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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논리와 다름을 보여주는경우...즉, 가상인 논리로는 현실을 포함하고 있는 진리와 다름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경우. 물리와 수학의 차이로 보면 않됨. 수학 아니고 물리이기에 철학의 대상이 됨. 왜냐면 논리적 모순이 없는게 수학인데 제논의 역설은 모순을 드러내고 있음.
대화와 역설은 변증법에서 정=대화,반=역설 사이에 모순이 있음을 보여주는 논리다.
1.제논의 역설 중 아킬레우스와 거북의 경주 얘기는 유명하다. 아킬레우스는 자기 앞에 있는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거북을 따라잡기 위해 아킬레우스는 거북이 있는 곳까지 가야 하는데, 그러는 사이에도 거북은 조금이라도 앞으로 전진해 있을 것이고, 아킬레우스는 다시 거북이 도달해 있는 지점까지 가야 하고, 이런 일을 무한히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에 맞서 우리는 "운동체에 의해 주파된 공간"과 "순수 운동"(즉 지속)을 구분해 내야 한다. 전자는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는 수적 다양성을 형성하며, 실제적이건 가능적이건 그 다양성의 모든 부분은 현실적이며 다만 정도상의 차이가 날 뿐"(42쪽)이다. 한편 후자는 "변질이며, 잠재적이고 질적인 다양성이며, 발걸음으로 나누어지는 아킬레우스의 경주로와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나누어질 때마다 본성상의 변화를 한다"(42쪽). 베르그송은 위치 이동이 있을 때는 언제나 "다른 본성을 가진 이동"(43쪽)이 있다는 것을 밝혀 낸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경주로를 구성하는 수적 부분들로 보인 것은, 안에서 체험하기에는 단지 회피된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다."(43쪽)
이런 서술은 베르그송이 발견해 낸 대단히 중요한 개념인 '잠재성'에 대한 이해에 의존하고 있다.
2.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는 거북이와 아킬레스가 동시에 출발하지만 아킬레스가 거북이 보다 10m 뒤에서 출발하면 절대로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킬레스가 달리는 것과 거북이가 달리는 것을 함께 놓고 설명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오류입니다.
아킬레스가 뛰는 속도가 거북이의 속도보다 10배 빠르고, 거북이가 아킬레스보다 100m 앞에서 출발한다고 가정하자. 거북이와 동시에 출발한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출발한 지점으로 가는 동안 거북이도 얼마간은 전진한다. 거북이는 아킬레스의 속도의 1/10로 움직이므로 아킬레스가 100m 지점에 도달했을 때 거북이는 10m 앞서 있게 된다.
다시 아킬레스가 달려 그 지점까지 가면 거북이는 10m의 1/10인 1m를 아킬레스보다 앞서게 된다. 이렇게 계속하면 거북이와 아킬레스 사이의 간격은 점점 좁혀지지만 거북이는 아킬레스보다 항상 조금이라도 앞서 있게 되므로,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
제논의 변증법을 그림으로 설명하면...
아킬레스 ●, 거북이 ○ 라고 하겠습니다.
●
-------------------- ○ 출발전
●
--------------------- ○ 1분후
●
---------------------- ○ 2분후
●
----------------------- ○ 3분후
●
------------------------ ○ 4분후
이런 식이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
-------------------- ○ 출발전
●
--------------------- ○ 1분후
●
---------------------- ○ 2분후
●
----------------------- ○ 3분후
이렇게 되죠.
이런 것을 패러독스라고 합니다.
으음... 그림 설명이 대충 맞나 모르겠네요...
3.
변증법이라기보다는 '역설(패러독스: 논리적으로 얼핏 당연해 보이지만 실제나 상식과 어긋나거나 어긋나 보이는 주장)'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상식적으로 발이 빠른 아킬레스는 당연히 거북이를 추월할 수 있죠.
그런데 제논은 아무리 아킬레스가 발이 빨라도 느린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는 엉뚱한 주장을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입니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뒤에서 출발했다면 결승점에 가 닿기 전에 우선 거북이가 출발 당시 있었던 자리에 먼저 닿아야 합니다. 아킬레스가 무한히 빠른 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느만큼이든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거북이도 가만히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얼마만큼이든 움직였을 겁니다. 거북이는 아킬레스와 결승점 사이에 어딘가에 있게 되겠죠.
그런데 이 과정이 무한히 반복됩니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먼저 거북이가 지금 있는 장소를 지나가야 하는데 아킬레스가 그 장소에 가 닿는 동안 거북이는 아무리 적은 거리라도 더 전진을 했을 것입니다. 아킬레스가 그 전진한 거리를 움직이는 동안 거북이는 또 전진을 했을 거구요.
출발점과 결승점 사이를 직선, 아킬레스와 거북이를 움직이는 두 점이라고 생각하시면 보다 정확해집니다. 직선 안에 무한히 많은 점이 있다면, 그리고 어느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그 점들 위를 모두 다 지나야 한다면 제논이 주장한 대로 한 점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다른 점을 추월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한과 연속에 대한 직관은 두 가지 전제를 모두 인정합니다. 아무리 짧은 거리라고 하더라도 그 거리보다 짧은 거리가 있을 수 있으므로 직선 안에는 무한히 많은 점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떤 직선 위를 움직인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점을 지나는 것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전제로 놓는다면 제논의 논리대로 이 세상에서 추월이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건 분명히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입니다.
제논의 목적은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설의 목적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전제나 추론 방식 중 어딘가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제논은 무한, 연속, 운동과 같은 주제에 대한 고대의 철학사상들 간의 논쟁 중에 위의 역설을 제시해서 뭔가를 반박하고 주장하려 했던 것인데 이 부분은 제가 잘 모릅니다. 그리고 이 역설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인터넷에서도 여기저기서 설명을 찾을 수 있는데 확실하게 와닿는 설명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가지 의미있는 결론은, 우리가 공간이나 시간, 무한 같은 개념들을 생각하는 방식을 깊이 검토하다보면 당연하게 여겨온 직관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예기치 않은 문제들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에 관심이 있으시면 더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끝은 무책임하게..^^)
4.
나중에 아킬레스는 거북이 걸음마처럼 느리게 가게 되네요..ㅋㅋ 그러면 그래프 기울기(변위 기울기:속도)는 어떤가요? dt분의 dx가 기울기라면 기울기 3이 기울기 1보다 크다는 걸 어케 설명합니까? 이래서 수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수학 못하면 저런 말에 넘어갈 수 밖에 없죠..
(수학 아니고 물리 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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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의 논리(아리스토텔레스가 제논을 변증법의 시조라함.)
...<운동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위해 사용한 논증방법 즉 <운동은 있다>는 명제가 거짓이라면
<운동은 없다>는 것이 올바른 명제라고 상대방을 납득시키는 논증방법에서 변증법이 유래하였다.
....거북이 경주에서 운동의 모순을 지적하는 논리일뿐 현실에서 적용은 맞지 않다.
왜냐면, 제논의 논리는 사물이 갖는 운동의 변화,다양성을 부인(배제)하고, 단지 공간과
시간만으로 사물이든 운동이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상한 제논의 논리가 철학적 의의를 갖는 이유는
1.변증법의 창시학파=엘레아 학파 라는 역사성.
2.사실과는 무관하든 사실이든 관계없이 상대방의 입장에 어떤 자기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함으로서
자기입장의 올바름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려고 하였다는 논리적 표현법(문답법)을 소크라테스에 의해 훌륭하게 전개되고,
이를 이어받은 풀라톤에 의해 변증법은 진리를 인식하기위한 방법으로서 중시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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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의 역설을 기억하십니까?
제논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가 가상의 세계며
오히려 운동이 없고 변하지 않는 존재계가 실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그 역설을 사용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논의 역설을 반대의 논리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논리학에서는 이것을 귀류법이라고 합니다.
즉 전제를 부정하고 결론이 거짓이면, 그 전제가 참이라는 것이죠.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거짓이라고 생각해 봅시다.(적어도 물리세계에서는 말이죠)
따라서 그 전제인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있다가 참이되는 것입니다.
귀류법을 사용함으로써 이중 부정이 되기 때문이죠.
즉 같은 논리를 다르게 ‘사용’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적어도 수학적 방법론이 현실세계를 설명할 때
항상 맞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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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이데아(진리)가 무엇이냐?는 이원론(형이상학적 세계관).
아리스토 텔레스의 이데아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논리학적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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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연에 존재하면서 생긴 의문..형이상학=거대담론..이를 해결할려고
진리를 연구--참과 거짓 구분--하는 것은 서구에선 고래로 부터 지금까지다.
(동양에선 진리를 논하긴 했지만...서구처럼 진리=하느님=기독교 이렇게까지 인간역사의 중심에 신이 취급되지 않았다.)
기원전에도 이 진리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는데 그 대표적인 방법으로 제논으로 대표되는 변증법의 시초가 있었다.
즉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모순을 제거해야한다는 논리다.
이를 소크라테스가 인간에 적용한게 흔히 말하는 변증법= 대화법=문답법이다.
<문답법이란?>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
정의;;질문과 응답의 형식을 사용하여 개념을 규정하려는 학습방법.
오늘날 문답법으로서 의미는 보통 선생 ㅡ학생간의 수업을 진행하는 수업방법이다.
이 방법에서는 대개 상대방이 생각하는 것을 솔직하게 최소한의 언어(=말수;語數)로 대답할것.
또 질문된 사항만 대답하고 다른 질문은 하지 않을것 등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 대답과 모순되는 사례를 질문자가 제시함으로서
그 사례도 포함될수있는 고차(=높은 단계=메타언어,은유까지)의 규정을 구하는 방식으로 문답은 진행된다.
dialogos(문답.대화)는 두 사람이 서로 주고 받는 말로서 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대화를 하다 서로 의견이 달라 대립하게 되면 논쟁으로 변하기 때문에 대화는 논쟁,변론으로 질적 발전을 하게 된다.
(이렇게 시대적 변화 즉,대화,문답법 ㅡ>논쟁.변론 ㅡ>변증법)
그런데, 철학에서 있어서 문답법, 즉 소크라테스의 문답법=대화법은 사람들이 문답을 통하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근원적인 무지를 폭로해 나아가는 것이다.
풀라톤에게 있어서도 철학은 일정한 말로서 표명 될수있는 학설체계의 수립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나타나고 보여지는 관념이나 현상등이 실제로 그러한지 음미함으로서
자기자신 내부의 진실된 모습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 철학의 길이었다.
(풀라톤의 저술에서 변증법은..소크라테스의 비판에 응답하면서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부정(否定)을 통하여 정신이 진리에까지 도달하는 과정이라 함.)
문답은 질문의 내면에 있는 것을 알기위한 것이고,
질문하도록 만들고 있는 근원자체를 말을 통하여 분명하게 해 나가는 것이다.
문답법의 유래는 제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고대의 문답법은 헤겔에 이르러 변증법이라는 새로운 철학의 방법으로 고양되었다.
<변증법이란?>
별론과 논증은 서로 대립하는 두 의견이 투쟁하는데서 전개된다.
그래서, 대립투쟁을 변증법의 본질적인 형식으로 본다.
대립물의 투쟁에 의한 사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는 논리.
<변증법적 유물론?>.....................................................
*소크라테스 문답법을 제자인 풀라톤은 이를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문답법을 중요하게 사용했지만,
*풀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적 관점에서 문답법을 이용하지 않았고,
단지 문답만을 토론과정에만 사용하였다.
그러다보니 원래취지인 "모순을 찾아내서 제거하여=>진리를 밝히는 법"인 변증법은
풀라톤의 형이상학에서는 중시되었으나, 풀라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논리학과는 대비
되었고,이로 인하여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중세까지 변증법은 논리학에서 거의 취급되지 않았다.
왜냐면, 모순을 찾는 문답법보단 진리를 밝히는게 옳다고 믿었기에...중세의 기독교논리(=하느님의 말씀만 따라살면 된다고 믿는 사고)가 들어있다.
즉, 문답법같은 부정적 사고나 논리보단 형이상학이나 논리학과 결합된 기독교의 긍정적 사고나 논리가 가치있다고 믿었던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한 사회였기에 당연히 이단으로 될수밖에 없었다.
(물론 고대의 문답법=변증법은 모순을 찾기엔 그 자체가 가지고있는 한계가 뚜렷한 점도 있었다...
사유방편이 아닌 사고하는 방법을 기르는 방법으로 변증법을 봄)
이렇게 중세까지 비주류의 사유방식으로 취급 받은 변증법을 칸트가
인간의 이성(理性)이 빠지기 쉬운, 일견 옳은 듯 하지만 실은 잘못된 추론
즉, 선험적 가상(假象)의 잘못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가장의 논리학"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즉,<순수이성비판>을 통하여 논리로 변증법(칸트는 보통변증론 이라함) 재사용하였다.
이처럼 칸트에 이르기까지는 변증법이란 말은 어느 경우에서나 진리를 인식하기위한
직접 또는 간접으로 유효한 기술및 방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모순율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로 생각되지 않았다. (((A)))
왜냐면, 근대의 시도(=기도)는
데카르트의 이분법인 주체와 객체로 ㅡ신과 인간의 분리 ㅡ나누어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런 이분법적 사유를 칸트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단지 조절 ㅡ적당한 이성(윤리나,도덕),무한한 실천 ㅡ로서 생각하였다.
이에 비해 헤겔은 변증법이란 것을 인식뿐만아니라 존재에 관한 논리로 생각하였다.
즉, 존재에 대해서도 변증법적 전개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주장한 이가 헤겔이었고,
이를 유물변증법론자들도 이점은 동의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한 헤겔은 사유방식을 넘어 역사에 적용하므로서 본격적인 철학적 사유법으로 올려 놓은것이다.
그럼, 어떻게해서 헤겔은 사유를 넘어 역사까지 확장하였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