원에 가면 그런 사람이 있지? 이성이 활동을 하면 자기가 ‘배가 고프다’ 하고 밥을 떠먹을 수 있지요? 떠먹여 달라고 하던지. 그런데 눈은 뜨고 깜빡 거리는데 코는 숨을 쉬는데 이성이 머릿속에서 전혀 작용을 못하는 게 있지요. 이성이 작용을 못하지요. 그러면 영도 죽어 있고 이성은 활동 불능이고. 그래도 인간은 인간이지.
기독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니 영이 주격이 되어가지고 부를 수도 있고 육이 주격이 되어서 부를 수도 있고. 육이 주격이 되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고 영이 주격이 되어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도 있다. 기독교인 중에 옛사람 혹은 육이 주격이 되어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영이 주격이 되어서 할 수도 있고 육이 주격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까? 성경에 ‘육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이니라.’ 그러면 육의 생각은 무슨 생각들이지요? 육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으니까 생각하는 것마다 ‘저 놈 죽여야지. 저 놈 것 빼앗아 먹어야지’ 맨날 그 생각이라는 말이요? 눈에 보이는 목적 현세적인 목적 그 목적에다 두고 사는 그 생각 마음 활동 모든 것은, 그리고 자기가 또 눈에 보이는 목적을 두지를 않았다고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것, 생각, 자기 속에 은근히 모두가 말하는 게 세상 것을 부러워하고 돋보고 하는 그것도 육이요, 영이요? 육이지요.
그러면 목사님이 ‘내가 신학교 들어가서 신학 나와서 목사가 됐다’ 하는 이것도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고 자랑을 하고 말하는 그거는 육이요, 영이요? 왜 육이지? 목사하는 그거는 영이 아니요? 믿음으로 했는데도? 그러면 ‘내가 예수 믿었더니 부자가 되고 사장도 되고 월급도 많아지고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셔서 기분이 좋다. 너도 예수 믿어봐라. 너도 그렇게 된다’ 하면 그거는 육이요, 영이요? 왜 이게 육이지요?
어떤 사람이 안수 잘하는 사람이 와서 신유의 은사 받았다고 하면서 날 보고 안수해주면서 ‘예수님도 병 낫게 해 주었으니 내가 병 낫게 해 줄 테니 예수 열심히 믿으면 그 병이 낫는다’고 하면 이건 육이요, 영이요? ‘네 몸이 그렇게 병들었어도 예수 믿으면 먼저 영적인 병은 낫는다. 부족하고 미달되고 꼬부라지고 잘못된 거 영적인 거 예수님 성품 잘 닮아간다.’ ‘하나님이 왜 그 병을 주셨느냐?’ ‘영적인 면에서 더욱 큰 유익을 주려고 그렇게 하셨구나’ 이렇게 됐을 때 이 목적을 가지고 육신의 병은 하나님이 낫게 해주시던 안 낫게 해주시던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하나님의 마음에 달린 거니까 나에게 병이 온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면 병이 안 오거든요. 그러니 하나님의 허락 하에 병이 왔다면 하나님이 더 잘 알 거 아니냐 그 말이요.
그러니까 ‘나는 영원히 영적인 그런 면에 불구가 되지 않겠다. 영원히 영적인 면에 믿음에 앉은뱅이가 되지 않겠다. 나는 예수 잘 믿어서 신령한 영적인 면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닫는 면에서 소경이 되지 않겠다. 육신의 모든 것은 임시적이다’ 그렇게 깨달으면 이거는 영이요, 육이요? 이건 영이지요.
육신의 눈에 보이는 거, 활동 행동 이 모두는 하나의 껍데기입니다. 나라고 하는 껍데기입니다. 예수 믿는 내가 나라고 하는 것은 내 속에 예수님의 생각 소원 목적 취미를 닮은, 예수님을 닮은 이것이 참 나란 말이요. 이것이 참 나입니다. 그게 진짜 나란 말이요. 썩어지고 뭉그러지고 죽어지는 그것이 참 나가 아니지요. 잘못 알면 큰일 나지요.
우리 기독자는 예수님의 피공로로 구속을 입어서 영이 중생이 됐기 때문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그 말이요. 우리의 영은 어디에서 어디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간의 영과 육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죽은 영혼을 살렸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어도 육은 죽지요? 신체는 죽지요? 마지막 그 날은 물론 삽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 기독자는 ‘신앙생활을 한다. 믿음이 좋다’ 그럴 때에 육이 주격이 돼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건지 영이 주격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건지 그걸 우리가 잘 분별을 해야 된다.
그리고 상대를 보고 ‘믿음이 좋다’ 그럴 때에 여러분들이 들을 때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육을 주격을 두고 그 말을 하는 건지, 영을 주격을 두고 그 말을 하는 건지 그것도 심사해야 된다 그 말이요.
요한계시록에 영적인 영의 활동성을 분별을 못하면 안 됩니다. 알겠어요? 영분별 잘해야 돼요. 교회분별을 잘해야 돼요. 목사님들을 분별을 잘해야 돼요. 분별을 안 하면 심판 당해요. 요한계시록은 그걸 분별해야 돼요.
악령의 운동 성령의 운동이 있는데 성령의 운동은 예수 믿는 사람의 운동이고 악령의 운동은 안 믿는 사람의 운동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단 말이요. 왜냐? 기독교 안에도 거짓 선지자 거짓 종들이 있다고 하니까 우리가 그걸 믿어야지요. 그렇다보니 분별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말이요.
분별을 할 때에 껍데기 것을 보고 분별을 해야 됩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어보면, 이런 분 저런 분에게 말씀을 들어보면 어느 정도 판단이 가잖아요?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그리고 기독자가 영이 중생한 후라도 신앙생활은 하기는 했는데 중생된 새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자기 일생을 마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주격이 돼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거지요? 육.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롯을 들어서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내 속에 롯도 들어있고 아브라함도 들어있다. 롯의 생각도 들어있고 아브라함의 생각도 들어있다. 롯의 성질도 들어있고 아브라함의 성질도 들어있다. 그렇지요?
그리고 아브라함과 롯을 들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영이 중생하지 못한 자에게 영이 중생하라고 하는 그 말씀도 아니다 그 말이요. 영 중생은 누가 시킨다고요? 하나님 주님의 독권적 사역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영이 주격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또 육이 주격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 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롯처럼 살면 롯처럼 수치만 남게 된다. 그러니까 그런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 그 말이요. 예수를 믿어도 정신을 바싹 차리고.
예수 믿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인심 좋은 분은 아닙니다. 심판 때는 인정사정없어요. 얼마나 심판이 무섭기에 제자들보고 그랬지요? ‘네 부모 형제들보나 나를 더 사랑하라고’ 그랬지. 이거 엄청난 거 아니요? 얼마나 심판이 무섭기에 그런 말씀을 하실까? 그것도 들어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학습도 받고 세례도 받고 예수 믿는 그 날부터 자꾸, 칼이라고 한다면 놋만 자꾸 벗기지 말고 날을 세워나가야 된다. 날을 날카롭게 세워나가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면 다 신앙생활이 아니고 믿는 사람이 다 믿는 사람이 아니니 육덩이 생활하는 사람이 있고 영덩이 생활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자꾸 자라가야지요.
아브라함은 육이 주격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려다가 고음국을 잘 먹었지요. 그렇지요? 우리 믿는 성도가 육이 주격이 돼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고음국을 먹어요. 반드시 먹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육이 주격이 돼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말이 ‘교회 다닌다. 안 다닌다’ 지금 그 말이요? 그 말은 아니지요. 교회 다녀도 열심히 충성봉사 해도 육이 주격이 돼서 하면 자기는 고음국을 먹게 되는 겁니다.
영이 주격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면 그건 분명히 목적이 영원한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수입 생각하는 것도 유익을 생각을 하는 것도 영원한 수입을 생각을 하고 있고, 또 자기 것을 임시적인 것에다 생각을 두지 않고 영원한 것에 자기의 소유로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은 하나도 없지요.
오늘날 왜 저렇게 불신세상이 주머니에 자꾸 집어넣지요? 뭘 몰라서? 영원한 것을 모르니까. 영원한 자기 수입을 몰라서 그렇지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 그런 짓 안 하게 하려면? 뭘 가르쳐주면 되지요? 영원한 수입을 가르쳐주면 돼. 영원한 수입만 깨닫게 하면 돼. 그걸 안 하게 하려고 뭘 자꾸 감독에다 또 감감독에다. 또 그것도 감감독이 해 먹으니까 감감감독에다 자꾸 이렇게 올라가면 어떻게 된 거야? 세상은 그래요.
임시의 것은, 현재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임시의 것이 뭐 뭐 있지요? 육신의 생명 시간 젊음 청춘 건강. 이게 전부 뭔가 하니 나의 영원한 것을 만들 수 있는 자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영원한 것을 자기가 부지런히 만들어가야 합니다. 영원한 것을 가지려면 부지런히 투자하고 이용만 하면 되는 거지. 육은 에누리가 있지만 영은 에누리가 없어요. 행한 대로 따라가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영이 주격이 되어 활동이 된 것은, 예수 믿어지고 밥 먹고 장사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무엇을 했든지 영이 주격이 되어서 한 것은 영원한 것이 얻어진 것이 틀림이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을 해 나가고 투자를 잘 해 나가니 아브라함이 부자가 됐습니까, 가난하게 됐습니까? 부자가 됐어요. 그러면 물질적 세상에서 부자가 된 것은 예수 잘 믿는 대가로 온 겁니까? 그러면 그것이 믿음의 대가로 온 것이 아니라면 그걸 왜 줬지? 재차 투자성도 되고, 또 하나는 영적인 면으로 볼 때 ‘네가 예수 믿고 천국저축 소유주의로 살았으니 천국에는 네 것이 이만큼 쌓였다’ 하는 것도 우리가 깨달을 수가 있는 거지요.
그런데 그 영원한 것은 못 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꾸 예수 잘 믿으면 뭐가 된다? 부자된다. 예수 잘 믿으면 요셉처럼 뭐가 된다? 총리대신이 된다. 이런 식으로 죄다 갖다 붙인단 말이요. 그러면 그들 해석대로 붙인다면 신약시대에 열두 사도 또 구약성경의 선지자들, 하나님 잘 믿고 예수 잘 믿었는데 짐승의 밥이 되고 불타지고 순교당하고 왜 그렇게 됐느냐?
오늘날 예수 잘 믿어서 무엇도 잘 되고 무엇도 잘 되고 하는 식으로 갖다 붙인다면 이런 선지사도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꼴로 죽었다 그 말이 되는 거지요. 그러면 오늘날 가르침이 ‘예수 잘 믿으면 뭐가 어떻게 된다’ 그러면 그것이 정답이요, 거짓말이요? 거짓말이지요. 그렇게 되었더라도 그것은 거짓말이다. 어째서 그렇지?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그런데 성경은 영원한 수입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려고 했다 그 말이요.
그러면 영원한 수입을 보고 예수 믿으면 전부 다 알거지가 돼서 길바닥에 나가서 굶어죽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도 참. 요단강 이 편의 재물을 계산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죽음 이 편의 것 세상 것을 내 것이라고 계산하면 안 된단 말이요. 요단강 저 편의 것을 나의 소유로 여겨야 되는 겁니다.
요단강 저 편에 투자한 거 있어요? 물질은 어차피 나갈 거. 천국에다 저축하는 방식으로. 잘못 들으면 모든 것을 다 교회에 바치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요. 그렇게 알면 안 됩니다. 자기가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교회 덕을 세우기 위해서 믿음 크게 하기 위해서 진리 배우는데 쓰임이 되게 하기 위해서. 어쨌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밥도 먹어야 되고 옷도 사서 입어야 되고. 그렇잖아요? 그거 다 구원에 투자요. 그런 투자도 있고 단체적인 투자도 있고. 그렇잖아요? 안 믿는 사람은 그런 생각으로 옷 입고 밥 먹고 그러지 않지요.
영원한 밑천은 가난도 밑천이요. 그렇지요? 부요만 밑천이 아니고 가난한 것도 영원한 것을 만들어갈 수 있는 밑천입니다. 그리고 사건도 모든 사건도 그렇고, 그리고 그 때 그 때마다 구원목적으로 쓰여진 것은 전부는 수입입니다. 그러니까 그 수입만 계산이 되는 거요. 하나님의 계산이 그래요. 알겠어요?
과부의 헌금 몇 푼 했지? 그게 천국에 저축된 계산이지요. 알겠어요? 온전한 십일조 그게 다 뭐요? 천국에 저축이 되는 그 면의 계산이에요. 부자는 흔들어서 넣어도 그건 없는 거요.
시간 물질 정력 목숨 모두 다 저 편에다 영원한 소유로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전등기 잘하는 그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다. 뭘 잘하는 거? 이전등기 잘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물질은 육에게 줍니다. 물질은 육에게 주는데 그것을 주는 목적은 그것 잡고 누리라고 주는 겁니까, 자기의 영원한 소유로 만들라고 주는 겁니까? 죽음의 선에 이르기까지 이전등기 안 하고 있으면 도둑놈이 와서 도둑 다 맞아요. 다 가져가요. 알겠어요? 어차피 빼앗기고 말아요. 그리고 이전등기를 잘하면 할수록 자꾸 줍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이 지혜 있는 삶이요.
우리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면으로서든지 영원한 자기 소유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기회가 있고, 하나님께서 다 주었습니다. 자기 목숨도 자기 것이 아니고 주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주님의 것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에게 투자되는 것이 당연하지요. 믿음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렇잖아요?
교회 다니면서 교회에 집문서까지 다 바쳤다. 왜 바쳤느냐? 우리 집 부자 되게 하기 위해서. 이건 이전등기 한 거요, 안 한 거요? 그건 날강도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환경에서든지 장소에서든지 영원한 곳에다 이전등기 해라. 하나님이 쓰시겠다’ 할 때는 ‘기회는 이 때다’ 하고 주저가 없어야지요. 그게 참 어렵지요. 안 그래요?
감사헌금 몇 푼 하는 것은 내 사업상 축복주기를 바라고 했는데 잘 됐으니 우러나는 마음에서 드릴 수가 있지. 그런데 어떤 사건에서, 이를테면 인간으로 통한 표현상 ‘돈 한 500만원만 가져와라. 교회에 이렇게 저렇게 쓰자’ 하면 그 다음 주에 교회에 안 올 걸? 참 그런 건 어렵지.
대동교회에서 김목사님 살아계실 때 예배당 터를 구입할 때 그랬나? 집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투자하라는 그게 있었을 거야. 믿음 없는 사람은 시쭉거리고 돌아가고 믿음 있는 사람은 집 팔고 전세로 들어가고, 전세 있는 사람은 전세 빼고 월세로 들어가고. 그 사람들이 게으른 사람들이냐? 부지런하고 아마 내가 알기로 그 사람들 다 알거지 돼서 깡통 찾지 싶은데? 과연 거지가 됐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꼭 그렇게 느껴지지. 그렇지 않아요? 그래, 그 믿음의 용기, 그 담대. 참 그거 정말 믿음이요. 그리고 그렇게 해놓고 또 목사가 가로채서 홀라당 주머니에 넣고 외국으로 날았다거나 그거 없잖아요.
모르지 또. 누가 압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건물을 써 보라’ 하고 주실 때에 목사 내 이름으로 난 안 하려고 그래요. 교인들 중에 믿음 있는 사람 앞으로 해야지. 그렇지 않아요? 세금은 교회에서 내고.
영 주격이 된 자는 영원한 존귀 부귀 영원한 안일성은 틀림이 없어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 구원 이루지 못하고 육이 주격이 된 자는 벌거벗은 자로 나오게 된다. 성경에 구절상 많이 있지요. 뿐만 아니라 무능자가 돼요. 그리고 또 현실에서 교회에서도 보면 예수는 늘 잘 믿었는데 그 머리통 속에는 깨달음이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이 돼버려요. 그거 믿음 없어요. 그렇게 살아선 안 된다 그 말이요.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를 배워도 바로 배우고 믿어도 바로 믿고. 그렇지 않아요? 왜 헛 밥 먹고 교회 들락날락 하면서 왜 헛 고생하고. 그렇게 믿을 바에야 아예 믿지 않는 세상에 나가서 돈이나 실컷 벌어서 쓰다가 죽는 게 낫지. 그렇지 않아요? 예수는 그렇게 믿지 말자 그 말이요.
그리고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 남의 간섭이 없기도 하지만 자기 실력이 없으니까 지기 실력의 제재를 받는 거지. 자기가 활용을 하나도 못한다 그 말이요. 성경에 ‘날마다 새 것이다’ 있지요? 날마다 새 것이니 그 얼마나 종류가 많겠어. 내가 사용하라는 종류가 많은데 실력이 없어서 그걸 사용을 못하면 그거 어떻게 할 거냐 그 말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의욕이 없어요. 자기가 쓰고 싶은 의욕도 없고 하고픈 의욕도 없어요. 예수 믿으면서 의욕이 있어야지요. ‘내가 예수 믿으면서 어떻게 예수를 믿겠다. 예수 믿어서 나는 누구만큼 얼만큼 닮겠다’ 그 의욕이 있어야지. ‘주님 앞에 내가 바로 살다 가야지’ 하는 의욕이 있어야 하고, ‘천국에 가서 내 것을 이 땅에서 많이 만들어 놔야지’ 하는 그게 있어야 돼요.
그리고 뭔가 하니 감각성적인 면에 아주 둔감해요. 둔해빠진 거요. 멍청해가지고. 예수님이 와가지고 이제 ‘산보 가자’ 하니까 눈치가 빠르면 그 뭐 ‘주님 어딨습니까’ 하고 부지런히 붙어서 내뛰지만 ‘산보 가자’ 하니까 이게 영 안 간데요. 그 무슨 맛이 있겠어? 안 그래? 천국의 맛이 없는 거지.
교회도 그래. 둔감하면 성도의 맛이 없어. 천국의 맛이 없어. 교회 덕을 세우고 구원을 이루는 면에 눈치가 빨라서 착착 움직여 돌아가면 참 그 천국의 맛이 있지요. 고상한 맛이 있고. 그렇잖아요? 성경이 맛이 있어요, 없어요? 성경에서 맛을 느끼려고 하고, 맛이 있어야지.
우리교회는 말씀이 어렵지요? 어려운 것 다 배우고 알려고 해야지 맨날 와가지고 국민하고 1학년 책 놓고 ‘영이야 바둑아 순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할 거요? 일 년 믿어도 그렇고 십 년을 믿어도 맨날 ‘영이야 순이야. 예수 잘 믿으면 부자된다. 뭣도 된다.’ 맨날 주일마나 그 소리에 ‘헌금 많이 내면 축복받는다’ 하고. 그게 뭐요? 그거. 그런 교인 어디 써먹겠어? 그래, 그 목사가 진짜요, 가짜요?
국민학교 1학년 들어갔다. 처음엔 낮은 거 배우지. ‘사람은 왼쪽 길이요, 차는 오른쪽 길이요’ 하고. 우리는 예수 믿어도 맨날 국민하교 일학년 책가지고 육학년까지 배우면 안 됩니다. 그렇게 1학년 책가지고 6년 동안 배우면 영리한 사람이 됩니까? 똑똑한 사람이 됩니까? 맨날 바둑이 하고 놀 텐가? 어쨌든 모른다고 안 가르치면 안 된단 말이요. 알도록 가르쳐야 되고. 모른다고 안 가르치면 바보가 돼 버려요. 예수 믿는 것도 배우는 건데.
우리 사람 속에 누구든지 흥이라는 게 들어있어요. 음악이 나오면 춤이 나오지요? 손뼉 치는 흥도 있고, 속풀이하는 흥도 있어요. 그래, 술 잘 먹는 사람이 집에 들어가서 젓가락 가지고 두드리는 흥풀이나 교회에서 찬송 부르면서 손뼉치고 엉덩이가 들썩들썩하는 흥풀이나 같아요, 달라요? 똑같아요. 술집에서 술 먹고 ‘니나노’ 하고 노래 부르면서 놀고, 교회에서 찬송 부르면서 미친 사람처럼 하면 성령이 오고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자기가 많이 깨달아가지고 내적인 면에 여물어지면 깨달음이 자꾸 들어가면 사람이 예수 믿는 게 흥풀이가 안 나와요. 알겠어요?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을 들어서 오늘도 우리에게 좋은 깨달음을 허락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저희들이 세상 사는 동안에 죽음 이 편에 있는 거은 내 것이 아니니 계산하지 말고 죽음 저 편에다 옮겨놓은 것은 전부 다 내 것으로 된 것이고 영 주격으로 살면 전부 다 내 것으로 되는 것이고 천국저축 주의로 그 정신으로 살았다면 천국에 부요자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현재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나의 부요성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좋은 재료거리인줄 압니다. 부지런히 하나님 앞에 임시의 것을 이용 활용 응용해서 믿음에 있어서 큰 부요자가 될 수 있도록, 그런 자로 살다가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천국에 부요자로 살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같이 할지어다. 아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