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평론가 최철주의 사진평론 : 신디 셔먼의 도자기에 제판한 사진/퐁파두르 후작부인, 푸아송
<보이지 않는 가족展 - 1 신화를 해체하기> 20160405-20160529 서울시립미술관
사진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신디 셔먼의 도자기에 제판한 사진 <퐁파두르 후작부인, 푸아송>
신디 셔먼은 자신의 신체로서 시대성을 반영하는 페미니즘의 언표행위적 사진 표현을 한다.
언표로서 영화의 시퀀스에 맞춘 의상과 분장을 하고서 등장 인물을 가역시킨 언표행위적 연출로서 남성 중심의 일반적 사회에 대한 차별에서 벗어나려는 주체로서 여성의 부당한 상황을 사진의 언표행위를 기호화하여 사진의 의미를 다루는 구조를 보인다.
사진으로서 성적 언표행위와 마주하는 남성에 대하여 경계하는 언표를 지속하여서 돌이킬 수 없는 여성의 정체성을 말한다.
그녀는 사회적 매너리즘의 실재적 표상으로서 여성이 사회적 관념에 억압된 사진을 보인다. 그 사진은 실재로서의 이미지를 도자기에 등장시킨다. 이것은 실재의 사진이 아닌 연출되어진 초상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사진을 제판한 도자기는 동시대의 사회상을 실재의 기의로 접근하여 중의성의 사회상을 드러낸다.
즉 실재의 사진 이미지로서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동시대의 사회적 관념과 사진의 예술적 가변 요소로서 도자기를 배경으로서 정해진 시대와 인물의 사진을 포함한 실재적 도자기를 재현한 것이다.
이렇게 신디 셔먼은 자신의 자화상을 통하여 동시대의 자화상을 그려내어서 역사적 인물을 재현하고 초상화로서 패러디한 포스트모던의 독자적인 사진의 방식을 이룬다.
도자기 <퐁파두르 후작부인, 푸아송>에서 신디 셔먼은 퐁파루드 후작부인으로 분장한 사진제판을 도자기에 전사한다. 이것은 피감상자에게 중의적 메시지를 제공하여서 피감상자에게 사진의 의미와 도자기의 용도를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따라서 역사적 인물을 패러디한 도자기의 용도의 중의성을 이용하여서 그녀는 동시대의 퐁파루드 후작부인의 자화상을 이끌어낸다.
서울시립미술관 2층 전시장 입구 중앙에 신디 셔먼의 도자기<퐁파두르 후작부인, 푸아송>가 보인다. 뒤에는 아네스 조프레이의 <일시정지>가 있다. 마치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실상을 듣고 있는 배심원들과 같다.
시각적 관점에서 공간적 개념은 시간성이 개입됨에 따라 <일시정지>는 그녀의 사진적 공간에 대한 대상의 관계로서 의미작용을 순간 멈추게 하여서 이제의 공간을 지각하게 한다. 이 지각은 정지된 시선에 존재하는 대상과의 관계적 시각적 형상이다.
대상을 보는 시선의 움직임은 공간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기 때문에 모방적 사진은 본래의 형상을 거짓으로 꾸며진 의미의 차원이 된다.
따라서 정지된 사진에서 마주하는 시선의 언표행위는 도자기의 형태에 사진제판된 후작부인과 도자기의 용도가 언표적 의미가 된다. 여기서 사진제판의 후작부인 이미지는 배경이미지에 영향을 받지않고 도자기의 용도의 의미로서 푸아송이 된다. 이렇게 도자기는 후작부인의 의미의 대상이 되어서 또 다른 후작부인으로서 푸아송의 의미의 구조를 이룬다.
즉 후작부인의 시선으로서 언표행위는 도자기와 사진제판의 후작부인이 연쇄화 하여서 푸아송의 언표내적 효력(言表內的效力)이 되어서 푸아송이 말로 드러내는 의미로 작용하는 결과로서 말하려는 것에서 얻어지는 푸아송과 구별되는 또 다른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하여 표적의 대상을 끌어들인다.
이것은 후작부인에 대한 루이15세의 사회적 매너리즘에서 실재적 표상으로서 후작부인이 동시대의 사회적 관념에서 자기의 뜻대로 자유로이 행동할 수 없었던 억누름된 푸아송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것은 <퐁파두르 후작부인, 푸아송>에서 신디 셔먼이 동시대의 실재적 내용으로한 중의성을 도자기에 표출한 것이다.
푸아송(poisson)은 언표로서 생선이지만 그것의 언표내적인 효력은 사치스러운 퐁파두르 후작부인을 의미한다. 푸아송의 의미를 향유하는 수준의 사진은 상상적 의미로서의 비실재를 은폐하고 후작부인의 또 다른 의미들을 늘어서게 하여서 주체의 의미로서 푸아송(생선)을 남기고 후작부인을 소거한다.
푸아송 요리는 루이15세가 가장 즐겨했던 것이다. 즉 후작부인이 사진제판된 도자기는 루이 15세가 즐겨했던 생선이 담겨있는 것으로 의미가 전이된다.
이것은 본래의 사진 의미를 드러나지 않게 보이려는 위장된 신화에 대한 거부감을 담고 있다.
보들레르의 미(美)는 인간의 이원성의 숙명적 결과에 따르지만, 신디 셔먼은 예술적 사진의 이원성으로 위장된 신화를 출현한다.
즉 도자기에 하나의 사진제판이 언표내적 효력을 일으켜서 도자기의 의미를 종결하고 실재로서 푸아송의 해체된 신화를 표상한다.
글. 미술평론가 최철주(디자인학박사)의 신디 셔먼의 도자기에 제판한 사진 평론
신디 셔먼의 도자기에 제판한 사진 사진제공 : 서울시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