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合面
창녕군의 북부는 성산면, 대합면, 이방면등 삼개면인데 이중 대합면은 삼개면중 한가운데 자리 잡은 면이다.
대합면의 동쪽은 고암면이며, 서쪽은 이방면, 남쪽은 대지, 유어면이며, 북쪽은 경북 달성군과 마주하고 있다.
태백산이 면의 북부에 솟아 있고, 남서편으로 구룡산이 자리한 아늑한 고장이다.
대합면은 太白山을 중심으로 한 고대인의 주거지였음이 합리 고분군을 통해 알 수 있다.
1) 옛 地名과 變遷
[대동지지]의 방면 기록과 [해동여지도]에 현청과의 이수(里數)가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다.
合山 西初十五終三十
大谷 西初三終三十
合山面 初境二十里終境四十里
大谷面 初境二十里終境四十里
[경상도 읍지]의 [창녕현 읍지]에는 합산면은 [自官門西北間距三十里], 대곡면은 [自官西北間距二十里]로 기록되어 정확하게 서북쪽에 대합면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으나 이수는 틀리게 기록되어 있다.
[창녕현지]에는 3개면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합산면과 대곡면외에 개복면(介卜面)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갑오경장 후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던 때의 일로 1914년에 가서 3개면이 합하여져서 대합면으로 개칭되었다.
이들 구획은 1910년대 구한말 행정구획이 근대적 형태로 옮겨지는 과정이 잠정적으로 이루어질 때 일이었다.
合山面 自官門西北間距三十里
介卜面 自官門北距二十里
大谷面 自官門西北間距二十里
[빛벌문화]에 보면 [구 대곡면이 11동, 구 개복면이 7동, 합산면이 11동이었는데 광무(光武) 원년(元年 :1879년)에 동리가 통 폐합이 되어서 구 대곡면은 7동, 구 개복면은 3동, 구 합산면은 6동으로 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에 면폐합에 의하여 3개면이 합하여져서 대합면으로 개칭되었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2) 합산면(合山面)
합산면의 이름은 면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산인 태백산이 합산이라 불린데서 왔다.
이 태백산에 있었던 봉수대가 합산봉수로 태백산이 합산이라 불리었고, 면의 이름도 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山川]란과 [봉수]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合山 在縣北二十里
合山烽燧 南鷹靈山縣餘通山北風縣所山
[호구총수 : 정조 13년 :1789년]에 보면 조선 중기에 현재의 대합면에는 합산면과 대곡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호구와 촌명은 다음과 같다.
합산면은 13개 촌리로,
호구는 576호
인구는 남자 1,161명, 여자 2,328명 합계 3,489명
촌리는 우물레동(亐勿禮洞) 유산동(柳산2洞) 이방동(伊方洞) 합동촌(合洞村) 대동촌(大洞村) 모전촌(茅田村)
십이촌(十二村) 무수촌(武愁村) 등지촌(等旨村) 장기촌(場基村) 매탄촌(埋炭村) 평지촌(坪地村) 오삭촌(梧朔村)
개복면 구영깅 합산면 안에 있었던 것인데 합산면의 남부에 있었던 개복면을 제외한다면 지금의 십이리롸 그 일대이다.
개복면이 분리되고 난 후 (1897년)의 합산면의 里洞은 6개동이었다.
이방동, 합동, 대동동, 목단동, 십이동, 등지동
이때 면소재는 대동(大洞)에 있었다고 전하며, 그후 대합면이 되면서 면사물소는 평지(坪旨)로 옮겨졌다가 1916년에 십이리로 나갔다.
3) 대곡면 (大谷勉)
[호구총수]에 대곡면은 10개촌이 있다 하였는데 지금 대합면의 서부이다.
호구는 462호
인구는 남자 989명 여자 1,867명 합계 2,856명
촌리는 소야동(所野洞) 사지촌(沙地村) 주매촌(主梅村) 신당촌(神堂村) 마산촌(馬山村) 퇴산촌(兎山村)
외도개촌(外道介村) 내도개촌(內道介村) 울개촌(鬱介村) 본대곡촌(本大谷村)
갑오경장 이후 1914년까지 있었던 리동은 7개동으로 다음과 같다.
소야동, 신당동, 퇴산동, 도개동, 내울동, 본대동 주매동
대곡면의 면소재지는 본대동(본대곡촌)인 현재의 대곡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또 신당리에 있었다고도 한다.
대곡이라는 면명도 이곳 대곡이 한실이라 불린 것이 기사된 그대로 면 이름이 되었다.
4) 개복면(介福面)
개복으로도 쓰는데 1895년대에 합산면에서 분할되어 존속하다 1914년 면 통폐합에 따라 사라졌다.
합산면의 동남부를 관할 구역으로 하여 3개리가 있었다.
1897냔 부터 1914년 사이에 있었던 개복면의 리동은 3개동으로,
장기동(場基洞) 평지동 (坪旨洞) 모전동(茅田洞) 이었다.
이때 면소재지는 현재의 장기리 개복에 있었으며, 이곳에 장도 섰다 하여 장터라 불리우는 곳이 남아 있다.
5) 日帝 軍用地 徵發(징발)과 强制 移住 (강제 이주)
1922년 일제가 만주 중국의 침략을 위하여 대합면 일대에 군 부대를 주둔하게 하여 만주와 중국으로 내보내는 신병의 훈련소를 설치하였다.
이 부대는 일본군 조선 제 20사단 80연대였는데 군용지로 편입된 곳은 대동리, 합리 전부, 이방리, 목단리, 내울리, 도개리, 신당리, 주매리, 등지리 일부와 경북 달성군 구지명의 유산, 예산등의 지역 900여 정보였는데 그중 대합면 지역은 800여 정보에 이르렀다. 훈련장으로 징발되는 바람에 누대(累代)에 걸쳐 살아온 마을을 떠나야 했는데 집과 전답을 빼앗기로 퇴거명령에 따라 쫓겨난 주민은 약 730여호로 이중 경북지역을 빼면 600여호에 이르렀다.
이때 퇴거령을 받아 이주하게 된 주민들은 전답조차 없어 생계가 어려웠고 관의 또는 현내의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었다.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이 도고나자 군용지로 빼앗겼던 땅을 옛 지주가 도로 찾게 되고, 옛 마을로 복귀하게 되었는데 옛 마을을 재건하고 묵혔던 전답을 다시 일구어 농사를 짓게 되니 수년 후에는 전과 다름없는 농지로 돌아 갔으나 20여년간 겪었던 강제이주 생활은 대합면민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해방 후 복귀는 하였으나 옛터로 돌아 가지 않은 사람들로 많아 합리, 이방리, 대동리 등에는 옛 마을터가 농토로 된 채 남아 있는 곳이 여러군데 있다.
6) 대합면의 오늘
1914년 4월 1일에 합산, 개복, 대곡 등 3개면의 통폐합에 의하여 합하여져서 대합면 으로 개칭되었다.
6.25때 대합면은 공산군이 오랫동안 점령한 곳이 되어 전장의 참화가 극심한 지역이었다.
지금은 대단위 농지정리가 완료되어 옥토화 되어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면사무소는 합산면과 대곡면이 합하여 질 당시에는 평지리에 있었다. 지금 평지의 서쪽끝 농협창고 자리인데, 마구선 국도가 개설되자 교통이 편리해진 십이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면사무소가 1916년 1월, 십이리 244 - 1번지로 이전하였는데 최근 화재로 82년 2월 4일 소실되어 82년 6월 10일 착공, 동년 10월에 현대식 2층 건물로 준공하였다.
1990년 말 현재 가구수는 1,983호이며 인구수는 6,273명(남 3,079명, 여 3,194명)이다.
[창녕군 이장 정수 조례]에 의한 법정 리는 16개리, 행정리는 31개리로 다음과 같다.
십이리(十二利) - 십이리 창곡(倉谷)
등지리(燈旨里) - 무솔(武率) 신안(新安)
장기리(場基里) - 율곡(栗谷) 매탄(埋炭)
모전리(茅田里) - 대전(大田) 수장(水長) 석실(石實)
소야리(所也里) - 소야(所也) 월령(月嶺)
주매리(主梅里) - 주매(主梅)
신당리(新堂里) - 신당
퇴산리(兎山里) - 퇴산 월계(月桂)
평지리(坪地里) - 평지 모지 합산
도개리(道介里) - 도개
내울리(內亐里) - 계동 옥산
대곡리(大谷里) - 대곡
목단리(牧丹里) - 목단 유산 용호 구미
합리 (合里) - 합리 용산
이방리(伊方里) - 이방 월포
대동리(大洞里) - 대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