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밭 위전리 흙공장과 짚풀공예 - 성낙연 님
김선희 汀彬
파주시 월롱면 위전리에 사는 성낙연(83세)님은 1999년 파주시로부터 짚.풀공예품-왕골돗자리 기능보유자 인증을 받았다. 2004년 왕골자리 종목에서도 파주시와 파주문화원으로부터 기능보유자 인증 패를 받았다.
자리와 돗자리는 만드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 자리는 날실을 고드랫돌에 감아 자리틀에 차곡차곡 왕골을 하나씩 대어가며 차례로 엮어서 만든다. 그래서 날이 밖으로 드러나 보인다. 고드렛돌은 보통 돌이나 무쇠, 사기로 만들어 앞뒤로 넘기면 엮는다. 보통 직사각형으로 왕골이나 부들, 갈대 같을 것을 말려서 가늘게 쪼개어 쓴다. 볏짚으로 만든 멍석도 일종의 자리라고 볼 수 있다. 돗자리는 가마니틀과 비슷한 돗틀에 미리 날실을 걸어 두고 골을 바늘대에 걸어 지르며 바디질 하여 짠다. 그래서 자리는 ‘매는 것’이고 돗자리는 ‘치는 것’이다.
- 누구한테 배워서 언제부터 짚풀로 만드는 걸 하셨나요?
배운 적 없어요. 그냥 어깨 너머로 배워서 하는 거지. 옛날에 할아버지가 만드시는 거 본 거 기억해서 따라서 만들기 시작한 게 아마 환갑 즈음 일거에요. 그래서 처음엔 시행착오가 있었는데, 만들다 안 되면 다시 또 만들고 망치면 또 만들고 하면서 터득한 거죠. 겨울엔 일거리가 없으니까 왕골돗자리를 짜요. 송달용 시장님께 대상 두 번, 은상 세 번, 상도 여러 번 받았지. 금 열세 돈을 받기도 했어요. 2016년에도 파주 짚풀공예품공모전에서 '왕골자리'를 출품해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논농사도 기력이 딸려서 못 지어요. 전에는 손자하고 같이 지었는데 이젠 소일거리로 배석을 짜서 아는 사람들 나눠줘요. 배석은 절하는 자리를 말해요.
(대상 받았던 왕골 돗자리)
- 하나 짜려면 얼마나 걸리는지요.
둘이 양쪽에서 짜면 꼬박 1주일이면 만들 수 있어요. 젖은 걸 짜서 마르면 촘촘히 치고 또 짜고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많이 걸려요. 아내가 살아있을 땐 둘이서 20장씩 만들고는 했어요. 지금은 쉬엄쉬엄 한 달에 하나 정도 만들어요.
- 재료는 어디서 구하세요?
나는 왕골을 쓰는데 논농사 짓는 곳 한쪽에 심어서 씁니다. 모 심을 때 심어서 여름에 베어서 말려요. 통째로 말려서 껍질 벗기고 말려서 이렇게 갈라서 쓰는 거지요.
- 이 동네에는 언제부터 사셨는지요.
16살에 장단에서 나왔어요. 내쫓긴 거지. 처음엔 금촌 축협자리에 있던 수용소에 사람을 부려 놨다가, 다음 날부터 알아서 살라고 내보내서 당시 조리면 장곡리에서 한 4년인가 살다가 이곳 도내리에 있는 수용소로 오게 되었어요. 당시 장단에서 나온 사람이 4만 명이나 됐어요. 그래서 수용소 들어오는 것도 연줄이 있어 간신히 올 수 있었지요. 무료 배급을 하니까 너도 나도 서로 오려고 해서 연줄 없으면 들어오기도 힘들었어요. 그러니까 이 동네가 형성된 거 60년이 채 안 되었어요.
여기가 위전리잖아요. 둑을 막기 전에는 갈대가 많아서 갈대위 葦자에 밭전 田자를 써서 위전이라고 불렀는데 왜정 때 둑을 막고 논으로 만들었어요.
- 그럼 이곳에 정착해서 어떤 일을 주로 하셨는지요.
지금은 농사를 짓지만, 아주 오래 전에는 독 만드는 흙을 파서 흙 거르는 거를 했어요. 독 만드는 흙은 추워야 파낼 수 있어서 해토가 되면 모래를 빼느라고 걸러요. 이 근방이 흙이 좋아서 여러 곳 있었어요. 지금 주유소 자리랑 현대 자동차 공장 자리 있는 곳이에요.
논바닥처럼 만들어서 흙을 파내는데 처음에는 조금 거친 흙이 나와요. 그건 벽돌 만드는 흙이고, 더 깊이 파내면 노오란 흙 독 만드는 게 나와요. 흙을 물을 타서 모래 가라 앉혀서 거르고 흙은 말려서 가루가 되면 일산에 있는 독공장으로 납품을 했어요. 그 당시 일산에 독 만드는 곳이 두 곳 있었거든요. 30년 동안 흙작업을 했는데 벽돌 공장 들어오면서 없어졌어요.
흙 공장에는 7∼8명이 일했고, 이 동네에 흙 만드는 공장이 두 곳 있었어요. 비가 오건 하면 흙이 신발에 붙어 부녀자들이 신발은 벗어들고 걸어 다니던 곳이에요. 그래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사는 마을”이라고 했지요.
- 많이 힘드셨겠네요. 일 하면서 어떤 것이 가장 힘드셨어요?
노동이니까 다 힘들기는 하지. 하지만 사고 날 일은 없어서 오래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 때는 일 하다가 힘들면 나무 밑에 잠깐 잤는데, 노루가 뛰어다니다 논에 빠지면 흙 때문에 못 빠져나와서 제자리에서 겅중겅중 뛰기만 해요. 그러면 그걸 잡아서 국 끓여 동네잔치를 했어요.
그 다음엔 농사를 지었어요. 땅 밖에 몰랐지요. 그 당시는 우리 집은 6남매에 부모님 모시고 8명이 한 집에 살았어요. 장단 살 때 형제가 셋이었는데 여기 나와서 세 명을 더 낳으셨어요. 그 당시 동네에 잔치가 있거나 장례가 있으면 모두 함께 모여서 했는데 특별히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은 없었어요. 지금은 30호에 100여 명밖에 없어요.
파주시 월롱면 위전리는 수용소였던 흔적은 오래 전 지워지고 없다. 근처에는 휴지 만드는 공장이 하나 있었고, 비닐 인쇄해서 항공사에 납품 하는 곳도 있었는데, 이제는 공장도 없고 그래서 공기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