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가 있느냐고 묻는 친구에게
매년 1박2일 총동창회 명분으로 야유회를 가진다. 그해는 서울과 부산의 중간지점을 택해 김천 직지사에서 만나기로 하고 스무 댓 명이 버스를 준비하여 부산에서 출발하였다. 그날도 예외 없이 재담이 유별난 김 교감이 마이크를 쥐었다.
김 교감의 주특기는 Y담. 그리고 독특한 어투다. 눈만 껌벅거려도 웃음을 짓게 하는 친구다. 모두가 한참 배를 잡고 웃으며 가던 중 잠시 침묵을 연출하였다. “이제 나이도 들만큼 들었으니 중후한 이야기 한 번 들어보자”며 자못 숙연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배 도사에게 마이크를 넘겨 격조 높은 이야기 한 번 들어보자” 한다. 배 도사는 동창생들이 나를 만만하게 부르는 별명이다. 김 교감은 능숙하게 마이크 줄을 끌며 내 자리로 왔다. “어이, 배 도사, 부처가 있기는 있는기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 교감 아들이 대학입시에 3년 내리 낙방을 했다. 그리고 내자는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범어사에 새벽기도를 다녔다. 그런 사실을 사전에 알았다 한들 이런 막무가내 질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아이의 낙방은 부모의 기도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김 교감은 부처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아들의 낙방을 정당화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고 보니 근간 김 교감은 마주할 때마다 부처의 실존에 대해 회의적 발언을 일삼았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번 두 번이다. 스님에게나 물어야 할 질문을 배도사라는 별명을 뒤에 붙여 부처이야기를 반복하니 마침내 정색을 하고 이야기해야할 상황까지 되었다.
“부처가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으면 내 손바닥에 김 교감 마음을 올려놓아 보여 다오.” 황당한 질문에는 황당한 답으로 응대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김 교감은 “따지는 게 아니라, 좀 깨우치게 해 달라”는 뜻이라며 살짝 어투를 누그러뜨렸다.
“한 두 마디 말로써 밥상머리 수저를 잡듯 설명할 일이 아니지 않느냐. 다음달 회지會誌에 내 생각을 올릴 터이니 읽어 보시게나.” 졸업생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매월 소식지 겸 회지를 발간하던 터였다. “배 도사는 불교공부를 많이 하잖아” 김 교감은 기어이 무언가 대답을 얻어내고자 하였다.
신앙을 가진 자는 대부분 제 마음을 찾겠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잘 다스려 줄 구세주를 찾고 기다린다. 마음은 본시 모양이 없는 것인데 모양이 없는 것이 모양임을 깨우치지 않고서는 구세주를 만나도 알아보지 못한다. 어머니가 합격기도를 한다고 자식 대학 진학이 성취될 것 같으면 시험에 떨어질 아이는 하나도 없을 터이다.
부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 이전에 부처가 무엇이냐, 나아가 누구냐 하는 문제를 명확히 해야 한다. 우리가 부처라고 부르는 존재는 교복에 달린 이름표 같은 고유명사가 아니다. 교사, 교장, 학장, 총장 등 우리가 속한 조직에 직급이 있듯이 부처 또한 직급 명칭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르다.
보리살타는 산스크리트어로 보디삿트바 라고 발음한다. 중국식으로 음사하여 기록한 것을 우리식 발음으로 읽다 보니 그리되었다. 보살도 보리살타의 보와 살을 줄여 만든 명칭이다. 붓다란 우주본성을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니, 붓다가 부처고 부처가 붓다다.
석가모니 역시 산스크리트어로는 샤키아무니 비슷하게 발음한다. 깨우친 석가족의 현인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법당에 조각상을 모셔놓고 부처라고 부르는 것은 대중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시청각교재다. 말을 만들자면 가우타마 싯다르타라는 석가족의 청년이 수련을 통하여 우주법칙을 깨달아 부처지위에 올랐다는 말이다.
인도인들이 조성한 불상은 야위고 검다. 단식수행으로 도를 깨친 가우타마 싯다르타가 볼이 통통하고 살집이 풍요롭게 조성된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보기 좋으라고 조각가가 꾸민 한국적 정서다. 중국을 거치면서 살이 붙고 화려한 장식이 덧칠되었다. 종교적 환경을 조성 하느라 상징물을 곁들이기도 하고 언설로 피력하지 못하는 부분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일주문, 사천왕문, 종루, 탑 등은 신봉의 대상이 아니라 문맹시대에 창안된 시청각교재다.
이 사람이 수행을 거쳐 부처라는 경지에 도달했기에 그를 일러 붓다라 하는데,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위대함을 찬양하는 뜻으로 무상사, 명행족, 성문, 연각, 세존 등 십여 가지 존칭으로 명명된다. 그렇게 부처는 분명히 과거완료형으로 실존했었다.
김 교감이 내게 던진 질문이 장난이 아니었다면 무언가 반응이 있겠거니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과거완료형으로는 이해가 됐으니 현재진행형으로 이야기하란다.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것은 설명으로 안 되고 수련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기도가 부처에게 당도할 것인가를 공부하는 것이 수련이다. 수련은 각자가 실천을 통해 갈고 닦아야 한다.
대부분 신도들은 기도라는 빌미로 소원을 성취하게 해 달라는 구걸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 닦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없다. 복권에 당첨되고 싶다면 복권을 구입해야 하듯이 복을 받고 싶으면 복 닦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부처는 복 닦는 방법을 가르치는 존재이지 복권에 당첨되도록 묘수를 부리는 마술사가 아니다.
보다 깊은 지식을 쌓고 싶다면 석학을 찾아가라. 욕심을 내려놓고 진실한 마음으로 좋은 은사님 만나기를 소망하면 정직한 안내자를 만날 수 있다. 부처가 꼭 존재해야 한다면 각자의 마음속에 있음이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불교를 믿는 것은 붇다의 가르침을 수행으로 삼아 스스로를 닦아야지 도와달라며 구걸을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더 이상 김 교감은 부처의 존재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아들이 어떻게 대학에 입학했는지는 후일담이 없다. 2,500년전 실존 인물이 우주법칙을 깨달아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가르침이 법처럼 오늘날 까지 규범이 되어 자리 잡았다. 도덕적 규범이라면 공자도 있고 소크라테스도 있다. 사후세계와 윤회론을 정립하여 불법이라는 종교적 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철학이론과 비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