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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영 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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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저서 1 | 대문 여는 소리 |
대표저서 2 | 나만 서 있는가 |
출생연도 | 1925년 |
별세연도 | 2019년 3월 23일. |
출생지 | |
직위직책 | 한국수필작가회 초대회장 |
*프로필
*대표작
-나만 서 있는가-
아침부터 그동안 미루어 오던 스크랩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문 잡지 등에서 오린 것, 팜플렛, 그림엽서 등 몇 년 동안 모은 것이 몇 개의 큰 봉투에 그득 담긴 채 책장 아래칸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미루어 왔던지 봉투 안에 든 종이들이 누렇게 변한 것도 있고 먼지가 푸석거린다.
그 옆에 정리되어 있는 스크랩북을 펴보니 처음 시작한 것은 10년도 더 전이다. 처음 몇 년 동안은 표지를 사다가 몇가지 분야로 분류해서 페이지마다 보기 편하게 붙여놓고 목차도 적어 제법 정성스럽게 정리가 돼 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큰 봉투에 분류 표제만 적어, 두서없이 담겨 있고 요근래에는 그 정도의 분류도 하지 않은 채 주섬주섬 모아놓고 있다. 학교 생활이 바쁘기도 했지만 갈수록 욕심이 생겨서 이것저것 모으다 보니 제대로 정리할 수가 없어 미루게 됐던 것이다.
그러니 정리 해야겠다고 다 꺼내 놓았지만 이 많은 것을 어느 세월에 끝낼지 아득하기만 하다. 그래도 마음을 다자보 봉투 하나를 쏟아 놓고 몇 종류로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을 하다보니 모아 둘 필요가 없어진 것이 꽤 많았다.
그 당시는 최신이며 첨단 지식이라고 소중히 오려둔 것이지만 시대가 달라지고 그보다 더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1년이면 옛날 것이 돼버린다. 더구나 시사성이 있는 통계나 칼럼 같은 것이 김이 빠져버린 셈이다. 필요성이 없는 것은 휴지가 아닌가. 모아 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분류작업보다 취사(取捨)의 선별이 앞서야 할 일이다. 분량도 줄일 겸 되도록 많이 버리기로 마음을 정하고 부지런히 일을 진행 시켰다.
스크랩이란 원래 한번 일고 버리기 아까운 것을 다음 어떤 기회에 다시 보기 위해서 남겨두는 것이다. 나도 아이들 교육이나 글 쓰는 데 참고할 생각으로 모아 두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별로 활용을 하지 못했다. 그저 많은 자료를 가졌다는 것, 필요하면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으로 항상 부자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 풍요한 자원들이 휴지가 되어 버려지고 있지 않은가. 세상이 그렇게 빨리 달라진 것인지, 내가 너무 오래 쥐고만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모처럼 비싼 옷을 사서 입지도 않고 넣어 두기만 하다가 유행이 지나 별볼일이 없게 된 것처럼 아깝고 섭섭하다.
두툼하게 철해진 묶음들은 한층 관심이 깊었던 자료들이다. 하나를 펴 보니 꼭 10년 전 것이다. '가정교육', '국민학교','고교생'이란 세 제목으로 3부로 나누어 교육현장을 취재한 것이다.
각각 30여 회씩 신문에 연재된 것을 거의 빠짐없이 모은 성의가 스스로도 놀랍다. 그 당시 공감이 짙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는 통쾌감에 열심히 모았던 기억이 새롭다.
가정교육의 부재, 무너지는 윤리관, 학교시설의 낙후성, 교사들의 흔들리는 교육관, 교육과정의 모순 등 그 부실함을 샅샅히 파헤치고 있다. 뜻있는 사람들이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장래가 걱정이라고 목이 타게 외치던 때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는데 우리는 지금도 똑같은 말을 외치고 있다. 그게 인간교육의 기본이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도 개탄하던 도덕이다. 그 골(谷)이 지금에 이르러 한층 깊어지고 넓어져 가고 있는 것이리라. 그때 취재대상이던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자라고 있을까.
만연된 그 병폐가 다시 어떤 내일을 낳을 것인가. 아직도 내가 외치고 싶은 말들이 그대로 담겨 있는 르포 묶음을 다시 책상 속에 잘 넣어 둔다. 과거로 밀어버릴 수 없는 어제 오늘의 세태를 마음 아파하면서.
잘 철해 둔 묶음들 속에는 화훼시리즈가 있다. 한때 이 방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퇴임하면 꽃과 더불어 조용히 살리라고 생각했었다. 엉성하지만 마당에 조그만 비닐온실을 지어놓고 꽃을 가꾸기도 했다. 그러나 전문지식이 없어 신문 잡지에서 부지런히 스크랩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사정이 늘 바뀐다.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접어둔 꿈은 갈수록 그 실현성이 멀어진다. 모두가 뛰며 사는 속에서 나만 조용히 살 수가 있을런지. 모두 함께 가는 길목에서 같이 뛰어야지. 나는 화훼시리즈를 휴지들 속으로 던졌다.
건강, 레저, 문학 등등 펴 보는 것마다 지나온 어느 날의 발자국 같아서 이어지는 추억으로 그리움과 아쉬움이 뒤섞인다. 그래도 나날이 새로워지는 지식 홍수 속에 이것들은 모두 휴지가 된 것이다. 아까울 것 없이 버리기로 한다.
흩어져 있는 종이조각들을 휴지통에 쓸어 담으면서 세월이 떨어뜨리고 간 편린들 속에 바쁘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나의 모습이 허탈하게 구겨진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하면서 뛰어가고 있는데 봉투 속에서 누렇게 과거로 퇴색해 가는 스크랩 조각만 믿고 혼자 풍요해 하고 있었으니. 모두 저만큼 가고 있는데 나만 공자의 말씀을 외우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게 아닌가.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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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돈-
오늘은 모임이 있는 날이다.
선물로 받은 도서상품권이 있어 서점에 들려서 모임에 갈 생각으로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할아버지는 타고 갈 버스가 가까운 신호등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버스표를 사러 뛰어갔다.
만원짜리를 내고 버스표 열 개를 달라고 했더니 늙수그레한 매표소 여자는 버스표를 먼저 밀어 내 놓고 거스름돈 천 원짜리를 세기 시작했다. 엄지에 침을 발라가면서 두 번이나 세어보고 나서 그 돈 위에 백원짜리 동전을 얹어서 내준다.
나는 서둘러 받아서 손에 쥔 채로 막 떠나려는 버스에 올라탔다. 차안에 서서 손에 쥔 채로 막 떠나려는 버스에 올라탔다. 차안에 서서 손에 쥐고 있던 돈을 펴보지도 않고 그대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는지 나오면서 시계를 보니 모임 시간이 촉박하기에 택시를 탔다. 목적지가 가까워졌을 때 요금을 준비하려고 호주머니에 넣었던 돈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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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을 집어내고 천 원짜리를 세려다가 돈들이 너무 더럽고 헤져있는 데 놀랐다. 성한 돈은 없고 모두 때에 절고 한가운데가 열십자로 닳아서 찢어진 것, 두 조각이 났는지 가운데에 스카치 테이프를 붙인 것, 전화번호며 무슨 숫자 여기저기 갈겨 쓴 것 등등 헌돈도 가지가지였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물끄러미 돈을 보고 있는데 운전기사가 다 왔다면서 차를 세웠다. 계기에는 2천8백 원이 나와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돈에서 차근차근 석 장을 세어 주면서 버스표 사고 거슬러 받은 돈이라고 안해도 되는 변명을 붙였다.
택시기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괜찮습니다. 어차피 손님들한테 되나갈 걸요 뭐. 그런 돈이라도 많이만 주세요."하고 픽 웃는다. "그렇군요." 나는 피식 웃으며 거스름 돈을 받아가지고 차에서 내렸다.
정말 그렇다. 기사는 그대로 손님에게 거슬러 주면 되는 거지. 그걸 사죄하듯 미안해 한 것이 바보 같아서 혼자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사람이란 돈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거라고 생각했다.
헌 돈이라고 찡그리고 혐오하면서도 한 장이라도 더 줄세라 확인하며 세어주고 남은 돈을 다시 간직하고. 만일 그게 돈이 아니라면 벌써 휴지통에 집어던졌을지도 모르는데.
걸으면서 작년 일을 생각했다.
어떤 사람한테 건네 받은 돈 속에 닳고 퇴색한 헌 돈 만 원짜리 한 장이 끼어 왔다.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까다롭게 구는 것 같아서 그냥 받았다. 유난히 낡아 보이는 그 돈을 지갑에 넣기가 싫어서 가로 세로 한번씩 접어서 동전지갑에 넣어 가지고 다니다가 물건 값을 치를 때 다른 돈 사이에 끼워서 내놓았다.
지갑 속에서 동전 때가 묻어 돈은 더욱 형편없이 되어있었다.
카운터 여자아이는 그 돈을 골라내더니 다른 돈이 없느냐고 물었다. 배짱이 없는 나는 얼굴이 확 달아서 황급히 돈을 바꿔냈다. 그 돈은 결국 종로 어느 매표소에서 버스표를 사는 데 사용했다. 얼굴이 좀 뜨거웠지만 쓰고나니 시원했다.
모임장소에 도착해 보니 아직 몇 사람이 덜 와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불쾌감이 가라않지 않아서 거스름돈 이야기를 하면서 돈을 펴 보였다. 친구들은 이건 너무했다며 깔깔대고 웃었다.
이렇게 헌돈이 몰려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헌돈으로 버스표를 샀다는 증거라면서 자기들도 그중의 한 사람이란다.
나도 찔리는 데가 있어서 불평을 거두고 멈칫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돈을 더립히는 거야. 돈 때문에 목숨을 걸기도 하면서 그 귀중한 돈을 깨끗이 쓰지 못하고." 한 친구가 갑자기 진지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말에 나는 얼마 전 신문에서 본 기사를 생각했다.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헌 돈이 너무 만다는 것이다. 훼손된 돈은 한국은행에서 폐기하고 그만큼을 새로 찍어낸다고 한다. 95년에 폐기한 지폐는 8억6천2백만 장이고 금년은 8월말까지 5억8천2백4십만 장이었으며 그만큼을 다시 인쇄하는 데 드는 비용은 작년에 5백2십억 원이었고 금년은 8월까지 만도 약 4백억 원이라고 한다.
우리 화폐의 품질이 선진국에 비해 손색이 없는데도 우리 돈의 평균수명이 짧은 것은 현금을 선호하고 돈을 함부로 다루는 나쁜 사용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돈을 함부로 다루어 국가재산을 낭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돈은 그 나라의 얼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국민의 수준을 나타낸다는 말일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수준이 낮다는 말이 된다. 외국사람들은 돈은 자신의 소중한 노동의 대가이기 때문에 다루는 것도 매우 소중히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지갑 속에 깨끗이 보관하고 낙서 등으로 훼손시키는 일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꼬깃꼬깃 접어서 아무데나 넣기 때문에 찢어지고 닳고 해서 쉬 못 쓰게 된다고 조폐 관계자가 말하고 있었다.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돈뿐 아니라 공공시설물이나 공유물에 대해서도 아끼고 절약하고 소중히 다루는 마음이 적다.
갑자기 풍요해져서 분수와 분별력을 잃은 것일까. 돈도 하나의 공유물이다. 내가 가지는 시간은 잠시고 끊임없이 돌면서 여러사람의 손을 거쳐다닌다.
모두 새 돈을 받았을 때 기분이 좋으면서 깨끗이 사용할 수는 없는지. 물건을 아끼는 사람은 자연도 아끼고 사랑도 아낄 줄 알 듯 돈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깨끗하고 살고자 하는 사람일게다.
아끼는 것과 인색한 것은 다르다. 돈은 그 자체도 깨끗이 해야 하지만 그 돈의 취득원이 깨끗해야 하고 지출도 적절하고 정당해야 한다.
손에서 손으로 도는 돈이 깨끗한 모습으로 깨끗한 손들을 거쳐 다니는 세상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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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여는 소리-
내가 어렸을 때 아침 일찍 대문을 여는 것은 할아버지의 일과였다. 방문이 훤하게 밝아오면 벌써 마당에는 할아버지의 큰 기침소리가 나고 이내 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식구들은 기상신호를 들은 듯 모두 일어나 하루의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제일 늦게 일어난 내가 졸린 눈을 비비며 나가 보면 대문은 활짝열려 있고 할아버지는 문 밖에 서서 막 산머리를 벗어난 아침해를 바라보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문을 열어놓아야 복을 많이 받는다고 하셨다. 그리고 문은 사람들이 맘대로 드나들 수 있게 낮에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면서 눈, 비가 오는 날도 여전히 일찍 열어 놓으셨다. 동네 집들도 다 문을 열어놓고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마음대로 집집을 드나들면서 마음도 함께 터놓고 다정하게 지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문 여는 일은 아버지가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대를 물려주기 전에 대문 열어 놓는 일은 끝이 나고 말았다.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이 할퀴고 간 폐허에는 풍습도 인심도 옛대로 남은 것이 없었다. 대문을 열어 놓고 살던 시대는 옛이야기로 흘러가고 각박해진 세상은 집집마다 높은 담에 철망을 두르고 대문은 낮에도 빗장을 걸어 놓았다. 나도 대문을 잠그고 살면서 밖에 나갈 때는 문 잘 잠그라고 당부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사람들은 문과 함께 마음까지 잠그고 이웃끼리도 인사 한번 안하고 산다.
나는 지금 대문이 없는 아파트에서 마루 끝에 단 철문 한짝을 여닫고 산다. 손님이 가실 때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전송한다. 편해서 좋기는 하지만 앉은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은 답답함과 협착감을 면할길이 없다. 대문은 의복에서는 관이고 사람으로는 얼굴이 아닐까. 그래서 인지 우리 조상들은 대문을 지극히 신성시했다. 도성에는 시구문을 따로 만들어 시체가 대문으로 나가는 것을 금했고 관가나 가정에서는 파장문 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도 지방에는 남아있는 풍습이지만 외지에 나가 객사한 시체는 대문을 통하지 않고 담을 깨고 들여온다. 옛날은 부모의 상을 당해 장례날까지 당도하지 못한 불상죄인도 담을 뚫고 들어갔다고 한다. 또 사사로운 일로 현감을 만나는 사람은 동헌담에 뚫린 구멍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이처럼 담을깨고 출입한 것을 파장문이라고 했다. 또 대가에서는 아녀자나 하인들은 뒷문이나 쪽문으로 출입했다하니 대문은 명분 없고 떳떳치 못한 사람이나 잡인들은 출입할 수 없는 당당한 곳이었다. 대문을 정문이라 하는 연유도 짐작이 간다.
어제는 차를 타고 단독주택 단지가 있는 마을을 지나면서 할아버지 말씀이 생각났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남향집에 동향대문으로 된 집을 으뜸으로 치는데 3대 적선을 해야 그런 집에 산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마을은 하나같이 그런 방향으로 줄지어 있었다. 그 말씀대로 라면 이 사람들은 모두 3대 적선을 한 후손들일까. 빈집처럼 꼭꼭 닫혀 있는 대문들을 보면서 이들의 삼대 후손을 생각해 보았다.
불현듯 아침마다 일찍 대문을 열어 놓고 복을 받아들이신다던 할아버지가 그리워지면서 분명 그 맑은 아침 햇살이 바로 복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이 여는 대문소리에 집안이 움직이기 시작하던 가정질서는 까마득한 추억이다. 활짝 열어 놓을 대문이 없는 오늘의 우리 생활에서는 영영 가슴을 열어놓고 살 때가 없을 것인가. 큰 기침소리와 함께 대문 열리던 소리를 마음으로 들으면서 승강기에서 목례하는 이웃들의 얼굴을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들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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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우리 아파트와 뒤 아파트단지 사이에 통로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저녁 산책을 그쪽으로 나갔다. 뒤 아파트의 상가가 바로 보이는 곳의 철조망을 한 칸 걷어내고 정식으로 출입문이 나 있었다.
나는 그 출입문을 지나 상가 앞까지 걸으면서 지난 일을 회상했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아파트는 아직 상가가 작아서 뒤 아파트상가를 이용했는데 아이들이 철조망을 넘어 다녔다. 그 아이들이 철조망에 걸려 옷이 찢어지고 몸에 상처를 입고해서 주부들은 통로를 내달라고 반상회에서 여러번 건의했지만 울타리는 단지의 경계라고 번번히 대표자 회의에서 부결을 당했다.
그 후 근처에 상가들이 생겨서 이 문제는 해결이 되었는데 왜 새삼스럽게 이제 통로를 냈느지 궁금했다. 다음날 만난 소장은 요새는 개방시대니까 양쪽이 합의해서 냈다고 간단히 말했다. 개방시대와 울타리의 관계는 무엇인가.
울타리는 경계의 표시이며 외부 사람의 침입을 막고 안에 있는 사람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보호한다. 서양식 주택은 튼튼한 벽으로 쌓여 출입문만 닫으면 밖과 차단되고 보호되지만 우리 한국가옥은 개방식이어서 울타리가 없으면 민망하게도 집안이 전면 노출된다. 그러므로 강아지도 쉽게 구멍을 뚫고 드나드는 우리 울타리는 외부인의 칩입을 막기 보다 노출된 내부를 살짝 가려서 집의 외관을 갖추고 외래인과의 체면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
울타리를 침으로써 집안 분위기가 아늑해지고 가족적인 정을 느끼게 된다. 우리 선조들은 기와집에는 담을 쌓고 초가에는 개나리, 무궁화, 백랍나무(쥐똥나무)등을 심어 생울타리를 치거나 억새같은 키 큰 풀이나 나뭇가지를 엮어 울타리를 둘렀다. 이 울타리에는 호박 울타리 콩이 열리고 나팔꽃 능소화가 꽃을 피우며 잠자리도 쉬었다 가는 한국적이고 서민적인 정서가 흐르는 삶의 테두리였다.
우리는 이 울타리 안에서 3대 4대 가 오손도손 함께 살면서 화목하고 협력하고 혈연의 정을 다지며 살아왔다. 또 울타리의 품안에서 겸손하고 양보하며 장유유서의 질서를 익히고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포근한 감성을 기르며 성숙해 왔다. 이 울타리에 붙어있는 사립문은 항상 반쯤 열려 있어 누구나 언제나 드나들 수 있게 개방되어 오는 사람을 거부하거나 배척하는 일 없이 너그럽게 맞아들였다.
그런데 근래 아파트 빌라등 주거양식이 바뀌어 시골에서도 토속적인 가옥이나 울타리가 사라지고 대형 아파트 단지가 생겨 철조망 울타리를 두른 안에서 살게되니 옛날 울타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울타리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 사이에도 울타리가 있다.
자녀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부모는 자녀의 울타리요, 노쇠한 부모를 봉양하는 자녀는 부모의 울타리가 된다. 또 학문 취미 친목 그리고 직장이나 사회단체 등 크고 작은 동아리들이 각각 울타리를 치고 모인다. 울타리 안에서 서로 도우며 순수한 모임의 취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한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런데 많은 울타리들 중에는 배타적으로 집단의 이익을 위해 힘을 모으고 사회질서를 역행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웃간의 친화를 깨고 질시를 받는 일이 있어 안타까울 때가 있다. 우리문단에도 동아리가 많다. 나라도 이웃도 개방으로 가는 시대에 우리 문단도 크게 통로를 트고 문학에 충실하고 순수한 문학인으로 마음을 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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