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파(春坡) 전형(全馨), 본명 전우한(全佑漢)의
문학적 업적 조명의 당위성에 대한 소고(小考)
오랫동안 대전은 문화의 불모지라는 오명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대전의 문화를 제대로 정립할 수 있도록 발굴하고, 정리하고, 알리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대전시민이 대전의 문화자산을 찾고 배우고 사랑하며 자부심을 품기 위한 노력과 당당함이 부족함에 대하여도 자성할 필요성이 없지 않다. 이점에 착안하여 빈자일등(貧者一燈)의 마음으로 점화하는 격의 한 가지 시범사업으로 대전의 문단과 언론계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면서도 조명되지 않아 까맣게 잊혀 가는 춘파(春坡) 전형(全馨)의 문학적 업적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고자 한다. 대전의 대부분 문인은 춘파(春坡) 전형(全馨)이 누구냐고 반문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나 자신도 그 이름만 알 뿐이지 그분의 작품을 관심 있게 살펴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현재 대전의 원로 문인 가운데에도 한두 분이 ‘전형(全馨) 선생은 대전 문학사의 중요한 분인데 아무도 조명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라고 말씀할 뿐이니 그분들조차 잊으시면 영영 잊히고 말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후손들 가운데도 장남은 서울 서부 교육장을 지냈으나 세상을 떠났고 손자는 미국으로 건너가 UN 본부 1등서기관으로 근무했으나 고향과 연락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형(全馨) 선생에 대한 일부 자료를 확보해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대전일보사에서 20여 년을 함께 근무하시던 분들이 기록해둔 것을 보면 그분은 자신이 일찍이 문학 활동을 한 것조차 몰랐다고 한다. 그분은 겸손하고 올곧으며 청빈한 신사였기 때문에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지역 문단이 화합하지 못하고 갈등을 빚을 때에는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언론인의 본분에 충실하면서 봉사할 기회가 주어질 때는 열성을 다했다고 한다.
그저 알기만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실로 그분의 작품을 직접 대할 수 있도록 본문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판단이 들었다.
또 한 번 놀란 것은 전형(全馨) 선생의 작품과 명문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그 많은 작품을 찾아내고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일로 판단했다. 그만큼 넘치게 많은 글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여러 지면에 산재 되어 있는 글들을 찾아내기 또한 쉽지 않아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어려워질 것이므로 기회가 닿는 대로 작품들을 찾아보고자 하며 대전의 문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함께 전형 선생의 문학작품을 찾아내고 감상하여 재평가함으로써 대전 문학의 역사를 바로잡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그 이유를 공감할 수 있도록 우선 작품소개는 뒤로 미루고 기초 자료를 제시한다. 궁금증을 가져주시면 고맙게 생각하고 싶다.
< 춘파(春坡) 전형(全馨)의 문학작품 조명의 중요성 >
〇춘파(春坡) 전형(全馨)은 대전의 대표적인 문학단체인 호서문학회에서 1954년부터 회장을 맡았고, 《호서문학》 제2집, 제3집, 제4집을 간행하는 데 앞장서고, 충남 문학 창간호 발간에도 참여하는 등 대전 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대전의 문인임에 틀림이 없다.
〇 춘파(春坡) 전형(全馨)은 1956. 3. 1. 제3대 대전문화원장을 겸임하면서 1956년부터 1961년까지 5년여 동안 대전문화원을 중심으로 대전문화발전을 위해서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문화원장을 맡기 이전에도 미 문화원에서 1953년 대전문화원으로 인수할 당시 운영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문화원장 재임〔겸임〕 시에는 대전문화원이 법인이 될 수 있도록 체계를 확립하고 당시로는 획기적인 기획이었던 <우주선 모형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많은 문화행사를 개최하여 문화원을 중심으로 시민문화 발전에 활기를 불어넣게 하였다.
〇 춘파(春坡) 전형(全馨)은 1945년 대전 최초의 신문인 《동방 신문》을 곽철수 씨와 함께 창립하여 주필과 편집국장을 맡았으며, 1952년 대전일보 논설위원, 1956년 주필 겸 제2대 편집국장을 맡는 등 1970년까지 대전일보에 몸담고 언론문화 발전에 헌신하였으며 신문을 통하여 수많은 명문과 연재소설과 시와 동시와 평론 등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다. 대전일보에 게재된 전형의 문학작품 발췌를 위해 필자는 십여 일 동안 대전일보사의 협조를 받아 조사하면서 채록해 보았으나 그 분량이 많은 시간이 걸릴 작업량이라서 개괄적인 파악에 그치는 정도였다. 이를 모두 정리하면 문학사적으로나 대전의 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〇 춘파(春坡) 전형(全馨)은 ‘대전 문학사’를 다시 써야 할 중요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전의 현대 문인 가운데 초창기 발표한 작품을 1935년 《가톨릭 청년》지에 정훈(丁薰)의 「6월 하늘」이라고도 하고 1937년 11월에 잡지 《자오선》 창간호에 실린 「六月空」으로 기록하여 왔다. 그러나 춘파(春坡) 전형(全馨)이 정훈(丁薰)의 작품발표 이전에 발표한 주요 작품 몇 가지만 들어봐도 1926년《시대일보》에 시「지친 마음」「봄비,」1927년 사조(思潮) 창간호에 <폐시미즘적 작품>「월광 밑에서」, 《매일신보》에 최초의 희곡 「영순(英順)의 사(死)」, 시(詩)「꿈을 깨다.」「새벽 비」「사랑을 찾으려」「애인을 보내며」 등을 발표하였고, 1928년 『조선시단』 2, 3호 합본 호에 시「한숨」, 1929년 『조선시단 』5호에 시「아침이 왔다.」, 1931. 1. 12일 《매일신보》신년현상문예 당선(단독 2등) *동화(童話) 「행복의 길」, 1931년 《동광 제20호》에 시 「근영(近詠)」 제24호에 시「추억」 제27호에 시「추소병음(秋宵病吟)」 1931년『혜성(彗星)』 제1권 제8호에 시 「울분(鬱憤)」, 1931. 4. 24.~4. 30. 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수필「인생(人生)․ 고뇌(苦惱)․ 사(死)」, 1931. 5. 12.~14. 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수필 「5월 상화(想華)-신록(新綠)과 신비(神祕)」를 발표하였고, 1932년 4월『혜성(彗星)』에 시조 「춘일점경(春日點景)」 1934. 2월《조선시단》제8호에 「환멸(幻滅)의 노래」 1935년 《신조선》 창간호와 이후에 「새로 얻은 노래」「고음(苦吟)」「애창」을 발표하는 등 시와 희곡과 시조와 동화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독립운동가인 형(兄) 전좌한(全佐漢)이 일본의 조선총독부 본부건물을 폭파하려고 실행에 옮기기 직전 체포(1926. 9. 22)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하고 1931. 3. 26일 폐인이 되어 출옥된 시기에 동생인 전우한(全佑漢〔전형의 본명〕)이 겪은 저항 의식과 분노가 표출된 작품들로 민족 독립운동사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〇 그 밖에도 전형(全馨)은 정지용(鄭芝溶, 1903~1950)과 친근한 사이로 고향인 옥천에서 정지용의 인도로 1929. 천주교에 입교 옥천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1929. 6. 1. 《천주교회보》 제27호(29. 6. 1) 신앙 고백적 작품「진주」, 1929. 6. 10. 《별》지에 시「믿음」이란 작품을 발표하는 등 많은 신앙적 작품을 발표하였다. 또한, 1926년 12월 1일 처음 발행한 우리의 중요한 문학지 풍림(風林) 1집~ 1937년 5월 1일 제6집을 발간하고 중단되자 〔주요 참여작가: 김동리, 박영준, 이효석, 엄흥섭, 송영, 유진오, 이기영, 채만식, 임화, 오장환, 신석정, 윤곤강, 정비석, 성경린, 조벽암, 이주홍, 김광균, 안회남 등〕이후 1938년 전형(全馨)이 앞장서 제7집, 제8집을 속간〔편집 동인 : 정지용, 이원조, 안회남, 유치환, 홍구, 안동수, 전형, 이육사 등 제씨〕하였으며 전형의 소설 「개와 고양이」를 문제 삼아 조선총독부로부터 출판금지를 당해 중단되고 말았다. 이같이 전형(全馨)은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시기에도 한국의 문학 발전을 위해서 노력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〇 해방 이후 전형의 주요 작품 일부를 들어본다면『호서문학』 제2집에 평론「문학(文學)의 율의(律義)」를 발표하여 평론가로서 공인받게 되었다고 알려졌는데 『호서문학』 제2집은 소실되어 찾아볼 수 없다. 『호서문학』 제3집에 평론 「현대문학(現代文學)의 계보(系譜)」가 실려있는데 전형의 대표적 평론의 한 편으로 여겨진다.
충남 문학의 사실상 창간호인 『호서문단』 에도 시 「무덤 앞에서」를 발표하였다.
《대전일보》에는 엄청난 분량의 주옥같은 작품과 문필이 상재되어 있다.
1951. 11. 8.~11. 15 일까지 수필 「추야 단상」이 7회에 걸쳐 연재되는 것을 시작으로 20년 동안 수많은 수필, 수상, 세평, 논단들이 실려있다.
시(詩)를 수시로 발표하였는데 주요 작품 몇 편을 예거(例擧)한다면 1952. 10. 7. 산새처럼 <丁薰 형에게>, 1958. 9. 27. 「실명(失明)의 노래」 1959. 3. 11. 노동절에 드리는 「우리 모두 불덩어리가 되자」 1961. 4. 19일 「4.19 영령 앞에 드리는 「진혼(鎭魂)의 노래」 1961. 3. 19 「황토(荒土)」 1963. 6. 25. 6․ 25 열세 돌에 부치는「분노(忿怒)의 장(章)」 1969. 4. 19. 4․ 19 일곱 돌에 부치는 「이날이 오거들랑」 등이 있고,
시조(時調)로는 1955. 8. 10. 「양촌점묘(陽村點描)」 1957. 9. 25. 「바람과 갈대」 1960. 5. 17.「해당화」부터 1961년까지 꽃을 주제로 시조 연재, 1961. 2. 29. 조병옥 박사 영전에 드리는 「만사(挽詞)」 등이 있으며,
동시(童詩)로는 1963. 3. 24. 「버들피리」 이후 「아침 청소차」「혜정이와 달」「봄의 소리」「해바라기」 등 많은 작품을 실었는데 《대전일보》는 특히 양면 신문 발행 시절부터 적은 지면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작품란’을 할애하여 1954. 1. 10부터 <어린이 잔치> 1959. 11. 1.부터 <소년 대전일보> 1960. 2. 20.부터 <소년 대전 판>을 만들어 전형(全馨)과 그의 오랜 문우였던 윤석중(尹石重), 그리고 지역 아동문학가들이 지도와 심사를 맡은 것으로 나타난다.
소설(小說)로는 1955. 11. 18.~1956. 10월 까지 「죄와 벌」을 연재하고 1960. 6. 1 일부터 「비파애가(琵琶哀歌)」를 105회에 걸쳐 연재하는 등 여러 연재물이 있는데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〇 이처럼 대전의 문학사(文學史)와 언론사(言論史)와 문화사(文化史)에 있어 춘파(春坡) 전형(全馨)은 매우 중요한 인물로 인정할 수 있다. 필자는 마중 문학 새로 얻은 노래 대전 문학 제28호(2003. 6. 28. 발행), 대전 문학 총서 제14권 등을 보고 그의 고향인 옥천으로 달려가 옥천 향토사학자인 전순표 씨를 만나 『옥천의 역사 인물』 등 자료를 구해보고, 국립중앙도서관 자료 일부를 검색하고 나서 《대전일보사》신문박물관을 찾아가 개략적으로 자료를 열람하였다. 다행히 대전일보는 1950년 11월 대전일보 창간 초기 신문부터 보관이 되어 있어서 소중한 문학 자료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50년부터 1970년까지는 신문 지면이 매우 중요한 문학작품 발표의 광장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신문용지가 삭아서 멸실 되기 전에 조속히 역사적 자료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하여 디지털 자료구축이 시급함을 절감하였다. 전형(全馨)의 저서로 집대성한 것은 많지 않으나 『새벽닭 울 때까지』 수상 집『파수 잡기』 논설 집『청론탁설』 1960년 미국 국무부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시찰한 여행기 『미국 시찰기』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찾아내지 못했고 종손(宗孫)이 미국의 유엔본부에 근무하면서 연락이 닿지 않아 알아볼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요한 작품들이 《대전일보》를 통하여 발표되었을 것으로 본다. 취록이 쉽지는 않겠으나 앞으로 대전일보사의 협조를 요청하여 사진 촬영, 스캔 등으로 필요한 자료를 발췌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〇 이상과 같이 한 사람의 대전 문인(文人)인 전형(全馨에)에 대한 조명의 필요성을 나름대로 소개하였는데 이를 실행에 옮겨 분량에 따라서 전집(全集) 형태로 엮는다면 대전의 문학사에 소중한 자료로 길이 활용할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더불어 춘파(春坡) 전형(全馨)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묻혀 있거나,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거나, 대전의 문인은 물론 대전의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대전의 역사에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분들에 대한 지속적인 조명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기초작업은 원전(原典)을 구축하는 방법일 것이므로 춘파(春坡) 전형(全馨)의 작품과 실록을 찾아내어 책으로 엮어내는 일을 마무리 짓는 방안을 강구고자 한다. 여기에 선생의 간략한 연보를 첨부한다. 읽는 분들이 다소 지루할 수 있겠으나 역사의 기록을 위해서 자료를 있는 그대로 소개하는 바이다.
춘파 전형(全馨) 선생 연보
【본명 : 전우한(全佑漢) 아호 :춘파(春坡) 필명 : 전형(全馨)】
〇 1907. 9. 13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죽향리 66-1에서 출생.
<부 : 전보현(全普鉉), 모 : 류취영(柳翠映)의 차남.>
고려 충절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지킨 거유(巨儒) 옥천 전 씨 동(東)의 17대손이며, 조부 재신(在臣), 종조부 재민(在民), 부 보현(普鉉), 모두가 일제의 침략 책동에 불응하여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혀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특히 형인 좌한(佐漢) 의사(義士)는 독립운동가로 투쟁하다가 극심한 옥고를 치르고 폐인이 되어 평생 어려운 생활을 영위함. |
〇 1926. 3. 1. 옥천 공립 보통 학교(죽향초등학교 전신) 졸업하고 동아일보 옥천분국 기자로 활동.
〇 1926. 정지용과 조우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 《시대일보》에 시「지친 마음」「봄비」 발표.
〇 1927. 서울 보성 고등보통학교 진학. 형인 독립운동가 전좌한의 권유로
불교 전수학교 발간 《일광》에 작품발표.
〇 1927. 사조(思潮) 창간호에 <폐시미즘적 작품> 시「월광 밑에서」 발표.
〇 1927. 《매일신보》에 최초의 희곡 「英順의 死」 발표. 시(詩)「꿈을 깨다.」「새벽 비」「사랑을 찾으려」「애인을 보내며」,하이네의 시「애인에게」를 번역 발표.
〇 1928. 『조선시단』 2, 3호 합본 호에 시 「한숨」 발표.
〇 1929. 『조선시단 』 5호 시 「아침이 왔다」 발표.
〇 1929. 정지용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 옥천성당에서 영세를 받음.
〇 1929. 《천주교회보》제27호(29. 6. 1) 신앙 고백적 작품「진주」,《별》지에 시「믿음」을 발표하면서 필명 전형(全馨이)을 사용.
〇 1930.3. 서울 보성 고등보통학교 중퇴
〇 1931. 1. 12.《매일신보》신년현상 문예 동화(童話)「행복의 길」당선.
〇 1931. 4. 1. 『동광 제20호』에 시 「근영(近詠)」 발표
〇 1931. 8. 4. 『동광 제24호』시 「추억」 발표.
〇 1931. 11. 10.『동광 제27호』 시 「추소병음(秋宵病吟)」 발표.
〇 1931. 11. 15. 『혜성(彗星)』 제1권 제8호 시 「울분(鬱憤)」 발표.
〇 1931. 4. 24.~ 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수필「人生․ 苦惱․ 死」 발표.
〇 1931.5.12.~ 3회에《동아일보》에 수필「5월 想華 -新祿과 神祕」발표.
〇 1932. (25세) 고소저(高小姐)와 결혼.
〇 1932. 4.『혜성(彗星)』에 시조「춘일점경(春日點景)」발표, 전춘파(全春坡).
〇 1934. 일본대학 문과 중퇴.
〇 1935. 6. 《신조선》에 시조 시작 2제(時調試作 2題)를 발표,
「애창(哀唱)」「새로 얻은 노래」 등이며 전형으로 발표한 첫 작품.
〇 1935. 7. 20. 《조선중앙일보》에 「고음(苦吟)」을 발표.
〇 1935. 10. 매일신문사 사회부 기자.
〇 1938. 6. 조선중앙일보 기자. *여운형 선생 운영.
〇 1938. 9. 3.~ 동아일보에 단상 집 적력보(滴瀝譜) 上, 下 발표.
〇 1938. 월간 『풍림(風林)』지 속간. <제7집> <8집> 발간.
1930. 풍림지를 6집까지 발간하고 중단되어 이를 전형 등이 앞장서 속간한 것이며 7집, 8집을 발간하고 조선총독부의 출판 금지로 다시 종간됨. *편집 동인 : 정지용, 이원조, 안회남, 유치환, 홍구, 안동수, 전형, 이육사 등 제씨이며 발행인은 전형으로 되어 있음. *전형의 소설「개와 고양이」를 시비 삼아 조선총독부 출판금지 8집으로 종간. <조선인 발행 출판물 전형>으로 조선출판 경찰 월보 제115호에 등록됨. 국내 항일운동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
〇 1941. 9.~1943.9. 아사히신문 구주 본사 정치부 기자.
* 1941. 11. 남만주(南滿洲) 특파원으로 파견.
〇 1943. 신문사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옴.
〇 1945. 10. 곽철수와 대전《동방신문》 창설 주필 및 편집국장 맡음.
〇 1948. 9. 《신성》 제3권, 7(6)호. 「민족문화의 과제」게재.
〇 1949. 6. 26.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자「곡! 김구 선생 –조국 통일과 백범 정신」발표.
〇 1949. 9. 《동방신문》 퇴사하고 《광천신문(鑛千新聞)》주간을 맡음.
〇 1952. 9. 1~ 《대전일보》 초대 논설위원.
〇 1952. 부인 고소저 씨 별세.
〇 1953. 12. 1 ~대전일보 주필,
〇 1954. 2. 『호서문학』 제2집 앞장서 발간.
4․ 6배판 12면>으로 간행 1면에 전형의 평론「문학(文學)과 율의(律義)」를 발표하면서 대전 문단에서 평론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함. 발간 본 미확보. |
〇 1954. 11. 13. 정기총회에서 호서문학회장 선출. *심훈 문학비 건립 추진
〇 1955. 11. 8 ~ 1056.1.10. 《대전일보》에 전형 作,
단편소설 【죄와 벌】 43회 연재.
〇 1956. 6. 25. 호서문학 제3집 간행.
*평론 < 現代文學의 系譜> … 文壇의 病弊와 停滯를 揚 기하기 爲하여…全 馨 |
〇 1959. 2. 1. 호서문학 제4집 간행.
1957. 11. 9일 제7회 정기총회를 열고 고문에 전형, 지헌영, 정훈을 선출하고 대표위원에 김대현, 정주상, 원영한, 홍성규 등을 선출 재편한 후, 1958년 제8회 정기총회 열고 59. 2. 1. 호서문학 제4집 발간한 후 침체기에 듦. |
〇 1956. 9. 1~1958. 4. 30. 《대전일보》 제2대 편집국장,
주로 사설 집필, 고정집필 ‘장침 단침’ 조 명태, 일요에세이. 등을 쓰고 언론인 모임 춘추 회장을 맡음. 대전일보 소년 판 발간 동시 등 발표, |
〇 1956. 3. 1. 제3대 대전문화원장 겸임(1956~1961) *대전문화원 운영위원회 회칙을 만드는 등 체계 확립으로 사단법인 설립요건 갖추고 발전기반 마련.
〇 1958. 자유당 선거법 악법에 끝까지 저항하라는 기치를 들고 투쟁에 나서고, 언론 제한에도 반대하는 ‘대전언론문화인 궐기대회’를 주도.
〇 1958. 최영자(崔暎子) 시인과 재혼. (부인 사별 5년여 후)
〇 1958. 제2회 충청남도 문화상(문학평론 부문) 수상,
〇 1959. 7. 18~1961. 9. 30. 대전일보 편집국장.
〇 1959. 미국 국무부 초청 3개월간 미국 시찰. *미국 시찰 기행문 씀.
〇 1960.~1970. 신문 잡지에 시조, 시, 동시를 수시로 발표하고 대전일보에 장편소설 「비파애가」 105회, 중편소설 「청등 야화」를 60회 연재.
〇 1960.~ 《대전일보》에 꽃과 시와 인생 연재하는 등 많은 작품발표.
〇 4대 편집국장(1959. 7. 18~1961. 9. 30)으로 4.19 학생운동, 5.16 사태 속에서 흔들리는 지방언론 지킴,
〇 1961. 포르투갈 국제 사진 공모전에 출품 (작품 쑥덕공론) 입선.
〇 1962. 한국 신문 연감(한국신문협회 발간) 집필 및 편집위원으로 참여.
〇 1967. 1. 1 ~1968. 6. 30. 대전일보 논설위원.
〇 1968. 7. 1~1970. 5. 27. 대전일보 주필.
〇 1968. 7. 7. ~ 1973. 7. 24. 대전일보 경리부장 겸임.
〇 1970. 대전일보 주필 사임.
전 대전일보 사장(1980. 12. 5 ~1989. 2. 28) 안세영(安世永) 춘파에 대해 “그분은 누구보다 논조가 날카로웠고 언론인으로서의 정신이 투철했다. 이 지방언론뿐만 아니라 호서문학회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라고 회상하고 평소 지론으로“기자가 돈을 알면 사회가 썩어요. 선비는 자고로 돈과 멀고 정의로운 기자가 되려면 우선 선비가 되어야 하오. 그러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고 돈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오.”라고 후배 언론인들에게 일렀다고 증언한다. <대전일보 40년사 773쪽.> |
〇 1972. 최영자 시인과 이혼.
〇 형인 독립운동가 전좌한의 옥고로 병고를 얻음에 서울로 올라가 여생을 마칠 때까지 형을 뒷바라지하다 1980. 2. 24. 선종.
* 장남 문표는 서울 서부 교육장으로 근무 중 순직하였고, 종손 욱(郁)은 미국에서 유엔본부 일등서기관으로 근무하였고 미국에서 거주.
< 저서(著書) >
시집 『새벽닭 울 때까지』
수상집 『파수잡기(破愁雜記)』
논설집 『청론탁설(淸論濁說)』
여행기 『미국 시찰기』
유고시집 『새로 얻은 노래』 오늘의 문학사. 2002.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