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간암공의 '임계탄' 계속]
海澤을 들너보니 海溢浦落 가이업다 해택을 들러보니 해일포락 가이 없다
大災을 가초올서 惡水들 업슨넌가 대재를 갖추올서 악수들 없을런가
田形이 업서거니 成川이 거의로다 전형이 없었거나 성천이 거의로다
禾谷이 업서거니 伏沙가 거의로다 禾穀이 없었거니 복사가 거의로다⑪
이被災 免한農形 긔얼마나 남어는고 이 피재 면한 농형 긔 얼마나 남었는고
四方을 周覽하니 焦原의 余草로다 사방을 주람하니 초원의 여초⑫로다
져나락 사긴滅吳 이나락의 들거고냐 저 나락 사긴 멸오 이 나락의 들었구나
이고지 뷔온滅吳 져고지로 건내넌네 이 고지 비운 멸오 저 고지로 건내넌네
一時에 枯損하니 到處의 同然하다 일시에 고손하니 도처의 동연하다
霜降인가 積雪인가 一樣은로 희여게다 상강인가 적설인가 일양으로 희여게다
滋甚하다 대벌기는 空莖조차 다새겻네 자심하다 대벌기⑬는 공경조차 다새겼네
져압픠 너룬들은 碧海가 말난는가 저 앞에 너른 들은 벽해가 말랐는가
이뒤예 노푼들은 秋山이 뷔엿는가 이 뒤에 높은 들은 추산이 비었는가
百谷을 혜여보니 萬無一實이로다 백곡(百穀)을 헤어보니 만무일실 이로다
고지마다 嗟歎이오 들마다 곡셩이다 고지마다 차탄이오 들마다 곡성이다
슬프다 져곡셩아 이제는 하릴업다 슬프다 져 곡성아 이제는 하릴없다
秋風이 건듯부러 梧桐의 葉落하니 추풍이 건 듯 불어 오동의 엽락하니
東務을 다시할가 西成을 望斷하니 동무를 다시 할까 서성⑭을 망단하니
이거시 뉘타시라 誰怨 誰咎 할고 이것이 뉘 탓이라 수원 수구 할 꼬
一網 乾坤의 갈데도 업서지게 일망 건곤의 갈 데도 없어지게
이時節 살펴보니 倍倍殺年 다시만나 이 시절 살펴보니 배배살년 다시 만나
官庫도 蕩盡하니 賑政인들 미들넌가 관고도 탕진하니 진정인들 믿을런가
아마도 못살인생 永訣會나 하여보세 아마도 못살 인생 영결회나 하여보세
마고떨어 수을 사고 머리버혀 안쥬사고 마구떨어 술을 사고 머리베어 안주사고
고지고지 聚會하니 永訣會가 樂事런가 고지 고지 취회하니 영결회가 낙사인가
아마도 죽글인생 令監긔 進退마라 아마도 죽을 인생 영감⑮께 진퇴마라
애답다 우리令監 巡使道의 面分업서 애닮다 우리 영감 순사또의 면분없어
監營을 가시잔들 騎馬가 이실넌가 감영을 가시잔들 기마가 있을런가
보션이 업섯거니 冬衣도 難得하다 보선이 없었거니 동의도 난득이다
(각주)
⑪ 성천․복사: 홍수로 인해 논밭이 냇물처럼 바뀐 것을 성천, 모래가 덮인 것을 복사라 함.
⑫ 여초: 남은 풀, 즉 심한 가뭄으로 불 탄듯한 땅에 겨우 살아남은 풀 같다는 뜻.
⑬ 대벌기: 소작농? 방언아닌가 싶다
⑭ 동무․서성: 동무는 농사를 시작하는 것, 서성은 추수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
⑮ 영감: 원래 정3품에서 정2품의 벼슬아치를 일컫는 말이다. 대감의 다음 호칭. 여기서 영감은 장흥부사를 지칭한 하다.
行裝이 不齊하니 邑民完行 勸치마라 행장이 부제하니 읍민완행(16) 권치 마라
馳報을 자주하샤 公道만 미덧더니 치보(17)를 자주하샤 공도만 믿었더니
公道 公道안야 人情이 公道로다 공도 공도 아녀 인정이 공도로다
使道題音 公明하샤 우리고을 낫다하고 사또 제음(18)공명하사 우리고을 낫다하고
負琵琶者 起舞하니 荷枷者도 亦動이라 부비파자 기무하니 하가자도 역동(19)이라
이題音 이러하니 이아니 一可笑가 이 제음 이러하니 이 아니 일가소가
金陵山陽 두사이요 瀛州는 압피로다 금릉산양(20) 두 사이요 영주①는 앞이로다
세고을 鼎足間의 우리고을 삼겨거늘 세 고을 정족간에 우리 고을 생겼거늘
무어시 낫다하고 之次邑의 分等한고 무엇이 낫다 하고 지차읍②의 분등하고
아모리 連凶인들 上納을 근치손야 아무리 연흥인들 상납을 끊칠소냐
行關이 連續하야 各項밧자 停止할나 행관③이 연속하야 각항받자 정지할라
大同 結役米와 □還上 乞粮本錢 대동 걸역미와 □환상 걸량본전
各色保米 運役과 統戶役 香徒役 각색보미④ 운역과 통호역 향도역⑤
區別區別 別音하랴 一時의 督捧하니 구별구별 별음⑥하라 일시의 독봉⑦하니
이리하야 못하리라 別差檢督 내여코야 이리하여 못 하리라 별차검독 내여코야
咆哮하는 號令소리 閭閻이 振動한다 호효하는 호령소리 여염이 진동한다
官令을 메셧거니 名分을 도라보랴 관령⑧ 메셨거니 명분을 돌아보랴
內庭의 作亂하니 壬辰倭亂 이럿턴가 내정의 작난하니 임진왜란 이렇던가
戶首次知 面任次知 里正次知 一族次知 호수차지⑨ 면임차지 이정차지 일족차지
(각주)
(16) 읍민완행: 고을 백성이 감영 소재지인 전주로 가는 것.
(17) 치보: 급히 보고하는 것.
(18) 제음: 이두어로 '뎨김' 관청에서 백성의 소장이나 청원서에 쓰는 판결문. 제사(題辭)라고도 하는데 소지의 좌측하단 여백에 소지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주어 증빙자료로 삼게 한다.
(19) 부비파자~ 도 역동이라: 이 구절은 고을 사또가 백성들이 올린 소장이나 원정에 대해 쓴 제음으로 판결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파를 짊어진 자가 일어나 춤을 추니 칼을 쓴 자도 움직인다'로 풀이되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20) 금능․산양: 금능은 강진의 옛 이름, 산양은 보성의 옛 이름.
① 영주: 제주도의 별칭, 당시 제주도는 전라도에 속했다.
② 지차읍: 지차는 다음가는 순서. 여기서는 흉년의 재해정도의 등급을 나눔에 우심하지 않은 고을로 결정되었다는 뜻.
③ 행관: 동등 혹은 그 이하의 관아에 보내는 공문.
④ 각색보미: 각종 군보로부터 거두는 쌀. 이 때 군보(軍保)란 군역의 하나로 정궁(正軍)으로 나가는 대신 정군의 비용을 부담했던 보인(保人)을 말 함.
⑤ 통호역 향도역:
⑥ 별음: 이두어로 분정 조정에서 할당하는 것.
⑦ 독봉: 세납을 독촉하여 거둬들이는 것. 독쇄라고도 함.
⑧ 관령: 관청의 명령.
⑨ 호수차지: 이두어로 무엇을 점유해 가지거나 무슨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여기서는 호 단위에서 면임에 이르는 향촌의 여러 일을 보는 사람임.
다자바 囚禁하고 星火로 督納하니 다 잡아 수금하고 성화로 독납하니
永嘉적 時節인가 荷擔은 무슴일고 영가적 시절인가 하담⑩은 무슨 일고
어어 亂離로다 이亂離 뉘當하리 어와 난리로다 이 난리 뉘 당하리
千兵萬馬 슬듸업고 萬財千金 네알이라 천병만마 쓸데없고 만재천금 네알이라
五大灾예 바린 谷物 이亂離을 免할넌가 오대재에 바린곡물 이 난리를 면할런가
賣買업서 바린 田地 져亂離을 當할넌가 매매없어 버린전지 저 난리를 당할런가
家藏器物 畧干거슬 그리져리 蕩盡하고 가장기물 약간 것을 그리저리 탕진하고
가는 流乞 오는流乞 져아니 避難인가 가는 유걸 오는 유걸 저 아니 피난인가
他道 各官 長程外의 니고지고 홀넛고야 타도각관 장정외의 이고 지고 흘렀고야
東西南北 岐路間의 依地업슨 저流乞아 동서남북 의지 없는 저 유걸아
風雪조차 무름슈고 어듸로 向하는가 풍설조차 무릅쓰고 어디로 향하는가
殘風向陽 어덕미츨 져집같치 반기는고 잔풍향양 언덕밑을 제 집같이 반기는고
쉬는드시 안자다가 자오도시 죽어지니 쉬는 듯이 앉았다가 자오듯이 죽어지네
물의밧진 져사람은 屈原의 忠節인가 물에 빠진 저 사람은 굴원의 충절인가
뫼혜죽은 져사람은 夷齊의 忠節인가 뫼에 죽은 저 사람은 이제⑪의 충절인가
路傍溝壑 사힌주검 無主孤魂 할일업다 노방구학 쌓인주검 무주고혼 할일없다⑫
一切肥膚는 群鴉의 所啄이요 일체 비부는 군아의 소탁이요
四肢骸骨은 諸犬의 相爭이다 사지 해골은 제견의 상쟁이다
所見도 慘測하다 져地境을 뉘免할고 소견도 참측하다 저 지경을 뉘 면할꼬
頑命이 죽잔하고 천의만 바라더니 완명⑬이 죽잖으고 천의만 바라더니
前監司 李匡德이 監賑史로 온다하니 전감사 이광덕⑭이 감진사⑮로 온다하니
(각주)
⑩ 영가․하담: 영가는 정확한 뜻을 알 수 없으며, 하담은 어깨에 짐을 지는 것을 일컫는다.
⑪ 이제(夷齊): 은나라를 위해 충절을 지키다 마침내 굶어 죽었다는 백이와 숙제(叔齊).
⑫ 노방구학․무주고혼: 노방구학은 길옆의 구렁창으로 흉년을 만나 떠돌다 굶어 죽은 경우. 무주고혼은 주인 없는 혼 즉 제사 지내줄 사람도 없이 죽은 사람을 가리킴.
⑬ 완명: 죽지 않고 모질게 살아 있는 목숨.
⑭ 이광덕(李匡德): 영조 때의 문신. 본관 전주, 자 성뢰(聖賴), 호 관양(冠陽), 1722년(景宗 2년) 정시문과(廷試文科)에 급제, 설서(設書)가 되어 왕세자(영조)의 심임을 받았다. 당쟁이 심할 때 중간파여서 노소론파의 미움을 샀다. 지평․교리를 거쳐 1728년(영조 4년) 전라도관찰사 부임, 이듬해 대대로 경작을 금지해온 전주 건지산(乾止山)을 내수사(內需司)에서 경작하려는 것을 거부해 추고(推考)를 받았다. 더구나 이인좌 난의모의를 미리 알았을 것이라는 노론의 무고로 삭직됐다. 1739년 사은부사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대제학이 되고, 1741년 지평인 동생 광의(匡誼)가 천거(薦擧)의 폐를 논하다가 투옥되자 이에 연좌, 정주(定州)․해남(海南) 등지로 유배됐다가 이듬해 풀려나 한성부좌윤에 제수됐지만 취임 않고 과천에 은거했다. 관양집이 있다.
⑮감진사: 흉년이 들 때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감독하기 위해 파견한 어사.
(144-045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44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44일차에서도 '간암공의 임계탄'이 밴드에 게재됩니다.
※ 주1) 읽는 이의 편의를 위하여 게재자가 일부 제목에 음을 달고 단락을 나누었습니다.
※ 주2) 41-46일차에는 간암공의 유작 중 '임계탄'이 계속이어집니다.
/ 무곡
흉년이 이어져도 세금은 꼬박꼬박 거두어가니 유랑걸식하는 걸인들이 넘쳐나는구나.
굴원이나 백이숙제같이 이념에 따라 물에 빠져 죽거나 굶어죽은 것이 아닐진데도 안타깝게도 군데군데 시신들이 넘치고
백성들의 생활고는 임진왜란때보다 더 심한것 같구나/ 무곡
감진사란 직책의 이광덕이란 실존인믈이 가사에 거론되는 것이 특이합니다. 통상 가사에는 실존인물이 여간해서 들어가지 않는데요./ 벽천
임계탄에도 나오는 얘기입니다만, 1731년 부터 내리 3년정도는 너무나 가물고 흉년이 심해서 벼를 제때 이앙을 하지 못해 벼 수확이 줄어드는 등으로 흉년이 악순횐이 되어 농민들의 고통이 더욱 심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말에 이앙법이 도입되어 농가의 수입이 늘수도(보리농사후 벼농사 등 이모작이 가능함) 있었습니다만, 이앙법은 제때 비가 오거나 저수시설이 잘 되어 있는등 전제 조건이 필요하기에 많은 제약이 따랐습니다. 그후 벽골제나 의림지 등의 저수지나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진 1920년대 이후 이앙법이 본격적으로 실시 되었다고 합니다./ 무곡
심지어 세종때 농사직설(정초)에 따르면 이앙법의 부작용(가뭄등으로제때 벼를 옮겨심지 못해) 으로 벼 수확이 줄어들자 국가에서는
이앙법을 금지하고 직파법으로 농사를 짓도록 하는 바람에 농민들이 이앙법을 허용해 달라고 항의하는 상소를 제기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무곡
안녕하십니까?
무더운 날씨에 천년세고선집 자료를 꾸준히 정독하시고 씨족문화 창달과 정신 수양의 방편 등으로 활용하시는 종친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간 게재분은 충렬공과 원감국사님 유고, 습독공과 남추강의 수창시, 괴봉공 유시, 청계공의 유고, 만회재공의 심양왕환일기 그리고 수우옹공의 금당별곡, 삼족당의 유시, 간암공의 임계탄 등등 모두가 주옥같은 선조님들의 귀중한 글들입니다만, 한문(시) 이나 한문투의 다소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의 글들이 주류를 이루다보니 지금쯤은 숨이 조금은 가쁠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는 사이에 44회차 까지 왔습니다.
전체 144회차 중 붙임성격의 해제편등 일부자료를 제외하면 정확하게 111회차 분량인데,
7월 말이면 52회차이니 거의 절반을 달려온 것이나 진배 없습니다.
계획단계부터 긴 걸음이라 생각하고 약 1년 정도를 연재 기간으로 삼아 왔으니 조금만 더 호흡을 가다듬으시고 끝까지 같이 목표지점까지 동행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며, 더운 여름철 건강에도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3. 7. 8.
선집 게재자 위상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