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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순 마리아 어머님의 ①살아생전의 뜻(마음가짐)을 받들고 “100세에 세상을 뜨신 ②어머님의 공로”를 기려본다.
2024. 3.23일 이경용 씀.
☆이길순 마리아(천주교 세례명)님의 선종일은 2024.3.17.일 22시53분이다.
☆7남2녀의 자식을 낳으셨고 조카딸 이정임까지 자식으로 여기셔서 총10명이다.
①아들.②딸③아들④아들⑤아들(경용:1956년생)⑥딸⑦아들⑧아들⑨아들⑩조카 딸
☆딸 1명(이순옥:1958년생)은 7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 시어머님을 33년간 모셔준 이경용의 아내.
이길순 어머님이 100세까지 사시는 동안, 넷째 아들 이경용의 집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33년간, 시어머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셔준 아내였다.
아내가 시집을 온 후에, 수영할 줄 모르는 시어머니를 22년(67세~89세)동안, 수영장에 다니게끔 뒷바라지를 해준 이경용의 아내였다.
2. 100세 어머님이 쓰다 남기신 용돈 잔액 3300만원과 조의금 잔액800만원을 공평하게 나눠줌.
①넷째 아들 집에서 사시면서, 쓰시다가 남기신 이길순 어머님의 용돈 잔액 3300만원을 조카 이정임(500만원 배분)과 많은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넷째 아들 부부가 아니었으면 용돈 잔액 3300만원은 없었을 것이다.
어머님을 모시면서 병원비, 약값, 외식비, 소고기 육회, 토종닭 등의 모든 생활 비용은 거의 이경용부부가 부담해버려서 용돈이 쌓이는 것이었다.
②조의금 총수입이 3400만원이고 장례비 등의 지출이 2600만원이었다.
넷째 아들 부부 앞으로 제일 많은 조의금(약 50%가까이)이 들어와서 적자가 아니었고 장례비 등을 지출한 후에 남은 잔액이 800만원이었다. 조카 이정임과 자식들에게 100만원씩 똑같이 배분해준 이경용 부부였다.
3.조카 이정임을 딸로 여기신 어머님의 뜻(마음가짐)을 받들다.
①. 어머님께서 이정임(6.25 한국전쟁후, 전주시 예수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남동생 이선우의 딸임)을 친딸로 여기셨기에 살아생전의 뜻을 받드는 이경용부부이다.
②. 외삼촌이 1953년도에 세상을 뜬 후에 59세의 외할머님은 친손녀인 이정임의 손을 잡고 이길순 딸집에 오셨다. 이정임은 12년간(1956년의 10살 때 와서 22살에 결혼)이길순 고모 집에 살면서 사촌 동생 9명(7남 2녀)을 돌봐주고,
빨래. 밥. 음식. 설거지. 정미소 가래떡 일. 돼지 밥 주기 등의 수많은 일을 하였으며 시집을 갈 때는 단돈 1원 한푼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③이경용 나이 32살 때(1987년), 빚 독촉에 시달리던 이정임 누나의 빚을 갚아줌.
☆경남 울산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 청량리역에서 만난 “누나의 빚 독촉을 당하는 슬픈 사정”을 들어보니, 마음이 아팠다.
☆ 수중에 돈이 없어서 채권자(울산 신협)에게 직접 전화하여 몇 개월 뒤에 찾게되는 3년 만기 재형 저축 돈으로 갚겠다(8급 공무원의 신분을 걸고)고 하니 빚 독촉을 안하겠다고 하였다. 약속했던 빚 260만원을 계좌송금(1987.12월)해주었다.
☆이정임 누나가 고모집(이경용 집)에서 12년간 식모처럼 고생하면서, 동생 이경용을 업고 다니며 키워준 은혜를 생각하면 그런 빚은 당연히 갚아줘야 생각했기에, 청량리 역 앞에서, 곧 바로 빚 상환 약속을 해준 것이었다.
★정임 누나의 딸(박영미)이 보낸 감사의 글(2024.6.19.일).
-제가 어렸지만 집 안에 큰일이 나서 매일, 불안과 눈물 속에 지새울 때, 삼촌(이경용)이 도와 주셔서 위기를 모면했던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나중에 결혼해서 보니, 내 살림하면서 누구를 돕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고 나니까? 더욱 그 일이 생각났어요. 그 때(1987년) 삼촌도 어려웠을 텐데 3년 만기 재형저축을 주시다니 진심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④. 이정임 누나가 집을 처음 취득하면서 생긴 빚을 전부 갚아줌.
상기와 같이 외사촌 누나 이정임씨가 고모 이길순 집에서 고생했던 과거의 헌신과 공로를 알기에 동생 이경용 부부가 이정임 누나가 아파트를 처음 마련하면서 발생한 1992년도의 빚을 전부 갚아주었다.
누님! 살면서 빚 없이 고통 없이 살아야 해요. 매형께서는 돈을 안 받겠다고 하였으나, 강권하여 아파트 취득으로 발생한 빚을 전부 갚아드렸다.
⑤. 매형의 큰 수술로 “딸 시집 보낼 돈”이 없었기에, 이정임 누님에게 “시집 보낼 비용”을 보내줌.
누님! 딸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지요? 하자, 잠시 침묵 뒤에 “매형이 큰 수술(걷다가 넘어져서 엉덩이 고관절이 부러짐)을 하여 ”딸 시집 보낼 돈“을 전부 써버려서 큰일”이라고 하였다.
큰 수술에 들어간 비용 “350만원(1993년도)을 이정임 누님의 계좌로 송금”해주었다.
그 딸이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후에,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의 명문대학교 스탠포드에 박사과정으로 현재 유학중(2023년~)”이다.
이정임 누님의 외손자가 훌륭하게 자라주어 너무나 기쁜 일이다. 살아생전에 매형께서는 처남(경용)의 도움을 크게 고마워하셨고, 나중에는 용돈마저 일체 받지 않으려고 하셨다.
2017년 추석 때, 매형께 용돈(100만원)을 보내드렸는데 4 개월 뒤(2018.2.2일)에 세상을 뜨셔버려 저승길을 가는 노잣돈을 주었나 싶었다.
사후에 시신을 의과대학에 기증하실 정도로 인간 사랑이 매우 깊으신 매형 박정봉님이다.
4. 살아생전 이길순 어머님의 지대한 공로.
① 1969. 4월경에 정미소 공장이 부도가 났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망하여 자식들은 학교도 못다니게 되었다. 셋째 아들만 명문 중학교, 고등학교를 계속 다녔다.
②. 1969년도에 서울의 변두리인 상계동에서 45세의 어머님은 14세의 어린 아들 경용이와 둘이서 밑바닥의 천한 주막식당(밥.술.안주)을 운영하여 대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였고 혹독하게 고생하셨다.
③. 셋째 아들이 전남 광주의 제일 고등학교를 졸업(중2~고3)할 때까지 2명(어머님, 넷째 경용)이서 돈을 벌어 4명(셋째와 동생3명)을 전부 학교에 보내야 하였다.
③61세의 아버님은 돈이 없어 전남 대학병원에서 쫓겨났고, 초라한 주막식당 안의 작은 방안에서 남편의 대소변을 1년(1973년~1974년)간 치웠던 어머님이시다.
주막식당을 운영하면서 남편의 대소변까지 치우며 혹독한 고생을 하셨다.
5. 넷째 아들 이경용의 인생환경.
☆. 우리 넷째 아들처럼 형제를 많이 도와준 사람은 조선팔도에 없을 것이라고 칭찬을 해주셨고 “주는 자가 복이다”고 하신 신부님의 말씀을 수없이 반복하셨다.
①. 남자 형제 7명 중에서 이경용이 혼자만 초등학교 졸업의 검정고시 출신이다. 1969년도인 14세부터 21세까지 7년(식당. 공장. 짐자전거 배달)간 돈을 벌어 대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였다.
②. 주막식당이 잘 안되어 빚이 늘어가자 이경용은 막걸리 짐자전거 배달에 나섰다. 대가족의 생활비 외에 “셋째 아들의 중고등학교 하숙비, 학비 때문에 이길순 어머님과 동생 이경용에게는 제일 큰 고통”이었다.
③1973년도에는 오토바이 사고를 크게 당하여 큰 부상을 입었고 피해 보상금으로 가해자(음주 오토바이)로부터 20만원(집값60~70만원 할때임)의 큰돈을 받았는데 빚(경기쌀집, 복송여인숙 등)부터 갚아야 하였다.
③1976년도에는 짐자전거 3년의 노동일을 그만두고 독서실에서 1달 공부하면서 “수학2권을 7일간, 국사와 일반사회 2권을 5일간, 영어와 국어까지 마스터하여,
3과목(수학, 국사, 일반사회)을 전부 100점”을 맞아 국세청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였지만 가족 부양 땜에 대학을 포기하였다.
④주막식당의 천하고 험한 일로 12년(1969년~1981년)간, 헌신의 삶을 살아오신 이길순 어머님과 동생 이경용에게 형 3명은 ☆큰 불효(요양원에 보내려는 사건 등을 일으킴). ☆큰 상처 ☆큰 고통을 주었다.
6. 형 3명을 제쳐두고 “넷째 아들 이경용에게만 유언을 하신 아버님”.
① 자식 중에서 혼자만 돈을 벌어 병든 아버님께 막걸리 배달의 월급과 일당을 갖다 바친 19살의 이경용에게만 유언을 하신 아버님이시다.
②병이 들어 죽음을 앞두고서 넷째 아들 이경용에게 말씀하시길 “초등학교 다니던 어린 자식 3명을 가리키며 불쌍하다”고 눈물을 글썽이셨다.
③돈이 없어 공동묘지에 묻더라도 묘지를 잊어버리지 않게 “튼튼한 나무 말뚝으로 만든 비석”을 깊게 박아달라고 여러번 말씀하셨다. 지금 이런 글을 쓰면 69세의 이경용은 눈물이 난다.
④1974.5.6일에 죽는다고 수없이 경용에게 알려주셨고 그날, 세상을 뜨셨다.
“62세의 남편 시신”을 붙잡고 “나혼자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가십니까?” 통곡하던 50세 어머님의 슬픈 목소리가 초라한 주막식당을 울렸다.
⑤아버님의 유언을 받들어 동생 3명을 잘 살게 해주려고
☆1명에게는 큰돈 2억(1997년 41평의 아파트를 팔은 값임)을 주었고
☆2명에게는 큰돈이 될, 아파트 분양권을 사주었습니다.
7. 생전 어머님이 “가슴 아파하고 보고 싶어했던 자식 2명(이순옥, 이정순)”
①100세 어머님이 2024.1.17일 인사불성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에 2일만에 깨어나셨다. 넷째 며느리가 “어머님 누가 제일 보고 싶어요!”하자
☆순옥이(60년 전에 죽은 7살이었던 딸: 1958년생)!!!하였고, 조금 있다가 ☆죽었지!!!하셨다. 가슴 속에 품고 지내던 60년 전에 죽은 순옥이!! 라는 말씀에 넷째 며느리는 눈물을 흘렸다.
②그 다음에 누가 제일 보고 싶어요?하자 정순이!!!하셨다. 정순이는 3살 경에 풍이 걸린 후에, 머리가 안좋아서 학교 성적이 최하위로 어머님의 아픈 손가락이다.
③어머님께 딸 정순이가 오면 300만원(현금 봉투를 만들어 드림)을 주세요 하자, 너무나 좋아하시는 어머님이셨고 넷째 아들에게 고맙다고 하셨다. 늙으신 어머님께 평시, 돈을 많이 쓰게끔 배려해야 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이다.
④당장, 딸 정순이를 오게 하였고 현금 300만원을 딸에게 주시면서 너무나 좋아하시며 크게 환하게 웃으셨던 살아생전의 어머님이다.
⑤어머님의 자식 중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인 이정순 누나를 도와줌.
이정순 누나는 동생 이경용에게 말하길, “자식들(딸3명, 아들1명)을 가르치고 잘 살 수 있게 도와주어 고마웠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
자식 중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인 딸 이정순에 대한 어머님의 뜻을 잘 알고 있기에 정순 누나를 도와주었던 것이다.
8. 넷째 며느리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생전의 어머님!
① 딸 2명(순옥, 정순)을 찾으신 뒤에, 넷째 며느리에게 “☆네가 나를 살려냈다”하시며 고마워하셨고 “☆나쁜 며느리였으면 진즉에 죽었을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②쓰러진 날(2024.1.17.일)로부터 딱 2달 뒤에 세상을 뜨셨다. 죽음을 앞두고 어머님께서는 딸 정순에게 300만원 준 것을 감안하면 어머님의 자식 중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인 딸 정순에게 용돈 잔액 1천만원을 배분한 것이다.
9. “100세 어머님의 유언”이 된 마지막 말씀
※. 2달 동안 몸을 전혀 못쓰는 100세 노모를 아내와 같이 수발한 것이 이경용의 마지막 효도였다.
① 세상을 뜨기 3일 전(2024.3.14.일, 오전 11.50분)에 넷째 며느리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셨다.
“☆이제 얼마 못 살거다. ☆네가 이쁘다. ☆잘 생겼다. ☆반짝 반짝 이쁘다”고 칭찬을 해주신 시어머니의 유언같은 말씀에 며느리는 눈물을 흘렸다.
②어머님 “★저희(넷째 부부)와 오랜 세월 참 좋게 살았어요” “★어머님! 천국에 가게 기도하세요”하였다. 옆에서 넷째 아들도 마음이 아파 울어야 하였다. 이후, 말 한마디 못하시고 3일 뒤에 세상을 뜨셨다.
10. 어머님을 33년간 모셔준 아내 이숙희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합니다.
①2달 동안, 기저귀에 싼 대소변을 치우고 깨끗이 닦아주고 욕창(허리. 엉덩이)에 약을 발라주는 넷째 며느리에게 감사의 유언(이쁘다. 고맙다 등)을 하셨다.
②세상을 뜨신 날, 3번(아침10.30분. 오후5.30분. 오후8.30분경)의 검은 대변을 보셨고 깨끗이 씻어준 아내는
그 전날(2024.3.16.일)에 머리도 깨끗이 감겨드렸는데, 완전히 목도 가누지 못하시는 어머님을 보니 세상 이별이 왔음을 느꼈다.
아내 옆에서 물 심부름, 치우기 등을 해주는 경용이다. 몸져누운 어머님을 들어 올려서 변기에 앉히고 들어서 침대에 눕히고 나면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린다.
③아내가 집에 없을 때, 경용 혼자서 기저귀에 싼 검은 변을 치우고 닦아드렸는데 살아생전의 효도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④마지막 날(2024.3.17일), 3번째 검은 변이 묻은 100세 어머님의 몸을 깨끗이 씻어드린 후에 침대 바닥 이불과 덮는 이불도 새로 갈아드렸는데,
늦은 밤에 세상을 뜨시자, 그 바닥 이불을 몸에 감싸고 병원 장례식장에도 가셨다. 몸도 깨끗이 하고서 깨끗한 이불에 몸을 감기고 가셨으니! 축복이다.
⑤ 7남 1녀의 자식을 둔 시어머님과 살면서
- 33년간 모시면서 대가족의 명절과 제사까지 지내주었고,
- 형3명. 동생3명. 누나 2분과 관련된 수많은 사건(불효 등)과 일을 헤쳐 나가고
- 가난한 형. 동생. 누나들을 돕는데 적극 앞장선 아내에게 무한한 감사를 올립니다.
11.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자질과 능력으로 큰돈을 벌었고 베풀며 살려함.
①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식당일, 짐자전거의 중노동일을 하면서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독서실에서 1달 공부하여 국세청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은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타고난 자질 덕분이다.
②그런 능력과 자질을 바탕으로 부동산 사업(건축, 토지 개발 등)으로 아주 많은 돈을 벌어서 형, 동생, 누나들을 도와주고 베풀며 살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어머님께 불효를 저지른 아들 3명.
①아버지 이귀섭 님은 18살(1930년)에 일본에 건너간 뒤, 온갖 고생 끝에 고무신 공장(오사카)으로 크게 사업성공을 하셨다.
②조국이 해방되던 1945년에 귀국하여 정미소, 과수원, 기와집을 가진 부자였으나
애지중지 귀하게 키운 “큰아들이 흥청망청 돈을 많이 써버려서 정미소 공장의 부도가 발생하였고 마지막 재산까지 탕진”해버렸다.
③집안이 완전히 망하여 가난에 빠져 있을 때, 첫째와 둘째아들은 집안을 전혀 돕지 않았고 나이 어린 넷째 아들만 돈을 벌어서 ☆셋째와 동생들 3명을 부양하고 ☆학교까지 보내야야 하였다.
④첫째 아들의 큰 죄악을 용서해주고 “평촌 32평 아파트까지 그냥 사준 넷째 아들 이경용”이었다. 둘째에게도 첫째만큼의 큰돈을 주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⑤고위 공직까지 지낸 셋째 아들은 요양원 사건을 일으키며 “어머님께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주는 최악의 불효”를 저질렀다.
⑥정년 퇴직후 모시겠다는 약속으로 셋째 아들이 어머님을 4년간 모시고 살 때, ★어머님이 누나 2명에게 돈을 주는 것도 싫어하고 반대하는 셋째 이야기를 하면서 “★넷째하고는 너무 다르다”고 하셨고
⑦ 어머님 수중에 돈이 얼마 있어요 묻자, 셋째가 관리해서 얼마 있는지 모른다.고 하셨으며 혼잣말로 “★내 죽으면 지(셋째)가 다 쓰려”고 하셨다.
어머님 가슴에 못을 박는 불효였으며, 모시기 싫어서 넷째 동생에게 온갖 화풀이(구안와사 사건 등)를 하였다.
넷째 집에 28년을 살다가, 2014.12월에 셋째 집으로 오면서 어머님 명의의 ★정기예금 통장2개의 해약금만 3090만원이었는데 ★통장 전체 잔액 8만원(2018.5.21일)을 남기고 다 써버린 셋째였다.
⑧셋째 집을 떠나 요양원에 안가고 재활치료 병원을 거쳐 넷째 아들집에서 모시게 되자 갑자기 1천만원(2019.3.4일)을 어머님 통장에 입금해준 셋째 아들이었다.
셋째 아들의 돈에 환장한 이기적 행위에 놀랄 뿐이었다. 넷째 아들집으로 오셔서 약 5년간(95세~100세)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넷째 아들집에 계실 때의 “어머님 용돈 사용 및 보유 현황”:
①셋째 아들 집에서 4년(2014.12월~2018.12월)간 모시기 전에, 넷째 아들 집에서 28년을 살때는 어머님이 직접 은행을 다니시면서 통장을 관리하였고,
②어머님 명의의 ☆정기예금 통장 3천만원(1천만원+2천만원)이 있었고, 별도로 ☆일반 예금통장이 있었고 ☆집에 현금 보유액이 항상 200만원이 넘게 있었다.
③셋째 집을 나와 또다시 넷째 집에서 5년 동안, 살면서 어머님이 ☆누구에게 선물하기도 하고, ☆용돈을 주시기도 하면, 넷째 아들 부부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④2년 전인 2022년도에 어머님은 기분이 좋아서 딸 이정순 50만원, 외손녀 이효은 30만원, 증손자 10만원을 주셨으며, 다른 손자, 증손자들이 오면 어머님 마음대로 그때 그때 용돈을 주신다.
⑦이렇게 용돈을 쓰시고도 넷째 아들 집에서의 ☆어머님 앞 통장 잔액이 3천만원이 넘고, ☆현금 보유액이 항상 200만원 넘게 갖고 계신다. 어머님 통장에 돈이 적으면 ☆돈을 더 채워주는 넷째 아들부부였다.
⑧셋째는 넷째보다 매월 용돈을 30만원을 덜 주었다. 어머님한테 용돈을 많이 주면 기분이 좋지 않은가? 어머님이 쓰시고 싶은 데로 쓰게 해야 자식의 도리이다.
13. 최악의 시집살이 조건에서 헌신의 삶을 살아온 아내임.
①아내가 시집올 때, ☆시외할머니. 시어머니. 시동생 3명과 함께 살아야 하였고, 그후, 시외할머님이 집에서 돌아가시고 ☆시동생 2명을 결혼시키고 결혼을 안한 ☆시동생 1명은 2억원(1997년)의 큰돈을 주고서 분가시켰다.
②동생한테 전 재산의 50%인 2억원을 주고 나니, 이경용의 재산은 1억8천만원에 분양받은 창동의 동아청솔 아파트 1채가 전부였다. 전 재산의 50%를 시동생한테 주는 것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그런 아내는 세상에 거의 없을 것이다.
③상계동 보람아파트 33평에 전세를 살때(1989~1992년)는 명절(구정, 추석)에 30명이 넘는 형제 가족들이 모여서 잠을 못자고 그냥 가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많은 식구들의 명절 음식을 장만하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시어머님까지 33년을 모셔준 아내의 헌신에 너무나 죄스럽고 고맙기 그지없다.
④시어머님을 모시고 남편과 함께 시외할머니 제사(이상석 외가 형님댁)에 30년 넘게 한 번도 안 빠지고 참석한 아내이다.
외할머니가 외손자들을 전부 키워주었건만, 이경용 외의 형제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들이 살아가는 인생살이 방식이다.
⑤외할머니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매월 용돈을 드려서, ☆외할머니 수중에는 현금이 제일 많아서 손자들이 돈을 빌려 쓰기도 하였고 이경용이 모시던 ☆어머님의 수중에도 항상 현금이 가장 많이 있었다.
⑥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수중에 돈이 있어서 ☆친척 등이 방문하면 꼭 차비 등을 주시었다. 이렇게 해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인 것이다. 이경용의 아내는 이런 것을 적극 찬성하고 협조해주었다.
⑦장모님(아내의 친정 어머니)에게도 매월 용돈을 드리고 있다. 장모님 수중에도 돈이 많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이경용 부부이다.
⑧손위 동서의 갑질 행위:
☆오래전(1991년 경)에, 미국에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셋째 형 앞으로 1천만원(그냥 도와줌)을 송금해준 이경용의 아내에게
☆“왜 동서 이름으로 돈을 보내는 거야, 그 돈이 서방님(이경용)돈인데 동서 돈이야”하면서 손아래 동서인 이경용의 아내를 무시하고 함부로 말하던 형수였다.
큰돈을 도와주고도 욕을 먹는 꼴이었다.
☆착한 아내를 자기 집(일산)까지 불러내서 혼줄(억지 사과 요구: 이경용 사건으로 아내가 셋째 형한테 부탁 이야기 한 것을 가지고, 왜 자신을 빼고 이야기 하냐고 따짐)을 내고, 눈물을 흘리게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준 손위 동서였다.
14.형수의 악행(갑질)을 당하고도 셋째 형에게 5억2천만원을 벌게 해줌.
①이경용의 아내에게 저지른 형수의 악행을 당하고도 그 후에, 셋째형에게 묵동 이수아파트(2001년 취득), 하남 미사아파트(2015년 취득)를 매수 후에 팔아서 5억2천만원(2억8천+2억4천)의 돈을 벌게 해준 바보 동생 이경용이었다.
②동생들(다섯째. 막내), 장인어른, 외가 형님 등과 다르게 셋째는 거주는 안하고 보유하다가 팔아서 이익만 남겼으며, 도리어 큰돈을 벌게 해준 동생 이경용에게 악행만을 저질렀다.
15. 자식보다는 형제, 친구 등을 더 도와주며 살아온 이경용 부부임.
①형제들에게는 집을 마련하라고 ☆큰돈을 그냥 주면서, 이경용 부부는 ☆딸이 시집갈 때는 아파트 19평(사위 앞 회사 대출금 등)에 세를 살게 하였으며, ☆아들이 결혼할 때는 거의 돈을 주지 않았다.
②3년 전(2021년도)에는 형편이 안 좋은 형제 4명(둘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누나 2명(정임. 정순), 처제 등에게 1억원을 나눠주면서도 자식인 딸, 아들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훗날, 자식 2명을 너무 푸대접하는 것 같아서 배분의 최소 금액인 500만원씩을 주었을 뿐이다.
③. 부모 재산을 서로 더 먹으려고 상속 재산 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식보다 형제들에게 돈을 더 주며 살아가는 이경용부부 같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자식보다 “형제, 친구, 친척(외할머님의 제사를 모셔준 외가 형님)들”에게 더 우선시하여 베풀고 살아왔던 수많은 실제 사례들은 이경용 부부만의 인생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④보유중인 부동산(집. 상가)은 ☆당초 취득한 가격보다 현재, 은행 빚이 더 많으며, 수중에 돈이 없어서★비싼 이자의 마이너스 대출 몇천만원을 쓰고 있는 형편이다.
이경용의 나이(69세)와 ★이경용 부부의 노후를 생각하여서 앞으로는 형제 돕는 것을 자제해야 할 것이다.
16. ☆어머님께 불효하고 ☆잘살게 도와준 동생 이경용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 형들의 일”을 전부 잊어버리자!
①. 이길순 어머님이 100세를 사시는 동안, ☆형 3명은 어머님께 불효와 큰 상처를 주었고 ☆동생 이경용에게도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주었다. 전부 잊어버리자!
②. 이경용은 형3명, 동생3명, 누나2명을 잘 살게 해주려고 ☆큰돈을 주고 ☆엄청난 노력(아파트 분양권 취득 등)을 쏟아 부었으나,
☆실망을 주는 형제가 4명이고 ☆보람을 주는 동생이 2명(남용, 정용)뿐이다. 동생 2명으로 만족한다.
③. 누님 2명(이정순, 이정임)은 동생 이경용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서 그것으로 크게 만족한다.
④. 막내 동생은 고마움의 표시로 ①승용차를 사주었고, 다섯째 동생과 조카(박영미)부부는 ②사례비를 줘서 안 받을 수가 없었다.
⑤. 많이 배울수록 지혜 있게 처신하고 존경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고위공직을 지낸 셋째는
안하무인으로 동생 이경용을 무시(창동 식당의 노모 생일 사건, 구안와사 막말 사건 등: 수없이 많음)하고 괴롭히기를 오랜(긴) 세월이었다.
⑥. 초등학교만 졸업한 동생(넷째)이 형(셋째)의 ①학교 뒷바라지(중고등학교 다님)를 해주고, ②부동산 투자(1986년)로 안산 주택지(이익: ?모름)와 묵동 이수아파트, 하남 미사 아파트로 큰돈까지 벌게 해주었다.
⑦. 셋째는 부동산을 팔아서 이익만을 챙길뿐이었고 동생에게 고맙다고 술 한잔 산 적이 없었으며, 그런 큰 도움(출세 기반+돈 벌이)을 준 넷째 동생 이경용에게 엄청난 고통만을 주는 고위공직자를 지낸 셋째형이었다.
⑧. 착한 아내가 셋째 형(욱하고 온갖 성질을 내질러 버림)과 말을 나누지 말라고 당부까지 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다 지난 일이다.
⑨. 형 3명을 잘 살게끔 도와줘도 어머님께 효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지난일은 전부 잊어버리고 앞만 바라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어머님의 말씀을 실천한 넷째 아들 이경용
1. 부동산 물건에 대하여 엄청난 노력(깊은 지식+정보+평가+용기+실행 등)을 쏟아 부어서 이경용은 많은 돈을 벌었으며
2.형제, 누나, 친구, 친척 등에게 베풀지 않고 투자만 해서 돈을 벌었다면 큰 재산을 이루었을 것이다.
3. 이경용은 혼자, 부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형제, 친구 등과 함께 잘 사는 것이 우선이었으며 이경용이가 실천에 옮겼던 인생 철학이었다.
4.형제, 친척, 친구들에게 큰 도움을 많이 줬지만 “은혜를 웬수로 갚는 ①형제2명(첫째. 셋째)과 ②친구 5명”이 있다. 은혜를 웬수로 갚으면 복을 받을 수 없다.
5. 탐욕하게 살면 복을 받을 수 없다. 복을 받을 삶을 살아온 사람은 ①죽을 때, 인생에 대한 후회도 없고 ②죽은 후에 좋은 이름(칭송을 들음)을 남긴다.
6.복을 받으려고 하면 복을 지어야 한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주고 살면 마음이 즐거워지고 행복해져서 복을 짓는 것이고 복을 받게 되어 있다.
★어머님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던 33년의 세월을 소중히 여길 넷째 아들 이경용 부부임!
1.시어머님을 33년간 모시면서, ①좋아하시는 음식(토종닭, 육회, 산 낙지 등)을 드시게 해준 아내였고, ②어머님을 모시고 즐겁게 구경 겸 외식을 많이 시켜드린 넷째 아들 이경용 부부였다.
2.넷째 아들 부부에게 ①부부 싸움하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하셨고 ②부부 금슬이 좋다고 칭찬도 많이 해주신 어머님이셨다.
3. 늙으신 어머님께 매일 출근, 귀가 인사를 드려서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림:
①서울 송파동에서 6년을 살 때도 아침마다 집을 나서면 ☆어머님! 다녀오겠습니다. 오후에 집에 들어오면 ☆어머님! 다녀왔습니다. 하고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
②이런 자식을 보고 늙으신 어머님(주막식당에서 12년간 고생하심)이 얼마나 흐뭇해하시고 든든해 하실까?해서 매일 인사를 드렸던 것이다.
③주간보호센타 5년(95세~100세)을 다니실 때도 매일 배웅(출퇴근)을 시켜드린 넷째 아들이었다.
4. 100세 어머님의 대소변을 수발을 할 때도 이경용 부부는 한 번도 싫증을 내거나 불만을 표시한 적이 없었다.
5. 어머님(초라한 주막식당에서 12년 동안, 혹독한 고생을 겪으심)을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던, 지난날의 수많은 흔적들이 이경용(69세)자신과 아내(62세)에게
①큰 위안(마음을 편하게 해줌)이 되고
②마음속에 큰 보람을 느끼게 해주고
③삶의 큰 업적(넷째 아들부부와 한집에서 33년을 행복하게 살음)으로 여긴다.
2024. 3. 23일 이경용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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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언:
☺☀. 49재를 지낸 2일 뒤의 새벽(2024.5.6.일)에 어머님께서 “넷째(아들 경용)야!”하며 옆방에서 크게 부르시는 어머님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꿈도 아니었는데 어머님의 ①큰 목소리에, 정신이 바짝 들었으며 ②아! 세상을 뜨시고, 안계시는데!!! ③어머님의 혼령이 잠시 넷째 아들 집에 오셨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