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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란 더 우월한 존재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존경을 표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씀하셨다. 경배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께서는 경배 받으시기를 좋아하시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받으시는 것은 아니며, 그분의 자녀들이 그분이 정하신 규례대로 경배할 때 받으신다.
1. 경배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행 10:25, 계 22:9).
인간이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만이 높임을 받아야 할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경배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베드로가 들어서자 코넬료가 그를 맞아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더라. 그러자 베드로가 그를 일으키며 말하기를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행10:25-26) 『그가 내게 말하기를 “보라, 그리하지 말라. 나도 선지자들인 네 형제들과 이 책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들과 같은 너의 동료 종이니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하니라.』(계22:9) 피조물이 경배를 받을 수는 없다. 마귀도 피조물이다. 그는 경배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경배받기를 좋아한다.
경배를 받으실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사역 기간 동안 자신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을 물리치신 적이 없으시다. 마귀가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 시험할 때 ‘너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곧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증명하셨다.
『그런데, 보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서 주께 경배드리며 말씀드리기를 “주여, 주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하니,』(마8:2) 『그때 그가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주께 경배하더라.』(요 9:38) 이렇듯 경배는 하나님께만 드려야만 하는 것이다.
성막과 성전은 경배를 위한 장소를 지정하셨다. 또한 어떻게 경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아브라함, 모세, 이삭, 야곱,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들에게 경배의 방법을 가르치셨다. 어디에서 어떻게 경배를 드려야 하는지 장소는 어디며, 대상은 누구며,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지를 다 가르치셨다. 그러나 오늘날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께 경배한다. 과연 인간들의 방법들이 경배에 합당하겠는가? 아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찬송 부르고 손뼉을 친다고 해서 경배를 받으시겠는가?
2. 경배는 영원토록 해야 하는 것이다.
『스물네 장로가 보좌에 앉으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께 경배하며 그들의 면류관을 그 보좌 앞에 던지며 말씀드리기를 오 주여, 주께서는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니, 이는 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으며, 또 창조되었기 때문이니이다.”라고 하더라.』(계 4:10-11) 하늘에 있는 보좌 앞에 네 짐승들이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리는 것은 경배의 지속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경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전 2:14). 왜냐하면 성령으로 나지 못한 사람들은 육신적이어서 영의 일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고전 2:14)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 누구도 경배에 관한 원칙을 이해할 수 없다. 경배는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으로 마음이 꽉 찬 상태에서 자신의 몸을 드리는 것이다.
경배는 구원받은 성도가 자신의 몸을 살아있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지역 교회로 모여 수행하는 가장 근본적이며 근원적인 실행이 바로 경배이다. 경배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나아가고, 자백과 회개로 스스로를 정결케 하여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고, 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은혜와 진리로써 더욱 강성케 하셔서 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며(사 43:7, 고전 10:31)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찬양케 하기 위해 구원하셨기 때문에(엡 1:5,12,14), 경배는 우리를 구원하신 참 목적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경배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의 존재의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확인하며 하나님의 일을 위한 준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과 지역 교회의 사역에서 일 순위는 합당한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불리는 자는 모두 다 데려오라. 이는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그를 창조하였고, 내가 그를 조성하였나니 정녕, 내가 그를 지었음이라.』(사 43:7)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입양할 것을 예정하셨으니』(엡 1:5)
『이는 먼저 그리스도를 믿었던 우리로 그의 영광을 찬양케 하려 하심이니라.』(엡 1:12)
『이는 값 주고 사신 그 소유를 구속하기까지 우리의 유업의 보증이 되사 그의 영광을 찬양케 하려 하심이니라.』(엡 1:14)
3. 참된 경배에 대한 근본적인 원리
『그러나 참된 경배자들이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경배드릴 때가 오나니 바로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경배드리는 그런 자들을 찾으심이니라.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드리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만 하리라.”고 하시니라』(요 4:23-24)
참된 경배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구원받는 사람임을 전제한다. 구원받지 않은 기독교인이 “경배” 혹은 “미사”라는 의식을 엄숙하고 경건하게 거행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지 않으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배를 드릴 수 없다.
1) 경배는 거듭난 사람이 영으로 드려야한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요 3:6)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롬 8:14)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지 않았다면 성령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상태로는 하나님께 영으로 경배드릴 수 없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영으로 하나님과 영적인 접촉을 갖게 되고 이 영적 접촉 가운데는 하나님께 올바른 경배를 드리게 된다.
구원받은 성도가 영으로 경배 드린다는 것은 성령을 무슨 도구로 사용하여 경배를 드린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맺게 된 상태에서 경배를 드린다는 뜻이다. 성도는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자세로 주님 앞에 서야한다.
2) 경배는 진리로 드려야 한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변개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바른 성경이 없이는 바른 경배를 드릴 수 없다. 왜냐하면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오직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만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경배에 성령님의 역사가 있기 위해서는 성령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신 진리의 말씀이 있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된 진리의 말씀이 있을 때 주님께서 온전히 선포되실 수 있다.
개역성경은 경배를 절하는 것으로 변개시켰다. 그런 성경으로는 바른 경배를 드릴 수 없다. 우리는 절하는 것이 아니라 경배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은 진리인데, 36,000단어가 변개된 성경으로는 하나님께 바른 경배를 드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바른 진리의 말씀으로 드려진 경배만을 받으신다.
3) 경배의 대상은 아버지 하나님(요 4:22-23)과 아들 하나님(요 9:38)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로 인해서 그분께 경배해야 한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그분의 아들을 주신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 경배해야 하고, 그 일을 완성하신 두 번째 인격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해야 한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경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경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 그러나 참된 경배자들이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경배드릴 때가 오나니 바로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경배드리는 그런 자들을 찾으심이니라.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드리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만 하리라.”고 하시니라.』(요 4:22-24)
『그때 그가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주께 경배하더라.』(요 9:38)
(1)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해야 한다.
『너는 다른 신을 경배하지 말지니 그 이름이 질투인 주는 질투하는 하나님임이니라.』(출 34:14) 만일 사람이 다른 신을 경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분개하시고 우상을 경배하는 자와 그 대상이 되는 우상을 멸하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아들 하나님이시기에 경배를 받으신다.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권세와 부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도다.”라고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과 땅과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각 피조물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이 말하기를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토록 있을지어다.”라고 하더라. 그때 그 네 짐승이 말하기를 “아멘.” 하고 스물네 장로가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에게 경배하더라.』(계 5:12-14)
(2) 성령님께 경배하라는 말씀은 성경에 없다.
『그분이 나를 영화롭게 하시리니, 이는 그분이 내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임이라.』(요 16:14)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지상에서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신약에 있는 어느 누구도 성령을 경배하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다. 성령에 대해 최대의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 가장 모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성경은 성도들을 성령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도록 인도하신다. 성령은 성경을 알고 공부함으로써 하나님을 경배하고, 감사하고, 이해하라고 가르치신다.
4. 경배를 위한 합당한 섬김의 의미
그리스도인은 경배의 의미를 알고 바른 경배를 드려야 한다. 만일 경배의 의미를 몰라서 바른 경배를 드리지 못했다면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경배에 대한 무지는 변명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제시하기 위해 성경을 쓰셨고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성경이 가르치는 지식을 우리가 얻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가 영적이며, 진실하며, 지적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인지 아닌지 마음을 써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합당한 예배(섬김)니라.』(롬 12:1) 카톨릭의 전통을 경배의식에 그대로 사용하는 개신교회에서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기도를 암송함으로써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려고 한다. 사람들의 잘못된 경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또, 자신의 몸만 교회에 있고 마음은 자기가 원하는 곳에 가 있는 것은 영으로 드리는 경배가 될 수 없다.
경배는 성도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삭이 번제로 드려지는 상황에서 경배라는 표현이 성경에 처음 사용되었듯이 우리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바른 섬김이 가장 기본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 그런 헌신된 섬김의 자세로 경배에 모여야 한다. 따라서 성도는 경배를 계기로 죄에서 성별하여 자신을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드려지는 제물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늘 죄들을 자백하고, 거룩함을 회복하며, 거룩함을 유지하는 삶을 살아야 바른 경배를 드릴 수 있다. 경배에 신실하지 못하면 신앙생활 전반이 온전할 수 없다. 경배는 성도의 신앙의 기초이자 신앙의 핵심이다.
5. 경배는 어떻게 드려져야 하는가?
경배는 기도와 찬양과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경배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인격체로서, 신들 중의 신이며 왕들 중의 왕이며, 주들 중의 주시며, 전능하신 분, 영원하신 분, 그리고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처음과 끝이신 전능하신 창조자로서 숭배하는 것이다.
경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경건하게 드려져야 한다. 경배는 품위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모든 일을 품위 있게 하고 또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품위 있고 질서 있는 교회가 아니라면 그것은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지 못하는 교회나 성도들은 하나님께 바른 경배를 드릴 수 없다.
경배는 경건의 모양만 있는 형식적인 의식이 아니라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집회여야 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 3:5) 피아노, 오케스트라, 화려한 성가대, 강단에 스톨을 목에 두른 목사, 찬란한 조명, 두 손을 높이 들고 열광하는 회중이 있다 해도 성경이 주관하지 않으시는 경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품위 있고 질서 있는 경배는 겉으로 보기에만 경건한 로마카톨릭의 미사나 제도화된 교회의 경배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가짜 방언이 난무하는 경배는 무질서하며 하나님께 합당치 않기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6. 경배 장소와 시간
그리스도인이 모인 곳이면 어디서나 경배를 드릴 수 있다.
1) 경배 장소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인아, 나를 믿으라. 너희가 이 산에서나 예루살렘에서도 아버지께 경배하지 않을 그 때가 오리라.』(요 4:21)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면 어디서나 경배를 드릴 수 있다. 구약에서처럼 반드시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지역에 지역 교회의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다면 한 장소에 모여 주님의 몸 된 지체들을 섬기고, 함께 교제하며, 경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하실 것이다.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경배를 드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올바른 경배가 아니다. 성경대로 믿는 지역교회가 없다든지 특별한 사유가 있어 교회에 오지 못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역교회에 모여서 경배에 함께 하는 것이 바른 섬김이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 자신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저버리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2) 경배 시간
그리스도인은 그 주의 첫날에 아침이나 저녁 언제든지 경배를 드릴 수 있다. 『그 주의 첫날 제자들이 빵을 떼고자 함께 모였을 때 바울이 그들에게 설교하되 다음 날 떠날 준비를 하고 한밤중까지 설교를 계속하더라.』(행 20:7) 『매주 첫날에 너희 각자가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신 대로 따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는 모금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전 16:2)
7. 경배의 요소
경배는 형식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일정한 순서와 질서가 있다.
1) 찬송
경배를 찬송으로 시작하며 찬양의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들로 너희에게 말하고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곡조를 만들고』(엡5:19)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해서 찬양의 제물을 하나님께 계속해서 드리자. 이것이 그의 이름에 감사하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그리스도인이 드려야 할 제물은 양이나 염소 같은 짐승이 아니라 찬양의 제물을 드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경배에 앞서 찬양을 드림으로 경배를 준비한다. 찬양을 드릴 때 일어서는 것은 주님을 맞이한다는 의미이다. 재판정에서 판사가 들어올 때 모든 사람이 일어서서 맞이하는 것처럼 가장 높으신 분을 맞이하는 성도의 자세는 일어서는 것이다. 이 때 부르는 곡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찬송으로 한다. ‘나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무엇인가 때문에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도 찬양이다. 다양한 모든 찬송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할 수 있다.
2) 기도
『꾸준히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기도에 깨어 있으라.』(골 4:2)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성냄과 주저함이 없이, 어디서나 거룩한 손들을 들고 기도하기를 바라노라.』(딤전 2:8)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합당하다. 특히 경배에는 반드시 기도가 있어야 하는데 기도는 대표자가 나와서 기도할 수 있다. 대표기도자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회중을 대신해서 기도하는 것이므로 성도들은 대표자가 나와서 기도할 때 같이 그 기도 내용에 집중해서 한마음으로 함께 기도를 해야 한다. 이때 대표기도자는 나와서 회중 앞에서 기도한다고 사람들을 의식해서 기도하면 안되고 온전히 하나님만 의식하며 기도해야 한다.
3) 헌금
헌금은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신앙고백이다. 헌금을 드리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이며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현이다. 『아무도 내 앞에 빈손으로 나오지 말지니라.』(출 23:15b)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율법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헌금은 이런 마음에서 하나님께 받은 것 가운데 일부를 자원함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형제들에게 권하여 그들이 너희에게 먼저 가서 너희가 전에 알려 준 너희의 연보를 미리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노라. 이렇게 준비하는 것이 연보 같고 억지로 한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후9:5) 그리스도인은 매주 첫날 교회에 모여 경배를 드릴 때 순서에 따라 준비된 헌금을 드리되 인색함이나 억지로가 아닌 기쁨으로 드린다. 내가 받은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지역교회를 운영함에 있어 경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성도가 마땅히 서로 짐을 나누어지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누구며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이같이 기꺼이 드릴 수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나왔고 주의 소유인 것에서 우리가 주께 바친 것이니이다.』(대상29:14) 『너희는 서로의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라.』(갈 6: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헌금은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드릴 때 기쁘게 받으신다.
4) 설교 말씀
그리스도인은 경배 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성도가 찬양과 기도와 헌금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면 설교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받는 것이다.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말씀을 듣는 것이다. 성도는 말씀을 듣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귀는 설교시간에 가장 많은 방해를 한다. 피곤하거나 몸이 연약한 상태에서 졸음이 올 수도 있지만 마귀의 방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피곤, 연약함, 마귀의 방해로 내가 집중해서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다른 성도들에게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핸드폰을 울리게 하거나 심지어 전화를 받고 통화까지 하는 것은 예의를 벗어나는 행동이다. 성도가 경배를 방해할 수 있는 모든 요건들을 사전에 다 정리해서 경배에 임해야 한다. 성도가 경배에 실패하면 한 주간 동안 무기력한 삶을 살 수 있다. 경배는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들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이 말씀이 믿는 너희 가운데서도 효과적으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성도가 설교 때 듣는 말씀으로 마음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실패한 것이다. 설교를 듣고도 마음에 찔림도 없고 다짐도 없고 헌신도 없다면 그 경배는 실패한 것이다. 성도는 경배에 성공하기 위해서 단순히 듣는 것만이 아니라 기도로 준비해야 하며 마음도 좋은 밭으로 갈아져 있어야 한다. 이런 자세로 경배에 임해야 경배에 성공하고 헌신할 수 있다.
5) 헌신
『또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너희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헌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변화된 자신의 도전 받은 마음과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경배에 동참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몸을 드리지 않은 채로 앉아서 마음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된 경배가 될 수 없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경배를 드리는 사람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누가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막상 경배를 드려야 할 성도들이 경배보다 더 소중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일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우상인 것이다. 경배자는 마땅히 경배해야 할 대상을 잘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상에게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배 드리는 데 있어 하나님께 하지 않고 우상에게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는 모독이며 성도에게는 수치로 돌아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으로 거듭난 그분의 자녀 된 우리들과 교제하시며 우리의 생애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죄와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구세주로서 아들 되시며,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경배란 이런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 한 분으로 자기 마음이 꽉 차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마음으로 경배에 참여하고 성공적인 경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8. 경배의 원칙
1) 구약의 경배
『아브라함이 그의 청년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머물라. 나와 아이는 저기로 가서 경배드리고, 다시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창세기 22:5은 성경에서 경배라는 말이 처음 언급된 곳이다. 이 구절에서 보면 진정한 경배는 항상 피의 제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자신과 아들이 둘 다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은 아브라함이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경배가 최초로 언급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이삭과 관련이 있다. 즉 어린양으로 예표 된 피의 속제이며 죽은 아들의 부활이 동반되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행하려고 했던 것은 어떤 의식이 아니라, ‘진짜’ 아들을 ‘진짜’ 장작더미에서 불태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결심이었다. 이삭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그 아들을 돌려받았던(부활) 것이다.
*경배라는 말이 구약에서 최초로 사용되었을 때 그 경배는 예표로서 죽었다가 살아난 한 아들과 연관이 된다.
2) 신약에 제시된 경배
『이제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니, 보라, 동방으로부터 현자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신가? 우리가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드리러 왔노라.”고 하더라.』(마 2:1-2) 동방의 현자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찾아 왔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경배라는 말이 처음으로 언급되었을 때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연관이 있다. 성경은 성경 자체의 기준을 정해 놓고 있다. 우리는 마땅히 성경대로 생각해야 한다.
구약에서 경배란 말이 처음 언급되었을 때 그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이삭과 관련이 되며, 신약에서는 이스라엘 왕의 탄생과 관련이 된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제물인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성경대로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성경대로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래서 이삭과 예수 그리스도는 둘 다 ‘독생자’라고 불린 것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이삭을 제물로 드렸으니, 그 약속들을 받은 자가 그의 독생자를 드린 것이라.』(히 11:17)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9. 참 경배는 피로 언약을 맺은 제사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피 흘려 드린 희생제사와 무관하게 드리는 어떠한 경배도 부질없는 종교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경배란 경배 받으실 분과 경배하는 자들 사이에 약속이 맺어져 있어야 한다.
1) 구약은 짐승의 피로 맺은 언약이다.
출애굽기 24:1에 하나님께서는 모세 혼자만 주께 가까이 오게 하셨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음에 있어서 단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다. 모세가 강압적으로 백성들에게 너희들은 무조건 하나님께 경배 드려야한다고 하지 않았다. 『모세가 와서 백성에게 주의 모든 말씀들과 모든 명령들을 말하였더니 모든 백성이 한 음성으로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을 우리가 행하리이다.” 하더라.』(출 24:3)
모세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들과 명령들을 백성에게 전하자 백성이 모두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경배하겠다고 동의했다. 동의가 있은 후에 번제와 화목제가 드려졌다.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주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모세가 피의 반을 떠서 대야들에다 담고 피의 반은 제단 위에다 뿌리며... 모세가 피를 떠서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기를 “언약의 피를 보라. 이는 주께서 이 모든 말씀에 관하여 너희와 맺으신 언약이라.” 하더라.』(출 24:5,6,8)
모세는 짐승의 피를 대야에 담아서 반은 제단에다 뿌리고 반은 백성에게 뿌렸는데, 제단에 뿌린 피는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시킨 것이다. 죄가 있는 상태에서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상적이지 않다. 또한 백성에게 뿌린 피는 하나님과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된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의 생활을 약속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한 것이다. 그 가운데 첫째가 경배이다. “제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겠습니다.”라고 피로 언약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동물 제사는 아무리 많이 드려지고 아무리 반복적으로 드려졌어도 결코 죄를 제거할 수 없었기에 온전한 경배가 드려졌다고 할 수는 없었다.
2)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언약
『이는 이것이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나의 새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라.』(마 26:28)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으심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씀하신 것으로 주님께서 죽으심으로써 새 언약이 시작된 것이다. 첫 언약 때에 흘려진 동물의 피는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을 때 송아지나 염소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언약이었으나 이 언약은 불완전했으며 영원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해마다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매년 제사를 드려야 했다. 이것은 불완전한 언약이었기에 새 언약이 필요했고, 이 새 언약은 영원한 언약으로써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완전하고도 영원한 속죄를 가져오게 하는 언약이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더불어 시작된 언약으로 이것이 신약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런 연유로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죄한 것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그 영원한 유업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히 9:14-15)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양심까지도 정결케 할 수 있는 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영원하신 피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양심이 정결케 된 성도들, 즉 새 언약에 속한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피가 필요 없이 하나님께 경배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경배 드리겠다고 언약을 맺은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경배드릴 수 있다.
10. 카인의 종교와 아벨의 종교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자신의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다. ‘내가 정성을 다하여 최선을 다하면 신께서 받아 주시겠지!’라는 이른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 언약 없는 열성과 정성은 결국 자기만족을 위한 종교일 뿐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자기 방식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따라야 하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의 구도는 크게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카인의 종교”와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아벨의 종교”로 나뉠 수 있다.
1) 카인의 종교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한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의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그들이 입었던 “무화과나무 잎”은 오늘날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의 상징이다. 불교, 유교, 힌두교, 이슬람교, 개신교, 카톨릭, 유대교, 안식교, 공산주의, 무신론 등 인간의 거룩함과 의로움의 결핍을 가려 보려고 사용되는 모든 종교는 인간의 사상들이다.
『시간이 흐른 후에 카인은 땅에서 나는 열매를 가져와서 주께 제물로 드렸고, 아벨도 자기 양떼 가운데서 첫배 새끼들과 그 살진 것을 가져왔더니, 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더라. 그러므로 카인이 몹시 격노하고 안색이 변하더라.』(창 4:3,5) 하나님께서는 카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첫째, 카인은 자기 자신의 최선으로 자기 방식대로 제물을 드렸기 때문이다. 인류에 의해 세워진 종교와 철학들, 그리고 오늘날 21C 한국식 기독교에서 드려지는 경배의 모습들은 대부분 죄인들이 자기 자신의 최선을 가지고 하나님의 앞에 나아오면 하나님께서 그 경배를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경배를 드린다.
카인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번제보다는 “음식제사”를 먼저 드리려고 가져온 것이다.(레 23:10-12, 출 20-24장) 그의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 되지 않은 둘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피”의 제물을 드리지 않았고, 아담과 이브의 타락으로 저주받은 땅(창 3:17)에서 나는 자기 의의 열매를 가져와서 제물로 드렸기 때문이다. 카인은 스스로 은혜를 저버리고 종교 행위를 앞세웠고, 그가 열심히 땀 흘리고 수고한 땅에서 나는 열매로 음식제사를 정성껏 드렸지만, 그가 드린 제물에는 “피”가 전혀 없었다. 피가 없는 경배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 아벨의 종교
『아벨도 자기 양떼 가운데서 첫배 새끼들과 그 살진 것을 가져왔더니, 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 4:4) 아벨은 언약에 따라 자기 양떼 가운데서 첫배 새끼들을 고르고 그 중에서도 가장 살진 것을 잡아 하나님의 제단에다 “피”의 제물을 드렸다. 아벨은 하나님 앞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겸손한 마음으로 제물을 드린 것이다. 아벨이 드린 제물은 온전히 열납 되었으며, 그의 기도는 즉시 응답되었고, 그가 드린 “피”의 제물은 즉시 그 “증거”를 얻었다.
비록 아벨의 제물은 영원한 속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부터 원하시는 유일한 제물은 점이나 흠이 없는 “어린 양”이라는 사실을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어린 양이 되실 때까지는 아벨이 드린 “피”의 제물이 올바른 해답이었다.
모든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레 17:11-14), 속죄를 위한 유일한 길은 “피”의 제물을 드리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섬김은 바로 “아벨의 종교”인 것이다. 누구든지 속죄함을 얻기 위해서는 아벨의 피의 제단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 마땅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갈보리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그 모든 죄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시는 것이었다. 진정한 종교는 인간의 편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은혜로 오는 것이다.
11. 바른 경배와 헛된 경배
창조주이시요, 온 인류의 구속주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람들로부터 합당한 경배를 받기 원하신다. 왜 하나님께서는 경배를 요구하시는가? 그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경배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자기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로부터 경배 받으실 목적으로 광야에서는 성막을 세우셨고, 카나안 땅에 들어와서는 성전을 세우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이사야 등등 그 외에 많은 신실한 종들에게 경배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음을 알 수 있다.
1) 바른 경배
율법의 첫째 계명은 『너는 내 앞에 다른 어떤 신들도 있게 하지 말지니라.』(출 20:3) 하나님께서는 선하건 악하건 다른 신들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다른 신들은 모두 우상이다. 오직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므로 경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사람도 두어서는 안 된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첫 계명은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계명이니라.』(막 12:30) 율법 아래이든 은혜 아래이든 첫 번째 계명은 하나님께 바른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신약 교회시대의 바른 경배는 하나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에서 신실한 설교자를 통해서 준비된 설교를 통해 마음의 변화를 받아 자신이 어떻게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지를 표명하고 죄인들을 구령하는 것에 도전 받으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다.
2) 헛된 경배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드리지 않는 모든 경배는 헛된 경배이다. 『무리가 크게 소리질러 빌라도에게 요구하기 시작하기를, 그가 늘 하던 대로 자기들에게 해 달라고 하더라. 그러나 빌라도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기 원하느냐?”고 하니,』(마 15:8-9) 입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주님을 사랑한다 말하면, 마치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 많은 사람들은 자기 감정에 속아서 자신의 마음과 목적에 따라 하나님께 경배한다. 그러나 경배는 영으로 드리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혼적인 열심만으로 나아가거나, 마음은 다른 곳에 빼앗긴 채 몸만 예배당에 있다면 그것은 헛된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영적인 경배와 혼적인 경배는 구별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육신은 아름다운 장소과 감각적인 음악, 그리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이야기가 있는 “밝고 매력적인” 경배를 원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요소와는 거리가 멀다. 모든 종교의식은 음악과 분위기에 좌우되는 혼적인 의식들이다. 분위기 형성을 위한 악기들의 반주와 예복들, 웅변의 기교와 유머 감각들로 이루어진 설교,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시적인 기도, 이외에서 참석자들에게 갖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키도록 의도된 것들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법칙을 무시한 잘 짜인 연극에 불과하다. 정화수를 떠 놓고 진정으로 비는 마음은 모든 종교와 우상숭배에나 적합한 것이다.
경배에 무지한 교회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경배 드리기 위하여 웅장한 건물을 세워 이스라엘의 성전을 대신하려 하며, 올바른 경배를 드리지 않고, 시대의 요구에 맞추어 변화와 개혁의 이름으로 축제와 같은 회중 지향적인 경배 방식으로 바꾸어 “열린 예배”나 “콘서트 예배” 같은 것을 하고 있다. “열린 예배”나 “콘서트 예배”는 말 그대로 어떤 사람이든지 예배에 참여할 수 있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예배를 뜻한다. 사람들은 현시대에 맞는 진보된 예배라며 설교 강단에 신디사이저와 드럼, 기타 등을 놓고 찬송가 대신 CCM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있다.
크고 작은 많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이른바 “경배와 찬양” 역시 모양과 형식만 경배를 흉내 낼 뿐 하나님을 위한 참된 경배가 아니라 인간을 만족시키기 위한 헛된 경배에 불과하다. 창조주이시요 구속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언제 어느 곳에서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경배와 찬양을 드린다고 무조건 받아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12. 경배를 방해하는 것들
경배는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가장 최고의 순종이요, 의무이기 때문에 사탄은 경배를 방해한다. 사탄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 성령과 성령의 은사 같은 것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사탄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시간은 일요일 아침 경배시간이며 나머지 시간들은 자기 마음대로 써도 되는 자신의 시간이라고 생각되도록 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다.
1) 사람의 자아 의지가 경배를 방해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그를 섬기기를 원하는 한 사람을 죽이셨다. 『그들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웃사가 하나님의 궤에 손을 내밀어 붙잡았으니, 이는 소들로 인하여 궤가 흔들림이더라.』(삼하 6:6) 웃사는 선한 동기고 언약궤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손을 내밀어 궤를 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뜻에 따라 된 것이 아니었다.
웃사는 하나님을 위하고자 하는 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의 분노를 발하셨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치셔서 그 자리에서 죽이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항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소가 끄는 마차에 태워 언약궤를 끌고 가는 것은 필리스타인들의 방법으로 사탄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언약궤는 언약궤 고리에 막대를 끼워서 제사장 어깨에 메어서 운반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각자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그 안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담아 주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지 않으신 다른 불을 주 앞에 드렸더니, 주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삼키니 그들이 주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발하게 하심으로 죽은 것이다.
경배하는 성도는 자기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네가 선택한 교회에 가라.’고 말한다. ‘네 마음에 드는 성경을 골라서 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선택의 권리가 없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권리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 성경은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너희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니’(고전6:19-20) 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 따르면 거듭나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노예이며 낙찰되어서 팔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치르시고 사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가거나, 교회를 선택하거나, 성경을 선택할 때 모든 결정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도록 하는 대신 사람이 결정할 때마다 그 사람은 주 안에서 반역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2) 세상적인 것이 경배를 방해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더니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나이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옵니다』(요 17:14) 이렇게 기도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있지만 분명하게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삶의 중심과 범위가 되어야 한다. 경배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춰진 몸과 마음과 인격으로 드려져야 하는 것이다. 세상일에 바쁘고 세상에 있는 것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바른 경배를 드릴 수 없다.
3) 사람의 게으름이 경배를 방해한다.
『그러므로 그가 말씀하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고 하셨느니라.』(엡 5:14) 어떤 성도들은 너무 게을러서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영적인 게으름은 경배에 참여하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그의 몸이 경배에 참여했을지라도 정신적으로 잠이 들어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마저도 내버리게 한다. 성도의 게으름은 도둑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열성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잠자는 자여 깨어나라고 명령하고 있다.
4) 인내의 부족이 경배를 방해한다.
『오직 주를 앙망하는 자는 자기의 힘을 새롭게 하리니 독수리처럼 날개로 치솟을 것이요, 그들이 달려도 피곤치 않으며 걸어도 곤비치 아니하리라.』(사 40:31)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주님을 기다리지 않는다.
스피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분의 존재 안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이 세대는 앉아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법을 잊어버렸고 성경이 ‘너는 잠시 가만히 서 있으라. 내가 네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리라.’는(삼상 9:27) 충고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 주일 학교 학생을 둔 어떤 부모들 가운데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몇 시간 동안 앉아서 공부하는 것은 당연시하면서 한 시간의 경배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아이를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부모는 아이에게 바른 경배를 배우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과 같다.
5) 형식에 치우침은 진정한 경배를 방해한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유로운 마음을 의식이나 성사로 바꿔치기하는 일은 사탄적이고, 신성모독적이며 악한 영에 사로잡힌 것이다. 틀에 박힌 경배 형식은 진정한 경배의 영을 질식시켜버리는 주범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 3:5) 죽어버린 전통적인 관행은 경배를 방해하고 정통주의는 이단의 가르침보다도 쓸모가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며 일요일 아침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모여서 참석인원과 헌금을 늘리기 위해 정해진 형식에 맞춰 행동하는 교인들의 경배는 하나님과 무관한 일을 하는 것일 뿐이다.
자신의 인격에 대한 자랑,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생각, 자신의 지위에 대한 교만, 자신만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교만, 설교자와 설교를 판단하는 교만 등은 진정한 경배를 방해하는 요인들이다. 교육 받은 죄인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서 자신들의 사역과 업적을 우상이나 신으로 만드는 곳으로 전락해버린 교회에서는 진정한 경배란 찾아보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경배해야만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서 우리의 최고의 임무인 경배에 임할 때 하나님께 바른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과 존경과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바른 경배를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기쁨과 평강으로 채워주신다. 경배에 임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른 경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