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착역을 향해가는 근로정신대 문제
미쓰비시중공업이 마침내 협상장에 나오겠다는 뜻을 공식 표명한 것은, 근로정신대 문제 뿐만 아니라,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전후 65년, 협상카드를 내민 미쓰비시
“어제(23일) 한국 방문단이 서명명부와 함께 회사에 요청한 내용에 대해서는 사장을 포함해 경영진에 모두 보고했다. 할머니들이 당시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일한 사실이 있다. 재판에서는 비록 이겼지만 인도적인 차원에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한일병합 100을 맞은 올해, 우리 회사로서는 이 문제가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라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협의해 갈 생각이다”
6.24일 오전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주주총회장에서 1천여명의 주주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 회사의 법무․총무이사역을 맡고 있는 야스다 상무가 밝힌 말이었다. 비록 상무의 발언이지만 1천여명이 넘는 주주들이 참여한 주주총회장에서 사장을 대리해 회사측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라는 점에서, 이날 발언은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특히 짧은 몇 마디 답변이지만, 정제된 이 짧은 답변 속에는 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한 미쓰비시측의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요약하자면 ①134,162명의 서명명부와 함께 국회의원을 포함한 25명이 방문할 만큼 큰 이슈가 되고 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②할머니들이 미쓰비시에서 노역한 사실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한 점 ③재판 결과에도 불구하고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 ④올해를 중요한 시점으로 본다는 점 ⑤협의할 뜻이 있다는 점 등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주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밝힐 만큼 이미 이 문제에 대한 내외의 관심이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점을 회사 측이 공개 표명한 것이라 할 것이다.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해방 65년 동안 그 존재마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어쩌면 역사의 무대로 저 멀리 이미 퇴장한 근로정신대 문제가 전후 65년 만에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입을 통해 역사의 무대로 새롭게 등장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후 65년이 지났고, 10여년에 이른 재판도 이미 끝난 이 시점에서, 전범기업 미쓰비시는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고 왜 이런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을까?
●3년에 이른 도쿄 원정시위....나고야 소송 지원회
이용섭 의원을 포함한 한국 국회의원 100명의 연서명, 25명의 항의방문단, 13만4,162명의 항의 서명, 200일에 가까운 광주 1인 시위, 1년 7개월에 이른 서울 금요시위…
눈길을 사로잡는 기록들이 없지 않지만, 24년(1986~)동안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오직 한 길 만을 쫓아 온 ‘나고야 소송 지원회’(‘지원회’는 1998년 출범)의 투쟁 앞에 설수는 없다.
2008년 11월 11일. 10년여에 이른 재판(1999.3.1~2008.11.11)마저 끝내 기각돼, 더 이상 사법적 해결의 길마저 모두 사라진 상태. 이미 1년여 전인 2007년 7월 20일부터 도쿄 원정투쟁에 나섰지만 이 같은 노력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투쟁의 고삐를 다시한번 움켜쥐었다. 그것은 ‘금요행동’의 강행이었다. 누가 봐도 ‘미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최고재판소의 판결이 결코 강제연행과 강제노역을 한 미쓰비시에게 도의적 책임까지 면책한 것은 아니다. 미쓰비시는 지금이라도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
나고야에서 도쿄까지의 거리는 약 360km. 왕복 700km가 넘는 거리를 오가는 신간센 요금만 1인당 30만원에 가까운 막대한 돈이었다. 2007년 7월 20일부터 시작한 도쿄 금요 원정시위는 무려 143회째에 이르렀고, 2010년 7월 현재 36개월째, 만 3년에 이르고 말았다.
출구도 없고 가녀린 한 치 빛마저도 보이지 않는 20여년 세월. 허망한 것은 비단 이것에 그치지 않았다.
“너희가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 조선이 좋으면 조선에나 가서 살아라”. 차가운 냉대 속에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러기를 24년.
“지금까지 봐 왔지만 최고재판소까지 간 판결로도 안 되면 모두 정리하거나, 지리멸렬하다 끝나게 된다. 모두 그렇게 됐다. 도대체 왜 그러냐?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2010년, 마침내 지난 6월 초 미쓰비시가 ‘나고야 소송 지원회’에 출구를 타진해 오기에 이르렀다.
●후생연금 납입기록 11년 만에 확인, 결정적 돌파구 마련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던 근로정신대 문제는 2009년 9월에 들어 극적인 반전의 기회를 맞게 됐다. 일본 후생노동성 사회보험청이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 원고들의 후생연금 납입사실을 공식 인정한 것이다. 1998년 사실 조회를 신청한지 무려 11년만의 일이었다. 바야흐로 근로정신대 투쟁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아는 바와 같이 후생연금 납입기록은 향후 투쟁을 열어 가는데 결정적 돌파구였다. 뿐만 아니라 향후 벌어질 대투쟁을 예고하는 서막이나 다름없었다. 부연하자면 후생연금 납입 사실은 다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첫째, 할머니들은 말 그대로 강제노역 피해자라는 사실을 일본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확인받는 셈이었다.
둘째,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해방 64년 만에 ‘후생연금 탈퇴수당금’을 수령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특히 이는 한일협정으로 과거사 문제가 모두 끝났다고 주장해 온 일본정부의 논리에 결정타를 던질 가장 강력한 카드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셋째, 강제노역 사실은 곧바로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의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확보했다는 차원에서 이후 벌어질 투쟁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반전...미쓰비시 1인 시위, 연이은 ‘99엔’ 파문
다가올 자신의 운명을 감지하지 못한 채 마침내 미쓰비시가 악수를 던지고 만 것이다. 2009년 9월 25일 광주에, 그것도 광주시청 앞마당에 미쓰비시자동차 전시장을 연 것이 그것이다.
어쩌면 역사는 투쟁하는 자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악수 중에 악수였다. ‘시민모임’과, 그것도 운명과도 같이 ‘광주’에서 만난 것이다.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미쓰비시는 결국 제 발로 광주를 찾아와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파는 꼴이 되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별반 다를 것 없는 또 하나의 전시장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악수’ 중의 ‘악수’가 되고 마는 것은, 부여된 역사적 책무를 마다하지 않고 칼을 벼르고 있던 ‘시민모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늦어도 한 참 늦은 출발이었다. 심지어 시민모임 출범을 두고서도 이미 다 끝난 마당에 ‘할 수 있는 일이 있겠느냐’는 동정도 없지 않았다. 1인 시위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 특정인들로 이뤄진 시민모임에서 과연 1인 시위를 유지해 낼 수 있겠느냐’, 심지어 ‘과욕’이라는 얘기까지 들리는 마당이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시민들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결코 시민들 속에 꿈틀거리는 생명력과 에너지를 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1인 시위는 근로정신대 문제를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홍보의 장이자, 더 없는 ‘역사 교육장’이 되고 말았다. 쉽지 않는 여건에도 지난해 10월 2010년 5월까지 ‘10만 서명운동’을 결의한 것, 역시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는 자에게 역사적 기회가 오고야 말았다. 그것은 바로 후생연금 탈퇴수당금 ‘99엔’ 사건이었다.
후생연금 탈퇴수당금 ‘99엔’건은 비단 근로정신대 문제에 그치지 않는 것이었다. 어쩌면 대일 과거사 문제의 모든 쟁점과 모순점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해방 65년 동안 역사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한일 양국 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 일제피해자 문제의 본질을 한꺼번에 토해 낸 것이다. 결과적으로 ‘10만 서명운동’은 ‘99엔’에 반발한 국민들의 대중적 분기와 염원을 끌어내는 장이 됐다.
●과거사 문제 해결의 시발점 마련...여파 확대될 듯
어쩌면 미쓰비시로서는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미쓰비시중공업측의 의도와 상관없이 근로정신대 문제는 해방 65년 동안 해결되고 있지 않는 과거사 문제의 시발점을 여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의 결과는 자연스럽게 다른 전범기업들에게도 여파가 미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일본정부의 향후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가져오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 아울러 포스코 등 일제 징용 피해자들의 수혜를 입은 국내 기업들에게도 과거사 문제에 동참하도록 하는 우회적 압박요인이 될 것이다.
특히 이미 사법적 구제의 길이 모두 끝난 상황이었고, 한일 양국 정부마저 등진 상황에서 과거 청산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양국 시민들의 연대 투쟁으로 이룬 일대 진전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적지 않다 할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이 과정을 잉태하기까지 그 모든 자리, 자리마다에는 ‘눈물’과 ‘땀’으로 일군 시민모임 회원 및 광주 시민들의 희생이 있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혹한의 눈보라를 헤치며 달려온 200여일에 가까운 1인 시위, 주말도 팽개치고 거리 서명운동을 강행한 지난 6개월의 그 지난한 발자취가 없었다면 감히 오늘의 결과를 예측키 어려웠을 것이다.
아울러 13만 4,162명의 서명이 있기까지는 전국의 경향 각지에서 이름도 모르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화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국민들의 응집된 분노로 미쓰비시를 굴복시킨 쾌거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