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온통 김삿갓 세상!
강원도 영월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청령포와 장릉이 있는 곳. 그렇다. 영월은 단종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영월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아주 많이 영월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 영월의 어느 지역에 가면 여기도 김삿갓, 저기도 김삿갓, 온통 김삿갓 세상이다. 이곳은 지역 명칭마저도 ‘김삿갓면’이다.
어째서 영월은 지금 김삿갓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김삿갓의 묘가 영월에 있기 때문이다. 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김삿갓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방랑시인이며 가문에 대한 아픔을 간직한 불운의 사나이다. 또한 시선(詩仙)이라 불릴 만큼 천재적인 시적 감각을 지닌 사람이기도 하다. 그 날카로운 감각으로 사회제도와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염증을 느껴 비판하고 자연을 사랑하여 시로 노래했다.
허나, 정말 김삿갓은 그것이 다였을까?
이제부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야 한다. 단, 한 가지 기억해 두자. 우리는 옛날에 죽은 김삿갓을 기리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김삿갓을 만나러 가고 있다는 것을.
김삿갓은 지금 영월에 살아있다!
(하동면은 2009년 10월 ‘김삿갓면’으로 개칭하였다.)
1. 태극기는 오늘도 펄럭인다 <옥동리>
따스하지만 조금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차를 타고 옥동리로 들어섰다. 아담한 마을 도로가 눈앞에 펼쳐진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는 알록달록한 담장들. 가까이 가서 보니 꽃도 피어있고, 나무도 서있다.
모이를 쪼던 엄마 닭과 병아리들이 놀란 듯 쳐다본다. 나뭇가지가 부러질 듯이 감이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 그림도 너무나 정겹다.
▲ 엄마 닭과 병아리들
▲ 풍요로워 보이는 빨간 감나무 그림
우리 집 좀 봐라 하고 자랑하는 듯한 벽화들에 이따금씩 따뜻한 눈길이 머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꽃을 쫓는 나비가 되기도 하고, 병아리를 쓰다듬고, 발꿈치를 들어 더 맛있어 보이는 감을 따려고 안간힘을 쓰는 어린 아이가 되기도 한다. 내 고향이 농촌이든 아니든 머릿속에 자리 잡은 시골에 대한 향수는 여기서 이렇게 펼쳐진다.
옥동리는 김삿갓권역으로 들어서기 위한 첫 관문이자 김삿갓면의 면 소재지이다. 이곳은 1167년 고려 시대에는 밀주(密州)의 청사(廳舍)가 있었던 곳이며, 그 당시 죄인을 가두던 감옥이 지금의 옥동중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옥(獄)이 있던 마을이므로 ‘옥동(獄洞)’이라고 했으나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 이름에 ‘감옥’이라는 의미가 들어가면 과연 어느 누가 반길까. 마을 이름은 ‘옥동(玉洞)’으로 바뀌었다.
▲ 마을 담장에는 장터길이라는 이름의 안내판이 붙는다. 여기는 마을 뒤에 있는 충절사의 주소.
▲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당의 모습. 요리사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청년이었다.
먼저 가장 큰 글씨가 쓰인 것으로 봐서 전문요리가 해물 순두부 전골인 것은 알겠다. 그런데 난데없이 중국 요리가 등장한다. 자장면, 짬뽕, 탕수육이라…. 식당 이름도 중국집의 ‘~반점’이라든가 ‘~성’ 내지는 ‘~루’ 시리즈와는 전혀 동떨어진 아주 평범한 ‘동강식당’이다. 이 식당의 정체는 과연 중국집일까 한식집일까. 바깥에만 이렇게 적어 놓았겠지 하는 맘으로 식당에 들어선다. 그러나 메뉴판을 보니 더욱 어리둥절해지는 건 어쩌나.
▲ 메뉴는 저것이 전부.
더 자세한 설명을 기대했던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다. 메뉴는 바깥에서 본 해물 손두부 전골과 갑작스러운 중국요리인 자장면, 짬뽕, 탕수육이 다였다. 아차, 육개장도 추가요! (나중에 다시 찾았을 때는 족발과 냉면이 더 생겼다. 여름이라 계절 맞춤메뉴가 생겨난 듯하다.)
노부부로 보이는 남녀와 청년 하나가 분주히 식당 안을 오가고 있는데 그 청년이 다가와 물을 주며 무엇을 먹겠느냐고 물어본다. 주문하기 전에 궁금한 것들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다음은 우리가 나눈 우스운 대화들이다.
“메뉴가 저게 다예요?”
“예. 다예요.”
“중국집에 흔히 있는 볶음밥이나 팔보채 같은 건 왜 안파시나요?”
“형이 만들기 귀찮다고 안한대요.”
“아, 형이… 그렇군요. 그럼 저기 있는 메뉴만 시켜야 되겠네요.”
“식당을 가족분들이 운영하시나 봐요?”
“예. 저 분들이 엄마랑 아빠고, 형이 요리산데 잠깐 어디 갔어요.”
“그러시구나. 저희 자장면이랑 탕수육 시키려고 하는데 되죠?”
“예. 근데 형이 와야 만들 수 있는데. 티비 보러 갔나? 잠깐만 기다리세요.”
작은 아들과 대화를 나눌수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중국 요리를 시킨 우리 옆에는 가스버너 위에 전골냄비를 올려놓고 식사 중인 무리가 있었다. 식당 가족들과 농사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니 옥동리 주민들인가 보다. 잠시 후 약간 긴 바람머리를 하고 등장한 요리사 형이 보였다. 그리고 금세 탕수육과 자장면이 나왔는데 정말 맛이 있었다. 음식을 먹고 나서 계산을 할 때 웃으면서 형에게 물었다.
“볶음밥 같은 건 귀찮아서 안하신다는데 정말이에요?”
“네. 할 줄은 아는데 잘 팔리지도 않고 그래서 없앴어요. 뭐 손님이 원하면 해드리고요.”
명쾌한 형의 대답. 손님이 원하면 해준단다. 사람 좋아 보이는 형은 근심 걱정은 과감히 떨쳐버리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것 같았다. 도시에는 특화된 나만의 메뉴가 없으면 시도 때도 없이 식당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는데 시골에는 이런 식당도 있다. 마을 분들에게 물어보니 동강식당은 맛있기로 꽤 입소문난 곳이었다. 모처럼 유쾌한 점심식사였다.
▲ 굉장히 맛있었던 동강식당 또 하나의 전문 요리 탕수육과 자장면
옥동리는 면 소재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각종 교육ㆍ행정 관서들이 밀집해 있다. 옥동초등ㆍ중학교와 하동지서, 하동농협, 하동우체국 등이 모두 옥동리에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2009년 10월 하동면에서 김삿갓면으로 지명을 개칭하였기 때문에 학교를 제외한 이 모든 것에 이제는 ‘김삿갓’이라는 이름이 붙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