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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와 서구 식민주의
네덜란드는 어째서 몰루카제도에 ‘정향나무숲’을 만들었을까?
긴 추석 연휴를 보냈다. 전에는 집에서 만들던 송편을 몇 년 전부터는 밖에서 사다가 제상에 올리고 식구들끼리 나눠먹는다. 송편을 먹으며 생각했다. 이건 떡이다. 우리 민족은 떡을 좋아한다? 왜 그럴까. 송편 하나를 더 먹으며 생각했다. 중국 사람들은 仲秋節에 보름달처럼 둥근 月餠을 먹는데, 우리는 왜 반달 모양의 송편을 만들어 먹을까? 강릉 사천이 고향인 허균 선생은 조선팔도의 음식 품평서라고 할 『도문대작(屠門大嚼)』(1611년)―‘푸줏간 앞을 지나며 입맛을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에서 봄떡인 쑥떡, 느티떡, 진달래 화전과 함께 송편을 먹는다고 했다. 애초 추석에 먹는 떡이 아니라는 얘기다. 송편은 명절음식인 節食으로 알고 있던 터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호기심이 발동하는 음식 관련 이야기는 또 있다. 어릴 때부터 성인이 돼서까지 어머니나 할머니를 통해 부단히 들었던 훈육 조항 가운데,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는 게 아니다. 그러면 그게 떨어진다.” 어려서는 이해가 안 됐고, 청장년, 중년을 다 지낸 지금에서는 경험적으로 안다. 부엌에 아무리 자주 들어가도 절대 그게 떨어지는 일은 없다. 흥미롭게도 같은 동방이지만, 중국남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집에서 요리를 하고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흉잡힐 일이었다.
중국에서 요리는 원칙적으로 남자의 일이었다. 여자는 바느질을 하는 게 소임이었다. 당나라의 건국공신 이적(李勣)이 손윗누이를 대접한다고 음식을 만들다가 잘못해 남자의 상징인 수염을 태웠다는 일화를 보아도 그 당시에 남자가 요리를 하는 게 자연스런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황실요리사는 남자들이었다. 신분이 높거나 가진 게 많은 있는 사람들은 마땅히 미식가였다. 그래서 요리사는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술 만드는 일만큼은 여자의 소관이었다. 우리나라는 시종일관 여자가 음식 담당이었을까?
앞의 글 어디에선가 아침과 밤참은 있는데 점심에 해당하는 우리 고유어가 없는 점으로 보아 예전에는 1일2식이었을 가능성을 말했다. 따라서 하루 세끼를 먹는 식문화는 후대에 형성된 것이다. 중국의 경우도 혼란스러웠던 晩唐과 五代 시기를 거쳐 모든 게 풍성해진 宋代에 이르며 사람들이 허기나 면할 정도로 약소하게 먹던 點心을 하루의 주요 식사의 하나로 생활습관화 한 것이다. 唐 현종 東宮의 左庶子였던 설영지의 싯귀 “무엇을 가지고 아침저녁을 꾀하리”를 보아도 당시 먹을 게 워낙 없던 터라 하루 두 끼 걱정만으로도 벅찼음에 틀림없다. 백거이의 시 「결박당한 오랑캐」에도 “아침저녁 굶주리니”라는 구절이 나온다.
불, 소금 그리고 후추
사람들은 왜 후추라는 향신료에 매료될까? 특유의 알싸한 맛, 재채기를 유발하는 독특한 향 때문이다. 후추는 소화 작용을 돕고 신경계를 자극한다. 살균과 살충 작용도 해 맛을 돋우거나 음식을 보존하는 데 널리 사용되며 한 때 치료용으로도 쓰였다. 서양 사람들이 후추에 열광한 것은, 금값을 주고라도 구입한 것은, 음식에 후추를 쳐서 먹고 나서 느끼는 개운함 내지 시원함 때문이다. 불이 인간의 음식문화에 혁명적 변화를 야기했고, 소금이 또 다른 음식 혁명을 일으켰듯, 후추도 음식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후추가 아니었다면 미식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밍밍한 수프에 첨가되는 몇 알의 후추가 사람의 입맛을 확 바꿔버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후추의 원산지는 인도 서남부 말라바르 해안 지역이다. 당연히 유럽인들은 그런 사실을 몰랐고 후추의 존재조차 몰랐을 수 있다. 그러나 상인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맹물도 불사약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돈이 있는 곳은 어디라도 간다. 페니키아, 카르타고, 애굽(이집트), 희랍, 로마, 페르시아, 유대, 인도, 소그드, 아랍, 중국 상인들은 거리에 관계없이 이익을 쫓아 동과 서를 넘나들었다. 노예매매가 제일 수지맞는 장사였고, 그 다음이 비단 거래였다.
돈은 힘을 가지고 있다. 장사꾼들에게는 돈이 있었고, 그들은 갈수록 부자가 됐다. 군인들 월급에, 궁궐과 성당 신개축에 반드시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상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왕과 교회 그리고 귀족들은 한 편으론 웃는 얼굴을 보이고 또 한 편으론 그들을 경멸했다. 돈이 필요할 때 저 자세를 취하다보니 자존심이 상하고 상인 집단이 못마땅했다. 서양 중세에서 인간의 유형 속에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를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질시와 원망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당시 기독교적 관점에서 기도하거나(성직자), 싸우거나(기사), 땅을 파는 자(농부)만이 인간 분류에 속했다. 돈을 만지는 사람은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의 주인공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유대인)을 냉혈한으로 규정하는 것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자에 대한 질투 때문일 수 있다. 사실 인간의 수준은 그 정도 밖에 안 된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이면에도 돈을 가진 유대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오래된 증오와 질투가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느 시점에 누군가에 의해 유럽 사람들이 후추 맛을 알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었고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 됐다. 후추가 유럽인들 다수에게는 음식에 풍미를 더하고, 소수에게는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는 하늘의 선물이 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도를 위시한 향신료 산지는 식민지 수탈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겪어야 했다. 유럽인들이 처음부터 폭력을 행사하고 수탈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필요한 물자, 돈이 되는 주요 물품들의 직접 교역을 원했을 뿐이다. 유럽에서 큰돈이 되는 비단, 향신료 등 이른바 사치품에 해당하는 값비싼 상품들의 가격은 아시아 지역에서의 가격과 비교하면 천문학적인 것이었다. 상인들의 노림수는 바로 이 격차를 이용한 이익의 극대화였고, 험한 해로를 따라 동방으로 향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인도, 페르시아, 중국 등 동방의 거대 제국은 물론 섬나라 일본조차 유럽인들과의 거래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인도 땅에는 일찌감치 무슬림들이 진출해 상권을 쥐고 있었다. 19세기 말까지도 아라비아에서 일본에 이르는 지역에서 유럽의 상인들은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연안 무역에서 유럽 상인들이 배척당하자, 유럽국가들은 망설임 없이 바다와 내륙 지역에 해군을 투입했다.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일이지만, 국가 이기주의 앞에서는 이보다 더한 일들도 벌어진다.
유럽인들은 아시아인들의 바다를 장악하고 연안 지역과 그 주변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런데 해적들이 유럽인들의 무역 이익을 빼앗아 가기 시작했다. 연안 항구도시의 관리들은 이를 묵인하거나 뒤에서 후원하기까지 했다. 마치 육지의 해적처럼 물색없이 굴었다. 아시아 항구에서 자행된 지역 관리나 군인들의 저열한 교역 방해와 폭력이 심해지자 외지인들의 인내도 극에 달했다. 유럽 상인들은 본국에 도움을 청했다. 그 결과는 역사가 말하고 있다. 유럽국가의 군대가 아시아의 통치자들을 제압하고 자신들의 상인들에게 유리한 교역조건을 제시했다.
동아시아는 물론 중남미의 해양 무역로는 ‘대항해시대’라고 부르는 빈곤 탈출을 위한 유럽인들의 활로 모색이 초래한 뜻밖의 결과였다. 포르투갈이 성공하자, 스페인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영국 등도 돈 되는 해외 사업에 국운을 걸었다. ‘Spice Route’라는 향신료 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포르트갈 무역선은 아시아 지역을 오가면서 租借地인 마카오에도 들렸다. 거기서 비단, 도자기, 사향, 금 등을 구입한 뒤 나가사키로 가서 배에 싣고 간 상품을 팔고 은, 칠기, 병풍, 기모노, 칼, 금 등을 구했다. 귀로에 올라 다시 마카오에 들려서는 은을 주고 비단, 사향, 도자기, 진주 등을 구입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鳥銃을 손에 넣었다. 사쓰마번 다네가섬 해안에 표류한 포르투갈 선원이 건네준 것이다. 그래서 다네가시마 뎃포(종자도총) 또는 뎃포(鐵砲)라고 불렀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흔히 쓰는 무뎃뽀[무대뽀]니, 무뎃뽀 정신이니 하는 말 속의 ‘무뎃뽀’가 ‘철포’를 뜻하는 일본말 ‘뎃포’에 ‘없다’는 의미의 한자어 ‘無’가 합쳐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사실 일본어 ‘無?砲’는 한자가 가진 본래의 뜻에 관계없이 음이나 훈음을 이용해 낱말을 표기하는 아테지(?て字, 宛て字)로 원래 ‘무뎃포’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이 발음에 해당하는 한자를 찾아 ‘無?砲’라고 표기한 것이기 때문에 ‘철포가 없다’는 한자의 의미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주장이 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향신료에 국한시켜 말하자면, 고추는 신대륙이 원산지다. 고추의 원산지를 놓고 볼리비아니 멕시코니 페루니들 하는데 그만큼 출신이 명확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콜럼버스가 황금을 찾아 인도로 가다가 카리브해에 불시착한 결과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한 중남미 식민지 수탈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안데스 고원 곳곳에서는 고추가 재배되고 식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듯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추를 고초(苦草, 苦椒)라고 했다. 매운 식물이라서다. 만초(蠻椒), 남만초(南蠻椒), 번초(蕃椒), 왜초(倭椒), 랄가(辣茄), 당초(唐椒), 번초(番草) 등으로도 불렸다. 맛에는 대표적으로 五味가 있으나 매운 건 맛이 아니다. 입안을 얼얼하게 하고 혀를 아프게 하는 痛覺이다. 몸에 열을 올려 땀으로 배출시켜 육신을 시원하게 해준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임진왜란 무렵이라고 한다. 그 내력이 재미있다. 왜군이 조선 사람에게 지독하게 매운 고추를 먹여 조선인의 종자를 끊으려고 들여왔으나 조선의 백성들은 죽기는커녕 오히려 고추를 즐기게 됐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병한 일본이 메밀이 瀉하는 식품이라 한국인을 말라 죽게 하려는 속셈에서 메밀을 가꾸도록 했지만 현명한 이 땅의 백성들이 메밀을 무와 함께 먹는 지혜를 발휘해 대가 끊기지 않고 잘 살고 있다는 얘기와 흡사하게 들린다.
우리와는 달리 일본의 문헌에는 고추가 임란 때 조선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기록돼 있다. 카이바라 에켄(貝原益軒)의 『花譜』나 『大和本草』 등에 “옛날에 고추가 일본에는 없었고, 히데요시 공이 조선을 정벌할 때, 그 나라에서 종자를 가져왔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高麗胡椒라고 말한다”라고 기록한 것이 대표적이다.
고추는 매워야 제격이다. 맵지 않은 고추는 고추가 아니다. 한국인에게는 작은 고추가 맵다. 청양 고추도 맵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매운 고추도 많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매운 고추는 인도 고추 부트 졸로키아다. 그 다음이 방글라데시의 도싯 나가, 인도의 나가 졸로키아, 4위는 멕시코 산 아바네로, 그리고 태국 산 프리키누, 멕시코의 타바스코, 그 다음이 한국산 청양 고추, 그리고 멕시코 산 할라피뇨다. 과연 얼마나 매울까 라고 생각만 해도 겨드랑이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원기가 떨어지고 기력이 쇠해지면 헛땀이 난다는데…….
여담이지만, 먹으면 힘이 난다는 뽀빠이의 식품 시금치를 중국에서는 ‘波稜草’라고 한다. 어디서 들어온 식용식물일까? 파릉초에서 波稜은 Farsi(페르시아)의 음차어다. 따라서 정답은 페르시아다.
몰루카 제도의 정향나무 숲
포르투갈이 후추 무역에 몰두해 있을 때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겁박해 몰루카 제도(the Moluccas Islands)를 접수한다(1605년). 그리고 원시의 정글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丁香나무 숲을 조성한다. 인도네시아 현지인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식민지 정부의 플랜테이션(plantation, 재배농장) 사업이 개시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영국은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자락에 위치한 아쌈주와 인도양의 섬나라 스리랑카에 차를 재배하게 했다. 차를 접한 뒤 그 맛과 향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섬나라 영국에서는 기후조건상 차나무가 자랄 수 없다. 본국에서 필요한 차를 확보하기 위해 별 수 없이 동인도회사를 움직여 식민지에 차 재배농장을 조성했다. 영국 차문화의 형성과 발전은 이런 식민지 농업경영이 있어 가능했다.
네덜란드는 왜 광대한 밀림을 없애고 정향나무를 심었을까? 정향이 고대부터 잘 알려진 대표적 사랑의 묘약이기도 하지만, 누린내 나는 육고기의 잡내를 잡아주는 효능이 빼어난 향신료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향신료의 하나인 정향은 향기 치료제로 인기가 높다. 기원전 3세기 後漢 응소(應?)의 『漢官儀』에 따르면, 당시 관리들이 황제를 알현할 때 불쾌한 口臭(입냄새)를 없애기 위해 정향을 입안에 머금고 있었다고 한다. 생김새 때문에 ‘鷄舌香’이라고도 불렀다.
丁香나무(clove)는 미의 여신 비너스의 神木이라는 목백일홍과 같은 桃金孃科에 속하는 상록 교목(큰키나무)으로 인도네시아가 원산지다. 말린 꽃봉오리의 모양이 마치 못과 닮았다고 해서 丁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어 명칭 클로우브(clove)는 불어의 클루(clou, 못)에서 유래한다.
중세 아라비아에서는 정향을 복용하면 불로장생하고 머리가 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서기 176년에 이집트에 정향이 들어오고 나서 몇 백 년 뒤에는 지중해 전 지역에 그 존재와 효능이 알려진다. 유럽 대륙에는 8세기경 도입되며, 몰루카제도를 강점한 포루투갈인들이 먼저 정향 무역을 독점했다. 꽃이 피기 직전에 따서 말린 봉오리를 그대로 또는 가루 형태로 파는데, 달콤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특징이다. 중국요리 오향장육에 정향이 빠질 수 없다. 서양에서는 고기요리나 피클, 소스를 만들 때 사용한다.
정향 때문에 몰루카는 ‘향료 군도(the Spice Islands)’라는 별명을 얻었다. 1605년 포루투갈로부터 몰루카제도를 접수한 네덜란드인들은 귀한 정향 가격을 올리기 위해 몰루카 일대에서만 정향을 독점 생산케 했다. 오늘날은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잔지바르(Zanzibar) 섬과 펨바(Pemba) 섬이 세계 최대생산지다.
정향은 향기가 좋을 뿐 아니라 부패 방지와 살균력이 뛰어나다. 우리나라에서도 귀한 약재로 취급되고 있는데 『동의보감』에 그 효능이 나와 있다. 허준 선생께서 정향은 “비위가 허하고 배가 차고 아프며 게우거나 설사하고 입맛이 없을 때, 딸꾹질, 소화 장애, 무릎과 허리가 시리고 아픈 데, 회충증 등에 쓴다”고 하셨으니 향신료를 뛰어넘어 가히 집안에 반드시 갖춰야 할 상비약이라고 할 만하다.
교훈으로 삼을 역설 한 가지. 인도네시아는 정향나무의 원산지임에도 현재 정향의 최대 수입국이다. 이런 모순에는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19세기 후반 인도네시아에서 담배와 정향을 혼합한 ‘크레텍(kretek)’이라는 이름의 정향담배를 최초로 생산했는데,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크레텍을 피우고 있기 때문에 수요가 엄청나서 정향의 역수입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담배 이름을 ‘크레텍(kretek)’이라고 붙인 까닭은 담배를 피울 때 나는 특유의 바삭바삭하는 소리 때문이라고 한다. 이쯤에서 중국이 보유한 막대한 은을 끌어내기 위해 하층의 중국인들에게 아편을 공급한 영국인들의 못된 행태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