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말 ‘사시미’는 사무라이 때문에 생긴 이름
한중일 삼국 중 일본이 가장 늦게 발달
임진왜란이 日 음식문화 바꿔놓은 셈
기사사진과 설명
대표적인 일본 요리로 알고 있는 생선회는 한중일 삼국 중 일본이 가장 늦게 발달했는데 임진왜란이 일본 생선회, 사시미의 발달에 간접적 영향을 끼쳤다. |
보통 일본을 생선회 종주국으로 알고 있다. 우리 역시 생선회를 즐겨 먹지만 일본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생선회의 역사는 한중일 삼국 중 일본이 가장 늦다. 종주국이 아니라 후발국이다. 생선회라는 뜻의 일본말 ‘사시미’에 그 비밀이 담겨 있다.
생선회는 한자로 자신(刺身)이라고 쓴다. 글자를 풀어보면 가시나 꼬챙이로 “몸을 찌르다”라는 뜻이니 칼로 생선살을 잘라놓은 생선회와는 맞지 않는 이름이다. 생선살을 잘랐다는 뜻으로는 절신(切身), 즉 기리미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그런데 왜 생선회를 사시미라고 부르게 됐을까? 이유는 사무라이가 기리미라는 단어를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사무라이들이 활약하던 시대는 이합집산과 하극상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배신과 음모의 세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라이들은 뒤에서 칼로 베어 자른다는 뜻의 ‘우라기루(裏切る)’라는 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배신이라는 뜻의 우라기루가 떠올라 어감이 좋지 않은 기리미 대신 몸을 찌른다는 사시미라는 이름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일본어 어원유래사전에 나오는 사시미의 어원인데 민간어원설로 진실 여부를 떠나 일본에서 생선회인 사시미가 사무라이 시대에 유행했다는 이야기 속에서 의외의 역사를 찾을 수 있다.
일본에서 생선회, 다시 말해 사시미라는 용어가 문헌에 처음 보이는 때는 1399년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제2대 임금인 정종이 즉위한 해인데 이때 나온 ‘영록가기’라는 요리책에 민물고기인 잉어를 회로 뜨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처음으로 사시미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약 90년 후인 1489년에 발행된 요리책(四條流包丁書)에 다시 사시미라는 단어가 보이는데 여기서는 꿩과 산새를 잡아 소금에 절인 음식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시미가 확실하게 생선회 요리로 정착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생선회, 사시미가 널리 퍼진 시기는 에도시대 이후라고 한다.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는 일왕이 있는 교토였으니 음식문화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교토는 내륙지방이기 때문에 횟감을 얻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 무렵까지만 해도 강에서 잡은 잉어와 붕어를 회로 먹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생선회 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바닷가인 에도, 즉 지금의 도쿄로 옮기면서 일본의 중심지가 내륙지방인 교토에서 바닷가 마을인 도쿄로 이동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바다 생선을 회로 먹는 사시미 문화가 발달했다고 하니까 결과적으로 전쟁이 일본 음식문화를 바꿔놓은 셈이다.
반면 중국인들은 생선회나 육회를 먹지 않는다. 일본요리인 사시미를 먹을지언정 중국요리에 생선회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대에는 달랐다. 회(膾)라는 한자 자체가 고대 중국에서 생긴 글자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먼 옛날 중국인들은 물고기가 됐건, 네 발 달린 동물이 됐건 날고기를 즐겨 먹었다.
고대 중국에서 회는 상류사회의 고급 음식이었는데 기원전 7세기 ‘시경’에 자라와 잉어를 회로 먹는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고 ‘맹자’에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다”는 말이 나오는데 날고기와 구운 고기를 먹는 것처럼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뜻이다. 이때 사람들은 잉어회와 양고기 육회를 즐겨 먹었다.
중국 역사를 보면 생선회를 좋아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 ‘삼국지’에 나오는 진등도 그 중 한 명이다. 어느 날 고열이 나자 관우의 뼈를 깎아 독화살 제거수술에 성공한 명의, 화타에게 진찰을 받았다. 화타가 맥을 짚어보니 생선회를 너무 먹어 기생충 때문에 생긴 병이었다. 병을 치료한 후 3년 이내에 생선회를 다시 먹으면 병이 재발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생선회 마니아였던 진등은 말을 듣지 않고 회를 먹어 결국 사망했다.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나라의 역사를 적은 ‘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렇게 회를 즐겼던 중국인들인데 어느 날 갑자기 중국에서 회 요리가 사라지는데 우리 기록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광해군 때 ‘어우야담’에 임진왜란 때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 병사들이 조선 사람들이 회를 먹는 것을 보고 오랑캐의 습관이라고 비웃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실제로 중국 기록에는 명나라 중기 이후에는 생선회나 육회를 먹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 음식에서 갑자기 회가 사라진 것인데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는 고려 중반 이후 조선 말기까지 생선회 먹는 기록이 끊임없이 보인다. 심지어 ‘산림경제’에는 “생선회를 먹고 소화가 안 될 때는 생강즙을 먹으면 바로 낫는다”는 치료법까지 적었으니 먹고 체할 정도로 생선회를 즐겨 먹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과 달리 생선회는 한중일 삼국 중에서 일본이 가장 늦었다는 사실이 의외다. 또 임진왜란이 사시미 발달에 간접적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