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정학적 요충지 원산
원산은 우리나라 고대국가 옥저가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조선 태조가 꿈을 키우며 말을 달리던 치마대와 둘째 왕비인 강씨의 고릉이 있다. 북쪽으로는 송도원 해수욕장이 넓게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10리나 뻗어나갔다는 해당화 붉게 피는 명사십리 해안이 있다. 이 속에 원산항이 있다. 그 외곽으로는 호도반도가 북에서 남으로 쭉 내려 뻗쳤고 남에서는 갈마반도가 북쪽으로 달리다 그렸다. 그 안에는 간만에 관계없이 수심 깊은 바닷물이 넘실거려 동양최대의 양항을 만들어 놓았다. 한편 은둔의 제국이었던 조선 조정은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1880년에 부산, 제물포(인천)와 동시에 이 항구를 개항했다. 한번 문을 열자 일본상인들은 원산항을 통해서 양곡을 일본으로 너무 많이 수출해갔다. 따라서 함경도민이 굶주림을 당했고 이를 걱정한 조병식 관찰사는 급기야 방곡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1910년 한일합방이 되었고 더 많은 일본인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조선, 기계, 섬유, 식품가공, 정유업 등이 일어나 일약 공업도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을 기점으로 청진으로 가는 함경선, 평양으로 가는 평원선, 양양으로 가는 동해북부선, 서울로 가는 경원선 철도가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육로는 물론이고 드넓은 원산항에는 쉴 사이 없이 대소형 선박이 드나들며 교통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니 각종 물산이 여기에 집중되고 관북과 영동북부의 관문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충지였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에는 오히려 도시가 대파되는 비운을 맞아야 했다. 군사적인 측변으로 보면 1946년 6월에는 원산에 해안경비대 간부학교를 두었으니 이것이 나중에 해군군관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1950년 6월23일 북한해군은 원산기지에 있던 8척의 함정을 출동시켰고, 민간선박 70여척을 징발해서 유격부대인 549부대와 766부대를 태우고 남침을 개시하였다. 1950.6.25.에는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있었고 아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낙동강 방어선으로 물러났다.
□ 미 제10군단의 북진작전
9월 15일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이라 불리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아군은 일제 반격에 들어갔고 9월28일 수도를 탈환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10월1일 유엔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미 제10군단장인 알몬드 소장과 미 제7함대상관인 스트러블 제독(중장)에게 원산상륙작전을 위한 준비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스트러블 제독은 제7함대 기동함대를 편성하여 청진 남쪽의 모든 해안을 철통같이 봉쇄하고 제10군단 상륙을 지원하게 되었다. 한편 10월1일 북진을 하게 되자 한국보병 제3사단과 수도 사단은 이날 오전2시45분 38선을 돌파하여 양양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적을 공격하던 아군은 10월10일 국군 제1군단 산하보병 제3사단 제23연대와 수도 사단 기갑연대가 원산에 입성하였다. 다음날 10월11일에는 미군이 원산비행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관북이나 영동지방으로 진격하는 유엔군은 거의가 원산에 상륙하였으니 실로 이 항구의 역할은 대단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항구라는 것을 적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30여명의 소련 기술자를 초청하여 고성능 기뢰 3천여 개를 원산 앞 바다에 바둑판처럼 깔아놓았다. 이를 제거하려고 미해군 소해정 10여척, 일본 해상보안청 소해정 7척, 한국해군소해정 1척 등을 투입하여 여러 날 소해 작업을 해야 했다. 결국 미 제10군단의 상륙은 늦어졌다. 드디어 서리가 내리고 단풍잎이 떨어져 가는 10월26일에야 미해병 제1사단과 한국해병 제3대대가 원산 외곽 명사십리 해안에 상륙하였다. 그 다음 날에 한국해병 제5대대가 역시 명사십리 모래판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어서 11월3일에는 미보병 제3사단이 원산에 상륙했다. 그 후 미보병 제7사단은 11월9일에 이원에 상륙했다. 그러나 10월26일 유엔군이 원산에 상륙하던 날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에 밀려 후퇴를 하고 있었다. 유엔군은 동부와 서부가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인천상륙지점에 편성된 미 제10군단이 미 제8군에서 분리되어 맥아더가 직접 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부의 제8군과 동부의 제10군단 간에는 정보공유와 협력체계가 미흡했고 2개 군단 간에는 드넓은 공간이 존재해 있었다. 그래서 상호 이를 연결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 중공군의 참전
이 때 북한군제 4,5,15사단에 편성되었던 약 8천명~1만여 명의 게릴라가 미 제8군과 제10군단 어간에 남아있으면서 도로와 병참선을 차단, 군부대 침투 등을 집요하게 자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맥아더 원수는 중공군의 개입과 북한군 잔류부대를 그리 중시하지 않고 크리스마스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며 한만국경선으로 진격에 열을 올리던 유엔군사령과 맥아더 원수 앞에는 이외의 변수가 일어나고 있었다. 전쟁의 여신 ‘아테네’는 우리에게 미소를 보내지 않고 더 한층 싸움을 붙이며 쌍방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마침내 중공군이 참전하여왔다. 그 징후는 인천상륙이 성공한 7일 후인 9월22일 중공외상 주은래가 이웃나라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을 절대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이어서 10월3일에 주공주재 인도대사 파니카를 불러 외국군이 38선 북쪽으로 진공할 경우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할 것임을 공식 표명하였다. 그러나 미 정책당국은 중공 측의 대미경고가 다분히 위협적인 언행에 불과할 뿐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을 것으로 여겼다. 더구나 파죽지세로 진군하던 아군 측은 중공 측의 군사개입 징후를 심도 있게 관찰하려고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10월16일에는 미 투르먼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와 회담하기 위하여 북서 태평양상에 있는 미국령의 작은 섬인 웨이크까지 비래하였다. 이 회담에서 투르먼 대통령이 중공군의 개입에 대하여 묻자 맥아더 원수는 중공군은 공군력이 빈약하므로 그들이 압록가을 넘어 오더라도 유엔군에 의해 섬멸될 것이므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미군은 조기에 전쟁을 종식시키고 빨리 철수가 가능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투르먼 대통령도 맥아더 원수의 낙관론에 대하여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더불어 미 행정부도 중공 정권수립이 1년 전인 1979.10.1.로 매우 일천하여 아직도 내부결속이 약하고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므로 영토보전만 확약해주면 대규모 희생을 감수하면서 참전하려 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이는 오판이었다.
미국의 거듭되는 한만국경 존중을 확약하는 성명에도 중공정부는 강하나만 넘으면 위협적인 요소가 될 외국군의 진주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0월19일 중공군은 펑떠화이를 원조 의용군 총사령으로 삼고 3개 방향에서 4개 군 3개 포병사단 1개 고사포 연대가 은밀히 압록강을 넘었다. 중공군은 평야지대와 대도를 피하고 개마고원, 낭림산맥, 묘향산 등지의 심산유곡에 은신하며 결정적 시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군은 대도로만 진격하다보니 적군을 발견하지 못하고 북진을 거듭하여 한국보병 제6사단 제7연대가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달하였을 때 바로 그때 중공군은 운산, 온정리, 희천, 구장동 일대에서 유엔군을 포위하며 반격에 나섰다. 더욱 난처한 것은 악천후로 유엔군은 항공기 지원을 받지 못하였고 인해전술로 들어오는 중공군에 밀려 아군은 총퇴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 관북지방에서 펼쳐졌던 북진과 철수경로
○ 국군보병 제3사단은 10월4일 영흥을 점령하고 두만강을 향하여 진군하여, 11월25일에는 길주에서 출발하여 무산군 삼사면 연암동까지 점령했다. 또한 제22연대 제1대대 제3중대는 혜산진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즉시 성진으로 철수하여 12월10일 수송선편으로 남하하였다.
○ 국군수도사단은 10월17일 함흥과 흥남을 점령하고 국경선인 두만강을 향하여 동북진하였다. 그리하여 11월25일 함경북도 중심지인 청진에 입성하였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함흥을 경유 흥남으로 철수했다. 수도사단은 12월16일 흥남에서 수송선편으로 남하하였다.
○ 미해병 제1사단의 제5연대와 제7연대는 함흥에서 북진하여 11월28일 장진호 서쪽에 있는 유담리를 점령하였으나 눈보라 속에 중공군에게 포위되었다. 11월30일 한 가닥 혈로를 뚫고 중공군 포위망을 벗어나 흥남으로 철수하였고 12월15일 흥남에서 수송선을 타고 남하하였다.
○ 미보병 제7사단은 11월19일 갑산을 통과하여 11월21일 한만국경인 혜산진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1월30일 불가피 철수하여 흥남으로 이동하였다. 그중 제231연대는 장진호 동쪽에서 진퇴양난의 사태를 뚫고 하갈우리와 황초령을 넘어 흥남으로 철수하였다. 이사단은 12월20일 흥남에서 수송선을 타고 남하하였다.
○ 미보병 제3사단은 11월3일 상륙한 후 원산항과 원산 비행장을 경비하였고 일부 병력은 평안남도 영원군으로 진출하였다가 11월30일 철수하여 흥남으로 이동했다. 이 사단은 12월24일 미 제10군단 사령부 및 남아 있던 전 지상군과 함께 흥남에서 수송선을 타고 남하하였다.
○ 한국 해병 제3대대는 고성, 통천, 안변 부근에서 잔적을 토벌하다가 11월15일 평남 양덕군 동야면 상석리를 점령하였다. 이 부대도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3일 원산으로 철수하였다. 12월7일 LST845호 외 1척의 수송선편으로 부산경유 진해로 철수하였다.
○ 한국 해병 제2대대는 11월30일 원산에 상륙하며 12월3일 함흥으로 전진하였다. 그 후 작전명령에 따라 임무 수행 중 12월15일 함주군 연포면의 연포비행장에서 미군 수송기편으로 부산수영비행장으로 철수하였고 12월17일 진해에 도착했다.
○ 한국 해병 제5대대는 고성, 통천, 안변 부근에서 잔적을 토벌하다가 12월3일 함흥으로 진주하였다. 제5대대는 함남 정평군과 평남 영원군 경계에 놓인 검산령에 도착하여 동토대의 혹한 속에 미 보병 3사단의 철수를 엄포하다가 12월5일 함흥으로 철수하였다. 제5대대는 12월15일 함주군 연포면 연포비행장에서 미군 수송기편으로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철수하였다가 12월17일 진해에 도착했다.
□ 북진 길에 나선 해병 제1대대
한국 해병 제1대대는 수도탈환이 끝나고 10월10일 인천 어느 병원 건물에 집결했다. 며칠 휴식하며 부대정비 후 10월18일 LST에 승선하여 바야흐로 남으로 향했다. 이 때 말단 병사들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는데, 진해와 부산을 경유하여 다시 항해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5일을 바다에서 보내고 10월23일 어느 항구에 상륙이 시작되었다. 전해지는 말로는 강원도 명주군의 묵호읍(동해시)라고 했다. 쌀쌀한 바람이 피부에 와 닿고 가랑잎이 떨어져 굴러가는 가을이었다. 저녁시간에 제1대대는 해군 묵호경비가 있던 해군 건물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 10월26일 제1대대는 묵호항에서 수송선을 타고 10월28일 원산 외곽 명사십리에 도착했다. 이 아름다운 해변으로 이미 미 해병 제1사단, 한국해병 제3대대, 제5대대가 거쳐 간 곳이었다. 제1대대가 시내로 행진하자 많은 시민이 나와 열렬한 환영을 해주었다. 해병들은 저절로 의기양양해졌고 손을 흔들며 주변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1대대는 원산 여자중학교에 들어가 주둔하였고 11월1일 수송선을 타고 또다시 남행하여 11월3일 고성군 현내면 송도진에 상륙하여 도보행군으로 고성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11월4일 고성에는 해병대 사령부는 물론이고 제1대대, 제3대대, 제5대대가 모두 집결하여 새로운 작전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1대대는 작전명령에 따라 고성~철원을 통하는 동부지역을 맡아 패잔병 토벌을 하게 되어 부근에 있는 명산인 금강산을 감상하였다. 그야말로 절묘하게 솟은 바위와 계곡에 흘러내리는 벽계수와 작은 폭포, 바위틈에서 낙엽지고 있는 단풍나무 등은 조물주가 만들어 낸 극치의 작품이었다. 이 산은 보통 금강산이라고 부르지만, 원래는 4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봄에는 신록이 우거져 아름다운 선경을 이룬다하여 금강산, 여름에는 녹음방초가 덮여 봉래산, 가을에는 곱게 단풍이 물들어 풍악산, 겨울에는 눈이 바위에 덮여 백골과 같다하여 개골산이라고 한다. 이제는 초겨울 개골산의 설경을 감상하며 그 경관에 점점 매료되어 감탄하게 되었다. 10월19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관북지방으로 진격했던 미 제10군단 산하 많은 부대가 흥남으로 모여들어 철수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지만 원산은 텅 비어 있었다.
□ 최후의 원산수비대가 된 해병 제1대대
원산에 방어할 부대로 해병 제1대대가 선정되었고 작전명령에 따라 11월27일 강원도 고성역으로 이동하였다. 다행히 그곳에는 미카 중기관차에 1~8량의 화차가 연결되어 있어서 명령에 따라 장병들이 우르르 화차위에 올라탔다. 그러자마자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열차가 레일 위를 서서히 굴러가자 모두들 환호성을 울렸다. 대부분 제주출신 병사들이라 천정이 없는 무개하차를 타서도 처음 타보는 열차였기에 신기해보였고 기분도 너무나 좋았다. 열차는 석탄연기를 물씬물씬 풍기며 계속 북상하여 용약 원산의 갈마반도의 명사십리에 도착했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해안 저 멀리 멀리 끝 가는 데를 모르도록 갈색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어 여름철이었다면 첨벙첨벙 바닷물 속을 들어가고픈 정겨운 풍광이었다. 해변에는 간만의 차가 별로 없는 동해바다라 바닷물이 스르르 하고 밀려왔다가 어느새 빠져나가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바로 그 해안에 붙여 원산비행장도 건설되고 있었다. 해병들은 중청리 고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원산여자사범대학 주변까지 수색정찰을 실시했다. 11월 29일에는 이미 겨울에 접어들어 살을 에는 칼바람 속에 하얀 눈이 쌓인대지를 밟으며 그 행렬은 동해중학교로 향했다.
11월 30일부터 제1중대는 동해중학 후방고지에 벙커를 급조하고 산 능선에는 교통호를 열심히 팠다. 간간이 쉬는 시간에 담배를 피며 드넓은 원산항을 쳐다보았다. 아직은 배가 몇 척 떠 있었고 항만 바로 너머에는 신도, 모도, 웅도, 송도, 여도, 장덕고, 대도, 소도, 사도 등 20여 개 섬이 점점이 놓여 있었다. 참으로 거대하면서도 아름다운 항구였다. 이 때 제1대대는 원산방어를 위해 제1중대는 관풍리에서, 제3중대는 중청리에서 미군과 임무를 교대하고 방어임무를 수행하였다. 제2중대는 원산 서쪽에 위치한 풍상면 용포리로 출신인 부 대대장 김종식 대위는 중화기중대의 81밀리 박격포 2개반과 기관총 1개반을 지휘하여 원산외곽에서 적의 내침을 분쇄키로 했다. 그런데 당시 원산 서방 24km지점에 있는 마전리에서는 미해병 제1사단 제1연대 제3대대가 진출해 있었고 그곳에서 서방 10km되는 문천군 풍상면 용포리 산정에는 미해병 포병대가 주둔하여 아군을 화력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이 용포리에서 험한 아호비령이라는 산악을 넘고 넘어 20여km를 더 서쪽으로 나가야 양덕군 대륜면 자개동과 사기리를 지나 동양면에 이르고 이곳에 한국해병 제3대대가 11월17일에 진출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며칠 후 북한군은 도로 요소요소에 진을 치고 아군을 포위하여 제3대대는 고립무원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속에서 김윤근 대대장은 북한군의 경계가 삼엄하지 않은 험한 산길을 택해 12월2일부터 철수키로 되어 있었다. 이를 엄호하기 위하여 제1대대 제2중대는 급거 출동하게 되었다.
12월1일 아침식사 후 9시경에 미해병대 GMC트럭 5대가 학교정문으로 들어왔다. 이제 출동하는가 보다고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제2중대에 전원승차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 미군트럭에 올라타고 서쪽으로 계속 달렸다. 선두차량은 중무장한 장갑차였다. 그 차들은 대낮이지만 라이트를 켜고 서쪽으로 달려 원산시내를 벗어나고 덕원면과 마식령을 넘어 평원국도를 따라갔다. 그리하여 차는 미해병 제1사단 제1연대 제3대대가 주둔한 문천군의 풍상면 마전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찬바람을 맞으며 차는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사방은 평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구름도 쉬어 갈 듯 높은 사놔 산이 하늘에 맞닿아 있었다. 그런 산 능선으로 한 가닥 길이 뚫려 있는데 계곡 밑을 보면 천 길 낭떠러지라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아, 여기서 차가 구른다면 병사들은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얼른 시선을 위로 쳐들었다. 이런 길을 따랄 제2중대가 가장 높은 산 정상에 오른 것은 오후 4시였다. 전하는 말로는 마전리에서 10km 떨어진 풍상면 용포리라는 땅이었고 계속 서쪽으로 나가면 평남 양덕군의 동양면을 지나서 평양에 들어간다고 했다. 신통하게도 계곡에는 눈이 쌓여 있었지만 정상으로 갈수록 눈이 없었다. 서북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이리 저리 날려버렸는지 모른다.
그곳에 미해병대 포병대가 진지를 구축하고 한파에 떨며 증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포대에는 105밀리 야포와 81밀리 박격포가 거치되어 있었고 포탄이 산더미 같이 적재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구미가 당기는 것은 시레이션이 벙커마다 가득히 쌓여 있어, 먹고 싶은 대로 가져다 먹으라는 전갈이 왔다. 해병들은 서로 다투며 하나씩 집어 들었다. 군대에서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그 시레이션은 골판지상자로 포장되어 있는데 큰 것은 16인의 1회용 식사가 들어있고 작은 것은 1인 3회분 식사가 들어있었다. 내용물은 깡통 속에 소시지, 미역줄기, 삶은 콩과 옥수수가 들어있었다. 그 외 건빵, 껌, 사탕, 럭키스트라이크 담배 등 우리나라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별별 진기한 것으로 식단이 차려져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방에 갈 때 총알이 바닥나 애쓰고 포탄 한발을 생명인 양 소중히 지니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주먹밥 한 덩어리로 주린 배를 채우며 싸워야 했고, 북한군이나 중공군 역시 병참물자가 귀하여 제때 식사 공급이 안 되었고 중공군은 아예 미숫가루 전대를 어께에서 허리까지 늘어뜨려 매고 다니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전투를 하고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더라도 미국은 부자나라였다. 이렇게 제2중대는 용포리 포대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향기로운 미제 담배를 피우면서 호사스런 이틀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럴 때 제3대대는 전 장병이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눈 덮인 설산 위를 걸었고 중첩된 포위망을 돌파, 바야흐로 12월3일 오전 3시에 기진맥진하여 용포리에 도착했다. 제2중대 요원과 미군은 그들을 껴안고 열렬히 환영했다. 독 안에 들어 전멸직전에 있었으나 대대장 이하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일사분란하게 행동한 멋진 철수작전이었다.
□ 중공군의 침입과 피난소동
12월2일 해병 제1대대 제3중대는 제2소대로 하여금 주변을 수색 정찰하도록 했다. 고문갑 제2소대장은 즉시 수색대(제1분대장 황인선 2등 병조, 여복만 3등 병조와 부창옥 2등 수병)를 편성하고 도보로 출발하여 원산 서방 8km거리에 있는 문천군 덕원면 상평리에 진출하였다. 마을마다 벌써 피난하는 사람들로 웅성이고 있었다. 그 곳에서 짐을 싸는 젊은이를 만나 물어보니 자기들은 원산으로 피난한다고 대답하면서 매우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중공군과 북산군 혼성부대가 이미 마식령( 문천군 풍상면과 덕원면 사이)를 넘는 중이며, 그 중 선발대는 덕원면 상대리에 들어 와 있다는 것이었다. 사태는 시시각각 원산을 압박하고 있어 수색대는 급히 귀대하여 이를 보고 했다. 이에 따라 해병 제1대대는 급히 원산방어를 위해 병력을 서측방과 갈마반도에 있는 비행장에 증강 배치하였다. 그런 후 하루하루를 초조히 보내는 찰나에 피로한 모습으로 해병 제3대대가 평남 양덕군의 동양면에서 아호비령을 넘어 12월3일 원산에 도착했다. 3일이 지나 12월5일은 남아 있던 육군이나 미군부대는 전부 철수해버렸고 한국해병 제1대대와 제3대대가 원산외곽을 담당하여 경계를 임하여야 했다.
그러는 동안 전세가 아군에게 불리하게 되자 반공인사들의 불안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정세에 민감한 그들은 보따리를 등에 이고 원산항으로 밀려들어 민간선박을 타서 남하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선박자체가 몇 척되지 않았고, 작은 배들이라 피난민은 운좋은 사람들 소수만 탈 수 있었다. 이제는 군 수송선 밖에 기댈 곳이 없었다. 사실 원산에 아군이 입성할 때에 공산당 치하에서 신음하던 많은 주민들이 열광적인 환영을 하였다. 당시 육군 제3사단이 내붙인 플랜카드도 「새 나라에 새 희망을 갖자」라는 구호였다. 역시 주민들도 새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장춘몽처럼 한 순간이었고 10월10일 한국 육군이 원산을 탈환한 이래 겨우 1개월 27일이라는 짧은 천하였다. 이제는 북한군이 들어오고 정치보위부원, 내무서원, 노동당원들이 설치어 피의 보복을 일삼을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원산 주민은 물론이고 이웃 문천군, 안변군, 영흥군 등지에서도 피난민들이 원산에 가면 유엔군이 있으니 살아날 수 있으려니 하고 원산으로 몰려들었다.
그 피난대열에는 아군에게 적극 협조해준 반공인사들 북진 시 찾아낸 국군의 가족, 해병 제3대대가 동양면에 갔을 때 협조해준 치안대 및 반공청년들이 300여명이 따라와 있었다. 그 피난민들이 운집한 머리 위로는 사정없이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누구하나 그대로 두고 갈 처지가 못 되었다. 이들은 그대로 있다가는 나중에 공산군이 들어오면 숙청 1호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 생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피난민들은 울고불고 남으로 데려가 줄 것을 처절하게 절규하고 있었다. 이 순박한 주민들을 두고 군부대만 빠져나가는 것은 의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과연 어찌하면 좋을까? 고길훈, 김윤근 두 해병대대장은 크게 고민하고 있었다. 특히 고길훈 소령은 고향이 원산 옆 영흥이었고, 김윤근 소령은 황해도 은률 출신이라 북한 주민은 부모형제 같았고 남다른 연민의 정이 있었다. 한 가닥 기대는 군 수송선편에 젊은 청년이나 여성들을 일부만이라도 승선시키자는 생각뿐이었다.
□ 해병 제3대대의 원산항 철수
당시 해상수송은 미군이 주관했으나 원래가 인도주의적인 미군들은 철군에 지장이 없는 한 민간인 동시승선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피난민 중에서 어떻게 일부만을 골라낼 것인가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노인과 어린이들은 매정하지만 남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12월7일 새벽녘 공산군 게릴라가 원산시내에 침투했다. 이를 안내해 오거나 숨었던 공산분자가 일어나 설치기 시작했고 정오에는 1천여 명의 적군과 원산을 방어하던 아군과의 첫 교전이 시작되었다. 피난민들의 운명은 점점 초조하고 절박해져 갔다. 드디어 원산부두에서 LST845호 등 2척의 수송선이 입항하자 물밀 듯이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태워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 때 평남 동양면에서 철수해 대기 중인 해병 제3대대가 우선 승선을 하고 제3대대와 함께 탈출한 300여명의 반공청년을 비롯하여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피난민들이 승선하였다. 그 아우성치는 군중 속에서 승선한 피난민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두고 가는 부모형제와 고향산천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이런 애환 속에서 출발한 두 척의 수송선은 부산에 기항하여 피난민을 하선시키고 진해로 들어갔다.
이제 원산에는 해병 제1대대만 남았다. 이 외로운 해병들은 수많은 적군과 교전하다가 12월8일 10시경 명사십리에 있는 원산비행장으로 이동하여 비행장 주변을 방어하였다. 그러자 피난민들이 비행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철조망이 쳐진 비행장의 활주로 서쪽에 비행장 입구가 있었다. 이 곳에는 8단으로 접게 된 철조망 문이 만들어져 있고 엄중경계를 하는데 피난민들은 문을 밀고 죽자 살자 들어오려고 했다. 그럴 때 인심 좋은 보초병이 문을 열면 우르르하고 인파가 파도 밀려오듯이 들어왔다. 적군은 쉬지 않고 밀려와 12월8일 10시에는 원산 시내에 진입하여 적기를 휘날렸다. 이제 원산비행장 함락도 시간문제였고 해병 제1대대는 고립무원 상황이었다. 드디어 9일 정오에 해병 제1대대를 수송하러 LST898호 외 1척이 명사십리 모래판에 선수문을 내렸다. 해병 제1대대가 승선하고 나머지 공간에는 빽빽하게 밀려든 피난민 중 젊은 남녀부터 승선을 시켰다. 그것은 제한된 인원이었다. 해변에 남겨진 인파들의 통곡소리가 처절하게 파도소리와 함께 메아리쳐 왔다. 2척의 수송선은 12월9일 석양 무렵에 원산, 명사십리를 뒤로 하고 남으로 내려왔다.
배가 외항으로 빠져 나왔을 때 미군 함재기가 비행장 주변을 선회하더니 아군이 미처 탑재하지 못하고 쌓아둔 장비와 물자에 사정없이 소이탄을 투하했다. 적군의 사용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배는 장병과 피난민들을 가득 태우고 남하하다가 울릉도 근해에 이르렀다. 바로 옆에는 미군수송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렁대는 바다에서 해병들에게 미군 수송선에 옮겨 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철모 끈을 동여맨 해병들은 하선망을 타고 바다 위에 떠있는 LCVP로 내렸다. 이렇게 다시 미군수송선에 내려진 하선망을 타고 올라갔다. 이렇게 해병들은 하루 종일 굶으면서 철수 길에 올랐고 일단 부산에 기항하여 노숙하다가 12월13일 다시 승선하여 진해로 돌아왔다. 해병들은 극도로 피곤한 모습으로 통제부를 걸어 나가 제3대대가 주둔하고 있는 진해여중으로 들어갔다. 며찰 전 원산에서 만났던 제3대대 장병들이 나와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발췌> 정수현, [한라의 젊은 영웅들], 제주특별자치도재향군인회, 2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