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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장사(七長寺)>
칠장사는 불교가 민중과 어떻게 한몸처럼 가까워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절이다. 나한이 된 도둑이야기나 임꺽정 이야기 등이 과거형 설화라면 박문수 설화와 연계된 수험생 기도는 현재형 설화이다. 박문수 백일장은 제도권으로 밀고 들어간 설화이다.
민중과 밀착된 불교가 우리에게 어떤 위로를 보내주는지 보여준다. 불교와 민중의 공생신화는 오늘도 현재형이다. 요소요소 구비구비 볼 만한 것들은 성찰의 숙제가 되고, 눈을 놀라게 하는 선물이 된다.
명칭 : 칠장사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방문일 : 2021.2.19.
1. 관람 전
1) 사찰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636년(선덕여왕 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그 뒤 고려 초기에 혜소국사(慧炤國師)가 현재의 비각(碑閣) 자리인 백련암(白蓮庵)에서 수도할 때 찾아왔던 7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7인 모두가 도를 깨달아 칠현(七賢)이 되었으므로 산이름을 칠현산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1014년(현종 5)에 중창한 후 1308년(충렬왕 34)에 대규모로 중수하였다. 1506년(중종 1년)에 흥정대사가 중창하고 1623년(인조 1)에 인목대비가 중창하였다. 1674년(현종 15)에 어느 세도가의 방화로 불타자 사역을 북쪽으로 옮겨 중수하였으나 1694년(숙종 20)에 또 다른 방화로 불탔으며 1704년(숙종 30)에 옛 절터로 돌아와 대규모로 중수하였다. 이후 영조와 정조 연간에 원통전・미타전・명부전・천왕문 등을 건립하고 대웅전을 보수하였다. 1828년(순조 28)에 대웅전을 이건하고 1857년(철종 27)에 대웅전・원통전・시왕전・향로전 등에 기와를 수리하였는데 1887년(고종 24) 대화재로 불탄 후 다시 중창불사를 수행하여 1937년 대화주(大化主) 공덕비를 건립하였다. 1982년에 대웅전을 해체보수하고 2006년에 혜소국사비각을 해체보수하고 2008년에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원통전(圓通殿)·명부전·응향각(凝香閣)·천왕문(天王門)·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보물 제2036호 대웅전 안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3호 목조석가삼존불좌상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9호 영산회상도 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8호 범종 등이 있다. 또한, 천왕문 내의 소조사천왕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비각 내에 보존되어 있는 보물 제488호의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를 비롯하여 국보 제296호 오불회괘불탱(五佛會掛佛幀)・보물 제1256호 삼불회괘불탱(三佛會掛佛幀) 등이 있다.
1060년(문종 14)에 건립된 혜소국사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임진왜란 때 적장인 가토(加藤淸正)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크게 꾸짖자, 화가 치민 가토가 칼을 빼서 베니 홀연히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렸으므로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쳤다고 한다.
현재 국사의 비신(碑身)은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이 밖에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인목대비의 친필 족자를 비롯하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 당간지주, 수많은 부도군(浮屠群)이 있다. 이 중 족자는 인목대비가 이 절에 와서 수양할 때 쓴 것이다. 또한, 절 입구에 있는 14기의 부도와 절 뒤편의 수많은 부도탑은 이 절의 유구한 역사를 일깨워 준다.
특히, 절 입구에 있는 철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청주 용두사지(龍頭寺址)와 갑사(甲寺)에서만 볼 수 있는 극히 드문 문화재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칠장사의 풍수적 형국이 행주형(行舟形)이므로 이 당간으로 배의 돛대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
그 밖에도 고려 말에 왜구의 피해가 극심할 때 충주 개천사(開天寺)에 있던 사서(寺書)를 이 절로 옮겨서 보관하여 소실을 면한 일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명적암(明寂庵)·극락암(極樂庵)·백련암 등이 있다. 절 일원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일주문
천왕문
*사천왕상
*종무소. 임꺽정 드라마 촬영시의 사진이 걸려 있다.
대웅전과 원통전
*대웅전(보물제2036호)
1790년(정조 14년) 중창되고 1828년(순조 28년) 이건된 건물로서, 경기도권의 조선후기 사찰 중심 불전의 건축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대웅전 내부. 목조석가삼존불좌상이 있다.
*칠장사 동종
*원통전
*국사전
공덕전
명부전. 명부전에는 병해스님과 임꺽정 의형제, 혜소국사와 일곱도적, 궁예 활쏘기 등의 전설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임꺽정 힘겨루기
* 『임꺽정』과 갖바치 병해대사와 안성 갖신
홍명희 소설 『임꺽정』은 칠장사가 중요한 배경이다. 임꺽정의 스승으로 받드는 갖바치 병해대사를 만나 의형제를 맺은 곳이다. 갖바치는 가죽신을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당시 갖바치는 고리짝을 짜는 고리백정과 더불어 백정에 속하는 천민계급이었다. ‘갖’은 가죽의 줄임말이다. 갖신은 가죽신을 말한다. 안성의 갖신이 유명하게 된 것도 병해대사가 갖바치 기술을 근처 사하촌 사람들에게 전수하여 퍼졌기 때문으로 본다.
천민의 업종임을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의 고결함을 추구하는 승려의 수도와 병행한 것은 생존의 엄중함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결국 인간의 존엄함도 스스로 마련하는 생계바탕 위에 있다는 인식의 표현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임꺽정의 형제들은 혜소의 도적들처럼 나한이 되지 않았고, 현실세계에 뛰어들어 불의에 저항하고 생존을 위해 싸웠다. 누가 더 인간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공헌했는지는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스승과 다른 길을 갔던 임꺽정은 병해대사가 입적하자 부처를 만들어 봉안하는 것으로 존경과 불심을 표했다. ‘꺽정불’이라고 불리는 목조불상이 그것이다. 꺽정불은 ‘충북대 연구팀이 꺽정불 밑 부분에 ‘봉안 임꺽정(奉安 林巨正)’이라고 쓰여진 삼베조각 등을 연대측정 한 결과 “1540년을 중간연대로 ±100년의 방사선 연대측정”이라는 결론을 내려 실제 임꺽정(?~1562)이 봉안했을 것으로 확실시‘(칠장사 홈피) 된다. 꺽정불은 칠장사의 귀중한 유물로서 홍제관에 전시되어 있다.
임꺽정의 홍명희는 북으로 갔지만 그의 소설은 남한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고,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 드라마 임꺽정(1996~7년, SBS방영)이 칠장사에서 촬영되었다. 이래저래 임꺽정과 안성, 칠장사와의 인연은 계속된다.
*혜소국사와 일곱도적
말타고 활쏘기하는 궁예
말타고 활쏘기하며 무예를 익히는 궁예. 궁예는 이곳 칠장사에서 13세?까지 무예를 연마했다고 한다.
*박문수 합격다리. 박문수 설화는 현재형이다.
혜소국사비각
* 혜소(慧昭)국사 정현(鼎賢 972~1054)
유가종(瑜伽宗)의 고승이다.
속성은 이씨. 어머니는 김씨이다. 젊어서 광교사(光敎寺) 충회(忠會)에게 출가했다. 죽산 칠장사(七長寺) 융철(融哲)에게 배우고, 영통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996년(성종 15) 미륵사의 5교대선(五敎大選)에 뽑혔으며 999년(목종 2) 대사가 되었다. 1012년(현종 3) 수좌가 되었다. 1033년(덕종 2) 덕종이 법천사로 옮겨 거주하게 했다가, 다시 승통으로 삼아 현화사의 주지로 삼았다. 1045년 삼각산 사현사관을 개창했다. 이곳은 원래 산짐승이 많고 산적들이 들끓던 지역이었는데, 사현사관을 지어 묵어가도록 하여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게 한 것이다.
1046년 문종이 즉위하자 내전에서 〈금고경 金鼓經〉을 강했으며, 1048년에는 문덕전(文德殿)에서 〈금광명경 金光明經〉을 강설하여 비가 내리도록 빌었다. 1049년 왕이 봉은사에 거둥하여 왕사로 삼았다. 1054년 다시 국사로 봉하여 대부경 김양과 승정 도원(道元)으로 하여금 칠장사까지 모시고 가게 했다. 산에 돌아와서부터는 승상(繩床)에 앉아 옷 1벌만을 해 입고, 모든 인연을 끊고 있다가 오래지 않아 죽었다.
1060년(문종 14)에 세워진 김현(金顯)이 지은 비가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에 남아 있다. 시호는 혜소(慧昭)이다.(다음백과 전재)
*혜소국사
1) 혜소국사비(보물제488호)
보물 제488호. 1060년(문종 14)에 건립되었다. 현재 비신과 귀부(龜趺)·이수(螭首)를 해체해놓았다.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신에 양측면으로 상하로 길게 쌍룡을 새겨놓았는데, 중단에서 부러져 쓰러져 있으며 좌상부가 결실되었다. 그 밖에 심한 파손은 없고, 글자는 선명한 편이다.
김현(金顯)이 짓고 민상제(閔賞濟)가 쓰고 전액도 하였으며 각자는 배가성(裵可成)·이맹(李孟) 등이 하였다. 자경 2㎝의 해서이며 전액의 자경은 9㎝이다.
비문에 의하면, 국사의 이름은 정현(鼎賢), 속성은 이씨이고 10세에 광교사(光敎寺)에서 충회(忠會)에게 구법하였으며 17세에 영통사(靈通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28세에 칙명에 의하여 대사가 되었으며 41세에 중대사(重大師), 60세가 넘어서는 승통(僧統)이 되었다. 그리고 1046년에 자수승가리일령(紫繡僧伽梨一領)과 금첩법의일령(錦貼法衣一領)이 하사되었고, 1054년 세수 83세, 승랍 74세로 입멸하였다는 등 그의 행적을 적었고, 후미에는 대사를 기리는 명문이 있다.
글씨는 구양순법(歐陽詢法)의 해서로서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을 방불하게 하는 주경(遒勁 : 붓의 힘이 굳셈)한 필력이며, 엄정한 결구의 것으로 금석기가 넘친다. 고려 초기·중기의 뛰어난 풍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글씨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2) 혜소국사 전설
칠장사 주변에 일곱명의 도적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마침 목이 말라 칠장사 샘에서 바가지로 물을 마셨는데, 마시고 보니 황금바가지여서 몰래 품어가지고 나왔다. 나머지 여섯도 차례로 물을 마시고 황금바가지를 챙겨가지고 왔다. 모두 모여 영웅담을 자랑하며 금바가지를 품에서 꺼내는데, 황금바가지가 아니라 그냥 물바가지였다. 놀란 도적들은 칠장사 혜소 스님의 신이한 능력 때문임을 알고 찾아가 가르침을 요청하자 흔쾌히 허락했다. 수행을 열심히 한 일곱 도적은 모두 깨달아 나한이 되었다. 덕분에 산 이름이 아미산에서 칠현산(七賢山)으로 바뀌고, 절 이름도 漆長寺(칠장사)에서 七長寺(칠장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적장인 가토(加藤淸正)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크게 꾸짖었다, 화가 치민 가토가 칼을 빼서 베니, 홀연히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렸다.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쳤다. 혜소국사비의 가운데 갈라진 흔적은 그때 가토가 자른 것이다.
나라에 가뭄이 들어 백성이 힘들어할 때 금광명경을 강설해 그 힘으로 비를 내리게 했다. 뿐만 아니라 절의 곳간을 비워 기민 구제를 했다. 칠장사에서는 2009년부터 혜소국사의 청빈한 삶과 평생 동안 실천해 온 나눔과 소통을 계승하고 실천하기 위해 추모 다례재를 지낸다. 2020년 10월에 혜소국사 966주기 추모 다례재를 지냈다. 다례재 때에는 거액의 성금도 각처에 지원한다. 혜소국사의 전설이 오늘도 계속되는 셈이다.
*나한전. 일곱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혜소국사가 법력으로 신이함을 보여주고 깨닫게 하여 나한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삼성각
*범종각
칠장사 누각
*칠장사 당간지주. 사찰 외부에 있다.
철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청주 용두사지(龍頭寺址)와 갑사(甲寺)에서만 볼 수 있는 극히 드문 문화재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칠장사의 풍수적 형국이 행주형(行舟形)이므로 이 당간으로 배의 돛대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
3. 관람 후 : 박문수 설화 생각
*박문수 설화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朴文秀, 1691-1756)가 꿈속에서 본 시제로 장원급제했다는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도 칠장사에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다.
과거시험에 두 차례 낙방한 박문수(朴文秀, 1691-1756)는 과거를 보기 위해 천안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중 칠장사 나한전에 기도를 올리고 하루를 머물렀다. 그리고 그날 밤 칠장사에서 꾼 꿈에 나한이 나타나 시제와 답안을 알려주었다. 답안은 7언율시 8행 중 7행만 알려주며 한 줄은 가 그대로 과거에 나와 장원급제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723년, 박문수가 충청도 천안에서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길에 칠장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때 그는 나한전에서 불공을 드리고 잠을 잤는데 나한이 꿈에 나타나 시제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시험에서 같은 시제가 나왔고 박문수는 삼수 끝에 장원에 급제할 수 있었다. 그날 밤, 박문수가 칠장사에 묵지 않았다면 조선 최고의 암행어사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가 바탕이 되어 어사 박문수 합격다리와 칠장산 어사 박문수길이 조성되었다.
: 과거시험에 두 차례 낙방한 박문수(朴文秀, 1691-1756)는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던 중 칠장사 나한전에 기도를 올리고 하루를 머물렀다. 밤에 나한이 꿈에 나타나 시제와 답안을 알려주었다. 7언율시 중 7행만 가르쳐주었다. 놀랍게도 과장의 시제가 같아 외운 7행에 한 행을 유려하게 써서 등과할 수 있었다. 아래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가 바로 그것이다.
낙조토홍괘애산(落照吐紅掛碍山) : 넘어가는 해는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는데,
한아척진백운간(寒鵝尺盡白雲間) : 찬하늘 갈가마귀는 자로재는듯 흰구름 사이로 날아가네
문진행객편응급(問津行客鞭應急) : 나루터를 묻는 나그네 말채찍은 빨라지고
심사귀승장불한(尋寺歸僧杖不閑) : 절을 찾아 돌아오는 중의 지팡이는 한가하지 않구나
방목원중우대영(放牧園中牛帶影) : 방목을 하는 들판에는 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망부대상첩저환(望夫臺上妾低환) : 남편을기다려 높은 누대위에 섰는 아내의 쪽그림자가 낮다
창연고목계남로(蒼然古木溪南路) : 푸른 고목이 들어선 냇가 남쪽 길에는,
단발초동농적환(短髮草童弄笛還) : 단발한 초동이 피리를 불며 돌아오더라.(시는 칠장사 홈피)
이처럼 과제를 알려주는 설화는 자주 보인다. 숙종이 미행 나갔다가 늦게까지 공부하는 늙고 가난한 선비를 보고, 안 돼 보여 시제를 알려주었다. 과거가 끝나고 합격자를 살펴보니 그 선비가 없었다. 사연을 알아보니 시제를 적어 돌에 싸서 던져 알려주었는데, 돌에 맞아 부상을 입어(죽었다고 하기도 한다.) 과거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도와주려는 사람의 의도가 실현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한 줄만 가르쳐주지 않았으면 이것은 성사되지 못하는 조건이 될 수 있다. 장자못전설이 그런 경우다. 선행을 한 부자 며느리에게 일대가 물바다가 되니 돌아보지 말고 올라가라고 시주를 받은 스님이 알려주었는데, 며느리는 결국 올라가다 돌아보아 돌기둥(소금기둥)이 되고 만다.
박문수는 이 두 가지 설화적 장치를 뛰어넘어 성공한다. 그 뒤에 부처님의 음덕이 있다는 민중의 믿음이 성공으로 만든 셈이다. 부처님은 숙종보다 높고, 며느리보다 강력한 성공 요인이 있다. 수많은 어사 이야기가 박문수 이야기로 흡수되어 박문수는 더욱 큰 영웅이 되어간다. 민중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했던 셈이다.
이 설화를 토대로 안성시에서는 합격다리를 만들고 어사 박문수길을 만들었다. 칠장사에서는 2009년부터 ‘칠장사 어사 박문수 전국 백일장’ 행사를 치른다. 박문수는 오늘날에도 민중의 구원자가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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