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6 바람에 나는 겨인가? 시냇가의 나무인가?
악인은 어떤 자인가? 말씀의 법규를 위반한 자로서, 말씀의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자이다. 이들은 철저히 본인의 욕심(이기심)과 유혹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따라서 이들에겐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경외심이 없고, 그 의무 또한 소홀히 여긴다. 이런 악인들은 믿음대로 살기보다 반복해서 악을 행하다가 죄인으로 발전한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는 일에 동참한다. (청중) - 여러분의 말과 행동의 출발은 무엇인가? 욕심(이기심)인가? 그렇다면, 우리도 말씀을 수시로 범하는 악인이요 죄인이다. 마귀는 이런 자들에게 들어가서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마귀를 위해 봉사하기 시작한다. 눅22:3을 보면,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다. 유다가 평소 죄를 짓고 있었다는 뜻이다. 요13:2에서는, 마귀가 벌써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었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 행동했는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 줄 방도를 의논했다.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왜 유다는 하필 그들을 찾아갔을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로서,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의 욕심과 맞물렸기 때문이다. ‘유유상종’이라고 악인은 본능적으로 본인의 욕심을 채워줄 악인을 알아본다. 말하지 않아도 자석처럼 철썩 달라붙어서 서로 잘 어울리고 뭉친다. 마귀의 나라를 돕고 발전시키기 위해 철저히 음모를 꾸민다. (청중) - 혹시 여러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포섭하고 있는가? 죄송하지만 마귀에게 걸린 것이다.
유다와 그들은 음모를 꾸미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향해 얼마나 많은 욕을 했을까? 입에 담을 수 없는 악한 말과 비난과 조롱과 저주가 오고갔을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반드시 죽이자고 결의했을 것이다. 그들은 오만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유다는 무리가 없을 때에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그는 돈을 받고 본격적으로 죄를 업으로 삼아 죄에 착수했다. 그의 양심은 화인을 맞은(인두로 지진) 것처럼 도덕적 감각이 상실되었고(도덕불감증), 영혼이 점점 굳어가는 “영적경화”에 걸리고 말았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에서 유다에게 떡 한 조각을 주면서,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진짜 하라는 소리일까? 맞다. 하지만 동시에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이때 유다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예수님 죄송해요. 제가 그만 돈에 눈이 어두워서 예수님을 팔 생각을 했어요”라고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회개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버렸다. ‘속히 하라’고 말씀한다고 그걸 또 유다는 하고 있다. ‘하라고 했잖아. 그래서 했는데 뭐 어쩌라고?’라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그의 행동을 보면, 이성이 가출한 것 같고, 어이없고,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유다는 왜 이런 오만한 행동을 했을까? 성격이 못돼먹어서? 상처를 많이 받아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요13:27에 보면, 예수님이 떡을 줄 때, 사탄이 유다 속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그는 죄를 저지르며 사탄에게 사로잡힌 자로서, 예수님조차 그 계획/욕심을 꺾지 못할 정도로, 그의 죄(욕심)를 악인들과 구체화시켰다. 마귀가 강력하게 힘을 실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음모를 들춰낸 예수님에 대해 강한 반발심이 생겼다. 그래서 뛰쳐나갔던 것이다. 오만/교만의 극치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한번이라도 깊이 생각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요13:30은 그때가 밤이라고 말한다. 유다의 영혼은 그야말로 마귀에게 잡힌 어두운 밤이었다. (청중) - 내 욕심과 감정을 누군가가 무시하면, 하나님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적(敵)으로 간주해 버리는가? 무시 받으면 당연히 화난다. 그러나 그 분노가 말씀의 선을 넘어서 자신의 욕심과 감정을 채우는 것이라면, 악인/죄인/오만한 자이다. 내 욕심과 감정이 채워지지 않으면, 말씀/예수님/교회/목회자고 뭐고 없는가? 격분하며 욕하며 날뛰는가? 이 또한 말씀이 아닌 욕심에 이끌려 악인/죄인/오만한 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악에 받쳐 길길이 날뛰며 격분한 유다는 어디로 갔을까? 말씀 듣기 위해 교회로? 참회의 기도를 하기 위해 기도의 자리로? 용서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에게로? 그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유다는 함께 음모를 꾸민 악의 무리에게로 갔다. 정체가 드러났으니 시무룩해졌을까? 아니다. 더 격분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더 나아가 그 동안 감췄던 자신의 정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잡기 위해 감람산으로 왔다. / 유다는 원래 어떤 사람인가?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 중에 12명의 제자 엔트리(entry)에 든 영예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해지다보니, 악인들과의 모의를 서슴지 않았고, 결국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악한 자가 되고 말았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배은망덕). (청중) - 무리를 지어 뭔가 꼬투리를 잡아서 여론을 형성하고, 그 여론에 힘입어 공개적으로 교회를 대항하려고 하는가? ‘이건 잘못된 것 아니냐?’라고 따지고 싶은가? 진리의 말씀에서 시작되었다면 저항하고 따져야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가 아니라 감정과 욕심에서 시작되었다면, 오만한 것이니 회개하길 바란다. 마귀의 길이다. 이들이 말씀을 즐거워할까? 아니다. 말씀을 묵상할 리는 더더욱 없고, 기도도 하지 않는다. 설사 기도하더라도 형식에 불과하다. 주님과 교제가 없다. 당연히 회개도 없다. 잠29:18에 묵시(말씀)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무례/건방짐) 행한다고 했다. 회개함으로써 이런 거짓된 욕심에서 빠져 나오길 바란다.
하나님은 이들을 좋아하실까? 아니요. 인정하지도 않는다. 4절에 보면, 이들을 바람에 나는 겨에 비유하셨다. 겨는 알곡이 아니다. 껍질이다. 무가치하다. 겨는 탈곡 과정에서 알곡 속에 잠시 섞여 있을 수 있다. 이처럼 악인은 의인의 모임(예배/기도/전도)에 적발되지 않을 채로 함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농부가 손에 키를 들고 흔들어 댄다면 겨는 어떻게 되겠는가? 더 이상 알곡과 함께 있을 수 없고, 분리되어 이리저리 나부껴야만 한다. 더 이상 알곡행세를 할 수 없다. 나부낀 겨는 불에 태워지는 심판을 받는다. 그래서 5절에 보면,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의인들의 모임에 들어오지 못 한다’고 말씀하셨다. 6절을 보면, 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따라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계신 에덴에서 추방되어야 했고, 가인 또한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해야 했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의 반열에서 제명되어 자살했고, 고라와 그 일당들은 제단에서 나온 하나님의 불에 타 죽음으로써 하나님이 계신 이스라엘의 회중에 들지 못했다. (청중) - 악한 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배/기도/목장모임에 들어오지 못한다. 들어오고 싶어도 못 들어오고, 또한 들어오기 싫어서라도 못 들어온다. 하나님께서 양과 염소를, 가라지와 곡식을 구별(분)하실 날이 온다. 어쩌면 이미 우리에게 이런 심판이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속히 마음을 낮추고 욕심을 회개하길 바란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자일까?》 이들은 말씀의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방법을 통해 말씀의 수액을 끊임없이 끌어올린다. 빨아들이는 수액은 온 나무와 잎사귀로 전달되고, 잎사귀는 수액과 태양과 공기 중에 있는 이산화탄소와 결합하여 광합성 작용을 함으로써 엽록소가 풍부해져서 그 푸름을 자랑하고, 영양분(당분)을 만들어 열매와 나무 전체에 다시 돌려준다. 견고하고 싱그럽고 풍족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히5:14을 보면,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단단한 음식이 무엇인가? 말씀이다. 지각을 사용할 때,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역시 말씀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장성한 자만이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연단을 받고 말씀을 잣대로 하여 선악을 분별한다”는 뜻이다. 고전2:15에서는 신령한 자(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자)는 철저히 말씀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판단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말씀에 물들어 있다. 그들의 언행, 실천, 판단, 가치관, 회개, 동기가 철저히 말씀에서 나온다. 이처럼 말씀 센서가 너무 좋아서 이들은 죄악(욕심)의 냄새만 맡아도 역겨움/불편함을 느낀다. 죄(욕심)를 밀어낸다. 차단시킨다. 몸이 반응하기 전에 영혼이 먼저 반응한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 그들의 모의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들의 충고를 따르지 않는다.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않는다. 그들을 닮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만 한 자의 자리도 앉지 않는다. 멀리한다. 멀리 할 수 없을 땐, 기본적인 대화 이외엔 친밀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악인/죄인/오만 한 자에게선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반응이다. 이들은 말씀대로 행하여 형통한 사람들을 보면, 기뻐하고 축하해 주고 도전을 받는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멋지다.’ 왜? 말씀으로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인/죄인/오만한 자들은 역겨움을 느끼고, 비교하고, ‘잘 났어 정말. 저런 말 좀 안했으면 좋겠다. 듣기 싫다’라고 비난하며 거부한다. 넘어뜨릴 꼬투리를 찾는다. 왜? 그 안에 진리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함으로써 말씀의 수액을 풍족하게 받아 그 말씀대로 판단 실천하여 말씀의 영양분을 풍족하게 만든다면, 푸른 잎사귀와 철을 따라 항상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욕심으로 속이 텅 빈 겨, 바람에 날리는 겨, 불에 태워질(심판받을) 겨와 완전히 차원이 다르지 않는가!
예수님 당시 최고의 권력 기관은 공회/산헤드린이었다. 공회원은 종교와 모든 재판을 총괄하고 있었고, 경찰권까지 행사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70명이 넘는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죽이자는 모의(꾀)에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만약 여기서 어느 누군가가 거절을 한다면, 조직의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더 이상 공회원이 될 수도 없고, 공회원이 누릴 수 있는 혜택과 권한이 박탈당하고, 어쩌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할 수도 있다. 따라서 싫어도 예수님을 죽이자는 모의에 찬성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악한 결의와 행사를 거절한 공회원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정성스럽게 장례까지 치렀다. 그는 누구인가? 아리마대 요셉이다. 대단하지 않는가! 멋지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눅23:51에 보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다. 마27:57에서는 그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묵상했던 자였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기만 하면, 불의(악인/죄인/오만자)와 타협하지 않을 수 있고, 목숨까지 내놓을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여호와께서 인정하는 의인이다. 이런 복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요셉을 보라. 그는 노예였다. 하지만 마님이 요셉을 마음에 품었다. 마님은 하룻밤 같이 자자고 제안을 했다. 이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까? 성공하려면 마님의 말을 들어야 한다. 마님의 눈 밖에 나면 그날로 요셉의 인생은 끝이다. 그러나 요셉은 여주인의 악한 꾀(유혹)를 따르지 않았다. 함께 있지도 않았다. 붙잡은 옷을 버려두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요셉은 철저히 죄(불륜)를 멀리 했다. 주인 보디발은 요셉을 총무로 삼았다. 그의 집은 요셉으로 인해 날로 부유해졌다. 보디발은 완전히 요셉을 신뢰했다. 따라서 요셉은 충분히 주인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오만한 자리(주인행세)에 앉지 않았다. 이렇게 했더니 누가 알아주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노예보다 더 심각한 죄수가 되어 옥에 갇혔다. 말씀대로 살아보았자 풀리지도 않는 자신의 인생을 보면서 요셉은 얼마나 절망했겠는가! 그러나 그는 교도소에서도 형통했다. 사회에서 성공해야지 감방에서 성공하면 뭐하는가? 그러게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죄수 요셉이 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요셉이 하루아침에 총리가 되는 것도 놀랍지만, 어떻게 죄수가 총리가 될 수 있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요셉은 17세 때 꾸었던 꿈/말씀을 늘 생각했다. 노예로 팔리든, 총무생활을 하든, 죄수의 삶을 살든 어디서든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했다. 그래서 마님의 유혹/꾀를 따르지 않았고, 오만한 자의 자리도 앉지 않았다. 이 모습을 하나님이 다 보시고 요셉을 인정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누구도 풀 수 없는 꿈을 꾸게 하여 요셉만이 풀게 하였고, 하나님이 주신 답으로 14년의 풍년과 흉년을 지혜롭게 해쳐나갈 수 있었다. 요셉의 형통/성공 키워드는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한 데 있다.
결론 -
현재의 고민과 갈등을 무엇으로 풀고 있는가? 감정과 욕심으로 풀고 있는가?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는가? 여러분의 인생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말씀으로 풀고 있는가? 여러분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많은 열매와 푸름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형통가게 될 것이다.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라. 말씀이 들리는 예배의 자리로, 하나님의 답이 쏟아지는 기도의 자리로 나오길 바란다. 말씀으로 현재의 일을 해석해 내길 바란다.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여 여러분 안에 있는 감정, 욕심을 제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