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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명수필 릴레이>(27)
사랑의 향기를 품고 숲속에 잠든 연꽃
해담 조남승
장마철인지라 일기가 변덕스럽기만 하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꼭 비가 내리는가 하면 습도가 높아 후텁지근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세상 돌아가는 것 또한 신통한 구석을 찾아보기 힘들다보니 마음까지 답답해진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다르다. 먼지와 안개에 쌓여 아스라이 보이던 삼각산 인수봉이 벽에 걸린 거울처럼 맑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산봉우리의 능선과 선명하게 대조를 이룬 파란 하늘이 너무나 아름다워 환상적이다. 마치 가을인 것처럼 파랗게 제 모습을 드러낸 맑고 드높아진 하늘이 청량감을 안겨준다. 거실 양쪽의 창문을 여니 미세먼지 하나 없이 맑디맑은 공기가 일시에 유입되어 상쾌함이 더해져 기분이 좋다.
인근의 공원이나 산책하면서 집에 머물러있기엔 너무나 아까운 날씨이다. 아내가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요?’라며 모처럼 쾌청한 날씨에 감탄을 한다. 난 아내에게 ‘요즘 연꽃이 한창일 텐데...’ ‘고놈의 지긋지긋한 신종코로나19바이러스 때문에 아마 연꽃축제 같은 건 전부다 취소되었을 거야.’라고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면서도 몸은 벌써 나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아내도 이심전심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준비라고 해봐야 식수와 부채나 챙겨드는 정도이고 보니, 이내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차에 올라 시동을 걸으니 아내가 ‘어디 로 갈 거예요?’ ‘장소나 정하고 출발해야 되잖아’라며 나를 쳐다본다.
난 ‘그럼 정했지. 연꽃이나 보러가려고’라며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아내는 ‘연꽃은 딸네집 뒤 흥천사에도 몇 주 전부터 많이 피었던데...’라며 별로인 듯 말끝을 흐린다. 그런 아내에게 난 ‘사랑의 향기를 품고 숲속에 잠든 연꽃을 보러가는 거야.’라고 말하자, 아내는 좀 의아해 하면서도 더 이상 캐묻질 않았다.
연꽃! 연꽃은 넓은 연못의 여기저기에 봉실봉실 피어난 모습도 좋지만, 산사의 조그만 연못이나 함지박에 그저 몇 송이 단아하게 피어있는 모습이 더욱 생광스럽다. 그래서 아침마다 아이를 보러 딸네 집에 가면 흥천사 뒤뜰의 함지박에 심어져있는 연꽃을 먼저 찾아간다. 연꽃은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맑고 향기롭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아름다운 연꽃을 볼 때 마다 참으로 예쁘기도 하지만, 마음이 고요해지고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또 연꽃을 바라보면 잠들어있던 자비심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연꽃은 예로부터 불가(佛家)를 상징하는 꽃으로서, 열 가지의 덕(德)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첫째, 이제염오(離諸染汚)로서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이렇게 연꽃처럼 주변의 환경에 물들지 않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둘째, 불여악구(不與惡俱)로서 연잎 위에는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는다. 물이 연잎에 닿으면 그대로 또르르 굴러 떨어지고 만다. 또 물방울이 지나간 자리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악과 거리가 먼 사람이나, 악이 있는 환경에서도 결코 악에 물들지 않는 불여악구(不與惡俱)의 삶을 사는 사람을 연꽃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셋째, 계향충만(戒香充滿)으로서 연꽃이 피면 연못속의 잡냄새는 사라지고, 한 자락의 촛불이 어두운 방안을 환히 밝히듯, 한 송이의 연꽃이 연못을 향기로 다 채운다. 이와 같이 한사람의 인간애(人間愛)가 사회를 훈훈하게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고결한 인품과 그윽한 덕향(德香)을 피워내는 생활로 사회를 정화하는 보살다운 삶을 살아야한다.
넷째, 본체청정(本體淸淨)으로서 바닥에 오물이 즐비해도 그 오물에 뿌리를 내린 연꽃의 줄기와 잎은 항상 맑고 푸른 청정함을 잃지 않는다. 이와 같이 사람도 어떤 곳에 있거나 연꽃처럼 항상 청정(淸淨)함을 잃지 말아야한다.
다섯째, 개부구족(開敷具足)으로 연꽃이 피고나면 꼭 열매를 맺는다. 연꽃이 귀한 씨앗의 열매를 맺는 것처럼, 사람도 자신이 베푼 만큼의 결과를 꼭 맺게 된다. 그러니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순리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여섯째, 성숙청정(成熟淸淨)으로 곱게 핀 연꽃을 보면 마음과 몸이 맑아지고 포근해짐을 느낀다. 활짝 핀 연꽃처럼 성숙함을 느낄 수 있는 인품의 소유자가 있다. 이런 분들과 함께하면 저절로 심안(心眼)이 열리고 정신이 맑아진다.
일곱째, 생이유상(生已有想)으로 장미와 찔레, 백합과 나리는 꽃이 피어야 구별할 수 있지만, 연꽃은 굳이 꽃이 피질 않아도 싹부터 긴 대의 줄기에 넓은 잎을 이고 있어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이같이 어느 누가 보든 존경스럽고 기품이 있는 사람을 연꽃 같다고 말한다.
여덟째, 면상희이(面相喜怡)로 연꽃의 모양은 둥글고 원만하여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온화해지고 즐거워진다. 연꽃처럼 원만한 심성과 항상 온화하게 웃는 얼굴로 말이 부드럽고 인자한 사람은 옆에서 보기만 해도 보는 이의 마음이 화평해진다.
아홉째, 유연불삽(柔軟不澁)으로 연꽃의 줄기는 부드럽고 유연하다. 그래서 좀처럼 바람이나 충격에 부러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생활을 유연하게 하고 융통성이 있으면서도 자기를 지키는 유연불삽(柔軟不澁)의 특성을 지닌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항상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잊지 말고 유연한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열째, 견자개길(見者皆吉)로서 꿈에 연꽃을 보면 길하다고 한다. 사람들도 꿈속의 연꽃처럼 타인에게 상서로움을 주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연꽃이 지니고 있는 열 가지의 덕(德)을 가슴에 담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연꽃과 같이 맑고 향기로우며 자비가 충만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연꽃을 부용(芙蓉)이라 달리 부르기도 하는데, “연꽃이 연못 가득피어 붉으니(芙蓉花發滿池紅/부용화발만지홍), 사람들은 연꽃이 나보다 곱다더니만(人道芙蓉勝妾容/인도부용승첩용), 오늘 우연히 연못가 둑 위를 거닐으니(今日偶從堤上過/今日우종제상과), 사람들은 어찌하여 꽃들은 외면한 채 나만 보는가(如何人不看芙蓉/여하인불간부용).”라면서 자신이 연꽃보다도 더 예쁘고 아름답다는 자긍심이 넘치는 여인이 있었다. 그는 바로 조선시대의 여류시인(女流詩人)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이다. 재기발랄한 운초(雲楚)는 풍경이 수려(秀麗)한 평안도 영변에 있는 사절정(四絶亭)에 올라 “정자이름 어이하여 사절이던고(亭名四絶却然疑/정명사절각연의), 사절보다 오절이 마땅할 것을(四絶非宜五絶宜/사절비의오절의), 산과 바람, 물과 달이 어울린 데다(山風水月相隨處/산풍수월상수처), 뛰어난 절세가인(부용)이 또 있지 않은가.(更有佳人絶世奇/갱유가인절세기)”라고 읊을 정도로 당돌하리만큼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존심이 대단하였다. 나는 오늘 아내와 함께 이처럼 아름다운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을 만나러가고 있다. 영원한 사랑의 향기를 잃지 않고 숲속에 잠든 한 송이의 연꽃인 부용! 내가 운초시인을 처음 만나 알게 된 것은, 아주 오래전, 상명대학교 구비문학연구회에서 충남지역에 대한 전통문화의 발굴과 보존을 목적으로 조사 연구한 내용을 천안문화원에서 발행한 ‘구비문학대관’이란 책에서였다. 조사에 참여한 구연자들이 주로 해당지역에서 아주 오래 살아온 토박이들인지라, 구수한 충청도사투리로 전하는 내용들이 아주 흥미로웠다.
그중에서도 천안의 태화산줄기끝자락에 광덕사를 감싸고 있는 광덕산의 능선부분에 김이양 대감의 묘가 있고, 거기서 조금 내려와 운초 김부용의 묘가 있다는 대목에 관심이 쏠렸다. 내용을 보면 소설가 정비석 선생이 ‘명기열전’을 쓰기위해 운초의 묘를 찾는 과정에서 구연자들과 서로 주고받은 말들을 아주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어 재미를 더해주고 있었다.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 어쩔 수 없이 기생의 길에 들어섰지만, 조선시대 여염가(閭閻家)의 아낙들처럼 일부종신(一夫終身)하였으며, 명시(名詩)를 많이 남긴 당대의 훌륭한 여류시인이었다. 그래서 운초의 묘를 꼭 한번 찾아가보고 싶었었다. 지위와 나이를 초월하여 남녀상호간에 진정으로 서로가 애정을 나누었던 조선시대의 사랑과 로맨스(romance)에 대하여 한번쯤 음미해보는 것도 꽤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어온 것이 그렁저렁 많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 오래되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 오랫동안 마음먹고 있던 운초 김부용의 묘를 찾아가는 것이다. 주말이고 보니 통행차량이 많아 도로가 좀 혼잡스러웠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큰 지루함 없이 하늘아래 제일 편안하다는 천안(天安)에 일찍 도착하게 되었다.
숲속의 연꽃을 찾아가기 전에 먼저 광덕사(廣德寺)로 발걸음을 향하였다. ‘태화산광덕사(泰華山廣德寺)’라는 일주문의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걷다가 우연히 뒤를 돌아보니 일주문 뒤에도 ‘호서제일선원(湖西第一禪院)’이란 현판이 걸려있었다. 절에 들어서자 우람한 호두나무가 무성한 녹음으로 시원스럽게 그늘을 드리워 천년고찰의 운치를 더해주었다. 이 호두나무는 고려 충렬왕 때 영밀공(英密公) 유청신(柳淸臣)이 임금을 모시고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어린호두나무를 가져와 우리나라에 최초로 심은 것으로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있는 귀한 나무이다. 우선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께 정성 것 참배를 올리고 나서 산사의 경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현재는 그리 규모가 커 보이지 않았지만, 신라시대의 진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사찰로서, 한때는 일주문현판의 글이 말해주듯 호서지방(湖西地方)에서 제일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어느 사찰이든 절 이름치고 좋지 않은 이름이 없고 의미가 깊지 않은 절이 없지만, 덕(德)을 널리 펼친다는 뜻을 가진 광덕사(廣德寺)란 사명(寺名)이 가슴깊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덕(德)이란 본래 마음이 오종종하지 않고 넓고 커서 넉넉할 때만이 스스로 덕을 쌓아갈 수 있고 베풀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덕(德)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란 말처럼 덕이 높은 사람에겐 자연히 만인(萬人)이 우러러 따르게 된다. 또 서경(書經)의 우서(虞書) 대우모편(大禹謨篇)에도 “덕유선정(德惟善政) 정재양민(政在養民)”이란 글이 있다. 이는 오직 덕으로써만이 선정(善政)을 펼칠 수 있고,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잘 보양(保養) 하는 데 있다는 뜻이다.
그러함에도 정치권력의 음양이 바뀔 때마다 무슨 앙갚음이라도 하듯 상대편의 묵은 잘못까지 뒤져내어 성토하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벌을 주고자하는 데에만 열을 올리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곧 덕치(德治)를 펼치는 대인(大人)의 무리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그러한 일들을 두고 백성과 나라를 위한 정책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죽은 사람에 대한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해야 직성이 풀렸었으니, 이 얼마나 딱하고 슬픈 역사란 말인가? 동서고금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상대에 대한 관용(寬容)과 자비(慈悲)가 없이 존중과 배려를 외면하고, 소통을 도외시한 채 일방적인 전횡(專橫)을 일삼으면서도 이를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오히려 보통으로 여기고 있다면, 그것은 숭덕광업(崇德廣業)을 외면한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으로서, 결국 국민의 대화합(大和合)을 이루어내지 못함으로 인하여, 국가의 미래에 대한 번영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
사찰 경내를 둘러본 다음 집에서부터 가고자 했던 조선시대의 여류시인 운초 김부용의 묘를 찾아가기 위해 절 뒤의 계곡을 따라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난 아내에게 김부용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운초(雲楚) 김부용은 조선 정조 때 산수(山水)가 빼어난 대동강 상류인 평안남도 성천의 비난한 선비집안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였던지라 일찍이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겨우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하였다. 그러나 열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그 다음해엔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게 되는 비운(悲運)을 맞게 되었다. 어린나이에 양친을 다 잃은 부용은 어쩔 수 없이 퇴기(退妓)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녀(妓女)의 길을 걷게 되고 말았다. 16세 때 성천군 군민백일장에서 당당히 장원을 할 정도로 시문(詩文)과 가무(歌舞)가 남달리 뛰어나, 조선의 삼대시기(三大詩妓)중의 한사람으로서 무려 350여수나 되는 한문체의 명시(名詩)를 남겼다.
또 부용은 열아홉 살의 꽃다운 나이에 77세나 되는 안동김씨(安東金氏)인 평양감사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대감을 만나 대감의 총애를 받으며 지냈다. 한때 김대감이 호조판서의 교지를 받고 한양으로 올라가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아리따운 부용을 두고 떠나는 대감이나, 하늘같이 믿고 살아온 대감을 보내야 하는 부용이나 서글픈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부용을 안쓰럽게 여긴 김 대감은 부용을 기적(妓籍)에서 빼내 양인신분으로 만들어 나중에 부실(副室)로 삼았다. 한동안 서로 헤어져 멀리 떨어져 있던 부용은 주야로 사무치는 그리움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외롭고 슬픈 마음을 달랠 방법은 오직 시를 짓고 그 시를 음미해 볼뿐이었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피를 토해내듯 애절함을 절절히 표현한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이란 시를 지어 보냈을까. 이 시는 전형적인 한시(漢詩)의 틀을 벗어나 한자씩 짝으로 시작하여 두자, 석자...의 형식으로 이어져 18자, 36행으로 된 회문체(回文體)위에서 내려읽거나 끝에서 치읽어도 뜻이 통하고 음운이 맞는 한시의 시였다.
따라서 이 시를 횡으로 쓰면 탑 모양이 되었기에 보탑시(寶塔詩)라고도 불리며, 부용의 시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표적인 시라고 말한다. 부용상사곡은 장시(長詩)이기 때문에 시의 머리와 끝부분의 일부만을 소개해본다. 부용은 “당신을 이별하니(別/별), 그리울 뿐입니다(思/사), 당신계신 길은 멀고(路遠/노원), 소식은 더디기만 하군요(信遲), 생각은 임께 있으나(念在彼/염재피), 몸은 이곳에 머물고 있네요(身留玆/신유자), 〜중략 〜오직 바라옵건대 관인하신 대장부께서 강을 건너오셔서 구연의 촛불아래 흔연히 대해주시어(惟願寬仁大丈夫 決意渡江 舊緣燭下欣相對/유원관인대장부결의도강구연촉하흔상대), 연약한 아녀자가 눈물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슬픈 혼이 달 가운데서 길이 울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勿使軟弱兒女子 含淚歸泉 哀魂月中泣長隨/물사연약아녀자함루귀천애혼월중읍장수)”라면서, 가슴이 타들어가는 그리움의 눈물을 먹물삼아 탑을 쌓아가듯 한자 한자 공을 들여 써서 연모(戀慕)하는 대감에게 보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만나 15년이라는 삶을 함께해오던 중, 부용의 나이 33살에 이르렀을 때 김 이양대감이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김이양은 과거를 보기 전 젊은 시절에 몹시 가난하였다. 하루는 저녁도 거르고 잠을 청하는데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훔쳐갈 쌀이 없자 솥단지라도 뜯어가려고 하였다. 놀란 부인이 남편에게 말하자, 김이양은 오죽하면 남의 솥을 떼어 가겠소?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니 그냥 놔
둡시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도둑은 감동을 받아 솥을 두고 갔으며, 그 후 열심히 일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훗날 김이양의 장원급제소식을 듣고 찾아가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이러한 전설 같은 일화가 있을 정도로 김이양은 아주 후덕(厚德)한 인물이었다. 또 김이양은 풍채가 뛰어나고 결기가 있으면서도, 시문(詩文)에 아주 능하여 한마디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호걸다운 인물이었다.
김이양이 이러하였으니, 나이어린 부용이 남자구실도 못하는 노옹(老翁)임에도 불구하고, 오르지 훌륭한 인품만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흔쾌히 자신의 몸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부용은 부군이 살아있는 동안 부도(婦道)를 다한 내조의 공이 컸던바, 대감의 본처가 죽자 부실(副室)에서 자연히 계실(繼室)이 되어 초당마마의 존칭을 받았다. 그리고 부군(夫君)인 김 대감과 사별하여 청상(靑孀)이 되어버리자, 평생 정절(貞節)을 지킴은 물론, 오직 김 이양 대감의 명복을 빌고 또 빌면서 자탄(自歎)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한 세월 속에 부용의 식지 않은 가슴엔 시나브로 차갑고 쓸쓸한 바람결이 몰아쳐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그럴 때마다 한시(漢詩)의 자음(自吟)으로 사무치는 그리움을 잠재우면서 16년을 더 살다가 49세의 일기로 한 많은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부용은 임종을 하기 전 내가 죽거든 대감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주오.라고 유언을 하였다. 이에 따라 태화산(광덕산)에 있는 김 이양대감의 묘 아래인 산기슭에 묻히게 되어 영원히 깨지 못할 영면(永眠)에 들었다. 이러한 운초의 묘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경사가 심하거나 험하지 않고 오히려 아기자기한 산길이 정겹기만 하였다. 조금 걷다보니 오솔길 옆에서 적적한 모습으로 산객(山客)을 기다리고 있는 벤치(bench)를 만났다. 아내와 난 쓸쓸해 보이는 벤치의 벗이 되어 잠시 쉬어가기로 하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냈다. 어디선가구국 꾸국, 구국 꾸국(계집죽고, 자식죽고)구슬피우는 멧비둘기의 울음소리가 가슴에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꼭 묘가 있음직한 저만큼 위쪽의 숲에서 들려왔다. 한스러움을 토해내듯 울어대는 멧비둘기의 울음소리가 왠지 쓸쓸하고 처량하여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새의 울음소리에 따라그대와 만날 인연이라면 일찍 만났어야지/누각에 홀로 올라 눈물뿌리니 이 슬픔 누가 알까/눈물마다 붉게 진달래를 물들이네.라는 부용의 시를 읊조렸다. 청상이 된 부용은 이렇게 가슴에 젖어드는 애절함을 시로 자위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또 홀로 평양에 머물러 있던 어느 봄날엔 산들산들 봄바람 화창도 한데(春風忽駘蕩/춘풍홀태탕), 뉘엿뉘엿 또 하루해가 저무네.(山日又黃昏/산일우황혼), 기다리던 임 소식 끝내 없어도(亦如終不至/역여종부지), 혹시나 오실까하여 문을 못 닫네.(猶自惜關門/오자석관문)라며 밀물처럼 밀려오는 그리움을 달랬다.
이윽고 초당마마의 묘소에 이르렀다. 우선 참배를 하고나서, 두 손을 합장하고 생전의 초당마마를 기리며 명복을 빌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이 묘는 소설가 정비석이명기열전을 쓸 때 찾아내어 봉분을 정비하고 비석도 세웠다고 한다. 비문엔 운초 김 부용에 대한 이력이 간단히 소개되었다. 비문 말미에정비석 지음, 김성열 세움, 한국문인협회 천안지부 후원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생전에 한 송이 아름다운 연꽃이었던 부용마마의 삼추명월(三秋明月)같은 용모는 간데없고, 묘와 묘의 주변엔 무성한 푸새만이 바람결에 한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또 묘의 봉분을 둘러친 둥근모양의 둘레 석 중에 뒤편의 석판 일부가 좀 밀려나면서 주저앉은 것 같아 애석한 마음이 더해졌다. 더욱이 부용이 생전에 그토록 사랑과 존경을 하였고, 헤어져있을 때와 사별(死別)을 한 뒤에도 그처럼 연모(戀慕)하였던 김 이양 대감의 유택(幽宅)은 어디쯤에 있는지 숲만 우거져있을 뿐 보이질 않았다.
부용이 유언이야대감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주오.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였겠지만, 속마음이야 대감이 잠들어있는 발치 바로 밑에 묻히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을 것이다. 살아있을 당시 한동안 대감은 한양에서, 부용은 평양에서, 서로가 그리움이 사무쳤던 것처럼, 지하에서까지 같은 산자락에 있으면서도 서로 손을 내밀어보거나 바라보지도 못하고, 그리움만을 애태우고 있는 것 같아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부용의 묘를 망연히 바라보다가 문득 해주최씨(海州 崔氏)인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연인이었던 홍랑(洪娘)이 떠올랐다. 홍랑(洪娘)은 조선 선조 때 함경남도 홍원의 기생이었다. 이율곡, 송구봉 등과 함께 조선의 8대문장가로서 당시(唐詩)에 능하여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던 고죽(孤竹)이 함경도의 북해(北海) 평사(評事)로 경성에 있을 때, 홍랑과 처음만나 서로가 애틋한 사랑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난 바로 다음해에 고죽이 한양으로 발령을 받아 떠나게 되었다. 홍랑은 대감을 따라나섰지만 당시 국법으론 함경도 사람이 한양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어있었기에 함관령(咸關嶺)에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홍랑은 보슬비를 맞으며 물이 촉촉이 오른 뫼 버들을 꺾어 고죽에게 보내면서뫼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주무시는 창(窓)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라는 그 유명한 시한수로 애절함을 삼키면서 돌아서야만 했다. 참으로 사랑은 짧았고 작별의 슬픔은 길기만 하여, 그리움은 절절히 밀려왔고 고독의 아픔은 사무쳐왔다. 설상가상으로 삼년 뒤에 고죽은 몸이 아프게 되어 병석에 눕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국법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리 길을 밤낮으로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또 걸어 이레 만에 고죽이 있는 한양에 당도하였다. 정성을 다하여 병구완을 함으로서 몸은 회복되었으나, 나라의 금법(禁法)을 어겼다는 죄명으로 고죽은 파직이 되고, 홍랑은 눈물바람으로 고향에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 후 고죽이 세상을 뜨자 홍랑은 고죽의 묘가 있는 파주시 교하 읍에 있는 정명 산기슭으로 달려가 소복차림으로 무덤을 지켰다. 그리고 홍랑은 평생 동안 수절을 하였음은 물론, 임진왜란 등 난세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고죽의 시고(詩稿)들을 잘 보전하여 해주최씨의 문중에 전달하였다.
이러한 공이 인정되어 고죽의 문중과 후손들이 홍랑이 죽게 되자 고죽의 묘소발치에 묘를 쓰고,시인 홍랑 지 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또 홍랑과 고죽의 시를 새긴 홍랑가비(洪娘歌碑)와 고죽시비(孤竹詩碑)를 세워 두 사람의 연정(戀情)을 기리고 있다. 홍랑은 생전에 조선시대 사대부의 남정네와 기녀와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함을 한스러워했다. 하지만 죽어서는 고죽 최경창의 묘역 안에 함께 묻히어 혼령이나마 사시사철 풍우한설(風雨寒雪)에도 항상 서로 마주 바라보면서 속삭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사후만반진수(事後滿盤珍羞)는 불여생전일배주(不如生前一杯酒)라는 말처럼, 한때일지언정 생전에 잘 지냈으면 되었지 저세상으로 돌아간 후에 무덤 따위가 뭐 대수냐고 하겠지만, 홍랑과 부용의 묘가 관리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누구의 무덤이든 묘소의 관리 상태를 보면 그 집안의 가세가풍(家勢家風)과 자손들의 숭조정신(崇祖精神)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세상엔 수많은 영웅호걸들의 무덤이 있을 테지만 직계자손이 아닌 그 누가 찾아가며 참배를 하겠는가? 그러나 조선의 여류시인이었던 운초 김 부용의 묘엔 많은 사람들의 탐방과 참배가 이어지고 있으니, 한 시대를 풍미(風靡)하였던부귀권세(富貴權勢)는 무상하나, 문학(文學)의 향기는 영원하다.고 할 것이다. 김 이양 대감이 본처에게서 아들을 두지 못하여 양자를 들인 판국에, 김 부용이 후사(後嗣)를 두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이양의 노쇠함으로 그렇게 되진 못하였으나, 유가(儒家)의 여식으로서 수치스럽게 여겼던 기적(妓籍)에서 벗어나, 부실(副室)에서 계실(繼室)이 되었으니 당시의 풍습으로선 다행으로 여겼어야 될 일이다. 그에 비하면 사대부와 기생의 신분적 한계를 끝내 뛰어넘을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을 하였던 홍랑! 그 비련(悲戀)의 처연(悽然)함이 얼마나 컸을까를 생각하니 그 또한 가슴이 아리도록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저 세상에선 영원히 최대감과 함께 있으며 해주최씨(海州崔氏)의 문중으로부터 향사(享祀)까지 받고 있으니 이 또한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벼르고 별러서 온 곳인데 바로 일어서기가 좀 아쉽기도 하고, 잠시 숲속의 향기에 젖어들고 싶은 마음에 풀잎을 자리삼아 편안히 주저앉았다. 바람의 방향과 강약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로 어우러져 한들한들 춤을 추면서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속삭이고 있는 초목들이 정겨웠다. 난 그들이 하는 소리를 엿들어보았다. 초목들은 자신들처럼 사람들도 문화의 변천과 시류에 따라서 살되, 자연의 섭리를 저버리지 말고 순리의 예를 지키며, 서로가 덕(德)을 베푸는 것을 즐겁게 여기며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난 잠시 눈을 감고 상념(想念)에 잠겼다. 조선조엔 신분의 차별이 극심하고 남녀의 동등권이 보장되지 않은 남성우월주의사회였기에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아주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가정에서도 딸로 태어나 남의 집의 며느리와 아내가 되어 풍족하지 못한 살림을 꾸려가면서 자녀를 키워내야 하는 어머니로서의 삶이 고단하기만 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조실부모(早失父母)를 하거나 삶이 너무나 궁핍한 나머지, 어쩔 수없이 관기(官妓)의 길에 들어선 어린여성들의 신세란 그야말로 가련하기 그지없었을 것이 뻔하다. 그러한 사회현실에서도 조선의 여자들은, 남자들 못지않게 당시의 전통사상인 선비의 정신을 가슴에 안고 여인(女人)의 도리(道理)를 착실히 지키면서 살았다. 사대부와 부부의 연을 맺은 부인들은 여필종부(女必從夫)와 부창부수(夫唱婦隨)를 부인의 도(道)로 여겼기에, 당연히 신사임당처럼 선비정신을 지켜 가는데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나아가 비록 화류계(花柳界)에 발을 담그고 있는 여인들이라 할지라도, 절조(節操)있는 삶을 통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이 많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논개(論介)와 계월향(桂月香), 제주도민을 구휼한 만덕(萬德), 율곡선생이 연문(戀文)을 보낸 유지(柳枝), 퇴계선생의 정인(情人)인 두향(杜香)이가 있는가하면, 화용월태(花容月態)로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하였던 천하의 절세가인(絶世佳人) 황진이(黃眞伊)와 함께 조선의 삼대시기(三大詩妓)였던 성천의 운초(雲楚) 김 부용(金芙蓉)과 부안의 이 매창(李梅窓), 그리고 홍원의 홍랑(洪娘)을 비롯한 많은 기녀들도 가슴깊이 선비의 정신을 품고 충절(忠節)과 정조(貞操)를 지켰다. 총명하고 아름다우며 착하디착한 두향이는 퇴계 이황선생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만나 사랑과 정성을 다하여 모셨다. 일 년도 채 안되어 풍기군수로 떠나게 되자, 주연을 베풀면서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 제/어느덧 술 다 하고 임마저 가는 구나/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라며 이별의 절절함을 시로 그려냈다. 두향은 퇴계선생과 떨어져 있는 동안 늘 선생을 잊지 않고 절조 있는 삶을 살았다. 또 퇴계선생이 세상을 뜨게 되자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꽃다운 청춘을 던져 선생의 뒤를 따르고 말았다. 이토록 옛날엔 비록 기녀(妓女)라 할지라도 여인으로서의 정절(貞節)을 굳게 지키며 오롯이 한사람에게만 정과 사랑을 다 바친 지조 있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또한 남성중심의 시대였던 조선조 때의 가장(家長)들은 현대사회의 도덕적 기준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부실(副室)을 두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다. 그 당시엔 관청에 공식적으로 관기(官妓)가 있어, 소위 사또니 대감이니 하는 벼슬아치들과 관기들 간에 깊은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관기라 하여도 춘향전에 나오는 변 사또처럼 여성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억압적인 위력으로 여인의 사랑을 갈취하고자 하는 예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 구애(求愛)를 하고자 한다면, 여인에게 먼저 시로 운을 띄워 의향을 떠본 다음, 이에 대한 화답이 흔쾌히 돌아왔을 때만이 여인의 손길을 잡을 수 있었고 사랑도 나눌 수 있었다. 조선 선조 때 이름난 시객(詩客)이요, 음률이 청아하고 뛰어난 당대 최고의 풍류객으로서, 임기응변의 재치까지 겸하여 가는 곳마다 명기들과의 흥미로운 일화를 많이 남긴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백호(白湖) 임제(林悌)였다.
임제는 날이면 날마다 당파싸움으로 서로 헐뜯고 다투는 비열한 소인배들과 어울리는 게 달갑지 않아 벼슬을 꺼려왔다. 그래서 스물여덟 살이 되어서야 뒤늦게 발분하여 생원진사시험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에 알성급제를 하였다. 그리하여 서북도 병마사, 예조정랑, 평안도 도사, 홍문관 지제교 등의 관직을 두루 맡게 되었다. 하지만 활달하고 호탕한 성품인 임제는 벼슬길에 대하여 그리 탐탁하게 여기질 않았다. 임제가 벼슬살이를 하던 중 서른세 살 때 평안도 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 그는 임지인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조선 최고의 명기인 황진이를 먼저 찾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이가 얼마 전 세상을 떴다는 것을 알게 된 임제는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관복을 입은 채 술잔을 올리며 통곡을 하였다. 한참을 울던 백호는 슬픔을 가다듬고 제주(祭酒)를 들어 진이의 무덤에 뿌려주면서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냐/잔 잡고 권할 이 없으니 이를 설워하노라.라는 시조 한수를 지어 진이의 넋을 위로하였다. 왕명을 받든 관리가 며칠씩 지체하면서 기생무덤을 찾아가, 체통도 없이 대성통곡을 하였다는 연유로 파직시켜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그러나 백호는 황진이의 무덤에 간 것에 대하여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랑낭자의 무덤 앞에서 생전에 만나지 못함을 한껏 서러워하였다.
그 당시 평양에서 인물도 뛰어나게 곱고 시(詩), 서(書), 음률을 아주 잘하는 한우(寒雨)라는 기생이 있었다. 그는 이름처럼 차가울 정도로 남정네들에게 허투루 정을 주지 않았다. 그러한 한우(寒雨)가 백호의 마음에 쏙 들어왔다. 그래서 백호는 거리낌 없이북천(北天)이 맑다하거늘 우장(雨裝)없이 길을 나니/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寒雨)로다/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라는 시 한수를 읊어 한우의 속마음을 떠 보았다. 아무리 도도했던 기녀였지만 백호의 호걸스럽고 낭랑한 음률에 차가왔던 가슴이 녹아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감고 백호의 음률에 빠져들었던 한우는 머뭇거림 없이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 얼어 자리/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라고 기꺼이 화답을 하였다. 정감어린 시서음률(詩書音律)을 나누며 사랑의 인연을 맺어가는 과정이, 이 얼마나 여유롭고 멋스러우며 풍류다운가! 아마도 그날의 술맛은 더더욱 감미로웠을 것이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 하였던가. 백호는 겨우 서른여덟의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되었다. 백호는 죽어가는 자신을 지켜보면서 오열하는 가족들에게,울지들 마라. 오랑캐들이 제왕(帝王)이라 자처하고 있는데, 유독 우리만이 그러질 못하고 중국 땅의 주인노릇 한번 못했다. 그렇게 남의 나라에 매어 살다가 죽는데 무엇이 안타까워 운단 말이냐? 내가 어찌 살았다 하겠으며, 또 어찌 죽었다 하랴.라고 말할 정도로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중원천지를 향해 호령한번 해보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길 정도로 아주 호방한 풍류남아가 바로 백호(白湖)임제(林悌)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남녀 간에 서로 예(禮)를 나누고 지키면서 지조 있게 사랑의 꽃을 피워갔건만, 오늘날 남녀 간의 애정문제는 왜 그리도 시끄러운지 모르겠다. 심지어 어린아이를 둔 젊은 부부들이 서로가 갈라서서 다른 사람과 동거를 하면서, 자신들이 낳은 어린 자식을 학대하여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는 사고가 이따금 발표되고 있으니, 참으로 강상지변(綱常之變)의 변고(變故)로서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남녀 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좋지 못한 행동들로 인하여 사회가 점점 혼탁해져 가고 있으니 큰 문제이다. 게다가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까지 가까이에 있는 여성들에게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을 하여, 성추행이니 성폭력이니 하면서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그것도 어쩌다 한번이 아니고 시리즈(series)처럼 이곳저곳에서 이어져 발생되고 있으니 민망스럽기 짝이 없다.
사실 가정을 가진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부부 외의 다른 사람과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아니 되며, 결국 하지도 못하게 되는 게 보통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이다. 그럼에도 사랑이란 이름을 값싸게 빌려 상대방의 뜻을 무시한 채, 일방적이고도 지속적으로 무리하고 추한 대시(dash)를 시도하여 성추행과 성폭행이란 이름으로 사회적 비난을 받게 됨으로서, 애써 공들여 쌓아온 자신의 귀한 명예를 송두리째 잃어가고 있으니 딱한 일이 아닌가. 누구를 막론하고 만약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되었다면,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고 우선 피해자에 대한 진정어린 미안한 마음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먼저 보여야 한다. 그리고 철저한 반성과 책임 있는 자세로 그에 따른 죄 값을 온전히 치러야만 된다. 그것이 그나마 남자다운 처사이자 개과천선(改過遷善)의 자세로서, 대중들에게 실망감을 덜어줄 수 있어 미래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명예에 흠이 생기는 것만을 염려하여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되지도 않는 변명으로 발뺌을 하는 등 비겁하고 천격(賤格)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또 오직 자신의 수치스러움만을 회피하고자 진실한 사실의 고백도 없이 극단적인 행동을 하여, 가족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안겨주게 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남녀 간의 문제들은, 대부분 남성들의 절제와 자기성찰의 부족에 의한 무책임과 선비답지 못한 처신에 의해 비롯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옛 선비들처럼 매순간순간 자신을 성찰하는 정신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상대를 바라보는 여유를 가진다면, 본래의 이성(理性)을 찾을 수 있게 되어, 가슴에 타오르는 불길에 의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데이게 하는 실수는 없을 것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의 계성편(戒性篇)에 한순간의 분한마음을 참으면 두고두고 하게 될 근심을 면할 수 있다는인일시지분(忍一時之忿)이면, 면백일지우(免百日之憂)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분(忿)자를 해의(解義)함에 있어 분함으로 화나 성을 내는 것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색(色), 재(財), 명(名)등에 대한 순간적인 욕망을 참고 이겨내야 한다는 뜻으로 확대하여, 항상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심행(心行)을 경계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성들 역시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이든 간에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옳지 못한 언행을 해올 땐, 머뭇거리지 말고 애초에 바로, 불편스럽다는 뜻을 직접 명확하고 단호하게 밝혀야 한다. 이럴 경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진정한 사과와 함께 스스로 자신을 경책(警責)하면서 예를 갖추어 인격적으로 대해줄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자신의 과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불이익을 주는 자충수는 절대 두지 못할 것이니, 주눅 들지 말고 담대하고 과감한 용기를 가지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 또한 법적인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이와는 별개로 정황에 따라 올바르고 적절하게 처리하면 될 일이다.
산에 올라올 때처럼 숲속 어디에선가 멧비둘기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애절한 울음소리에 처연(悽然)한 마음이 들었다. 또 언제 날아왔는지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묘의 봉분위에 앉을 듯 말듯 하늘하늘 맴돌고 있다. 수줍은 듯 수풀사이에 숨어 있던 한 떨기 외로운 패랭이꽃이 바람결에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나비를 부른다. 이윽고 나비가 패랭이꽃에 살 짝이 날아가 앉는다. 어찌 짝도 없이 이 산중에 홀로 날아왔을까? 진정 순결한 사랑과 정절의 꽃말을 지닌 패랭이꽃을 찾아왔단 말인가. 난 나비를 바라보다말고 처량하게 들려오는 멧비둘기 소리를 들으며, 사랑의 향기를 품고 숲속에 잠든 연꽃마마에게
「붉게 피어 곱디곱던 연꽃 한 송이/숲속에 깨지 못할 깊은 잠에 들었건만/활짝 웃었을 때 그 향기 여전하고/한스럽게 내쉬던 그 숨소리/이젠 향기롭고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영원히 아주 멀리 멀리 메아리치니/아름다운 연꽃이여! 고이고이 편히 잠드소서.」
라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아내와 난 적막한 숲속에 잦아드는 멧비둘기소리를 뒤로하고 싱그러운 풀냄새와 함께 산길을 걸어 내려왔다.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천안시청 문화관광과와 천안 문화원에 전화를 하였다. 운초 김부용의 묘를 관광자원화 하여 관리를 좀 더 잘해주고, 추모행사도 천안시가 후원하여 성대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건의를 하였다. 귀가를 하기위해 차에 오르기 전, 속세에 맑고 향기로운 덕(德)의 향기를 펼치는 광덕사(廣德寺)와, 산사를 감싸고 있는 녹음이 우거진 광덕산을 향하여 합장을 하였다. 숲속의 초목들도 또다시 찾아오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