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장지도(張志道,13??~14??) 윤은보(尹殷保)ㆍ서즐(徐騭)
장지도(張志道, ?~?) [려문1371] 관향은 옥산(玉山). 부친은 윤원(允元) 이며 조부는 수원부원군 을보(乙浦)이다. 관직은 기거주(起居注)ㆍ지의주사(知宜州事)에 이르렀다. 조선이 건국하자 사직하고 향리에 돌아가 자제들을 부지런히 교육하였다. 윤은보(尹殷保)ㆍ서즐(徐騭)이 스승으로 섬겼다.
*조선왕조 실록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태종 년간에 고향으로 내려 온 것으로 추정
윤은보(尹殷保) 본관은 파평이며 號는 효절이다. 부친은 시조(時祖)이며 파평부원군 호(虎)의 현손이다. 묘소는 현의 남쪽 표암에 있다.
서즐(徐騭) 본관은 이천이며 호가 남계(南溪)이다. 부친은 목사 강(强)이며. 조부는 평장사 윤(玧)이다. 묘소는 현북의 문당에 있다.
> 조선왕조실록 > 태조실록 > 태조 4년(1395년) 을해 > 9월 4일 >
乙未/命禮曹議郞鄭渾及校書少監張志道, 校正《貞觀政要》以進。
예조 의랑(禮曹議郞) 정혼(鄭渾)과 교서 소감(校書少監) 장지도(張志道)에게 명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교정해서 올리게 하였다.
>한국고전총간 > 신증동국여지승람 > 卷二十九 > 慶尙道 >지례현
盤谷吟(반곡을 노래하다)
장지도(張志道)
千年盤谷一區平(천년반곡일구평) 오래된 반곡의 한 구역 차지하여
占斷前峯起石城(점단전봉기석성) 앞 봉우리 끊어서 석성을 세웠다네.
從古幾家爲土姓(종고기가위토성) 내려오던 몇 집안은 토착 성씨 되었고
于今十室得官名(우금십실득관명) 지금에는 열 집안이 관직을 얻었네.
簷垂柹栗山中味(첨수시율산중미) 처마 아래 감과 밤이 산중의 별미이고
軒鎖雲煙世外情(헌쇄운연세외정) 집을 감싼 안개 구름 세상 밖 정취라네.
莫恨盛時曾見棄(막한성시증견기) 좋은 시절 일찍이 버렸다고 후회하지 말게나.
好爲閑客此閑行(호위한객차한행) 한가한 나그네 한가로운 여행 좋아한다네.
*장지도(張志道) [려문1371] 본관은 지례(知禮). 관직은 기거주(起居注)ㆍ지의주사(知宜州事)에 이르렀다. 태종 년간에 사직하고 향리에 돌아와 자제들을 부지런히 교육하였다.
*반곡(盤谷) : 당나라 임담(臨潭) 사람 이원(李愿)이 은거한 곳으로 한유(韓愈)의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가 전해진다. *석성(石城) : 『경상도속찬지리지 지례현』 “홍무(洪武) 신유년(1381년)에 돌로 성을 만들었다. 둘레가 1343尺. 높이가 9尺, 작은 우물 2개가 있어 여름이나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다.
>고전번역서 > 야은일고 > 야은일고 제6권 > 부록 > 〈존모록〉을 붙임〔尊慕錄附〕 [전만영(田萬英)]
전녹생(田祿生, 1318~1375)
張志道知禮人。官至起居注、知宜州事,辭官歸鄕里,敎誨子弟不倦。尹殷保、徐騭師事之。
장지도(張志道) 지례인(知禮人)이다. 관직은 기거주(起居注)ㆍ지의주사(知宜州事)에 이르렀다. 사직하고 향리에 돌아가 자제들을 부지런히 교육하였다. 윤은보(尹殷保)ㆍ서즐(徐騭)이 스승으로 섬겼다.
> 고전원문 > 임하필기 > 林下筆記卷之十八 > 文獻指掌編 >
大典後續錄。尹殷保等撰。《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은 윤은보(尹殷輔,) 등이 지었다.
>단원 김홍도(金弘道,1745~?) 作 오륜행실도첩(五倫行實圖帖)의 윤은보(尹殷保)
> 한국고전총간 > 동국여지지 > 卷四下 > 慶尙道 > 최종정보
柳馨遠(1622~1673)
尹殷保。徐騭。二人共學於張志道。相謂曰:“民生於三,事之如一,況吾師無子可養乎?”每遇良辰,必具酒饌,敬事之如父。及歿,二人請廬墓於其親,親憐而許之,乃玄冠腰絰,廬於墓傍。未逾年,殷保感異夢急歸,父果病作。及歿,晨夕號哭,不離喪側,旣葬,廬父墳。一日飄風疾起,失案上香盒,數月不得,有烏含物來置墓前,人就視之,卽所失香盒也。至朔望,猶奠張墳。騭終三年。世宗朝幷旌門拜官。後騭父母歿,居廬六年,年九十餘卒。
>> 한국문집총간 > 금곡집 > 錦谷先生文集卷之十三 > 碑 >
知禮三賢遺墟碑 戊申(1848)
송내희(宋來熙,1791~1867)
惟此知禮縣治。在主嶽山下。其舘舍傍近。自昔相傳以爲三賢之舊居也。縣之東一喚地有盤谷。兼以巖瀑之勝。張公遊賞其間。取以爲號。歿而墓於縣後精誠峴。又其小北幾百步。設尹徐二公之棹楔。自縣而南數十里許。鑑湖之上剡溪書院。卽白村金公揭虔之所。而以三賢躋侑焉。顧其遺址荒茀堙廢。殆不可辨。而槩認其同閈共學。勝國以來迄今四百餘載。尙爲鄕人行路之所指點而咨嗟矣。諸公事實。世遠不能詳。而就邑誌與倫綱所編。猶可考據。張公知道玉山人。父允元。祖乙浦水源府院君。公以洪武辛亥。擢文科。官起居注。知宜州事。當革命之際。謝歸鄕里。日進諸生而訓誘不倦。其貞操芬躅。足以激懦而律貪。更無入本朝祿仕之蹟。想或以罔僕之義歟。時有尹公殷保,徐公隲。俱摳衣請益於其門。相謂曰。人生於三。事之如一。况吾師無子可養乎。得異味輒進。遇良辰。必具酒饌。及張公捐世。廬墓供饋奠。而尹公感異夢。歸視親疾。竟有烏含香盒。茸抽雪中之異。徐公獨守終制。亦致猛獸之呈祥。事親從師。生養死祭。盡其至誠。而物之感應。理無舛差。二公資質之美。固有過人者。而從事問學。擩染啓發之功。尤爲難誣也。至世宗朝。有上其事者。幷命旌閭。拜尹公官厚陵參奉。徐公官司涓。遭逢聖明。獲被殊恩。豈不休哉。盖民有是身。則必有彝倫。師之設敎。因其固有。還以導之。故參於君父而爲三大倫。二公之移孝及師者。皆盡乎彝倫之道。而今聞徽蹟。終古不泯。非有爵賞之勸刑辟之威。而人皆靡然嚮之而感慕者。豈非彜倫所同而然歟。尹公號節孝。貫坡平。父時祖。坡平府院君虎之玄孫。墓在縣南瓢巖。徐公號南溪。貫利川。父强牧使。祖玧平章事。墓在縣北文堂。諸公之同出一縣。已可謂盛矣。而居旣同井。葬皆不出鄕。亦稀矣。今者知縣耆老章甫與諸公遺裔。懼彌久而彌失其處。謀伐石而刻其事。合辭屬余以記之。余攷其蹟而多曠感。遂不辭而略書如右。復語之曰。顧自世級漸降。義理日晦。事一之倫已斁。而知之人士。感奮激發於百世風聲。不忍荒其地而將圖永有所勸。則矧其子孫闡先之誠。寧有窮已乎。若因是而恒思法象其賢範。則異日復振世業之中微。於是乎在。不惟永賁其遺墟而已。爲諸公後承者。益相與勉之哉。
지례현의 치소는 주악산 아래에 있다. 그 관사와 가까운 곳은 예전부터 세 어진 분의 옛 집ㅌ로 전해져 왔다. 현엣 동쪽 방향에 반곡이 있는데 바위와 폭포의 아름다움을 겸하고 있다. 장공이 그곳에서 노닐다가 그 이름에 취해서 호로 삼았다. 장공이 세상을 떠나자 현의 뒤 쪽 정성고개에 묘를 썼다. 또 그곳에서 조금 북쪽으로 멸 백보 되는 지점에 윤공과 서공 두 분의 정려가 설치되어 있다.
현엣 남쪽으로 수십리쯤 되는 감호에 있는 섬계서원은 곧 백촌 김문기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삼현의 신주도 나란히 올라있다. 세분에 관계되는 사실들은 『읍지』와 『삼강행실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장지도는 옥산인이다. 부친은 윤원(允元) 이며 조부는 수원부원군 을보(乙浦)이다. 공은 홍무 신해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기거주(起居注)와 지의주사(知宜州事)를 역임했다. 혁명기간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날마다 여러 생도들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其貞操芬躅。足以激懦而律貪。更無入本朝祿仕之蹟。想或以罔僕之義歟。
그 즈음에 윤은보와 서즐이 함께 그의 문하에서 예를 갖추어 가르침을 청하였다. 서로 이르기를 “우리 세사람에게 인생은 하나와 마찬가지이다. 스승께서 자식이 없으니 어찌 부양하리오.”하면서 맛 난 것을 자주 올리고 명절이 되면 반드시 술과 안주를 갖추었다.
장공이 세상을 떠나자 여막에서 함께 제사를 올리는데, 윤공이 이상한 꿈을 꾸고 돌아와 보니 모친이 병을 앓고 있었다. 竟有烏含香盒。茸抽雪中之異。徐公獨守終制。亦致猛獸之呈祥。事親從師。生養死祭。盡其至誠。而物之感應。理無舛差。두 사람은 자질이 아름다워 남들보다 뛰어났으며,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물어서 익히고 계발된 것이 더욱 뛰어나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세종조에 이르러 그 일을 올려 정려를 세우라는 명이 있었고, 윤공에게는 후릉참봉, 서공에게는 사연 벼슬이 제수 되었다. 遭逢聖明。獲被殊恩。豈不休哉。盖民有是身。則必有彝
스승은 가르침을 베풀어 그 고유한 것을 바탕으로 이끄는 길로 돌아오게 한다. 그러하기에 임금과 어버이와 마찬가지로 세 개의 큰 윤리가 된다.
두 분이 효를 스승에게 옮긴 것은 떳떳한 윤리를 다한 것이 아니리오. 而今聞徽蹟。終古不泯。非有爵賞之勸刑辟之威。而人皆靡然嚮之而感慕者。豈非彜倫所同而然歟。
윤공은 호가 효절로 본관은 파평이다. 부친은 시조(時祖)이며 파평부원군 호(虎)의 현손이다. 묘소는 현의 남쪽 표암에 있다.
서공은 호가 남계(南溪)로 본관은 이천이다. 부친은 목사 강(强)이며. 조부는 평장사 윤(玧)이다. 묘소는 현북의 문당에 있다. 세 분이 한 고을에서 나온 것으로도 이미 성대하다 할만한데, 한 마을에서 같이 살고 고향을 떠나지 않고 장사 지내니 역시 드문 일이다.
근자에 지례현의 노인과 선비들이 세공의 후손들과 함께 오래될수록 그 장소가 사라질까 염려하여 돌을 다듬어 그 일을 새기고자 나에게 기문을 지어줄 것을 함께 부탁하였다.
나는 그 사적을 참고하여 크게 느낀바가 있어 마침내 사양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그 사적을 기록하였다. 復語之曰。顧自世級漸降。義理日晦。事一之倫已斁。而知之人士。感奮激發於百世風聲。不忍荒其地而將圖永有所勸。則矧其子孫闡先之誠。寧有窮已乎。若因是而恒思法象其賢範。則異日復振世業之中微。於是乎在。不惟永賁其遺墟而已。爲諸公後承者。益相與勉之哉。
숭정기원후사무신삼월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 겸 경연관 은진 성래희찬
>김천신문 http://www.kimcheon.co.kr/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297&idx=34899
윤은보의 묘비(坡平尹公殷保墓碑)
孔門廬墓載遺篇 공문(孔門)의 여묘(廬墓)살이 남겨진 글에 실렸으나
師道千年癈不傳 스승의 도(道) 천년토록 병들어 전해지지 않았었네
誰料窮鄕初學輩 궁벽(窮僻)한 시골의 처음 배우는 이가 누가 알리
種楷腰經企前賢 성인(聖人) 가르침 실천하여 법 심으며 앞 현인(賢人)처럼 되길 바랄 줄을
一軆而分性本眞 한 몸에서 나누어졌으나 성품은 본래 진실해
夢驚親癠氣通神 어버이 병환에 꿈에도 놀라니 기운이 신묘(神妙)하게 통했네.
慈烏反哺能相感 반포(反哺)하는 까마귀도 능히 감동(感動)되어
香合啣來慰棘人 향합(香合) 물고 와 상주(喪主)를 위로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