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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9일(목),
해남
땅끝마을과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향하여 출발 하였으나 좋지않은 날씨때문에
낭만의 고장 진도로 변경하였다.
진도에는 친구들
덕분에 두 번
씩이나 간적이 있으나
다시한번 더 둘러 보고싶은 명승지를 찾아갔다. 운림산방과 진도 신비의
바닷길(모세의 기적)만 둘러 보고 귀경하면서
진도대교옆 명량대첩공원을 방문, 울돌목에 있는 기념공원과 총무공 유물전시관에서 명량대첩
역사의
의의를 감명깊게 느꼈다.
『진도
운림산방
(珍島 雲林山房)』
운림산방(雲林山房)은 넓고
울창한 진도 쌍계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107호)이 있는 첨찰산과 남도전통 회화의 산실로 유명한 명소인 운림산방 등 자연유산과 역사문화유산이
어우러진 곳으로 역사적·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명승지이다.
운림산방은
조선말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조성하여 말년에 거처하면서 창작과 저술 활동을 하던 곳으로서「소치실록」에 따르면 큰 정원을 다듬고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를 심어 선경(仙境)으로 꾸민 곳이다(출처: 문화재청).
허련(許鍊)은
조선 후기의
서화가로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다. 글,
그림, 글씨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리며 스승을
따라 추사체를 쓰기도 했다. '하경산수도' 등의
작품이 있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癡)·노치(老癡)이다. 1808년
2월 7일 전남 진도에서 허각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이름은 허련(許鍊)이었으나 후에 허유(許維)로 개명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을 두고 허유였다가 허련으로 변경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허씨대종보에는 련(鍊)으로 기록하고 있다.
1839년
32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서화를 추사
김정희에게
보였다가 작품의 솜씨에 감복한 추사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갔다. 허유는 한양에 머물면서 추사의 문하생이
되어 사사를 받았다.
1840년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되자 해남까지 배웅하였고 이듬해 제주도로 건너가 서화수업을 받았다. 1843년 제주 목사 이용현의 도움으로 추사의
적거지를 왕래하며 서화를 익혔다. 1846년 한양으로 돌아와 헌종에게 《설경산수도》를 바쳤고 극찬을 받았다.
1847년
세번째 제주도를 방문하여 스승 추사를 찾아뵈었다. 1856년 추사가 타계하자 고향 진도로 낙향하여 운림산방을 짓고
정주. 1866년 상경, 1877년 70세에 흥선대원군을 만났으며
대원군은 그를 두고 "평생에 맺은 인연이 난초처럼 향기롭다(平生結契其臭如蘭)"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887년
벼슬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893년 9월 6일 86세를 일기로 사망. 글·그림·글씨를
모두 잘하여 삼절로 불렸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墨竹)을 잘 그렸다. 글씨는 김정희의 글씨를
따라 화제에 흔히 추사체(秋史體)를
썼다.
작품으로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추강만교도(秋江晩橋圖)', '만산묘옥도(晩山茆屋圖)', '산교청망도(山橋淸望圖)', '동파입리도(東坡笠履圖)',
'산수병풍(山水屛風)', '산수도', '노송도병풍(老松圖屛風)', '묵해도(墨海圖)', '괴석도쌍폭(怪石圖雙幅)', '포도도(葡萄圖)' 등이
있다(출처: 두산백과).
전통남화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운림산방은 조선조
남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유(許維)가 말년에 거처하던 화실의 당호로 일명 '운림각'이라고도 한다(1981.10.29.
~ 2011. 8. 7. 전라남도지정기념물 제51호 → 2011.
8. 8. 국가지정명승 제80호 지정).
이곳에서
소치는 미산(米山) 허형을 낳았고 미산이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의재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기도 하다. 이와같이 유서깊은
운림산방은 소치(小痴) - 미산(米山) - 남농(南農) - 임전(林田) 등 5대에 걸쳐 전통 남화를 이어준 한국 남화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소치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호를 붙여준 것이며 젊었을때는 련(鍊)이라 했고 자는 마힐(痲詰)이다.
소치는
1808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각의 5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나 1893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치는 어려서 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28세 때부터 두륜산방(현, 해남 대흥사)의 초의대사(草衣大師 : 張意恂) 밑에서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33세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하게된다.
비록
낙도에서 태어났으나 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시(詩), 서 (書), 화(畵)에 능하여 40세 되던 1847년 7월 낙선재에서 헌종을 뵐 수가
있었고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흥선대원군,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을 비롯하여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첨찰산 아래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운림산방
앞에 있는 연못은 한면이 35m 가량되며, 그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고 여기에는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있다.
소치가 서화에 뛰어나 민영익은 '묵신(墨神)'이라 했으며 정문조는 여기에 시를 더하여 삼절(三節)이라 하였고, 김정희는 중국 원나라 4대 화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을 '대치(大痴)'라 했는데, 그와 견줄만 하다고 소치(小痴)라 했다고 한다.
운림산방은 진도군 의신면에 있는 조선 후기 남종화의 거봉이었던 소치 허련선생의 화실로 진도 명승 제
80호이며, 첨찰산을 깃봉으로 수 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연무가 운림(雲林)을 이루었을 것이고 '연화부'를 지었던 소치의 사상으로도 운림(雲林)이라는 당호(堂號)가 걸 맞았을
것이다.
◈ 분류 : 자연유산
◈ 명승 : 역사문화명승(명승 제 80호)
◈ 면적 : 1,367,620㎡
◈ 지정일 : 2011년
08월 08일
◈ 소재지 : 전남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
315, 등
(사천리)
◈ 소유자/관리자
: 국유, 공유, 사유 /
진도군
『진도
신비의
바닷길(모세의 기적)』
해마다 음력 2월 그믐경의 영등사리와 6월 중순경에 진도군 고군면 회동마을과 그 앞바다의 의신면 모도 사이에 바다가 갈라지는 일명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 물이 빠지면 폭 30~40m, 길이 2.8km 가량 되는 바닷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 기간내 회동리 일대에서는 신비의 바닷길축제가 열린다. 바닷길은 약 1시간 동안 완전히 드러난 후 도로 닫혀 버린다.
진도에는 회동리의 뽕할머니 전설이 구전되어 온다. 옛날 진도에는 호랑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의 회동마을은 첨찰산 줄기 끝에 있는 까닭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마을 이름도 "호동이"라 불렸었다. 어느날 호랑이가 나타나 피해를 입게되자 마을 사람들은 전부 앞 바다의 모도로 도망을 갔는데, 하도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뽕할머니"를 빼놓고 갔다. 혼자 남은 뽕할머니는 용왕님께 다시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그 해 2월 그믐께 용왕이 뽕할머니의 꿈에 나타나 "내일 바다에 무지개를 내릴 테니 그 길로 바다를 건너가라"고 했다. 다음날 뽕할머니가 가까운 바닷가에 나가 기도를 했더니 정말로 바닷물이 갈라지면서 무지개처럼 둥그렇게 휘어진 길이 생겼다. 모도에서 할머니를 걱정하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징과 꽹과리를 치며 바닷길을 건너왔다. 다시 가족을 만난 할머니는 "내 기도로 바닷길이 열려 너희들을 보았으니 이제 소원이 없다"는 유언을 남긴 채 기진하여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이래로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이곳에 제단을 차리고 할머니의 제사를 지냈고, 이 날을 뽕할머니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 날이라고 해서 영등사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때 마을 이름도 호동에서 사람들이 돌아왔다고 해서 회동으로 고쳤다.
진도 신비의 바닷길은 1975년 주한프랑스 대사가 진도로 관광을 왔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프랑스 신문에 "모세의 기적"이라고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영등살에 때맞춰 진도군에서 영등축제를 벌인다. 바닷가의 뽕할머니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용왕제를 지내며 씻김굿, 다시래기,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진도만가, 북놀이 등 진도 고유의 민속공연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벤트 행사의 개최로 볼거리를 제공해 각지에서 수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든다. 바닷가 사당에 모셔져 있는 뽕할머니 영정은 진도 출신 동양화가 옥전 강지주 화백이 그렸으며 문을 열면 기적의 현상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 바닷길이 열리는 기간 - 국립해양조사원 홈페이지 참조 http://www.khoa.go.kr
『명량대첩공원(鳴粱大捷公園)』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에 위치한 명량대첩공원은 임진왜란 3대 수군대첩지의 한 곳으로 이순신이 대승리를 이룬 명량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곳으로 당시 최후의 교두보였던 울돌목을 성지화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공원으로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 "호국의 성지 우수영 관광지" - 영화 '명량' 역사의 현장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위치해 있는 우수영관광지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곳으로 당시 최후의 교두보였던 울돌목을 성지화하기 위해 세운 기념공원으로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우수영관광지는 1597년 충무공이 이룩한 명랑대첩을 기념하고 옛 성지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역사적 산 교육장으로 복원하려는 뜻에서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했고 1990년 울돌목이 바라다보이는 위치에 명량대첩 기념공원으로 조성해 명량대첩의 역사적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원 내 곳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관군들의 전투모습을 조각한상들이 배치되어 생생한 감동을 주고 있으며 공원내 전망대에 서면 명량해협과 진도대교를 비롯하여 명량대첩탑, 명량대첩비 탁본, 어록비, 충무공유물전시관 등의 시설물들이 있다.
총무공 유물전시관에는 명랑해전에서 사용했던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등 각종 총통들이 전시되어 있고 당시의 활약상을 담은 영상도 상영한다. 또 거북선 실제모형, 거북선 절개모형, 판옥선 모형, 여러 가지 무기등, 명량해전에서 사용했던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세계무형문화재 강강술래 전수관과 전라우수영 성지및 망해루, 충무사, 울독목거북배선 등 다양한 유적지 들이 있어 울돌목의 물살 체험과 함께 여행을 즐길수 있다.
특히 강강술래길을 따라 전라우수영의 역사와 문화자원을 둘러보는 코스도 걷는코스로 각광 받고 있다. 그리고 매년 10월에는 전라남도와 해남군 ,진도군이 주관하는 명량대첩축제가 성대히 열려 명량대첩을 재현하며, 주말 5월 ~ 9월까지는 명량역사체험마당등이 운영돼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 참고문헌 >
명량대첩 기념공원, 해남군
해남(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
해남군 문화공보실, 해남군, 1996.