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조선에 싸우러 왔다가 항복한 일본군을 降倭(항왜)라고 했다. 그 수가 만 명 이상 된 것으로 추산된다. 거의 다 일본보다 더 좋다고 여긴 나라 조선의 백성으로 살기를 바라고 귀화했다. 조선군에 편입되어 각자의 장기를 발휘하면서 큰 활약을 했다.
沙也加(사야가)라는 항왜는 지휘관급의 무장이었다. 항복해 귀화하고 왜군을 친 전공이 뛰어나, 金忠善(김충선)이라는 성명과 함께 정2품 사대부의 지위를 받았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출전해 국은에 보답하고, 많은 노력을 해서 문화적 귀화도 훌륭하게 이룩했다. 한시, 가사, 시조 등을 지어 생애가 기구해 얻은 깨달음을 독특한 어조로 술회한 작품이 한국문학사에 새로운 색채를 보탰다.
<慕夏堂述懷>(모하당술회)라고 한 가사를 보자. “어와 이내 생애 흉험도 할세이고”라고 말을 꺼내고, “넓으나 넓은 천하 어이 하여 마다하고, 南蠻(남만) 左袵鄕(좌임향) 鴃舌風(격설풍)에서 생장”한 것이 한탄스럽다고 했다. 일본은 “남쪽 오랑캐 오른쪽 섶을 왼쪽 섶 위로 여미는 방식으로 옷을 입는 고장”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고 폄하했다. 아주 유식한 문구를 사용해, 노력해 습득한 능력을 과시하고자 했다.
야만과 문명을 유교의 이상을 갖추었는가 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야만국 일본을 버리고 문명국 조선을 택했다고 했다. “中夏(중하)의 좋은 문물 一見(일견) 願(원)일러니”, 조선에 와서 보니 “東魯至治(동로지치) 여기로다, 小中夏(소중하) 거룩할사”라고 칭송했다. 유교의 이상을 조선이 모범이 되게 갖추고 있는 것을 높이 평가했다.
이것을 몇 가지 다른 말로 풀이할 수 있다. 조선 사대부가 자부심을 가지는 근거가 타당하다고 확인하고, 자기가 조선의 사대부로 변신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유교의 이상을 존숭한다는 慕夏(모하)를 강조해 귀화의 명분을 분명하게 하고, 文班(문반)의 지체를 얻어 누리려고 했다. 이 모든 노력이 기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慕夏堂集>(모하당집)이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위에서 든 가사와 함께 창작한 시조도 남겼다.
임진왜란 이후에 여진족과 싸우러 가서 지은 시조를 보자. “이 몸이 長城(장성) 되어 萬里邊塞(만리변새) 칼을 베고 누었으니, 鳳凰城(봉황성) 山海關(산해관)은 말발의 티끌이요, 십만 胡兵馬(호병마)는 칼끝의 풀잎이라”라고 했다. 여진족의 거처를 넘어서서 중국 대륙 저 먼 곳까지 만만하게 여기고 내려다본다고 했다. 기개가 대단하고, 발상이 놀랍다.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완전하게 변신한 것이 놀랍다. 그 이유가 조선이 훌륭한 나라라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니다. 충성의 대상을 완전하게 바꿀 수 있는, 일본인의 비상한 능력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으로 간 조선인은 고국을 잊지 않은 것과 아주 달랐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조선인을 10만 명쯤 납치해 갔다. 도공, 각수 등 여러 분야의 기술자가 대다수이고, 더러는 문사도 있었다. 문사는 일본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필요한 전문인이었다. 납치된 문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는 姜沆(강항)이었다.
강항은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이 형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며, 성리학 공부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일본에서 무사히 귀환해 견문한 바를 적은 <看羊錄>(간양록)을 남겼다. 일본의 무장이 조선에 귀화해 金忠善이 된 것과 조선의 문사 姜沆이 납치되어 일본에 간 것이 좋은 대조가 된다. <看羊錄> 한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김충선이 지은 시문과 아주 다르다.
賊魁(적괴) 秀吉(수길)이 죽자, 북쪽 교외에 매장하고, 그 위에다 황금전을 짓고, 왜승 南化(남화)가 큰 글씨를 써서 그 문에 새겼다. “크고 밝은 일본이여 한 세상 호기를 떨쳐라. 태평의 길 열어 놓아, 바다 넓고 산 높도다.”(大明日本 振一世豪 開太平路 海濶山高) 나는 나가 노닐다가 붓에다 먹을 찍어 그 옆에 이런 시를 썼다. “반세상 경영이 남은 것은 한줌 흙뿐이다. 십층 황금전은 부질없이 높다랗구나. 조그마한 땅이 또한 다른 손에 떨어지는데, 무슨 일로 청구에 거듭 쳐들어왔던가?” (半世經營土一坏 十層金殿謾崔嵬 彈丸亦落他人手 何事靑丘捲土來)
金忠善은 뛰어난 용력으로 무공을 세워 조선의 국은에 보답했다. 姜沆은 깊은 학식으로 일본에 문화적 감화를 주어, 본의 아니게 밥을 얻어먹게 된 값을 치렀다. 일본에도 훌륭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舜首座(슌슈소)라는 승려와 가까이 지내고, 학식과 인품을 평가해 더 높아지도록 했다. 우월감을 가지고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대등한 위치에서 깊이 교류하면서 함께 공부하자고 했다.
“자못 총명하여 고문을 이해해 어느 글이라도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성품이 굳세어 왜인에게 용납되지 못했다. 內府(내부) 家康(가강)이 훌륭한 인재란 말을 듣고 倭京(왜경)에다 집을 지어 주고 해마다 쌀을 2천 석씩을 주었으나, 그 집을 버리고 살지 않고, 주는 곡식을 마다했다.” 이렇게 적고, 舜首座가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옮겼다.
일본의 生民(생민)이 지치고 시든 것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은 없다. 조선이 만약 중국 군사와 함께 일어나서 백성을 조문하고 죄 있는 자를 토벌하되, 먼저 항복한 왜인 및 통역으로 하여금 倭諺(왜언)으로 방을 내걸어, 백성의 水火(수화) 의 급함을 구제한다는 뜻을 보이며, 군사가 지나가는 곳마다 추호도 백성을 침범하지 않는다면, 白河關(백하관)까지도 갈 수 있다. 만약 왜인이 조선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던 그 수단을 이쪽에다 바꾸어 쓴다면 비록 대마도 하나도 건지지 못한다.
舜首座는 조선의 유교 의식에 대해 거듭 묻고, “애석하게도 나는 중국에서 나지 못하고 또 조선에서도 나지 못하고, 일본에서도 이런 시대에 태어났단 말인가?”라고 했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납치한 유학자를 통해서 조선의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을 강황은 조심스럽게, 일본의 체면을 존중하면서 말했다.
姜沆은 舜首座가 힘을 써주어 무사히 귀국했다. 舜首座는 승려 노릇을 그만두고 藤原惺窩(후지와라세이카)라는 유학자가 되어 일본 성리학을 주도했다.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 동아시아의 이상을 함께 지니는 문명권의 영역을 확인했다.
“理(이)가 있다는 것은 하늘이 덮지 않은 것이 없고, 땅이 싣지 않은 것이 없음과 같다. 이 나라도 그렇고, 조선도 그렇고, 안남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다.” 안남을 잊지 않고 중국을 맨 나중에 들어, 대등의 관점을 보여주었다.
조동일 :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대등의 길>, <한일 학문의 역전>. <국문학의 자각 확대>, <우리 옛글의 놀라움>,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최근에 저술로 <문학 속의 자득 철학> 3부작: 1<문학에서 철학읽기> 2<문학끼리 철학논란> 3<문학으로 철학하기>도 있다.
첫댓글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완전하게 변신한 것이 놀랍다. 그 이유가 조선이 훌륭한 나라라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니다. 충성의 대상을 완전하게 바꿀 수 있는, 일본인의 비상한 능력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으로 간 조선인은 고국을 잊지 않은 것과 아주 달랐다.
감사합니다 대구 녹동서원 자주 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