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다 (행 20:17~38)
신약성경 가운데 ‘바울의 유언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성경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입니다.
오늘 본문도 바울의 유언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아주 비장하지요.
바울은 그 뒤에 오늘 자기가 한 설교와 같이 되었습니다. 23절에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했는데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잡혀 쇠사슬로 결박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는 자유롭게 활동하는 바울의 모습을 따라 왔는데 22장부터는 갇힌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개역성경」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22절이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에 가는데”라고 되어 있을 것입니다. 거기의 ‘심령’이라는 말은 성령으로 바꾸어야합니다.
원어 ‘데데메노스 토 프뉴마티’로, ‘프뉴마티’는 ‘영’이라는 뜻인데 이것을 왜 ‘심령’이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역성경」을 손질해서 저희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판」을 만들 때의 원칙 가운데 하나가 ‘「개역성경」의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되 꼭 고쳐야 할 것은 고친다.’였는데 22절의 ‘심령’은 꼭 고쳐야할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심령에 매임을 받아’ 하면 ‘내 마음에 이끌리어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되지요. 바울은 자기 마음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 오게 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여기 ‘교회 장로들’이라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들’ ‘나이 많은 분들’ 이런 뜻입니다.
이 때까지는 교회에서 지금과 같은 장로 제도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주로 교회 밖의 사람들을 향해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달아죽인 예수가 메시아입니다. 그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울 설교의 요약입니다.
‘전도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교회 안을 향한 설교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목회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는 바울의 이 고별설교를 우리에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설교를 할 때 설교자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나는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쳐야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고별설교에서 이 원칙을 깨뜨립니다. 17절에서 38절까지 고별설교 전체에서 ‘내가’ ‘나는’ 이런 말이 열네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의 본문에 다섯 번 나옵니다.
원칙을 깨뜨리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더 강렬한 느낌을 주고 더 비장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채찍을 휘두르며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기 때문에 그 일이 더욱 강하게 전달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 ‘어떤 사람이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 라는 말을 가끔 합니다. 그 때 그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저 자신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내가 겪은 이 일이 설교의 흐름에 도움이 되는데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고, 그래서 이렇게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고생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어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기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말합니다.
19절에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이것이 다입니다.
여러분, 이야기할 때 내가 고생한 것은 좀 간단하게 말하기 위해 힘쓰기 바랍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참고’라는 말입니다.
고생은 참고 견디어야합니다.
예수 믿는 것에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은 참는 것입니다.
어느 연세 많은 목사님 한 분은 ‘무인불승(無忍不勝)’ 네 글자를 평생 목회의 표어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는 것이 없으면 이기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금식하면서 일하는데 어느 날 집에 가는 길에 쓰레기 모아 놓은 곳에
족자가 하나 있더랍니다. 뭐라고 쓴 족자인가 보았더니 지금 그 말 ‘무인불승’이더랍니다. ‘아, 주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이로구나!’ 그 족자를 가져다가 사무실에 걸어놓고 참기 위해서 힘썼더니 어려운 문제가 다 해결되고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지금도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나는 에베소에서 이렇게 일했다’라고 말합니다.
19절에서 21절까지에서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지요.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바울은 에베소에서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어디에서나 이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17절에서 20장의 끝까지를 ‘사도행전의 요약’ ‘바울 생애의 요약’ 또는 ‘바울 서신 전체의 요약’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동시에 ‘나는 앞으로 이렇게 할 것입니다’는 점도 밝힙니다.
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바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이 뒤에 이 말대로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해 총독에게 심문 받을 때 거기에서 석방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로마에 가서 황제에게 재판 받겠다’고 상소를 합니다. 황제 재판권은 당시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권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전도하기 위해 특별히 황제 앞에 서서 전도하기 위해 이렇게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32절을 보면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바울의 이 고별설교를 들으면서 우리는 ‘나는 지금 교회에서 어떻게 생활했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속장님들, 선교회 지회장님들, 교사들, 19절에서 21절 까지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합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이렇게 믿어야하겠다’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하겠다’ ‘나는 앞으로 이렇게 속회를 이끌어나가야 하겠다, 학생들을 지도해야하겠다, 선교회를 이끌어나가야 하겠다’ 다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목회서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성경들이 있습니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입니다. 목회자들, 교회의 지도자들이 지켜야 할 교훈을 담고 있기 때문에 ‘목회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목회 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 직분 맡은 분들이 지켜야 할 일들이 간곡한 어조로, 또 비장한 어조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삼가야합니다.
28절 앞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삼가라”(프로세코)라는 말은 ‘주의를 집중하라’ ‘전력하라’ ‘관심을 가져라’ 하는 뜻입니다.
직분 맡은 이들, 또 각종 직무 맡은 이들, -집사․권사․장로를 직분이라고 하고 교사․속장․선교회 임원, 각종 책임을 직무라고 합니다- 자기의 직분에 대해. 직무에 대해 주의를 집중하고 전력을 다하고 관심을 갖기 바랍니다. 삼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말 ‘삼가라’에는 ‘절제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도 절제하고, 하고 싶은 일도 절제하고, 나는 하고 싶더라도 나에게 맡겨주신 양들을 위해 절제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도 좋으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 바울은 먹어도 좋지만 믿음이 약한 성도들에게 걸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헸습니다. 삼가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자기는 음식이 형제를 실족하는 일이 없도록 영원히 고기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삼가는 일의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둘째, 직분과 직무는 성령이 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8절 중간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우리의 직분과 직무는 사람이 준 것 아닙니다. 성령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임명장에는 담임목사의 직인이 찍혀 있는데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도장도 볼 수 있어야합니다.
성령이 여러분과 저에게 직무를 주셨는데 감독자의 직무를 주셨습니다. ‘감독자’(에피스코포스)라는 말은 ‘조사하는 사람’ ‘감시하는 사람’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교회를 지도하는 사람을 감독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도 감리교회에서는 연회를 책임지고 이끌어나가는 목사를 ‘감독’이라고 부릅니다.
감리교회에서는 한 번 감독을 지낸 목사님은 언제나 감독이라고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들의 가정에 자녀의 결혼이 있어서 축전을 칠 때 우체국에 전화를 해서 받을 사람 주소와 내용을 불러줍니다. 받을 사람 주소와 이름을 ‘어디 무슨 교회 아무개 목사님’ 이렇게 부르면 금방 알아듣는데 ‘어디 무슨 교회 아무개 감독님’ 이렇게 부르면 ‘감독이라고 하셨어요?’ 하며 확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직원은 ‘감독이 무슨 뜻입니까?’ 묻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총리사’라고 불렀는데 성경에 있는 단어를 따 와서 감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감독이 아닙니다. 집사이고, 권사이고, 장로이고 목사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나는 성령에 의해 임명받은 감독이다’ 이런 긍지를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영화계에서는 ‘나쁜 감독 밑에 좋은 배우가 있을 수는 있어도 좋은 감독 밑에 나쁜 배우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교회의 감독과 영화의 감독은 뜻이 다릅니다만 우리는 좋은 감독들이 되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페라 ‘투란토트’가 많은 화제를 일으키며 월드컵 경기장에서 공연된 일이 있습니다. 영화의 감독을 연극이나 오페라에서는 연출자라고 부르지요.
‘투란토트’ 공연이 끝나고 출연자들과 제작진이 하나씩 나와서 인사할 때 연출자가 나오니까 관객들이 박수를 제일 많이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박수 받는 감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교회가 어떤 것인지 잘 알아야합니다.
28절 끝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이 교회는 하나님이 피로 사신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흘린 보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교회는 엄숙한 것입니다. 값진 것입니다.
우리는 또 순교자들의 피도 생각해야 합니다. 용인에 순교자기념관이 있는데 그 입구에 자연석으로 된 비석이 서 있습니다. 그 비석에는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서 있다’는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터툴리안이라는 교부가 한 말입니다.
세상에 많은 기관들이 있는데 교회만큼 귀한 기관은 또 없습니다.
넷째, 이단들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2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마구 해친다는 뜻입니다.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이것은 밖에서 들어온 이단을 말합니다.
외래 이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모르몬교, 이런 것들은 밖에서 들어온 이단입니다.
3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이것은 안에서 생긴 이단들을 말합니다. 토종이단, 자생적 이단을 말합니다.
통일교, 전도관(천부교), 장막성전, 시한부 종말론자들, 구원파, 그밖에도 수많은 자생적 이단들이 있습니다.
자주 성도들이 길에서 받은 전도지나 카세트를 들고 와서 ‘목사님, 이들이 이단이에요? 아니에요?’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감리교에 열세 명으로 구성된 이단대책 위원회가 있는데 제가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단 문제에 대해 잘 안다고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일반 성도들은 어떻하겠습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권면은 수상하면 가지 마세요. 수상하면 호기심도 갖지 마세요.
정통적인 교회들이 있는데 왜 수상한데 관심을 갖습니까?
다섯째,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힘서 말하고 있는 것은 ‘나를 본받아라’ 하는 것입니다.
31절에서는 눈물로 훈계했다고 했습니다.
33절에서는 물질에 깨끗했다고 했습니다.
35절에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는 지도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아렇게 하는 지도자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