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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지젝: [시차적 관점], 김서영 옮김, 도서출판 마티 2009.
서주: 손 곁에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
근본적으로 두 이야기가 공유하는 것은 그것들이 구축하는 관계가 구조적인 이유들로 인해 결코 조우할 수 없는 불가능한 단락의 층위들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탈린”이 대표하는 것을 “벤야민”과 같은 층위로 이동시키는 것, 즉 스탈린적인 관점에서 벤야민의 「테제」의 진정한 차원을 간파하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이 두 이야기가 기조로 삼고 있는 허상, 즉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현상을 동일한 차원에 배치하는 허상은 칸트가 “초월론적 가상”(transcendental Illusion)이라고 부른 것, 상호 번역이 불가능하며, 어떠한 종합이나 매개도 불가능한 두 지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일종의 시차적 관점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현상들에 대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가상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두 층위 간에는 어떠한 관계도 성립되지 않으며 어떠한 공유된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일치한다 할지라도 말하자면 그것들은 뫼비우스 띠의 상반된 양면에 있는 셈이다.(시관13)
처음 생각할 때에는 시차적 간극과 같은 개념은 헤겔에 대한 일종의 칸트적 복수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시차”(視差, parallax)란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공유된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고차원적인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antinomy)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시차적 간극이라는 개념은 결코 변증법에 되돌릴 수 없는 장애물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그 전복적 핵심을 간파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를 제시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이러한 시차적 간극을 적절히 이론화하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기 위해 필수적인 첫 단계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 역설에 대면한다: 많은 현대과학들이 자발적으로 유물론적 변증법을 실천하지만, 그들은 철학적으로 기계적 유물론과 관념적 반계몽주의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여기에는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다. 어떠한 “대화”도 없으며 어려운 시기에 동맹군을 찾는 일도 없다.(시관14)
우리는 더욱 쉽게 수용할 수 있고 당혹스러움이 적은 “유물변증법”이 아니라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때 규정적 반성(determinate reflection)에서 반성적 규정(reflective determination)으로의 전환은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의 단어 또는 단어들의 위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우리가 여기서 언급하는 전환은−(억압적) 체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격렬한 춤사위에서 (독일 관념론자들이) 자유의 체계(라고 부른 것으)로의−핵심적인 변증법적 전환이다. 이것은 폭발적인 부정성 및 “저항”과 “전복”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정작 그 자신이 기존의 긍정적 질서에 기생하게 되는 일만은 극복할 수 없는 “부정 변증법”으로서는 진정 파악하기 어려운 변증법적 전환이다.(시관15)
그렇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최고”와 “최하”의 독해 사이의 차이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완고한 네 번째 교사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을 보편 형이상학과 특수 형이상학의 차이, 즉 보편적 존재론과 사회의 특정 영역에 대한 그것의 적용으로 인식하여 그들 사이의 차이를 존재론의 용어로 표현하는 심각한 철학적 실수를 범했다. 이때 “최하”에서 “최고”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보편과 특수 사이의 차이를 특수 자체로 대체하기만 하면 된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사적 유물론과는 다른, 인류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 그렇다, 여기서도 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계는 시차적이다; 그것들은 사실상 같은 것이며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의 전환은 전적으로 관점의 전환에 따른 것이다. 이는 인류의 집단적 실천(praxis)의 지평 너머에 도달하는 인간의 “비인간”적 중핵인 죽음충동 같은 주제를 도입한다: 그러므로 간극은 인간다움과 그 자체의 비인간적 과잉 사이의 간극으로서 인류사회에 내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시관16-17)
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러한 관계와, 정신분석을 사회-이데올로기적 과정에 적용하는 것에 대한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비판에 대응하는 정신분석의 적절한 응답 사이에는 구조적 유사점이 있다: (…) 정신분석은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춘다: 사회적인 것들, 사회적 실천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신념들의 영역은 단순히 개인적 경험과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 자신이 관계되어야 하는 것, 개인 자신이 가장 미세하게 “물화되고”, 외화된 질서로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떻게 개인으로부터 사회적 차원으로 비약하는가”가 아니다; 그보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주체가 자신의 “건강”(sanity)과 “정상적” 기능을 유지하려면 제도화된 실천과 믿음들의 외부적이며 객관적인 사회-상징적 질서는 어떻게 구조화되는가? (…) 다른 말로 바꾸어, 개인과 “개인에 무관한” 사회적 차원 사이의 간극은 다시 개인 자신 안에 각인되어야 한다: 이 사회적 실체의 “객관적인” 질서는 개인들이 그것을 그렇게 간주하고 그것에 그러한 방식으로 관계할 때에만 존재한다.(시관17)
변증법적 유물론은 말하자면 반대쪽에서 동일한 매듭에 접근한다: 여기서의 문제는 어떻게 그들의 실천적-변증법적 매개를 차용하여 사유와 존재의 외적 대립을 극복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긍정적 존재의 기복 없는 질서로부터 사유와 존재의 간극 자체, 사유의 부정성이 나타나는가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루카치 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사유가 사회적 존재의 능동적이고 구성적인 순간일 수 있는가를 보이기 위하여 노력한 반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근본적인 범주는 (“죽음충동”의 부정성과도 같이) 바로 사유의 수동성 자체의 “실천적” 측면을 목표로 삼는다: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이 비-행위, 즉 존재로부터 반성적 거리를 두고 물러나는 것을 가장 급진적인 개입으로서 설정하기 위하여 삶의 재생산이라는 순환을 파손/중지하겠는가? 키르케고르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중요한 것은 존재로부터 사유를 분리시키는 간극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 속에서 그것을 착상하는 것이다.(시관18-19)
여기서 가장 중심적인 문제는 양극단들의 투쟁이라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 “법칙”이 대극(음-양 등)의 양극성(polarity)이라는 뉴에이지식의 개념에 의해 식민화되었다는/혼란스러워졌다는 것이다. 첫 번째 비판적 시도는 이러한 대극이 양극성이라는 주제를 하나 자체에 내재적인 “긴장”, 간극, 불일치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 책은 하나를 그 자체로부터 분리시키는 이러한 간극을 시차라는 개념으로 나타내겠다는 전략적인 정치·철학적 결정에 근거하고 있다. 일련의 전체 시차의 양식들이 현대 이론의 다른 영역들에서도 나타난다.(시관19-20)
마르크스에 따르면, 교환이라는 개념과 같이 철학은 다른 공동체들 사이의 간격으로부터,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환과 순환의 불안정한 공간, 어떤 실증적인 정체성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출현한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경우 특히 명확하지 않은가? 보편적 회의라는 그의 입장이 근거하는 근본적인 경험은 정확히 우리 자신의 전통이, “기이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전통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보여주는 “다문화적” 경험이다.(시관22)
그러므로 가라타니 고진이 코기토의 비현실적인 특성을 강조한 것을 적절하다: “그것은 실증적으로 말해질 수 없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 기능이 사라진다.” 코키토는 실체적인 존재자가 아니며 전적으로 구조적인 기능, 빈 자리(라캉의 S)이다. 그렇게 그것은 실체적인 공동체의 체계들 사이의 틈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코키토의 출현과 실체적인 공동체적 정체성의 붕괴와 상실 사이의 연계는 내재적인 것이며 이는 데카르트보다는 스피노자에게서 더욱 적절히 나타난다: 비록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비판했지만 그는 그것을 실증적이고 존재론적인 실체로서 비판한 것이다. 그는 속으로는 그것을 “발화된 것들의 자리,” 근본적인 자기회의로부터 말하는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 이유는 스피노자가, 데카르트보다 더욱 더 유대인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닌, 사회적 공간(들)의 틈으로부터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시관23)
우리는 다수의 시차적 간극들의 비조직적 배치 속에서 길을 잃기 쉽다; 여기서 나의 목적은 그 안에 있는 세 개의 주요 양식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러한 다수성에 최소한의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들은 철학적, 과학적 그리고 정치적 질서이다. 우선 바로 현실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조건 짓는 궁극적 시차로서의 존재론적 차이 자체가 있다: 그리고 현실의 현상적 경험과 현실에 대한 과학적 보고/설명 사이의 환원할 수 없는 간극인 과학적 시차가 있다. 이는 우리의 “1인칭” 경험에 대해 신경생물학적 “3인칭”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인지주의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시차이다. 이것은 대립하는 작용인들(먼 옛날 이것은 “계급투쟁”이라고 불렸다) 사이에 어떤 공동기반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존재의 두 가지 주요 양상들(공법과 그것의 초자아적인 외설적 보충 사이의 시차적 간극; 사회적 참여로부터 물러나는 “비틀비”적 태도와 집단적인 사회적 행동 사이의 시차적 간극)이 있는데 이 책의 마지막 두 장이 이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 세 가지 양식들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책의 구조를 설명한다.(시관26-27)
단지 존재론적 지평이 존재적 발생의 효과로 환원될 수 없고, 현상적 자기인식이 “객관적”인 뇌 과정들의 부수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사회적 적대관계(“계급투쟁”)가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힘들의 결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이러한 이원론 자체의 이면에서 그것을 생성하는 “극소 차이”(하나와 그 자체의 불일치)에 도달해야 한다. 나는 자크 데리다의 저작과 씨름하며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으므로, 아마도−데리다적인 유행이 사그라지는 시기인−지금이 이러한 “극소 차이”와 그가 차연(différance)이라고 부른 것의 근접성을 지적함으로써 그를 기억하고 기려야하는 적절한 순간일 것이다. 이 신조어의 악명 높은 평판은 그 전례 없는 유물론적 잠재력을 희석시켰다.(시관28)
그러므로 변증법적 “발전”은 우선 얼굴, 성 기관 그리고 다른 신체부위 사이의 관계와 각각의 사용 양식에 대하여 일련의 변화를 겪는다: 중심적 기관은 여전히 팔루스지만 삽입을 위한 개구부(항문, 입)는 변한다. 그렇다면 일종의 “부정의 부정” 속에서 삽입되는 대상이 변할 뿐만 아니라 파트너인 사람 전체가 그 반대로(동성애) 변하기도 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목적 자체는 더 이상 오르가즘(물신숭배)이 아니다. 손가락 성교는 이러한 순열에 손(도구적 활동, 노동의 기관)과 질(“신축적인” 수동적 생산의 기관)이라는 불가능한 종합을 도입한다. 손가락(목적이 있는 일의 중심이며 우리 신체 중 가장 엄중히 통제되고 훈련된 부분인 손)이 계획이 잘 짜인 도구적 방식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출현하는 형세에 적응하는 사람의 경우와 유사한 관계 속에서 (예를 들어 “이성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시를 구성하는 시인은 시적으로 손가락-성교를 하는 사람이다) 팔루스(그 발기가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왕하므로 특히 우리의 의식적 통제를 벗어나는 기관)를 대체한다.(시관32)
이러한 관행의 이상한 (그렇지 않다면−적어도 어떤 사람들에게는−따분한) 특성을 설명하는 것은 그러한 성 행위와의 관련이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양립할 수 없으며 존재론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두 영역들 사이의 단락이다: 그것은 숭고한 철학적 사변의 층위와 성 행위의 세부로 이루어진 층위이다. 비록 헤겔의 개념적 장치를 성적 관행에 적용하는 것을 선험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전체 관행이 다소 무의미한 듯하고, (심지어 형편없는) 농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단락들의 불쾌하며 이상한 효과는 그것들이 우리의 상징적 우주 속에서 증상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이러한 우주들이 의존하고 있는 암시적 무언의 금지들을 집 안에 들여 놓았다. 우리는 보편성을 그 “참을 수 없는” 사례들과 대면시킴으로써 구체적 보편을 실현한다. 물론 헤겔의 변증법은 어떤 것을 분석할 때에도 사용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성에는 적용하지 않도록 무언의 조언을 받는다. 마치 이러한 행위가 변증법적 분석이라는 개념 자체를 우습게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물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중 어떤 사람들은 “그 이하로 동등하게” 대하라는 무언의 권유를 받는다. 마치 그들을 전적으로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평등이라는 개념자체를 훼손시키는 것처럼 말이다.(시관33-34)
이것이 결코 사소하지 않은 심각한 의미에서 내가 독자들이 이 책을 흥미롭게 느끼기를 바란다는 말이 뜻하는 바이다: 내가−저 위대한 반 헤겔주의자 들뢰즈가 “개념들의 확장”(expanding the concept)이라고 부른 것에 동참하며−구체적 보편을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에 성공하는 한 그렇다는 뜻이다.(시관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